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했다지요. 울산에서 살아온 지 벌써 20년째 접어들었습니다. 이제 울산은 제게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삼남면에 처음 온 뒤 여기서 막내의 돌잔치를 했습니다. 둘째 딸아이는 공교육의 첫걸음인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 세월이 흘러 이제 둘째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었고 막내는 고3입니다. 감사하게도 2015년엔 대한노인회 울주군 지부 삼남면 분회 어르신들이 추천해 주셔서 울주군수 표창까지 받았으니 이젠 저도 울산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놀랍고 감동적인 것은 우리 마을에 처음 도시가스 공사를 시작할 때 시설비를 마을 공동기금에서 한 가구당 일정 금액 지원해 주는 주민 총회에 초청되어 갔더니 "우리 마을에 많이 수고했으니 한 구좌 주자"고 만장일치로 의결해 구좌를 주실 때의 감동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젠 마을 공동 행사에서도 빠지지 않고 초청장을 보내줍니다. 초청을 받아 마을 어르신들을 모시고 해남 땅끝 마을에 단합 여행을 갔을 때의 추억도 결코 잊지 못할 겁나다. 먼 길을 함께 오가며,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르며 한 마을의 주민으로 정이 들어가던 그 시간을 어찌 잊으리요. 이제 이장님을 뵐 때에도, 우리 반의 반장님을 뵐 때에도 먼저 인사를 건넵니다. 장터에서 만났을 때에도 반갑게 여기저기서 어르신들이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합니다.
삼남면 사무소가 명칭을 삼남면 행정복지센터로 개칭하면서 옛 건물에서 작천정 가까운 쪽으로 신축해 옮겨 갔습니다. 이후 행정복지센터 주변에 슬금슬금 상가들이 생기고 상권이 점점 형성돼 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을에 새로운 가게가 생겼으니 사장님들과 안면을 트고 인사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해 그 곳을 찾았습니다. 영업이 잘 되는 지? 우리 마을에 와서 어려운 점은 없는지? 생활하는 주택은 어디에 있는지? 서로의 애환을 나누면서 쭉 한 바퀴 돌았는데 커피가게 사장님이 즉석에서 시원한 냉커피를 내 주시며 방문해 줘서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날엔 잘 아는 지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돼지국밥집에 들러 사장님을 만나 보았습니다. 차근히 안부 물어본지 제법 되었다 싶어 가게에 들렀더니 아니나 다를까 사장님이 반갑게 맞으며 봉지 커피를 주시며 달달하게 한 잔 하시라고 하네요. 며칠 후에는 그가 마을에 있는 통닭가게를 인수해 영업을 시작한다기에 잠시 들렀습니다.
비록 여성이긴 하지만 젊은 사람이 당당히 개인 창업을 시작했기에 축하하고 나오는데 이번에는 맞은 편 카페 사장님이 저를 보고 차 한 잔 하시고 가라며 초청하시네요. 그 날 오후엔 자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힘이 있을 때까지 뭔가 좀 해야한다"며 식당을 운영하시는 마을 경로당 총무님을 만났습니다. 총무님도 "우리 식당에 커피 원료가 새로 왔다"면서 한 잔 하시라고 따끈하게 내어 주십니다. 눈에 익은 이웃들이 한 두 분씩 식당에 들어와 담소를 나누며 커피 한 잔 했습니다. 철마다 노지에서 생산되는 제철 채소나 과일들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나눠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검은 비닐봉투에 담긴 한 두끼 분량의 상추나 깻잎, 미나리 혹은 풋고추, 오이나 애호박을 선물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저런 소소한 선물을 받아서 기쁜 것도 사실이지만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서로 나누는 대화 중에 `내가 이분들의 이웃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대부분 마을 어르신들은 교회 운영에 어려움은 없는지, 아이들이 잘 있는지 등을 걱정하시며 저의 건강까지 잘 챙겨 주십니다. 모두가 자기 일처럼 걱정하고 염려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본인들의 건강상의 어려움이나 자녀문제, 고부갈등, 부부문제, 직장이나 사업상의 문제들을 스스럼없이 털어놓고 대화해 오십니다. 이렇게 마을의 주민으로 인정받고 공동행사에 초대되고 살아간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특히 삶 속의 애환을 스스럼없이 터놓고 이야기하는 인간적 관계를 이웃들과 맺게 된 것에 무한히 감사할 뿐입니다. 이웃사촌이 논밭에서 일하다 흙 묻은 손으로 인사를 보내 올 때 정말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기뻐합니다. 살다보면 이런저런 안타깝고 고통스런 일을 만난 적도 있지만 가까운 이웃들이 건네는 달달한 커피 한 잔에 담긴 정과 여유는 나를 지치지 않고 행복하게 살도록 만듭니다. 지금 내 고향 삼남면에서는 삼남 배들이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습니다. 한가위 날 누렇게 삼남 배들이 익어갈 때면 우리들의 이야기도 황금빛으로 영글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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