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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희 시인은 경북 경주에서 출생했고, 2009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2011년 『시와 세계』로 등단했으며, 합동시집으로는 『젊은시』(2009, 문학나무)가 있다.
윤은희 시인의 첫시집 {아르정탱 엿보다}는 현대인의 물신성을 포착하여 그만의 시적 언어로 산책자, 분석가, 수집가로서의 문명비판적인 전모를 보여준다. 더없이 날카롭고 예리한 시선과 그 언어들을 통하여 한국 현대시의 스펙트럼을 넓히려는 전위주의자로서의 투신이 바로 그것이다. 정상적인 주체의 실종, 한없이 수동적이고 폭력적인 주체들의 난무, 따라서 인터넷 세상의 위험은 “버뮤다 삼각지대”의 그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살아라, 살아야 하는 것이 시詩다
Nothing과 Something 사이의 표리상응
조롱과 말놀이의 진수이다
시는 육신의 아픔으로 배양된다
겨울을 품은 봄이 필 것이다
피에리아Pieria 장미를 그리워하고 있어요, 제발
2016년 봄을 기다리며
윤은희
지팡이, 카우치, 그리고 테이블
-윤은희의 시의 방(房)에 놓인 것들
안서현(문학평론가)
윤은희 시인의 시 세계는 이채롭다.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그의 개성적 시풍은 고유한 시적 관심과 과감한 언어 운용에 의해 뒷받침된다. 먼저 시인의 고유한 시적 관심은 문명비평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의 겉과 속을 가감없이 꿰뚫어보고자 하는 거침없는 문명비평적 시선이 그의 시적 개성의 주된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의 독특한 언어 운용방식은, 신조어나 외래어, 외국어, 그리고 상표나 고유명사 등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그 이물감을 통해 작금의 혼성적 언어 풍경을 반영해내는 데 그 특징이 있다. 다른 시인들은 모국어의 순수한 세계를 지켜가는 것만을 자부로 삼지만, 윤은희 시인은 그보다는 동시대 언어의 날것 그대로의 생생함을 지향한다. 요컨대 윤은희 시인의 첫 시집은 현대의 세태와 습속, 그리고 그 문제성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는 언어적 구체와 실감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하겠다.
우리는 이 근사한 문명비평가-시인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먼저 도시를 활보하며 낯선 이웃들의 삶의 모습을 관찰하는 산책자인 그의 모습을 상상해본 후, 그에게 산뜻한 단장과 모자를 들려준다. 그가 유리로 된 가게나 찻집의 문 안을 들여다보다가 누군가에게 오해를 사기라도 하면 점잖게 모자에 손을 얹고 한손에 지팡이를 휘두르며 그곳을 떠날 수 있도록 말이다. 또 이 도시에서라면 도처에서 만나게 되는 우울증 환자들의 진찰을 해주는 분석가인 시인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의 방 한 켠에는 카우치를 마련해둔다. 자신을 찾아온 이들을 카우치에 눕히고 이야기를 듣는 것이 그의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는 섣부른 치료를 하려 드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카우치에 누운 환자는 자신의 증상에 관해 알고 싶어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증상을 잃고 싶어하지는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환자는 자신의 증상을 향유하고 있다는 것. 프로이트 이후로 이제 꽤 유명한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먼 훗날에 이 시대를 증언해줄 수 있는 사물들을 모으는 수집가이기도 하기에, 그의 방에는 수집품들을 올려놓을 테이블도 마련해본다. 물건은 그 소유자 혹은 그가 향유했던 한 시대를 증언한다. 또한 그 테이블 위에는 문명비평가에게 있어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인 신문도 놓여 있어야 할 터이다. 아니 지금은 인터넷 뉴스의 시대이므로, 그의 테이블 위에는 작은 랩탑 컴퓨터도 하나 있는 편이 낫겠다. 그의 테이블에는 이렇게 동시대의 거울들이 잔뜩 놓이는 것이다.
이것은 이 시집을 읽고 상상해본 시인의 모습이다. 물론 이것은 유쾌한 상상일 뿐이며, 실제 시인은 그의 시적 페르소나인 ‘지팡이를 짚은 문명비평가 신사’와는 상관없이 우아한 모습일 테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명 비평의 도구들을 통해 이 시인-페르소나가 관찰하고 또 그려낸 현대의 요지경 속으로 한번 들어가보면 어떤가.
