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4·19의 현재적 의미는 ‘좋은 나라, 훌륭한 나라’ 만들기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05호(2020. 4.15)
김기병 롯데관광개발 회장·4·19혁명 60주년 기념사업회 회장
대담: 방문신(경영82-89) SBS 논설위원·본지 논설위원
김기병(행정대학원65-67 롯데관광개발 회장, 행정대학원동창회장) 동문의 삶에는 5개의 키워드가 녹아 들어있다. 첫째 초등학교 때의 월남, 둘째 학생 시절의 4·19 주도, 셋째 공직자로서의 경제개발 참여, 넷째 민간 사업가로서의 관광 산업개척, 다섯째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 투자가 그것이다. 4·19 참여는 민주화, 경제개발 참여는 산업화를 상징한다.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뤄낸 대한민국 현대사의 궤적 그대로이다. 4월을 맞아 4·19 60주년 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는 김기병 동문을 만났다. 인터뷰의 계기는 4·19 60주년 기념사업이었지만 4·19뿐 아니라 김기병 동문의 82년 인생에 담긴 위의 5가지 키워드를 궁금증 남지 않게 모두 물어보았다.
-4·19 시위 주도자의 한 명으로서 많은 기억이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면?
“저는 60년 4·19 당시 외대 총학생회장이었습니다. 3·15 부정선거 규탄을 위해 각 대학 학생회장들과 정치대학(광진구로 이전하기 전의 건국대 전신, 현 낙원동 건국 빌딩)에서 첫 모임을 가졌습니다. 시위 날짜를 저울질하던 중이었는데 고대 생들이 4월 18일 평화시장 앞에서 정치 깡패들에게 얻어맞는 일이 발생해 학교별 거사 날짜가 앞당겨진 것이 4·19입니다. 저는 그날 시위대를 이끌고 이문동에서 종로로 진출했죠. 종로2가에서 살수차의 물 대포 저지를 받아 더 이상 행진이 어렵게 되자 제가 살수차 뒤로 몰래 올라가 운전수 아저씨에게 ‘여기서 죽을래요?’라고 반 협박 하다시피 해 운전수를 내리게 한 뒤 살수차를 한 쪽으로 밀어붙이고 행진을 계속했습니다. 이미 계엄령이 발령된 상황에서 경무대(현 청와대)로 가는 광화문에서는 수많은 사망자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는데 저는 조선호텔 쪽으로 시위대를 이끌고 갔습니다. 조선호텔 건너편의 506 방첩대에서 총탄이 비오 듯 날아왔습니다. 총탄에 엎드리라고 소리치던 일, 건너편 공터에 모여 만세삼창을 외치는 것으로 그날 시위를 마무리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뒤에는 질서 수습활동도 주도적으로 하셨는데요.
“이 대통령의 하야에는 학생 시위를 지켜보던 전국 대학 교수단의 25일 시국선언이 결정적이었습니다. 하야 후 사회는 혼란스러웠습니다. 동네 파출소에 있던 경찰관들까지 도망가는 바람에 약탈이 생겨도 속수무책일 정도로 치안이 걱정스러운 상황이었죠. 각 대학 학생회장들이 사회질서를 지켜내야겠다며 ‘대학생 질서 수습 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제가 의장에 선출됐습니다. 대학별로 지역을 맡아 ‘질서유지’ 어깨띠를 두르고 치안 유지, 교통질서 활동을 벌였습니다. 시민들이 박수치고 환호해 주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송요찬 장군이 ‘군인도 못한 일들을 대학생이 해냈다’고 격려하며 자신의 전용 지프인 KA HQ-1(대한민국 육군 본부 1호차)를 저에게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4·19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4·19도 이제 6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사람의 회갑이 그렇듯이 의미가 남다르죠. 4·19 이념은 이미 헌법 전문에 명기돼 있지 않습니까? 4·19가 없었다면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룬 대한민국의 역사도 없었을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후 해방된 약 140개의 나라 중 10위 경제권에 들어간 나라는 우리밖에 없습니다. 그런 뜻에서 4·19의 현재적 의미는 ‘좋은 나라, 훌륭한 나라 만들기’라고 생각합니다.”
-올해 60주년 기념사업은 어떻게 준비하셨는지요? 코로나 사태로 인해 많이 축소됐을
것 같은 느낌도 있는데요.
“4·19정신 KBS 간담회, 학술 토론회, 지난 50주년 때 만든 전국의 4월 혁명 표지석 순례, 희생자를 위한 전야 추모제, 열린 콘서트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 사업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로 모든 행사가 일괄 취소됐고 열린 콘서트만 가을로 연기해 하기로 했습니다. 아쉽습니다.”
