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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꿈돌이 동산 원문보기 글쓴이: 하나목
창에 걸터앉은 유두고
본 문 : 사도행전20:7-12
설교자 : 조재진목사
오늘 본문 말씀은 유두고라는 청년이 예배 시간에 졸다가 창밖으로 떨어져 죽었다가 살아난 기록입니다. 사도 바울의 3차 전도여행 중에 일어난 한 에피소드로 드로아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조는 것은 위험합니다.
사실 졸음은 자연스러운 생리적인 현상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피곤하면 졸게 됩니다. 졸음이 몰려올 때면 졸음을 참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생명이 위험한줄 알면서도 좁니다. 졸음 운전하면 큰일 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좁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운전하면서 깜빡 졸았는데, 그 사이 꿈을 꾼 적이 있다고 합니다.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도 어쩔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졸지 않아야 될 자리에서 조는 것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잠을 잔다든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졸고만 있다면, 그것은 보통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짓궂은 카메라맨이 국회의원들의 조는 모습을 가끔 방송 매체를 통해 흘리는 모습을 볼 때면 공적인 자리에서 조는 것이 얼마나 흉한 것인 줄 새삼스레 알게 됩니다. 공부하는 학생이 학교에 가서 졸고만 있다면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직장생활 하는 사람이 직장에 가서 졸고만 있다면 그런 사람을 좋아할 직장 상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에 졸고만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은 제대로 예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예배 시간에 졸더라도 교회 나오는 것이 안 나온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127편에 보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준다고 하셨으니까 잠은 하나님의 축복의 일부분입니다. 졸더라도 교회에 나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 봉독하는 시간부터 조는 사람이 있고, 또 설교 시작한지 5분도 안되어서 꼭 졸기 시작해서 끝나기 5분 전에 깨어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이럴 경우는 피곤해서 조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닫거나 아니면 영적인 방해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도움 되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앞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 훨씬 나아질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졸다가 인생의 위기를 맞이한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베드로의 경우입니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나와 함께 기도하자’고 하셨지만 너무 피곤해서 그만 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세 번씩이나 와서 깨웠지만 도저히 졸음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그날 밤에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는 비참한 자리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 일은 일평생 그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습니다. 또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채 졸고 있다가 신랑이 온다는 말을 듣고 그제야 부랴부랴 기름을 준비하고 왔지만 문은 닫혔고,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유두고 라는 청년은 졸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겨 살려주셨지만 아마 이 경험은 이 청년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믿음의 교훈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사도 바울 역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롬13:11)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졸면서는, 영적인 잠을 자면서는, 믿음의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단순히 ‘졸다간 죽을 수 있다 졸지 마라’라는 졸음에 대한 경고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 본문을 어떤 학자는 졸음에 대한 경고라고 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이 사건을 기록한 누가는 말씀을 듣는 시간이 한밤중이었다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온종일 고된 일을 하다가 한 밤중까지 말씀을 듣다보면 졸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또 누가는 그 방에 많은 등을 켜놓았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등불들로 인해 방안이 더워졌을 것이고, 타오르는 기름에서 검은 연기가 나와 공기를 흐리게 하여 산소부족 현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이 유두고가 졸았다고 책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본문을 유두고 한 사람의 졸음과 죽음에만 초점을 맞출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신앙의 교훈이란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사실 바울의 3차 전도여행에 대한 기록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누가는 사도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3년 사역을 중점적으로 기록하고는 이후의 사역에 대해서는 그저 바울이 마게도냐와 헬라지역을 다녀왔다고만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굳이 오늘 본문, 유두고가 창에 걸터앉아서 졸다가 죽었던 사건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누가는 이 본문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을까요?
밤중까지 강론한 바울
우선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유두고라는 청년이 졸게 된 원인이 사도 바울의 강론이 너무 길어졌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 본문 7절의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여기에 보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몇 가지 단어들이 나옵니다. 우선 ‘그 주간의 첫날’(개역성경에서는 ‘안식후 첫날’로 번역함)이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아마 이때 즈음 초대교회 성도들은 안식일이 아니라, 안식일 다음날에 독립적으로 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주간의 첫날은 안식일 다음날, 오늘 날의 주일을 가리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해 그 주간의 첫날에 모였고, 바로 이 날을 교회 예배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렇게 함으로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속한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소속감을 분명히 한 것 같습니다.
