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 - 에곤 실레.1912년. 패널에 유화 물감과 불투명한 물감. 레오폴트미술관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의 불안한 정치 상황과 급변하는 사회 분위기는 예술가들에게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안겨 주었다.
실레는 ' 자아 정체성의 위기'라는 주제를 시각적 으로 강렬하게 표현한 예술가였다.
깔끔한 흰색을 배경으로 어두운 옷을 입은 인물과 강렬한 붉은색의 꽈리 열매가 작품 좌우에서 균형을 이룬다.
어깨를 살짝 돌리고 관람자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자신감과 연약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얇고 세밀하게 그려진 선에서는 실레의 예민한 성격과 내면의 불안한 감정이 전해진다.
그옆에 이 작품을 소개하는 영상이 있습니다.
에곤 실레는 100여 점이 넘는 자화상을 그렸지만 구스타프 클림트는 단 한 장의 자화상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발리 노이칠의 초상" 과 짝을 이루는 작품으로
여겨 집니다.
이 작품 입니다.
발리 노이칠의 초상 - 에곤 실레. 1912년.
목판에 유채.레오폴트미술관
초상화에서는 보기 드문 가로로 긴 구도를 사용했다.
* 에곤 실레 (Egon Schiele, 1890 ~ 1918)
철도회사 역장이었던 에곤 실레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잇기를 바랐지만, 실레는
두 살 때부터 색연필과 종이를 잡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실레는 삼촌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삼촌의 도움으로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교육 방식에 실망했고, 평생 스승으로 믿고 따랐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후원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합니다.
실레는 클림트의 초청으로 참여한 전시회에서 유럽 거장들의 작품 세계를 접했습니다.
초기에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선보였지만 곧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인물을 표현하는 실레의 독특한 선과 뒤틀린 몸은 곧 그의 화풍으로 자리 잡았고 비엔나 예술계에 강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인간의 감정과 존재에 대한 고민을 자신만의 선과 색채로 풀어낸 방식은 에곤 실레를 세기 전환기의 가장 독창적인 예술가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
소녀의 초상 - 에곤 실레.1906년. 종이에 검은 분필과 목탄. 레오폴트미술관
1906년, 열여섯 살의 에곤 실레는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 최고의 미술 학교인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러나 엄격하고 보수적인 체제와 교수법에 반발해 1909년 아카데미를 그만둔다.
아카데미에 입학하던 해에 그린 이 작품은 그가 드로잉에 얼마나 뛰어난 재능이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긴 머리를 한 자화상 - 에곤 실레.1907년 캔버스에 유화. E. 와 H. H. 컬렉션
똑바로 정면을 바라보는 에곤 실레의 자화상이다.
강한 빛을 받아 밝게 표현된 왼쪽 얼굴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빛은 실레의 이마, 뺨, 턱으로 쏟아지며 얼굴의 특징을 매우 섬세하고 정확하게 드러낸다.
다양한 채도의 갈색과 보라색으로 칠해진 머리카락은 개성 있고 생동감이 넘친다.
이 자화상은 실레 자신을 깊이 있게 표현하면서도 내면의 강렬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 에곤 실레의 개성을 담은 사진
안톤 요제프 트르치카 ( 1893-1940 ).1914년경. 사진. 레오폴트미술관
포즈를 취한 에곤 실레
에곤 실레는 개성 있는 표정과 자세로 자신을 탐구했다.
마치 배우처럼 표정을 연출하는 등 실레의 과장된 자기표현은 그의 작품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특징이다.
안톤 요제프 트르치카는 여러 점의 연출 사진으로 실레의 개성을 담아냈고, '안티오스'라는 가명을 사진에 적었다.
주인공인 실레 역시 직접 사진에 이름을 남겼다.
그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사진에서도 손은 두드러지게 강조되었다.
손이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중요한 요소였음을 알 수 있다.
깍지를 낀 에곤 실레
에곤 실레
.
손 - 이반 메슈트로비치 ( 1883-1962 ).
연대 모름. 청동.대리석. 레오폴트미술관
예술가에게 ' 손'은 창작 활동에 꼭 필요한 요소다.
따라서 작품에 그려진 ' 손'은 예술가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화가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중요한 소재다.
크로아티아의 조각가 이반 메슈트로비치는 받침대 아래에서 손이 위로 튀어나오도록 표현했다.
