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51219. 묵상글 ( 12월 19일. - 늙은이의 특권.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4:25 추가
----------------------------------------------------
251219. 12월 19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2.19 04:21
- 늙은이의 특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얼마 전에 저와 저의 형제를 같이 아는 어린 자매가 말하기를
저의 형제가 저를 노인네 취급하며 자기에게 말해서
그 자매가 낯설게 느꼈다고 하는 거였습니다.
제가 젊다고 생각했거나 젊기를 바랐기에 그리 느꼈을 것 같은데
덕분에 그때 저는 어떤 존재인가? 정말 노인네인가? 아닌가 생각해봤습니다.
저도 제가 노인네 또는 늙은이는 아직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젊은이도 아니니 굳이 늙은이라고 해야 한다면 중늙은이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신기한 것은 제가 설사 중늙은이일지라도
그것이 저에게 그리 슬픈 일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자기 위안인지 모르지만 저는 정말 지금 이 나이가 딱 좋습니다.
웬만한 슬픔이나 고통은 다 받아들여지고,
웬만해서는 미움이나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일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제는 잔가지를 가지치기한 나무처럼
거의 모든 잔가지가 치어져 아주 단순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제 사랑만 할 수 있는 제가 너무 행복하다고 얘기했는데
이제 사랑만 할 수 있게 되어 지금이 제게는 황금기입니다.
그런데 지금이 제게 참으로 좋은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나 지금보다 젊었을 때는 제힘으로 하려다가 실패하고 넘어졌는데
이제는 저의 힘이 없다고 생각하니 하느님의 힘으로 하려 하고 그래서 좋습니다.
제힘으로 하려고 하지 않으니 그렇게 편하고 좋을 수가 없고,
하느님의 힘으로 하니 잘될 뿐만 아니라 안 돼도 괜찮습니다.
이런 묵상을 오늘 길게 한 것은 하느님께서 늙은 부부들을 통해
당신의 구원사업을 하시는 얘기를 독서와 복음에서 읽었기 때문입니다.
제힘으로 할 수 없기에 하느님께 내어드릴 수 있는 것은
젊은이보다는 늙은이들이 할 수 있는 특권임을 묵상하는 오늘 저입니다.
----------------------------------------------------
251219. 12월 19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선물
“삼손과 세례자 요한 탄생 예고”
“오 옛세의 뿌리여, 만민의 표징이 되셨나이다.
주 앞에 임금들이 잠잠하고 백성들은 간구하오리니,
더디 마옵시고 어서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대림 제2부 셋째 날, 12월10일 <O후렴>은 오늘 복음 환호송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입니다. 복음중의 복음이 하느님이 우리를 찾아 오시는 일입니다. 대림시기에 딱 맞는, 늘 인용해도 늘 새로운 아주 예전 28년전 <하늘>이란 자작 애송시를 나눕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1997.2.>
오시는 하늘인 주님을 고요한 마음의 호수에 모셔들이는 대림시기입니다. 모든 시간이, 모든 것이 하느님 손안에 있습니다. 결코 우연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찾아 오심은, 하느님의 개입은 언제나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앞서 오늘은 삼손과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주님의 천사에 의해 예고 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천사는 바로 하느님의 개입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흡사 두 인물에 관한 주님의 천사의 탄생 예고에 관한 장면이 태몽처럼 생각됩니다.
예전에는 태몽도 꽤 많이 회자되었는데 요즘은 태몽에 관한 이야기도 거의 사라진 듯 합니다. 주님의 천사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어서 자식을 낳지 못하는 마노아의 아내를 찾아 아이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보라, 너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어서 자식을 낳지 못하였지만,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그 아이는 모태에서부터 이미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 될 것이다. 그가 이스라엘을 필리스티인들의 손에서 구원해 내기 시작할 것이다.”
마노아의 아내는 즉시 남편와 놀라운 기쁜 소식을 공유했고, 이어 아들을 낳고 이름을 삼손이라 했습니다. 삼손이란 이름은 “태양” 혹은 “밝음”을 뜻하니, 하느님의 태양, 이스라엘의 태양인 판관 삼손을 연상케 합니다. 때가 되자 주님의 영이 삼손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삼손의 탄생 예화를 통해 모든 이의 탄생은 우연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각별한 사명이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같은 존재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결코 우연한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사명을 받고 파견된 <하느님의 선물>같은 우리 존재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관상하는 대림시기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삼손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도 하느님의 귀한 선물이요 바로 이것이 우리의 성소요 존재이유입니다. 제가 38년째 여기 요셉 수도원에 살면서 요즘 절실히 깨닫는 진리는 우리 수도형제들,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신의 한 수”같은 하느님의 선물같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삼손의 탄생에 이어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의 전조와도 같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앞에서 의롭고 흠없이 살아가는 즈카르야-엘리사벳 부부를 택하였고, 마침내 즈카르야에게 요한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이어 주님의 천사는 세례자 요한이 얼마나 거룩한 사명을 수행할 축복된 존재인지 자상하게 설명합니다만, 즈카르야의 반응이 회의적입니다. ‘자기는 물론 아내인 엘리사벳도 나이가 많은 늙은이 인데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이요, 이런 불신에 대한 주님의 천사의 가차없는 선언입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불신 덕분에 침묵의 벙어리가 되어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앞서 이 모든 일들을 깊이 묵상하고 관상할 시간을 갖게 되었으니 전화위복입니다.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은 다섯 달 동안 숨어 피정기간을 보내며 하느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리니 그 믿음이 남편 즈카르야보다 낫습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주셨구나.”