또 우리가 주목할 단어가 ‘떡을 떼려하여 모였더니’ 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이 단어에서 당시 초대교회의 예배가 ‘떡을 떼는 것’과 ‘말씀을 강론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강론하는 것’이 지금의 설교라고 한다면, ‘떡을 떼는 것’은 지금의 ‘성찬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마 당시 초대 교회의 예배에는 항상 ‘성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에 보면, 바울은 말씀을 강론하고 난 이후 떡을 떼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의 강론이 아주 길어졌던 것 같습니다. 어떤 학자는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강론이야말로 성경에 기록된 설교 중에서 가장 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언제부터 강론을 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본문 7절에 보면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라고 말합니다. 9절에서는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하매’, 또 11절에 보면, ‘떡을 떼어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아마 이것을 미루어본다면 최소한 10시간 이상은 강론한 것 같습니다. 무척 길게 설교한 것입니다.
여러분, 학생들이 제일 싫어하는 교장 선생님이 누군지 아십니까? ‘마지막으로 한마디 한다’고 하면서 30분 이상 하는 사람이고, 교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목사는 축도하러 나와서 설교 한번 더하는 목사입니다. 저도 벌써 30년째 목회를 하고 있지만 분위기에 맞게 시간 조절을 하면서 설교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함석헌 선생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 분은 사상가이시기 때문에 비판력이 아주 뛰어나신 분이셨습니다. 이분에게 걸렸다 하면 대통령에서 목사까지 신랄하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한번은 강의하면서 “나는 몰랐을 때 장로교회에 나갔었는데 지금은 장로교회 안 나가”라고 말했답니다. 학생들이 “그러면 예배를 어떻게 드리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자신은 퀘이커 교도 예배 나간다고 하시면서 “퀘이커 교도들은 특정한 설교자가 없이 그 시간에 모여 앉아서 찬송 부르다가 성령의 지시가 있는 사람이 5분 동안 말해. 내가 장로교회에 안 나가는 이유는 장로교 목사들이 설교를 너무 길기 때문이야. 몇 마디로 할 수 있는 설교를 그렇게 길게 하니, 나는 그런 교회 안 나간다.”라고 했답니다.
그러다가 신학교 채플(chapel) 시간에 함석헌 선생님이 설교할 차례가 되었는데, 예배 순서지를 본 학생들이 설교자가 함석헌 선생님으로 기록된 것을 보고는 ‘와’하고 함성을 지르면서 ‘오늘은 5분 안에 설교가 끝나겠구나’라고 좋아했답니다. 그런데 막상 설교를 시작하고 나니까, 5분 안에 끝난 것이 아니라 자그마치 2시간 5분 동안을 함석헌 선생님이 설교를 했답니다. 예배가 끝나고 학생들이 항의하자 시계를 보시면서 ‘어? 시간이 그렇게 됐어?’라고 놀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목사가 설교 오래한다고 비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판하기는 쉬워도 실제 해보면 어렵습니다.
