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척이라.... 1자.. 그정도 되지요. 덧붙이면 1자는 22Cm에서 33Cm정도이지요.. 가장 많이 쓰인 것은 27~30 정도 이고요.
애쓰시며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만.. 자료가 부족합니다. 근대나 서양의 경우는 별로 쓸 곳이 없어서요. ^^
참고로 1리는 200~560m 사이..
궁금한 것은 1步- 삼국사기의 성들의 길이 관계에 나와서 자료가 필요합니다.
이성산성 자료 좀더 부탁합니다.
참고로 현재의 하남시라면 처음에는 백제가, 광개토대왕 이후 고구려가,지증왕 이후 신라가 한반도 전체를 지배했으므로 3국의 유물이 섞여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 고고학계는 재야 사학자가 조금도 접근 할 수 없는 체제가 이루어져 있는 데, 발굴인들은 처음부터 백제면 백제, 신라면 신라라는 식으로 정한 상태에서 접근합니다. 그 결과 지금까지 발굴 현장에서 여기는 무슨 성이다 하는 유물이 한 번도 나온적이 없답니다.
어느 곳 어느 땅에서도 나올 수 있는 물건들을 가지고 여기는 어디다라고 하는 식이지요.
--------------------- [원본 메세지] ---------------------
제목읽고 여기저기서 자료를 찾았어요...그런데...머릿속에는 많은데 요약을 하자니 너무 괴롭네요...그래서 몇가지 자료를 퍼왔답니다.
덕분에 공부도 많이 했구요.
마구잡이로 올렸기때문에 두서도 없고....도움이 되어야 할텐데...오히려 혼란만 주지 않을지....
자료를 읽고 머릿속에 정리가 된건 우리생활의 거의 모든부분이 도량형으로 계산된거라는거...알게되었어요.
***옛날에는 나라마다 길이나 무게 등을 재는 측정 단위로 각기 다른 도량형을 사용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마, 평, 품, 리와 같은 독자적인 도량형이 있었습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 각국은 들쭉날쭉한 도량형 대신 미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와서도 영국과 미국은 여전히 미터법 대신 전통적인 야드법을 사용했습니다. 거리를 나타낼 때 meter 대신 yard와 mile을 쓰고, 휘발유의 양을 재는 단위도 liter대신 gallon을 사용했습니다. 키를 잴 때도 cm로 하지 않고 feet로, 무게를 달 때에도 kg으로 하지 않고 pound와 ounce를 썼습니다.
20세기 중반 들어 미터법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 영국과는 달리 미국은 아직도 미터법에 익숙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미국에서도 미터법을 사용하는 예가 점차 늘고 있습니다.***
......지금은 미터(m)법으로 도량형이 쓰이고 있는데...그 유래입니다.
우리는 길이나 부피, 무게 등을 측정할 때마다 알맞은 단위를 사용하고 있다. 가령 길이에는 ㎝, m, ㎞ 등으로 부피에는 ㎤, ㎥등, 무게에는 ㎎, g, ㎏등을 사용하고 있다. 이 미터법 도량형이 발명된 나라는 프랑스로서 약 24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미터법 도량형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를 살펴보자.
프랑스는 지금부터 약 200년 전까지 귀족과 평민의 차이가 심했다. 귀족은 왕으로부터 아주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왕은 일반 백성들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고 무거운 세금만 강요했다. 게다가 당시의 자, 되, 저울, 즉 도량형이란 것이 정확치 못하여 무엇하나 일정한 것이 없었다.
따라서 세금을 내거나 물건을 팔 때, 언제나 불편이 따랐다.
서로 이익을 보기 위해 저마다 자기의 잣대를 주장하며 남을 속였다.
혼란한 민심은 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왕의 정치에 반기를 들고 1789년 마침내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켰다. 혁명정부는 무엇보다도 우선 도량형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당시의 정치가 탈레랑의 제의로 "미래에도 영원히 바뀌지 않는 것을 기초로 해서 만들자"고 약속하였다.
영원히 변치 않는 도량형이란 무엇일까?
1791년 프랑스 전국의 대학자들이 모여 회의를 연 결과, "지구의 북극에서 남극까지의 거리, 즉 자오선의 2천만분의 1을 단위로 삼자"라고 정하였다.
