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리아 왕조 인도를 통일하다
신비의 땅 인도, 그곳은 페르시아 제국이 인더스 강을 점령한 이래 점차 고대 통일 왕조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인도대륙 전체를 통일만한 힘을 갖춘 세력이 들어 선 것은 역설적이게도 알렉산더 대왕의 침공이 있은 기원전 4세기 이후였다.
기원전 327년 알렉산더 대왕은 동방원정을 단행하여, 인더스 강을 돌파하고 펀잡지방에까지 진출하면서 베일로 둘러쌓여 있던 인도대륙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포루스왕은 코끼리군대까지 동원하여 완강하게 저항하였고, 알렉산더 대왕은 포루스왕의 군대를 격파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자신의 군대역시 큰 타격을 입어 동방원정을 중단 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은 실패로 끝났지만, 결과적으로 인도 북부지방의 왕조들을 중무장시키게 하였고, 이렇게 내재된 힘은 곧 통일전쟁으로 이어졌다.
인도 북부에서는 난다왕조가 두각을 보였고, 동부 겐지즈강에선 마가다국이 두각을 보였다. 하지만 두 국가는 공통적으로 극심한 내부혼란에 시달리고 있어 인도의 통일은 아득히 멀기만 하였다. 그러나 혼돈의 시대는 영웅을 낳게 마련이다. 마가다왕국의 찬드라굽타는 마우리아를 姓(성)으로 썼는데 그것은 공작새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구려가 삼족에 대해 신앙이 있듯이, 마가다 왕국에는 공작새에 대한 신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찬드라 굽타는 반란을 도모하다가 실패하여, 인도 북부로 도망가게 되었는데 때마침 인도 북부를 점령하고 있었던 알렉산더 대왕과 만나, 그에게 대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포부와 지혜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하여 찬드라 굽타는 기원전 317년 거병하여 펀자브 지방을 점령, 이어서 히말라야 산맥에 흩어져 있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난다왕을 격파하여 왕위에 올랐다. 난다왕국의 막대한 영토와 인구를 갖게 된 찬드라 굽타는 기원전 312년 마우리와 왕조를 성립시키고 인더스 강변까지 진출, 인도 북부 전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우리아 왕조는 기원전 305년 시리아 왕국이 인도를 침입하였을 때 보병 60만명, 기병 3만 명, 象(상)병 9천명으로 격퇴시킬 만큼 강력해 졌다. 찬드라굽타를 이어 그의 아들 빈두라사는 더욱더 국가를 발전시켜 제국의 틀을 다졌다.
아소카왕은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왕(BC 268?∼BC 232?)이며 한역불전(漢譯佛典)에는 아육(阿育), 아유가로 기록되어 있다. 아소카왕은 찬드라굽타와 함께 전설적인 왕으로 평가되었지만 그의 즉위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불교 경전에 의하면 아소카왕은 왕위를 물려 받은 것이 아니라, 찬탈하여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인 빈두사라왕은 마우리아 왕조를 크게 발전시키긴 하였지만, 101명의 자녀를 둘 정도로 수많은 부인을 거느리고 있었다. 아소카는 그 101명중 한명이었지만 가장 용맹하고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었으며, 어느 누구보다 많은 공훈을 세웠다. 하지만 너무나 특출하였기 때문이어서 일까, 빈두사라왕은 아소카를 그리 아끼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빈두사라왕은 아소카가 자신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묘한 경쟁심까지 느꼈던 것 같다. 따라서 빈두사라왕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아소카라 하더라도 도저히 시행하기 불가능한 명령을 내렸다.
즉 먼 지방도시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란에 대한 진압명령을 내렸는데, 빈두사라왕은 아소카에게 무기와 차량사용을 금지해 버렸다. 그러나 아소카왕은 그 열악한 상황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 승리에 대한 기록에는 상당히 종교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정확하게 평가 내리기는 어렵다. 아무튼 이러한 전설은 부왕과의 관계가 좋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볼 때 아소카가 중앙권력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빈두사라왕이 급사하여 버렸다. 이제 왕의 자리는 공석이었다. 하지만 지방에서 충실하게 군사력을 키운 아소카를 대적할만한 인물은 없었다. 부왕의 사망소식을 듣자마자 수도 파탈리푸트를 점령한 아소카는 무려 99명의 형제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또 아소카왕에게 적대적이었던 신하들에게 왕을 가볍게 여겼다는 죄목을 적용하여 500여명을 참수시켰고, 궁녀 500명도 화형시켜 버렸다. 궁녀를 화형시킨 제목은 무우수가지를 꺽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아마도 부왕시절 타락했던 왕실의 질서를 잡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궁전내에서 끔찍한 살육행위가 자행되고 있을 무렵, 한 승려의 신비한 능력과 설법에 감동하여 불교에 귀의하였다고 한다. 이후 아소카왕은 불법을 수호하고 포교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수많은 불탑과 사원을 세워 불교 왕이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