산책자의 지팡이: 도시의 우울과 환등상
시인의 방에 놓인 첫 번째 사물인 지팡이는 사실 저명한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발터 벤야민에게서 잠시 빌려온 것이다. 대도시의 아케이드를 산책했던 벤야민과도 같이, 산책자-시인(flâneuse-poétesse/flâneur-poète)은 욕망의 미로 혹은 허영의 극장과도 같은 도시 거리를 배회한다. 상점에 진열된 상품이나 카페에 가득 찬 손님 들은 물론, 가게의 간판이나 광고판, 그리고 거리에 흩날리는 신문의 호외나 광고지에서 볼 수 있는 파편적인 기호나 이미지들까지 거리의 모든 것이 벤야민에게 현대성에 대한 영감을 주었던 것처럼, 시인에게도 역시 그러하다. 벤야민에 따르면 대도시의 거리는, 한편으로는 군중을 마비시켜버리는 화려하고 현혹적인 환등상(phantasmagoria)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잊혀진 유토피아의 흔적과 희미한 구원의 단초를 숨기고 있기도 하다. 시인(벤야민에게 있어서는 철학자, 또는 글쓰는 사람)은 바로 그 이중적인 상을 읽어내는 사람일 터이다.
윤은희 시인의 등단작인 「아르정탱 안을 습관적으로 엿보다」는 시인이 자신의 단골 카페 ‘아르정탱’에서 “엿보”게 된 풍경들, 그리고 그 풍경들이 환기해낸 시인의 꿈들을 그린 시다. 이때 ‘엿본다’는 행위는 결코 표피적 관찰이 아니며, 공간과 사물이 보여주는 현상과 그것이 불러내는 기억(현재와 과거), 그리고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내밀한 정념과 생의 비밀을 생동감 있게 포착하는 행위다. 이국적인 이름을 가진 이 카페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엇갈려 들끓고 있다. 권태로운 연인이 있는가 하면 어색한 침묵의 두 남녀가 있고, 결혼식을 앞둔 교회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젊고 활달한 술 친구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갤러리에는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그림이 함께 놓여 있고, 레너드 코헨과 베빈다의 노래가 번갈아 들려온다. 이렇게 환멸과 영원(빛을 잃어가는 맹세와 새로 언약되는 맹세), 성과 속, 중년의 회한과 청춘의 빛, 남성성과 여성성이 공존하고, 또 교차한다. 그리고 그 속에 흩뿌려져 있는 인생의 비의의 파편들을 시인들은 그러모으고 있는 것이다. 이 시집 속 「마네킹 엘레지」나 「정다방, 바다를 기다리다」 등의 시편들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도시의 풍경과 멜랑콜리를 그린 시들이다.
「카니발」이라는 시편은 또 어떠한가. 역시 다양한 풍경들이 겹쳐지고 여러 목소리들이 혼조를 이루는, 또 성과 속이 중첩되어 있는, 그야말로 카니발리즘적 미학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1. 성 십자 앞에서 혼인한 부부
서로의 두뇌 뒤적이는 제로섬게임은 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 늑대나 경험할 법한 젊은 날 보낸 후 혼인하는 신사는 수줍기만 하다 남자들의 거룩한 뻔뻔스러움에 눌려 아이스크림만 먹던 신부의 입술이 얼었다 태양 같은 신랑 옆에 서서 다년초 베고니아 꽃말을 전한다
달콤함은 배고픔을 채우지 못한 채
2. 우울증환자
혓바닥에 소금맛 길들이려 고등어 한 손 사는 대신 김빠진 잡담 돈 대신 넘겨주고 시장 골목 빠져나온 유니氏, 햇당근 한 바구니 들고 횡단보도 앞에 선다
-머리 속은 당신을 위해 야채수프 끓이는 중
3. 찌푸린 가방처럼 찌푸린 남氏
매일 아침 밥 짓는 냄새에 신경이 날카롭다 아침 7시 정각 똑딱, 울리는 시계 곁에서 아침으로 커피와 머핀을 먹는다 찌푸린 가죽 가방 들고 증권회사로 출근한다 저녁이면 술 취해 머리 부풀린 채 살고 싶은 곳으로 달려 들어온다 엔틱 화장대 위 마블인형에 입 맞추고 잠든다 머리 속은 가난한 여자의 땀방울로부터 훔쳐온 재산을 헤아리는 중
(후략)
이 시에서는 현대인들의 욕망의 풍경들이 나열되고 있다. 채울 수 없는 애정의 허기나 일상의 공허를 가짜 위로―달콤한 아이스크림이나 바구니 속의 햇당근, 그리고 마블 인형의 키스―로 달래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화려한 겉모습과 허기진 내면은 현대인의 삶이 품고 있는 전형적인 아이러니이다. 다르게 설명하면, 소비와 공허는 현대인의 삶 속에 똬리를 틀고, 앉은 서로 맞물린 뱀과도 같다. “카니발(재의 수요일 직전에 열리는 축제를 의미한다)”이나 사순절의 금욕의 시작을 나타내는 “災의 수요일”(인용 뒷부분)은 욕망의 충족과 억압이 교차되는 주기를 암시한다. 과거에는 이러한 제의적 혹은 종교적 주기가 작동하였지만, 지금은 소비와 공허의 아이러니가 이를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페티시즘의 마리오네트들」의 일부를 읽어보자.