여러분들은 설교가 긴 것이 좋습니까? 짧은 것이 좋습니까? 설교도 설교 나름이긴 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짧은 설교를 좋아합니다. 설교시간 30분만 넘으면 시계보기 시작하고 몸을 좌우로 비틉니다. 빨리 끝내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당시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이튿날 드로아를 떠나야 했기 때문에 한마디 말씀이라도 더 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강론했고, 이 강론은 밤중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아마 시간가는 줄도 몰랐던 것 같습니다. 11절에 보면, 1부 강론을 마치고, 2부 성찬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끝나야 하는데,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집으로 흩어지지 않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잘 믿어지지 않겠지만, 역사상 교회가 부흥할 때 대체로 목회자들의 설교가 길었습니다. 또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부흥하는 교회는 목사님들의 설교가 대체로 좀 긴 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흥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힘이 있고 흥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모여들고, 말씀을 그냥 듣는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개인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기 시작하는 것, 여기에서 하나님의 부흥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에 걸터앉아 있다가
아마 유두고가 졸았던 이유는 바울의 설교가 이렇게 긴 탓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유두고가 앉아 있었던 자리가 더 큰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유두고가 앉아있었던 자리가 어디였습니까? 자 본문 9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여기에 보면, 당시 바울이 강론했던 예배의 장소는 3층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두고가 어디에 있었다고요? 그는 그 삼층 다락방 창문에 걸터앉아 있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3층 창문에 걸터앉은 자세는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3층 창문은 상당히 위험한 자리입니다. 성경은 그가 졸다가 떨어져 죽게 된 것은 그가 창에 걸터앉아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우리가 앉은 자리는 참 중요합니다. 영적인 타락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있어야 할 자리를 이탈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맨 처음 사람 아담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아담을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찾았습니다. 시편1:1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복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에겐 앉아야 할 자리가 있고, 앉지 말아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란 그가 앉아야 할 자리에 앉은 사람입니다. 반면 앉지 말아야 할 자리에 앉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유두고가 앉아 있었던 3층 창은 위험한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그 창에 걸터앉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창에 걸터앉아있는 것은 방 안에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방 바깥으로 나온 것도 아닌 아주 어중간한 모습니다. 어쩌면 그는 창문에 걸터앉아서 방 안도 보고, 바깥도 보았을 것입니다. 아주 자유로운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말씀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런 자세를 경계합니다. 소속이 불분명한 것은 언제나 위험한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중에 어떤 분들은 창에 걸터앉은 것처럼 신앙적으로 어중간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 다리는 교회에, 다른 다리는 세상에 두고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에 마음이 나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마치 창에 걸터앉은 유두고와 비슷합니다. 그 자리는 결코 안전한 자리가 아니라 위험한 자리입니다. 빨리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할 것입니다.
오래 전에 저는 마크 뷰케년이 쓴 “열렬함”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영어 제목은 “your God is too safe"입니다. 이 책의 첫머리에서 뷰케년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프리카 케냐와 우간다 국경에 부시아 라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은 두 나라의 국경의 경계지역입니다. 흥미 있는 것은 마을의 한쪽 끝은 케냐고 다른 쪽 끝은 우간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마을은 케냐도 아니고 우간다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한 사람이 케냐에서 우간다로 들어가려면 일단 케냐 국경을 넘습니다. 그렇다고 바로 우간다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시아’라는 작은 마을을 통과해서 다시 우간다의 국경을 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마을의 모습이 우리 믿음의 삶에 아주 의미심장한 은유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깁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세상이라는 나라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죄와 죽음이 지배하던, 허무한 인생을 살던 그 나라에서 나온 것이지요. 이제 구원받았고, 예수 안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우리는 곧 바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경계지역이 있습니다. ‘부시아’라는 마을에 그냥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도 아니고 하나님 나라도 아닌, 우리들이 만들어 놓은 자신만의 나라, 그 경계지역에 그냥 머물러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로 속하려면 하나님 나라의 언어를 배워야 하고, 그 나라의 가치관, 그 나라의 문화를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라는 나라에서 빠져 나왔지만 여전히 세상의 언어, 세상의 습관, 세상의 문화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님 나라의 것을 금방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냥 그 경계지역에서 적당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라고 손짓해도 아직은 아닙니다. 그 경계지역, 부시아에서 그냥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30년을 살고, 50년을 살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세상에서 구원을 받지 못했나요?’ ‘아니요 구원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기적과 능력을 체험하고 있나요?’ ‘아닙니다. 