그리하여 7년간에 걸친 노력으로 자오선의 길이를 측정하고, 이 길이의 2천만분의 1을 길이의 단위로 '1미터'라 명명하였다. 이 때, 1 미터에 상당하는 길이의 백금 막대를 두 개 만들었다.
그 중 정확한 쪽을 도(度)의 원기(原器)라고 하고, 후세의 미터 도량형의 시초가 되었다. 나아가 1m의 십분의 일의 증류수가 섭씨 4。 일 때의 눈금을 1킬로그램으로 하였다. 다음에 1000㎤ 의 부피를 단위로 하여 1리터라 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보통 1리터를 양의 기본단위로 생각하나 1㎥의 부피가 기본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피가 너무 크므로 리터가 보조단위인데 거의 기본인 것처럼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가지는 '도' 안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넓이의 기본단위는 1㎡이다. 넓이의 단위 중 '아르'는 양의 있어서의 리터와 마찬가지로 기본이 아니라 100평방미터(100㎡)를 말하는 것이다.
그 후 1872년 세계 각국의 위원들이 프랑스 파리에 모여 세계의 도량형을 비교해 보았더니 미터법 도량형이 실용적이고 학술적으로도 편리함이 인정되어 29개국 위원들이 미터법에 따를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 후 지구의 남극에서 북극까지의 자오선의 길이를 다시 정밀하게 잰 결과 2000만 미터보다 1700미터 가량 긴 것을 알았다. 따라서 1m의 길이는 실제 자오선의 2000만분의 1보다 약간 짧은 것이 되었다. 게다가 지구는 오랜 세월동안에 크기가 바뀐다는 사실을 알았다. 처음 프랑스인들이 생각한 것처럼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은 아닌 셈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원리가 길이의 기본이 되어 버렸다.
미터법이 이처럼 세계 각국에서 사용되는 이유로는 다음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1. 세계 각국이 공통으로 쓰고 있으므로 편리하다는 점
2. 정확한 원기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점
3. 10진법이라는 점
4. 명칭, 자릿수가 간단하다는 점 등이다.
*******아래글은 기사의 일부입니다***********
이성산성(二聖山城)에서 발굴한 신라 자(尺)
문헌기록으로만 전해져 오던 삼국시대 당시의 자가 발견됨으로써 도량형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발굴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이성산성은 백제왕성에서만 발견되는 다리 달린 벼루가 출토되기도 한 중요유적으로 고구려와 신라의 흔적도 갖고 있다고 한다.
[이성산성서 7세기 신라 자 발굴(종합)]/ (하남=연합뉴스) 김태식기자
지난 87년 이후 한양대박물관이 발굴하고 있는 경기 하남시 춘궁동 이성산성 안 저수지 터에서 7세기 신라인들이 길이 측량을 위해 사용하던 도량형의 하나인 당척(唐尺)이 발굴돼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는 고려시대 이전 자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실정에서 신라가 삼국통일을 즈음한 시기에 중국 자를 수용해 건축에 이용했음을 밝혀주는 명확한 증거라는 점에서 한국 고건축술 연구에 획기적인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발굴단(단장 김병모)은 19일 이성산성 현장에서 발굴조사 설명회를 갖고 지난달초 이후 계속되고 있는 제7차 발굴에서 토기와 목기를 비롯한 각종 유물과 함께 산성안 연못터에서 7세기쯤 신라인들이 사용하던 당척 1점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이 자는 전체길이가 29.8㎝이며 9개의 눈금을 같은 간격으로 측면에 새긴 것으로 중국 당나라가 사용하던 이른바 당척과 동일한 것으로 판명됐다.
당척은 현대의 미터단위로 환산하면 29.694㎝인 0.98곡척(曲尺)을 1자로 하는 도량형의 하나로 그 폭은 1치에 해당한다.
이런 당척이 사용돼 세워진 삼국시대 건축물로는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사천왕사 등이 보고돼 있으나 막상 한국 고대인들이 직접 사용했던 자는 지금까지 실물로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발굴단이 확인한 결과 이성산성안에서 확인된 건물터 2곳이 실제 이번에 발굴된 당척으로 축조됐음이 드러났다고 김병모 교수는 말했다.
