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야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집안이 사도세자 죽음에 관여 정조시대 때 정치적 역할 못해
11세 순조 왕위에 오르자 정조 개혁정치 기반 해체 천주교 탄압도 적극 나서
1757년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 서씨(1692~1757년)가 승하했다.
정성왕후는 1704년 14세에 두살 연하의 연잉군(훗날 영조)과 혼례식을 올렸다.
1724년 영조 즉위 후 왕비에 올랐지만 영조와의 사이에 대를 잇는 자식을 두지 못한 채 승하한 것이었다.
왕실에서는 영조가 비록 고령이었으나 재혼을 서둘렀고,
그렇게 해서 영조의 계비로 들어온 여인이 15세의 신부 정순왕후 김씨(1745~1805년)였다.
1759년 혼례식 당시 영조의 나이가 66세였으니, 조선왕실에서 가장 나이 차가 많은 혼인이 이뤄진 것이었다.
정순왕후는 경주 김씨 김한구(漢耉)의 딸로 1745년 경기 여주에서 출생했다.
1759년 6월9일 정순왕후는 창경궁 통명전에서 삼간택 끝에 계비로 간택됐다.
정순왕후가 간택 때 면접을 잘 봤던 일화는 <대동기문>이라는 야사에 전해온다.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어떤 신부는 산이 깊다, 어떤 신부는 물이 깊다, 어떤 신부는 구름이 깊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정순왕후는 인심(人心)이라는 답으로 면접관들을 놀라게 했다.
사람의 마음은 측량하기 어렵다는 것이 인심이라고 답한 이유였다.
이어서 꽃 중에 어떤 꽃이 제일 예쁜지를 묻자, 정순왕후는 목화꽃이라고 답했다.
다른 꽃들은 일시적으로 좋은 것에 불과하지만, 목화는 솜을 만들어 많은 사람을 따뜻하게 해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지혜와 총명함이 남달라서인지 정순왕후는 쉰살이 넘는 나이 차를 극복하고 영조의 계비가 될 수 있었다.
간택이 끝나고 영조는 6월13일 창경궁 명정전에 나아가 납채례(納采禮)를 거행했으며,
6월17일 원류관을 쓰고 명정전에 친히 납시어 납징례(納徵禮)를 행했다.
6월19일에는 면복(冕服)을 갖추고 고기례(告期禮)를 행했다.
이어서 6월22일 친영례(親迎禮)가 거행됐다.
친영례는 별궁으로 만든 어의궁에서 왕비 수업을 받고 있던 정순왕후를 궁궐로 모셔오는 의식으로, 오늘날 혼례식에 해당한다.
어린 계비의 내조 속에 영조는 혼례 후 17년을 더 살다가 1776년 83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영조의 뒤를 이어 정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는 31세의 나이로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됐다.
그러나 집안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관여한 데다,
정조 시대 개혁정치의 흐름 속에서 정순왕후는 별다른 정치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11세의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순왕후의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순조실록>의 즉위년 7월의 기사를 보면 정순왕후 스스로 ‘주상이 나이가 어리니 내가 여주(女主)로서 조정에 임한다’고
선언하면서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할 것임을 시사하는 기록이 나온다.
실제 정순왕후는 여군(女君) 또는 여주로 자처해 3년 반 동안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조가
구축해놓은 개혁정치의 기반을 해체해나갔다.
특히 천주교 탄압에 적극적으로 나서 1801년(순조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신유박해로 인해 정약종·정약전·정약용 3형제를 비롯해 이가환·권철신 등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됐다.
1804년 순조의 친정(親政) 체제가 이뤄지자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마치고 왕실의 최고 어른이라는 상징적 존재로 되돌아갔다.
권력을 잃은 허망함 때문일까?
정순왕후는 수렴을 거둔 지 1년 후인 1805년 창덕궁 경복전에서 승하했다.
그해 6월20일 정순왕후는 영조의 무덤인 원릉(元陵) 옆으로 모셔졌다.
정조는 영조 사후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원릉을 조성하고, 그 옆자리를 비워뒀다.
어린 계비가 쓸쓸히 홀로 묻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영조의 바람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 결과 1805년 정순왕후가 29년 만에 영조 곁으로 와 그 빈자리에 묻혔다.
현재 동구릉 내에 있는 원릉은 영조와 정순왕후의 쌍릉 형식으로 조성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