-그 뒤 공직자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60∼70년대 경제개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제기획원과 상공부에서 일하셨는데요.
“졸업 후 내무부를 시작으로 공직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964년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의 비서관으로 호출 받았는데 이것이 제 삶의 전환점이 됐죠. 장 부총리와는 함경도라는 인연이 있었어요. 제 고향은 원산이고 (원산은 지금은 강원도이지만 1946년까지 함경남도 소속이었다- 편집자 주) 장 부총리는 해방 전에 조선은행의 함경남도 청진 지점장대리를 지냈어요. 제가 학창시절 ‘관북 학우회’라는 함경도 출신 장학생 모임 대표를 할 때 장기영 한국일보 사주를 고문으로 모셔왔던 적이 있었죠. 그렇게 맺어진 인연 때문에 장 부총리께서 내무부에 있던 저를 자신의 비서관으로 불러 일을 시키셨던 것 같아요. 상공부에서 일할 때는 상역국 과장, 기업지도국장으로 김정렴 장관을 모셨고요. 공직에 있던 10년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차례로 만들고 그 계획을 기초로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등이 만들어지던 때였죠. 장기영, 김정렴 같은 쟁쟁한 분들을 보필하며 산업화의 토대를 닦았다는 뿌듯함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런 공직생활을 뒤로 하고 1974년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관광업, 지금의 롯데 관광개발이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는지요?
“가난한 후진국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는 달러를 많이 벌어들이는 것이 최고의 애국이라 생각했어요. 그 때 관광업은 주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저는 관광업이야말로 외화도 벌고 국위선양도 할 수 있는 훌륭한 국가전략 산업이 될 거라는 확신 같은 게 있었어요. 70년대 외국 관광객의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는데 대한민국 상공부 국장 출신이라는 덕도 많이 봤지요. 일본 역시 관료 우위의 사회이다 보니 관료 출신인 저를 검증된 인물로 평가해주는 듯했고 그래서 제가 만든 관광업체를 더 믿어주었던 것 같아요. 창업 3년 만에 관광객 유치 1위 기업이 됐고 글로벌 여행전문지인 TTG가 선정한 ‘대한민국 최우수 여행사’19년 연속 수상으로까지 이어졌죠.”
-고향이 원산인 데다 관광업이다 보니 남북교류 사업에도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북한 땅이 고향인 만큼 남북교류,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을 늘 가지고 있죠. 제가 하는 관광사업을 고리로 북한 경제에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그래서 평양과 개성 등 북한도 여러 차례 다녀왔습니다. 1991년 김달현 정무원 부총리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을 때는 노동당 부부장 급들과의 면담 때 ‘북한 정부가 관광을 개방하면 부족한 쌀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건의한 적도 있었습니다. 또한 남한의 경제발전상에 대해 분야별로 자세히 설명했는데 참석자 모두들 놀라는 표정이었습니다. ‘백문불여일견이다. 내년 봄에 서울에 와서 마음 놓고 살펴봤으면 좋겠다’고 이들을 초청했습니다. 이를 정부에 보고하고 다음해 김달현 부총리와 관계자가 대거 남한을 방문하기도 했지요. 원산은 김정은 위원장 생모인 고영희가 머물렀던 곳입니다. 북한이 원산을 관광특구로 지정하고 특급 리조트, 마식령 스키장, 갈마 국제비행장 같은 대규모 시설을 짓고 있는 것은 원산의 명사십리라는 지리적 조건 외에도 김정은 본인의 인연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여건과 기회가 된다면 우리 대형 크루즈 선이 원산항에 들어가는 북한 관광사업을 꿈꾸고 있습니다. 남쪽의 양양공항과 북쪽의 원산 갈마공항이 비행기 이동거리로 20분 남짓인데 하늘 길을 이용한 승객 수송도 이뤄질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북한이 총을 내려놓아야 가능한 일이죠.”
-원산에서 남으로 내려오실 때의 기억이 있으신지요?
“남으로 올 때 초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저희 집안이 5남매였는데 제가 막내였고 큰 형(김기형 초대 과학기술처 장관)은 경성제대(서울대 전신) 예과 2학년 학생이었습니다. 큰형 집은 경복궁 근처인 창성동이었고 누나도 이화여대 학생이었습니다. 부모님이 ‘큰형과 큰누나가 있는 경성으로 가자’고 해서 남으로 이동했고 저도 따라 가게 됐습니다. 어머니가 쌀을 사러 간다고 핑계 대고 원산-철원까지 기차로, 산속의 안내인 집으로 가서 밤에 로스케(소련군 병사)의 경비를 피해 38선을 넘어 한탄강 건너 연천 미군 천막 DDT 살균 세례를 받고 동두천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들어왔습니다.”