그런 것은 잘 모릅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아, 나는 경계지역, 부시아에 그냥 살고 있지요.’ ‘언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겠습니까? 좀 더 즐기다가요!’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그 경계지역이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구원은 받았고, 아직 하나님은 별로 많이 간섭하지 않고, 적당하게, 눈치 보면서 과거 세상에 속해서 했던 것들도, 술 담배도 슬쩍 슬쩍하고, 또 적당하게 주일 예배도 빠지고... 좋지요? 일단 세상에서 구원은 받았으니까. 천천히 천천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 경계지역은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경계지역인 부시아라는 마을에서 범죄가 일어나거나, 살인이 일어나면, 케냐도 우간다도 어느 나라의 군대도 그들을 지켜주지 않습니다. 경계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곳을 지나가다가 강도를 당합니다. 그래도 도와줄 사람 없습니다. 아무도 보호자가 없습니다. 사실 그 경계지역은 빨리 통과해야 할 지역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느릿느릿하기만 합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그 경계지역을 지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경계지역에 머물러 있듯이, 창에 걸터앉은 자세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어중간하게 걸터앉은 자세로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고 하십니다. 온 맘을 다하는 것, 뜻을 다하고, 심지어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의 자세요, 하나님 섬기는 자세입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창에 걸터앉아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교훈하셨습니다.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배와 같다. 바람이 이쪽으로 불면 이쪽으로 갔다가 저쪽으로 불면 저쪽으로 밀려가는 이런 사람은 주께 얻기를 희망하지 말라.”(약1:6-8)
창에 걸터앉는 것은 자유로운 자리이기는 하지만 언제나 추락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중간한 자리, 경계지역에 머물러 있다간 영적 위험에 노출되고 말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유두고
결국 유두고는 3층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기절한 것이 아니라 죽었습니다. 혹 어떤 사람은 ‘3층 정도의 높이에서 떨어졌는데 죽었겠느냐?’ 라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의사인 누가가 전문적인 관찰을 통하여 진단을 내리기를 ‘죽은 것 같다’라고 하지 않고 아예 희랍어로 ‘네크로스’, 실제로 죽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어떻게 했습니까? 자 10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여기에 보면 바울은 내려가서 죽은 유두고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가 죽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사건과 비슷합니다. 거기에 보면, 엘리야가 죽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릴 때에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바울의 연민, 사랑의 마음입니다. 바울은 내려가서 죽은 청년을 끌어안았습니다. 시체를 부둥켜안은 것입니다. 특히 여기에 나오는 ‘안고’라는 희랍어 단어는 ‘쉼페릴라본’입니다. 이 말은 ‘완전히 껴안다’ ‘함께 둥그렇게 붙잡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연민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 청년의 몸을 끌어안았습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이 부분을 주석하기를 ‘사도 바울은 깊은 연민과 긍휼의 마음으로 사고를 당한 청년을 끌어안고 어떻게 해서라도 이 청년을 소생시키기 위해, 모든 심정을 다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바울의 모습에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을 떠나 죄를 범하고 저 영원한 심판으로 향하여 가는 인간들을 외면하거나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이 죽은 청년을 안았듯이, 우리 인간들의 고통과 질병과 약함과 모든 죄를 다 끌어안았습니다. 연민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인간들의 모든 문제를 ‘쉼페릴라본’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담당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두 번째는 바울의 믿음입니다. 바울은 유두고의 몸을 안고는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걱정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고 소란을 피우지 말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떠들지 말라’는 말은 예수님이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 사용한 단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에 들어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울고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티 도뤼베이스데’, 어찌하여 환화하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동일하게 ‘메 도뤼베이스데’, 걱정하지 말라. 슬퍼하지 말라 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죽은 이 청년을 하나님이 살려주실 것을 믿은 것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이 일이 얼마나 당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던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2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바울 일행이 떠난 후에, 아마 드로아의 성도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유두고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보여 주신 놀라운 사랑의 증표를 보았을 것입니다.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대로 성령으로 자기들과 함께 하신 생생한 증거를 붙잡은 셈입니다. 그래서 이 청년 때문에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마 그 이후 유두고는 걸어 다니는 간증문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3차 전도여행 중에 드로아에서 일어났던 이 한 사건은 무엇보다 그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명확한 증거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어도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가는 바로 본문을 통해 이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주님이 함께 하자 죽은 유두고가 살아났다. 우리 역시 죽어도 살 것이다’ 그러니 ‘떠들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메 도뤼베이스데!’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실수해서 떨어질 수 있고, 때로는 죽음이 우리를 엄습할 수 있지만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한 우리는 죽어도 살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이것보다 더 큰 성도의 위로가 무엇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