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친구가 되시어
당신의 목숨까지도 내어 주신다.
그리고 우리도 다른 이들의 친구가 되어
사랑의 열매를 맺도록 초대하신다(복음).
“저 사람을 대신하여 내가 죽겠소!”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울리는 거룩한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그곳 수용소에는 수감된 사람 한 명이 도망을 가면
같은 방에 있는 열 명이 아사(餓死) 감방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그날 아사 감방으로 끌려가는 사람 가운데
부인과 자식들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한 사제가 울부짖는 사람을 위해
대신 죽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입니다.
사제라고 해서 왜 고통과 죽음이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운명적으로 마주한 사건 앞에
외면하고 싶은 유혹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콜베 신부님의 마음 안에
메아리치는 말씀이 있었을 것입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바로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콜베 신부님은 주님의 이 말씀을 실천하시려고,
울부짖는 그 동료를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택하셨을 것입니다.
그분은 물 한 방울 마실 수 없는 처참한 아사 감방에서
죽어가는 동료들을 위로하시며 함께 순교하셨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그저 한 사람을 살리려고
대신 돌아가셨을 뿐입니다.
산술적으로 보면 한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이 생명을 얻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살린 이런 희생에는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의 가치가 담겨 있습니다.
누구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은
아무런 기대도 조건도 없이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누군가에게 이런 친구가 되어 주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단 한 사람에게라도 친구가 되어 주고,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할 수 있다면,
그 안에 우리가 찾는 인생의 모든 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에게 이런 친구가 되어 주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은 용서입니다.
그분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남기셨습니다.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신 것이 용서였습니다.
따라서 ‘사랑한다는 것’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말로는 용서가 됩니다.
하지만 마음에는 찌꺼기가 남습니다.
여전히 ‘내가 옳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용서에 조건을 달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냥 용서하며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연습해야 할 것은 ‘이런 용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서가 빨랐다든지
현명하지 못했다든지 하는 말을 견디어 내야 합니다.
감사와 칭찬에 대한 욕구마저 넘어서야 합니다.
옛말에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겨라.”고 했습니다.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거꾸로 될 때가 더 많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은혜는 잊어버리고,
지워야 할 ‘원망’은 지우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감동시켰듯이 ‘너희도 감동을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감동입니다.
감동을 주어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은총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늘만큼은 감동을 베풀 수 있는 힘을 주십사고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첫댓글 "예수님의 사랑은
용서입니다.
주님께서는
용서에 조건을 달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냥 용서하며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연습해야 할 것은
‘이런 용서’입니다. "
좋은말씀 감사합니다.
공감합니다.
오늘도 정성어린 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