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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에 주님 부활 대축일 낮미사 강론함
4월10일 [주님 부활 대축일 낮미사]
요한 20,1-9
부활은 믿지 못하는 것일까, 믿고 싶지 않은 것일까?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와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믿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부활하셨음을 믿은 것인지 시체가 사라졌음을 믿은 것인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없던 믿음이 생겼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왜 세상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잘 표현해줍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 대한 누군가의 증언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새로운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는 이유는 근거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관심’이 부족해서입니다.
믿음은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믿음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요구됩니다.
믿음의 대상은 믿을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부활을 믿고,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근거의 문제가 아니라 관심의 문제인 것입니다.
왜 세상 사람들은 부활에 관심이 없을까요? 만약 그것을 믿어버리면 자기 이전의 믿음이 깨지기 때문입니다.
돈이 행복인 줄 알고 살았는데 부활이 있다면 복음을 전하는 게 행복이 됩니다.
그러면 이전에 믿어온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이것이 싫은 것입니다.
영화 ‘적과의 동침’ 줄거리입니다.
부자인 남편 마틴과 살고 있는 로라. 그러나 남편 마틴은 극도의 결벽증에 심한 의처증까지 있어
아내를 감시하고 폭력을 행사합니다.
허구한 날 맞아가던 로라는 견디지 못하고 이혼을 하려고 해도 절대로 해줄 수 없다는 그에게 질려 어느 날 밤, 마틴과 항해에 나선 로라는 폭풍을 이용해서 탈출에 성공합니다.
마틴은 수영을 못하는 로라가 물에 빠져 죽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장례식까지 치릅니다.
마틴은 자신이 완벽한 남자이고 아내에게 잘해준다고 착각했기에 아내가 자신에서 탈출했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수영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아내가 오랜 기간 수영 강습을 받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인정하기는 싫지만, 아내가 변기에 버린 결혼반지까지 찾습니다.
어쩌면 그는 아내가 자신을 배신하지 않고 정말 죽었기를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 아내가 숨어 사는 곳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에 분개한 그는 아내를 죽이려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믿음이 거짓된 것이었음을 밝혀지는 게 두려운 것입니다.
아내가 살아있는 것은 자신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은 그 부활 때문에 자신의 믿음이 틀렸음을 인정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베드로와 요한은 근거만 있다면 자기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여자의 말을 듣고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도 처음엔 돈과 명예와 여자가 행복이라 여겼습니다.
만약 사제가 되는 것이 더 큰 행복이라면 제 생각이 틀린 것입니다.
하.사.시.는 결혼하지 않고 사제로 사는 게 더 행복이라고 저에게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저는 행복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관심이 있으면 믿어지기 마련입니다.
성당에서 많은 봉사를 하였습니다.
거의 사제의 삶처럼 매일 성당에서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런데 행복하였습니다.
조금씩 믿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사제가 되는 삶이 행복이라고 믿을 결심을 하였고 그렇게 모험을 감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살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영원한 생명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믿을 수 있습니다.
그 부활의 삶으로 초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위해 목숨과 같은 것을 내어주었을 때 부활의 기쁨으로 돌아오는 경우를 많이 경험합니다.
그 경험을 되풀이하다 보면 사랑은 죽음과 같고 열매는 부활과 같음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에 관한 것에서는 관심만 있으면, 믿으려고 하는 마음만 있으면 믿어집니다.
그리고 믿어지면 삶이 바뀝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10일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사도행전 2,14.22-33
마태오 28,8-15
또 다른 세상
제가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남도의 한 항구로 여행을 갔었는데, 바다를 처음 본 터라 모든 게 너무 신기했습니다.
크고 작은 화물선이며 어선들이 쉼 없이 들어오고 나가고를 반복했습니다.
한참동안 그 배들을 계속 바라보다가 제가 한 가지 개인적으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짐을 가득 실은 큰 화물선 한척이 출항할 때였습니다.
바로 앞에서 보니 크기가 어마어마했습니다. 엔진소리도 엄청났습니다.
크게 뱃고동을 울리면서 항구를 벗어났는데,
그때부터 저는 계속해서 그 배 한척의 뒤꽁무니만 바라봤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 큰 화물선이 멀어져가면서 점점 작아지더니 어느 순간 제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배가 도대체 어디로 가버렸을까요?
바다 속으로 침몰한 것도 아니고...