그는 구부림과 각도가 다른 긴 손가락들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도록 하나하나 세심하게 묘사해 손에 강력한 생명력을 부여했다.
.
스스로를 보는 이 II ( 죽음과 인간 ) - 에곤 실레.
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실레는 이 작품에 '스스로를 보는 이' 또는 '죽음과 인간' 이라는 두 개의 제목을 붙였다.
그림 속 인물은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 있고, 그 뒤로 두 번째 자아가 유령같이 그려져 있다.
죽음을 상징하는 유령이 인물의 어깨를 감싼다.
주인공은 본래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자아에서 분리되어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
이 작품에서 시선이 집중되는 곳은 아래에서 뻗어 올라온 ' 손'이다.
실레는 자신의 작품에서 손을 내면 심리를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또한 어두운 색조와 날카로운 선으로 주인공의 고통과 불안함을 표현했다.
이 작품을 에곤 실레가 21세 때 그린 이중 자화상
이다.
이 그림은 정면을 바라보는 형태로 거울에 비친 자기자신을 바라보는 형식으로 화가 자신의 자아에 대한 성찰이라는 쉴레의 주제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중 자화상은 당시 유행하던 ' 도플갱어'와 관련이 있으며, 특히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홀연히 나타나는 죽음의 사자 같은 창백하고 위협적인 그림자 같은 또 다른 나의 분신과의 만남을 표현 하고 있습니다.
시인 - 에곤 실레.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밑그림 없이 빠른 붓질로 그린 이 작품에서 에곤 실레는 자신을 뒤틀린 자세를 한 시인으로 표현 했다.
어색할 정도로 심하게 왼쪽으로 꺾여 있는 실레의 머리는 뒤쪽 흰색 공간에 둘러싸여 있다.
눈썹을 치켜뜬 의심에 찬 눈초리는 옆을 향하고 있다.
창백해 보이는 몸에 검은색 윗옷만을 걸친 실레는 어두운 배경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오른쪽 손목을 살짝 잡고 있는 왼손 아래로, 배꼽과 성기를 붉은색으로 그렸다.
계시 - 에곤 실레.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 슬하에 서 자란 에곤실레는 어머니의 따뜻한 보살 핌을 받지 못해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인간의 불안과 고독, 그리고 죽음에 관한 관찰이 매우 세심하고 정교하여 자신의 작품에 아주 선명하게 잘 녹아 있다.
30년도 안되는 짧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그림에 쏟아 붓고 유명을 달리한 에곤실레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는데 ' 계시'라는 작품에서는 편지 속에서 작품의 숨은 의도를 밝혔다.
"< 계시 > ! 당신은 위대한 인물이 주변에 미치는 영향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모든 사람은 자신의 빛을 일평생 소비하며 살아갈 뿐이다.
빛이 모두 소진되면 더 이상 빛나지 못한다.
뒤돌아선 사람은 위대한 인물에 매혹됐다.
그는 무릎을 꿇고, 눈을 뜨지 않고도 세상을 보는 존재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들이 발하는 넘치도록 충분한 빛은 무릎 꿇은 작은 인물과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상징한다."
상처 입은 사람 - 얀 슈투르사 ( 1880-1925 ). 1920년경. 청동. 녹청. 석재. 레오폴트미술관
이 조각은 중심을 잃고 곧 앞으로 넘어질 것 같은 순간을 묘사했다.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양팔을 들어 올린 자세로 다리를 꼬고 발끝으로 서 있는 긴장된 순간이다.
매끄럽게 다듬어진 몸이 빛을 섬세하게 반사해 상처 입은 인물의 연약함과 불안함을 드러낸다.
인물이 느끼는 극한의 감정을 몸으로 표현한 방식은 에곤 실레가 수많은 드로잉에서 보여 준 화풍과 비슷하다.
당시 친한 예술가들끼리 각자의 작품을 주고받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슈투르사와 실레 역시 서로 교류하며 작품을 교환했다.
첫댓글 자신(自身)의 마음 그릇이 제대로 놓여 있는지
‘확인(確認)’해 볼 일입니다.
사람이 쓰는 말 중에서 ‘감사(感謝)’라는 말처럼
아름답고 귀한 말은 없습니다.
감사가 있는 곳에는 늘 ‘인정(認定)’이 있고,
늘 ‘웃음’이 있고, 늘 ‘기쁨’이 있고,
늘 ‘넉넉함’이 있습니다.
감사(感謝)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