아담스채플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알쏭달쏭 스무명의 마리오네트들 아이폰4s에 나오는 Steve Jobs 1의 사과처럼 신맛을 본다 Jobs 2가 듣고 있는 음악을 만진다 백년의 최면에 기대어 Jobs 3의 얼굴에 귀 기울인다 Jobs 4의 손가락이 쇼팽의 피아노와 현을 위한 녹턴을 두드린다
참 우울한 일이야
Jobs 5의 전두엽에 녹아 든 마리오네트를 맨드라미 부풀리듯 끄집어낸다
살아있는 척
Steve Jobs의 시뮬라시옹들은 어린 꿈을 환대한다 (후략)
위의 시에는 스마트폰을 만든 스티브 잡스의 마리오네트들이 되어버린 현대인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스티브 잡스의 꼭두각시이자 모방자(시뮬라크르)이자 “노예”(2연)가 되어버린 애플스토어 안의 추종자들은 상품과 테크놀로지의 환등상에 사로잡혀버린 불나방들과도 같다. ‘애플’이라는 상표와 인류에게 신기원을 선사한 ‘아담’의 이미지, 그리고 그 아담과 애플을 경배 혹은 물신숭배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풍자하는 ‘채플’이라는 단어가 합쳐진 ‘아담스채플’이라는 시인의 패러디 작명이 풍자적이다. 이 시가 그려내고 있는 것은 스티브 잡스의 분신과 유령 들이 무한히 증식되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풍경이자, “어릴 적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바라보았던 세상”(인용 뒷부분) 즉 물질과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우위에 놓이게 된 전도된 세계, 판타스마고리아의 풍경인 것이다.
분석가의 카우치: 마음의 가난과 병
윤은희 시인의 시인-페르소나는 현대인의 무의식을 파헤치는 분석가-시인이기도 하다.
마음이 가난한 현대인들은 “카운슬러”를 찾아가거나 타로카드 점을 본다. 그러한 방편에 의존해서라도 삶의 공허와 불안을 이겨내려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정황이 「카운슬러 페르소나」나 「매달린 남자」에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카운슬러”의 말이나 점괘는 사실 기만적 환상이나 은유적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
카운슬링이란
반라의 자세로 앉아 오렌지 향수에 콧구멍 처박고
고양이 꼬리 흔들듯이 우울증환자의 엉덩이 춤추게 하는 것
어린 나무에게 휴식을 주는
리터머스 시험지로 독이 든 치료약을 손바닥에 문지르고
수리 수리 마수리 연기 피워 올리며 주문을 외운다
논 삐앙게레*
논 삐앙게레
논 삐앙게레
우스워서 눈물 나는 노래
페이소스의 문신이 박힌
혹, 푸른 최음제 빛의 문양은 어디로
어린 꿈을 말랑말랑하게 회유하는 댓가로
그녀 발톱에는 장미향으로 치장한 궁전 하나 생긴다
읍소하는 침묵이 아니면
팔찌 흔들며 관습에 이끌려 씨앗의 싹을 수놓는
네 혀를 묶어라
* 수전 손택의 “논 삐앙게레Non Pianggere, 울지마!” (전문, *는 원주)
이와 같이 시인은 카운슬러의 거짓 위로를 희화화하고 “우스워서 눈물 나는” 것으로 풍자한다. 그리고 대신 현대인들을 카우치에 앉힌다. 아래의 시 「페티쉬한 사내의 기하학적 내면세계」에서 두 가지 층위의 언어들이 교차하는 시 형식은 마치 분석가의 목소리와 분석대상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리는 듯한 효과를 자아낸다. 그가 보았을 때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전형적 증상은 우울증과 페티시즘이다. 주체의 소진과 타자와의 유대의 상실, 그리고 그로 인한 주체의 공허를 사물에 대한 집착을 통해 대리보충하고자 하는 증상인 것이다. 「면도날 모티프」, 「우울증 환자의 얼굴」 그리고 「페티쉬한 사내의 기하학적 내면세계」 등의 시들에 그러한 진단이 두루 제출되어 있다.