현장설명회에 참가한 한국 고건축사 전공 장경호 경기문화재단 산하 기전매장문화재연구원장은 '이번에 발굴된 당척은 한국 고건축사 연구에 일대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같은 한국 고건축 전문가로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을 지낸 김동현 동국대 교수는 '고대의 자는 중국에서는 은나라때 사용되던 은척(殷尺)을 비롯해 많은 실물 자료가있지만 일본에서는 7세기 이전 실물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당척 외에도 이번 7차 발굴에서는 신라 목간 5점이 발굴됐다. 그러나 이들 목간에 묵 글씨가 남아있음만 확인했을 뿐 국립문화재연구소의 X-레이 촬영에도 불구하고 무슨 글자인지 판독되지 않았다.
지난 90년 진행된 제3차 발굴에서는 서기 663년이나 603년으로 추정되는 무진년(戊辰年)이라는 연대와 함께 신라 지방관직 이름인 도사(道使),촌주(村主)라는 명문이 적힌 목간이 발굴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목간을 출토한 제2의 저수지 터가 아직까지 전체의 5분의1 가량만 발굴됐기 때문에 발굴이 계속 진행될 경우 더 많은 목간을 비롯한 귀중 유물이 나올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한편 이성산성은 전체 성벽이 1.9㎞에 달하는 석축산성으로 지금까지의 발굴결과 대체로 신라가 진흥왕때 한강유역을 점령한 6세기 중반 이후 축조했다는데 대체로 학계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으나 백제나 고구려의 흔적도 남아있어 면밀한 검토가 요구되고 있다. taeshik@yonhapnews.co.kr(끝) 1999/12/19 15:58 송고
[신라자 발굴로 본 한국 도량형]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記) 문무왕 5년조 마지막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견포(絹布.비단 베)는 전에는 열 심(十尋)을 한 필(一匹)로 하였으나 (이때)이를 고쳐 길이 일곱 보(七步), 너비 두 척(二尺)을 한 필로 삼았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전 한국의 도량형이 어떠했는지 문헌기록이나 유물은 물론이 분야 전문가까지 없다시피 해 그 전모를 파악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때문에 경기 하남시 춘궁동 이성산성에서 최근 7세기쯤 신라 장인들이 중국 당나라에서 수입해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당척(唐尺)이 발굴된 것은 한국 도량형연구는 물론 고건축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자가 발굴됨으로써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킬 즈음에는 적어도 당척을 사용했으며 당시 1척이 29.5㎝ 가량임을 실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기록이나 이번에 나온 당척같은 유물이 없다시피 해도 삼국시대 이전 도량형의 현대적인 크기가 어떠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당시 유적 등을 실제로 재 보는 것이다.
실제로 원래 물리학자였던 고 박흥수 박사는 서울 강동구 방이동 백제 석실고분과 경주 석굴암,화엄사 신라 석등 등의 구조물을 측정해 신라,고구려,백제인들이 사용하던 1척이 몇 센티인지를 규명해 내기도 했다.
도량형(度量衡)이란 길이를 재는(度) 자와 부피나 넓이를 재는(量) 되, 무게를 다는(衡) 저울을 가르킨다.
자는 워낙 많이 알려졌거니와 지금도 농어촌에서는 미터법보다 널리 사용되는 홉(合)이나 되(升), 말(斗), 곡(斛) 및 마지기(斗落)가 부피나 넓이를 나타내는 도량형이고 쌀 같은 곡식을 다는 단위인 섬(石)은 무게를 표시하는 도량형이다.
그런데 이런 도량형은 시대에 따라, 심지어 같은 시대라 하더라도 지역에 따라 각양각색이었다. 때문에 비단 한국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도량형 통일에 골머리를 앓곤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시대 이전에는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이 1431년 도량형을 통일하고 이에 맞춘 새로운 기기들을 제작 배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중국이 도량형 통일이라는 위업을 이룩한 진시황 이후 그랬듯이 한국 또한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특히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 도랑형은 제작자에 따라, 지역에 따라 제각각으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1902년 서양식 도량형제가 도입됐으며 1964년 미터법 사용이 공식화되면서 비로소 도량형은 통일되었다.
미터법은 전 세계가 채택한 공식 도량형이지만 아직도 미국 같은 곳에서는 미터법보다는 피트(feet)나 마일(mile)을 선호하고 있음은 도량형 통일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taeshik@yonhapnews.co.kr(끝) 1999/12/20 16:05 송고
--------------------- [원본 메세지] ---------------------
1步의 각 시대별 길이를 알고 계신분... 정리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