-팔순이 지나셨는데도 사업 의욕이 왕성하신 것 같습니다. 제주도 복합 리조트가 올해 오픈 예정인데 어떤 곳인지요?
“중국 국영기업과 합작으로 지상 38층의 복합 리조트를 짓고 있습니다. 월드클래스 카지노와 전망대 등 부대시설까지 모두 합하면 여의도 63빌딩의 1.8배 규모입니다. 호텔은 전 객실을 스위트(Suite) 룸으로 계획 중이고 운영은 그랜드 하얏트에 맡겼습니다. 제주도의 특급 랜드마크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싱가폴의 마리나베이 샌즈 리조트를 연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제주의 활성화는 물론 한국 관광산업의 새 역사를 쓴다는 심정으로 오픈을 준비 중입니다.”
-회장님 이력 중 색다른 것이 교육 사업입니다. 신림동에 미림여고와 미림여자정보고를
설립하셨는데 어떤 동기가 있으셨는지요?
“내 평생 가장 잘한 일이 학교를 세운 일입니다. 학교 터를 잡고 건물을 짓던 1978년은 강남개발이 시작되던 때였습니다. 유혹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래도 흔들리지 않고 교육 불모지인 관악구에 터를 잡았고 주위에서 만류하던 여성 교육을 선택했습니다. 지금도 미림여고 교장을 임명할 때 ‘관악구는 어려운 동네입니다. 성적으로든 직업교육으로든 학생들에게 맞는 교육방침을 세워주세요. 우리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 제 몫을 하고 살 수 있도록 가르쳐 주세요’라고 당부합니다. 미림여자정보고등학교는 우리나라 최초로 91년 세웠는데 전산화, 정보화 사회가 올 것으로 판단해 설립했습니다. 미림학원 설립자 이사장을 맡은 뒤 IMF 외환위기 때는 물론 롯데관광 개발이 법정관리 위기에 몰렸을 때조차 재단 전입금을 거르지 않았습니다. 교육이야말로 사람에 투자하는, 미래에 투자하는 가장 의미있는 분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서울대 졸업식에서 축사를 하신다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습니까?
“도전과 개척자의 이야기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서울대는 학문과 지성의 대표입니다. 무엇을 이루겠다는 꿈과 그것을 달성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겠죠. 그것이 프론티어, 개척자 정신입니다. 우여곡절은 있겠지만 꿈은 결국 실현된다는 믿음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김기병 동문의 인연과 사람들
김기병 동문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중 익숙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했다. 4·19를 고리로 당시 이기택 고대 학생회장 (전 의원, 작고)과 알게 됐다. 그 뒤 4·19기념사업회에 함께 참여했고 가장 큰 행사로 치러진 2010년 4·19 50주년 기념사업회 때도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사진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대학 시절 친구로는 뉴스 앵커로 잘 알려진 최동호 전 KBS 부사장을 꼽았다. 영어과 동기의 인연이 이어져 최동호 전 부사장은 지금도 김기병 동문이 이사장으로 있는 미림학원 재단 이사와 롯데관광개발 이사로 일하고 있다. 공직자 시절 직접 모셨던 장기영 부총리, 김정렴 상공부 장관은 큰 인물이었다며 큰 그늘에 감사한다고 술회했다. 결혼 때는 정일권 총리가 현직 총리로 결혼식 주례를 섰다. 가족들이 원산에서 월남할 당시, 경성제대 학생이었던 큰 형 김기형은 후에 초대 과학기술부 장관을 지냈다. 김 동문은 원산 시절, 그 곳에서 초등학교 1학년을 다녔다고 했다. 확인된 정보는 아니지만 김정은 위원장이 어린 시절 원산 초대소에서 어머니인 고영희와 함께 초등학교 졸업 후 스위스로 유학 떠날 때까지 지냈다는 일설이 있는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두 사람은 김일성 주석이 현지 지도한 명문 명석초등학교 동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 동문의 회사명은 롯데관광개발이지만 롯데그룹의 지분은 없다. 다만 김 동문의 부인인 신정희 동화면세점 대표가 고 신격호 명예회장의 막내 여동생이라는 인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