불면의 밤 아내에게 얼굴 잃은 사내가 있었다
-내 사랑은 여자의 옷장 안에 있어
여자의 속옷으로 존재, 존재를 알리는 사내가 있었다
-나의 죄는 그녀의 속옷에 신이 잠들어 있다고 믿는 것
낮과 밤의 그로테스크한 얼굴로 웃고 우는 사내가 있었다
-뿌리 깊게 길들여진 채, 노골적 혹은 따뜻하거나
마술적 신음을 내는 여자의 목소리를 긁는 사내가 있었다
-치유, 치유는 봄비 내리는 날에 만나
보라색 허브의 꽃말을 애무하던 사내가 있었다
-인격적 아픔에는 비극적 과거사가 있어
우울에 홀린 사내에게 여자의 속옷은
-아껴 둔 부적이다
(전문)
“얼굴 잃은 사내”, 자신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여자의 속옷”이라는 특정한 사물을 경유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이 “사내”는 한마디로 현대적 ‘주체의 실패’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타자와의 인간적 관계 대신에 사물에 대한 고착된 욕망으로 자신을 확인하고 증명해야 하는 현대인의 왜곡된 주체성이 이 시에 포착되어 있는 것이다. 자신을 잃은 그의 얼굴은 “그로테스크”하다. 그는 “치유”를 끊임없이 연기하며 자신의 증상을 향유하고, 자신의 과거와 미래까지도 이러한 왜곡된 관계에 속박시켜버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내”는 모두 같은 “사내”일 수도 있지만 매 연에 다른 “사내”‘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주체의 왜곡과 실패라는 시대의 고질병은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
수집가의 테이블: 물상과 그 그림자
이제 마지막으로 시인에게서 수집가의 면모를 찾아내볼 차례다. 먼저 「현대사 전당포의 비밀」을 보자. 전당포라는 공간에서 시인은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대의 멜랑콜리”를 읽는다. 주인에게서 잊혀지거나 몇 푼의 돈으로 환금되어버린 사물들은 시인에게 많은 말을, 특히 현대성에 대한 진실들을 가감없이 전한다.
(전략)
낯선 사기꾼의 이태리제 선글라스
성형수술한 뮤지컬 배우의 루이뷔똥 가방
마음 떠난 약혼자의 스위스제 카르티에
낡은 정치가의 홍보석 박힌 도자기
거식증 여배우의 세공 유리병에 담겨 있는 향수
헤어진 허즈의 결혼반지
(후략)
이 시는 현대인들의 과시와 변덕을 드러내는 무수한 증언적 사물들에 대한 박물지와도 같다. 이 목록 속의 물건들은, 한때는 주인의 욕망하는 자신의 이미지나 관계의 이상을 담아낸 호화로운 소유물이었으나, 이제 주인의 환멸이나 관계의 종말에 의해 전당포로 오게 된 것들이다. 이러한 사물들을 낱낱이 호명하는 이 시의 구체성의 언어는 그 자체로 물신적인 현대인들의 삶을 잘 반영하는 한편, 그러한 물신적 집착의 덧없음을 또한 고발한다.
수집가-시인은 이렇게 다른 사람의 테이블에 놓여 있는 물상들을 통해 그것들이 의미하는 현대적 삶의 공허를 보여주는가 하면, 자신의 테이블에 놓인 신문이나 책(일일이 논의하기에는 지면의 한계가 있으나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나누었던 역설의 대화」가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고전 속에서 현대 미학의 핵심이자 현대적 주체의 구조인 아이러니와 패러독스를 읽어내고 있다.), 혹은 신문이나 인터넷 단말기를 현대를 읽는 거울로 삼기도 한다. 「詩人, 버뮤다 삼각지대에서 놀기」는 신문 대신 인터넷이 점유한 테이블의 풍경을 다루고 있는 흥미로운 시편이다.
