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리아 왕조의 3대왕인 아소카왕은 제1 대왕이었던 찬드라굽타와 제 2대 빈두사라왕의 정책을 이어받았지만, 인도영역 밖으로 적극적으로 제국을 확대하기 보다는 제국 자체의 힘을 키우는데 주력하였다. 그 결과 어떠한 외부 민족도 감히 인도를 넘보지 못하게 되었으며, 제국은 풍요롭고 군사력은 정점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아소카왕의 이러한 처세에도 불과하고 아직 인도가 완전히 통일된 것은 아니었다. 동남인도에는 보병 6만명과 기병 1천명, 상병 7백명을 보유한 군사강국 칼링가국이 있었다. 특히 칼링가국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을 저지하여 인도문화를 수호하였을 정도로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아소카왕이 칼링가국 원정에 나선 것은 집권 9년(기원전 253년)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칼링각국의 저항은 예상했던 것 보다 더욱 완강하였다. 전쟁을 통해 칼링가국은 10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하였지만, 아소카왕이 이끈 군대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장기간의 전쟁에 따른 굶주림과 전염병등은 전쟁으로 인한 죽음보다 몇 배나 더 큰 죽음을 몰고 왔다. 아소카왕은 무려 15만명의 포로를 잡고 개선하였지만, 승전에 대한 기쁨보다는 전쟁과 기근 그리고 질병 등으로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애도와 연민이 더 컸다. 결국 아소카왕은 칼링가 지방을 특별 주로 지정하고 왕자들 중 한명을 항상 상주시켜, 지역 주민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마우리아 왕조의 팽창정책도 여기서 끝을 맺었다. 칼링가국 원정이 아소카 왕에게는 최후의 전쟁이 된 셈이다. 그러나 그는 무력에 의한 점령과 통치를 부정하고 다르마(법)에 의한 통치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불교의 깊은 신봉자이자 수호자가 되었으며, 다르마의 실현을 지향하여 정력적으로 노력하였다.
언제 어디서나 정무(政務)를 들어서 처리하고, 스스로 영역 안을 순찰하였으며 또 관리를 시켜 5년마다 관할구역을 순회하여 백성이 법을 준수하는지의 여부를 시찰하게 하였다. 그리고 불교에 귀의한 왕은 석가모니의 탄생지 등을 방문해서 스투파(탑의 기원인 건축물로 부처의 진신 사리를 보관한 일종의 무덤이다)를 증축하고 불교 교단 내의 화합을 도모했으며 분쟁을 엄하게 경계하였다.
그밖에 종교교단에 대해서도 보호를 하고 관용을 주장하였다. 또한 여러 종교교단을 관장하는 특별 관리를 임명하였고 백성을 위해서 도로를 건설했으며, 수목을 심고 우물을 파거나 인간과 동물을 위한 병원을 세우는 등의 사회사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아소카왕은 영토 곳곳에 돌기둥을 만들어 조칙(詔勅)을 세겨 다르마의 실현을 강조하였다. <=아소카왕의 석주(돌기둥)
그밖에 종교교단에 대해서도 보호를 하고 관용을 주장하였다. 또한 여러 종교교단을 관장하는 특별 관리를 임명하였고 백성을 위해서 도로를 건설했으며, 수목을 심고 우물을 파거나 인간과 동물을 위한 병원을 세우는 등의 사회사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아소카왕은 영토 곳곳에 돌기둥을 만들어 조칙(詔勅)을 세겨 다르마의 실현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종교와 온정주의적 법의 교화에 기울어지면서 군사력과 경제력은 약해졌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약해졌다. 그리하여 아소카왕의 죽음과 동시에 제국은 분열되기 시작하였고, 마우리아 왕조의 마지막 왕인 브리하드라타가 그의 부하였던 푸샤미트라 장군에 의해 피살됨으로써 기원전 180년 마우리아 왕조는 막을내리게 되었다. 아소카왕은 인도 통일 대업을 완수하고 마우리아 왕조의 황금기를 열었지만, 통일을 유지할만한 체제를 만들지는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