비록 제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그 배가 없어져 버린 것은 절대 아니겠지요.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한시적으로 제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 배는 어느 바다 위에 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구 반대쪽 나폴리라든지 부에노스아이레스라든지 또 다른 아름다운 항구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도 똑같은 이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 세상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게 주어진 이번 생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눈앞에 펼쳐지는 이 현실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고 거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모든 것이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정복하지 못한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정복된 것입니다.
이제 죽음은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는 관문이 된 것입니다.
얼마간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더 들고, 병들고, 그렇게 끝이려니 생각했었는데, 또 다른 생이 있다니, 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축복입니까?
우리네 인생의 바다 저 건너편에 또 다른 대륙인 하느님 나라가 존재한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한 축복인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고 고달프다하더라도,
매일이 죽기보다 힘든 삶이라하더라도 또 다시 희망하고 용기를 내고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이 지나가면 그것으로 인생 종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아름다운 세상, 하느님 나라가 있고, 그곳에서 우리를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세상은 이 세상보다 훨씬 풍요롭고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함께 하는 불멸의 세상이요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세상입니다.
지금 우리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 모든 지상적인 것, 육체적인 것이 다가 아니라 보다 영원한 것, 보다 가치 있는 것, 불멸하는 것,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대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아름다운 나라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 풍요롭고 충만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안고 오늘 나 자신의 이 비참함, 이 현실의 혹독함을 기꺼이 견뎌나가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2023. 4. 10. 월)(마태 28,8-15)
<평안하냐?>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8-10)”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 부활 소식을 전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무덤이 비어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 부활의 증거도 아니고, 징표도 아닙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여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천사를 만났고, 그 천사가 예수님 부활을 알려 준 것으로 기록했는데, 여자들이 천사의 말만 듣고서 예수님 부활을 믿게 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라는 말은, ‘반신반의’ 상태였음을, 즉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여자들이 천사의 말을 듣고서도 믿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16,8).
‘여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일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만난 뒤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셨을까?
네 복음서의 이야기를 모두 합해서 생각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도들이 처음 만난 곳은
갈릴래아가 아니라 예루살렘입니다.
또 루카복음을 보면,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9).” 라는 지시가 있습니다.
갈릴래아로 가라는 지시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는 지시는 모순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갈릴래아로 가라는 지시는, 루카복음 24장 47절,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에 연결해서, 이제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할 때가 되었다는, 즉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라는 지시로 해석합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사도들이 복음 선포 활동을 할 때 당신이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으로 해석됩니다.
“여자들이 돌아가는 동안에 경비병 몇 사람이 도성 안으로 가서, 일어난 일을 모두 수석 사제들에게 알렸다.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
있다(마태 28,11-15).”
여기서 ‘경비병들’은 사제들이 지휘하는 성전 경비병들이 아니라 빌라도의 부하들, 즉 로마 군인들입니다.
27장 65절의 “당신들에게 경비병들이 있지 않소.” 라는 말은, 번역이 잘못되었습니다.
“당신들이 경비병들을 차지하여라.”가 올바른 번역이고, 이 말은 빌라도가 자기 부하들을
내주겠다는 뜻입니다.
<경비병들이 총독의 처벌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도 그들이 빌라도의 부하들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무덤을 막았던 돌을 옆으로
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마태 28,2).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은 보지 못했고, 부활하신 예수님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언제, 어떻게 부활하셔서 무덤에서 나가셨는지는 본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경비병들은 자기들이 본 것을 그대로 사제들에게 알렸을 텐데, 사제들은 예수님의 무덤에서 어떤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은 알게 되었지만, 그 일을 예수님의 부활에 연결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싶지 않아서, 또는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를 원해서, 경비병들에게 거짓 소문을(가짜 뉴스를) 퍼뜨리게 합니다.
그래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경비병들과 사제들에게도 나타나셨다면?”
요한복음을 보면, 이 질문은 이미 최후의 만찬 때 사도들이 했던 질문입니다.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2-23)”
예수님의 답변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왜 사도들과 신자들만 하고, 다른 사람들은 못했을까? 라는 의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서 말씀하셨는데, 조금 풀어서 표현하면, 부활하기를 희망하고, 그 희망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사람들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믿고 싶어 하는 것’이고,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부활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아예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많은데, 그들은 부활을 ‘남의 일’로만, 또 종교와 신앙에 미친 사람들의 ‘헛소리’로만 생각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사도 6,7).”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사제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는 것인데, 그들 중에는 경비병들을 매수하는 일에 가담했거나 그 일을 알고 있는 사제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고, 바로 그 사람들을 통해서 그 일이 교회에 알려졌을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