신년, 조간신문의 종잇장 위에 대붓으로 떨군다:
-동시대는 미래파 그러므로 실패, 우리에게 보여주오
자색의 밤바다
야맹증 물고기 시체들이 포복절도 하는 곳으로 간다
돋보기로 Surfing the Internet 활자에 입 맞춘다
맨대가리로 달려들어 물마루 삼키는 수탉들
칼 빼어 들고 가파른 물 위로 굽이친다
내일은 커피와 호흡으로 어릿광대 놀음 구경하세요
물고기들 혀 날름 빼물고 키 재는 양피지 위
기호를 포식하는 외래종 얼간이 눈알 삼각자로 잰다
끝을 당기는 모서리 안에서
퍼즐 맞추듯 타작하는 곡식알의 비명 소리
밀물 썰물 흔든 달의 주목 끌지 못한 채 고함치는, 혹독한
조롱과 말놀이는
폭풍우 만나기 전
여름날 기승부리듯 다이빙 한다
눈꺼풀에 꽃즙 발린 물고기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주지
빗장 걸린 뿔대문을 때려 부술테야
(후략)
바다의 물결을 타고 노는 물고기들의 이미지는 한없이 가벼운 인터넷 속 기호와 이미지들의 세계를 누비는 네티즌들을 나타낸다. “시체”, “어릿광대”와 ‘구경꾼’, 그리고 ‘포식자’의 이미지로 변주되는 이 물고기 이미지는 이들의 무력함, 무비판성, 그리고 폭력성을 암시한다. 그들의 행태를 설명하는 “포복절도”, “조롱과 말놀이”, 그리고 “혼자 놀기” 등의 표현 역시 마찬가지로 이들의 행위가 갖는 무의미함의 극치를 드러낸다. “바다”와 “물고기”라는 비유는 약육강식의 원리가 통하는 하나의 생태계를 연상시킨다. 타인에 대한 공격이나 조롱을 통해 그보다 우월해지거나 그를 지배하려 하는 행위는 서로 “살결 뜯어먹기”(인용 뒷부분)를 하는 이 카오스적 생태계의 냉혹한 일상이다. 또 “버뮤다 삼각지대”라는 시어는 정상적인 주체의 ‘실종’, 그리고 무력하고 수동적이며 폭력적인 주체로의 대체를 가져오는 인터넷 세상의 위험을 집약적으로 표현한다. 이는 앞 장에서 살펴본 현대인의 병적인 내면의 또 다른 표현 양태일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현대인의 물신성을 풍자하는 윤은희 시인의 언어를 전유하여, 산책자, 분석가, 그리고 수집가로서의 문명비평적 면모를 보여주는 시인의 시적 세계를 세 개의 ‘사물들’을 중심으로 살펴본 셈이다. 이렇게 참신한 시선과 과감한 언어를 통하여 우리 시의 스펙트럼을 더 넓히는 전위의 시인이 우리에게는 늘 필요했다. 윤은희 시인이 지금까지 없던 낯선 시의 빛깔로 우리 시라는 스펙트럼의 한끝자리를 열어나가기를 고대한다.
윤은희 시인의 시는 끊임없이 낯선 세계로 나아간다. 우선 시인이 운용하는 언어가 낯설다. 일반적으로 피해 가는 영문 표기가 거침없이 등장하는 것이 그러하다. 그리고 그의 시에 등장하는 배경과 시적대상이 보편적 풍경이나 정서에서 벗어나 있다. 등장하는 인간상 또한 예외가 아니다. “아침 7시 정각 똑딱, 울리는 시계 곁에서 아침으로 커피와 머핀을 먹는다 찌푸린 가죽 가방 들고 증권회사로 출근한다 저녁이면 술 취해 머리 부풀린 채 살고 싶은 곳으로 달려 들어온다 엔틱 화장대 위 마블인형에 입 맞추고 잠든다 머리 속은 가난한 여자의 땀방울로부터 훔쳐온 재산을 헤아리는 중” 그의 시 ‘카니발’에 등장하는 현대인의 일상과 가치관이다. ‘아침 7시 정각’, ‘마블인형’과의 입맞춤, ‘머리 속은 가난한 여자의 땀방울로부터 훔쳐온 재산을 헤아리는 중’에서 인간성은 찾을 수가 없다. 기상에서 잠들기까지 기계화된 일상에서 추구하는 것은 오직 물질적 가치다. 감정이라고 찾을 수 없는 싸늘한 인간이다. 현대인의 그늘진 모습의 한 단면이지만 보편적 인간상과는 거리가 있다. 이렇듯 윤 시인의 시는 언어와 시적 배경, 대상, 인물이 어우러져 독자들을 낯선 세계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윤은희 시인의 이러한 낯선 세계를 지향하는 시적 자세는 우리 시가 나아가야 할 소중한 세계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시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라 할 수 있는 ‘새로움’의 영역을 확대, 창조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 구석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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