오늘 말씀은 모두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은총의 대림시기 삼손의 탄생예고 와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를 묵상하면서 우리의 성소를 묵상하고 관상하게 됩니다. 과연 하느님께 주어진 선물 인생을 사명을 다하며 살고 있는지 말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각자의 성소에 충실하도록 좋은 도움을 주십니다.
“주 하느님, 당신은 저의 희망,
어릴 적부터 당신을 믿었나이다.”(시편71,5). 아멘.
----------------------------------------------------
251219. 12월 19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어제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 대한 말씀을 들었고,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에 대한 말씀을 듣습니다. 곧 어제는 “의로운 사람”(마태 1,19) 요셉의 이야기였고, 오늘도 역시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루카 1,6)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이야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예고는 구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고 너무 늙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서 거룩한 인물이 태어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사실, 성경에는 여러 거룩한 여인들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창세 11,30), 이사악의 아내 레베카(창세 25,21), 야곱의 아내 라헬(창세 29,31),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1사무 1,2), 그리고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삼손의 어머니인 마노아의 아내(판관 13,2), 그리고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루카 1,7)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거룩한 인물들을 낳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간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장소와 시간은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곧 세례자 요한의 잉태 예고 장소인 성전의 ‘성소’와 예수님 잉태 예고 장소인 ‘나자렛’은 두 제단 곧 두 계약을, 그리고 옛 계약에 따라 ‘제사를 드리는 시간’에 벌어진 이 일은 구약 시대와 신약을 연결해줍니다. 따라서 요한의 출현은 옛 계약의 율법과 사제직이 끝났음을 알려줍니다. 이는 경계가 무너지는 일입니다. 벽이 무너지고 막힌 것이 사라집니다. 이는 우리를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사실, 요한은 불임인 늙은 여인에게서 태어나고, 그리스도는 동정인 젊은 여인에게서 태어납니다. 여기에는 어떤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막시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구약의 인물인 요한은 늙은 여인의 식어버린 피에서 태어나야 했고, 장차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주님은 꽃처럼 피어나는 처녀의 몸에서 피어나셔야 했던 것입니다.~그리고 즈카르야는 의심했기 때문에 목소리를 잃었고, 마리아는 곧바로 믿었기에 세상을 구하는 ‘말씀’을 잉태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아기의 잉태를 알려주면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줍니다. ‘요한’이란 이름은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다’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명이 주어집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6-17)
이처럼, ‘요한의 사명’은 그리스도와의 관련성을 드러냅니다. 곧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일’(루카 1,16)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의 사명을 되새겨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안에 혹은 우리가 만나는 이 안에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탄생하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 1,25)
주님!
당신께서는 저의 무능과 허약 안에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피하고 도망쳐도 보물을 찾듯 찾아오시고,
거부하고 배신해도 목숨처럼 아끼시며 끝까지 버리지 않으십니다.
주님, 지금 지체치 마시고, 당신의 일을 완수하소서.
제가 응답하게 하시고, 당신의 자비를 이루소서. 아멘.
----------------------------------------------------
251219. 12월 19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Fort Boggy State Park’로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지난 10월 11일 그곳에서 중남부 꾸르실료 야외 미사가 있었습니다. 공원에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었고, 주변에는 산행 코스가 있었습니다. 시간 나면 한번 가고 싶었고, 몇몇 분들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달라스에서는 2시간 거리여서 그리 멀지도 않았습니다. 호수에는 아이들이 부모님과 함께 물놀이하고 있었고, 어른들은 투망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소풍은 ‘쉬엄쉬엄 거닐며 바람을 쏘인다.’라는 의미입니다. 적당한 구름이 햇빛을 가려주었고,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게 하였습니다. 거닐면서 묵주기도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도 생각났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노라고 전하리라.’ 그렇습니다. 이 세상을 소풍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소풍 와서 다툴 일도 없고, 소풍 와서 그리 걱정할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지친 이들은 모두 나에게 와서 쉬어라.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
묵주기도 환희의 신비 2단은 ‘아름다운 소풍’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막 임신한 마리아는 임신한 지 6개월 된 친척 엘리사벳을 찾았습니다. 나자렛에서 아인카렘까지 길을 떠났습니다. 달라스에서 포트 부기 공원까지 가는 거리와 비슷합니다. 마리아는 늙은 나이에 아이를 가진 친척 엘리사벳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이제 막 임신한 마리아에게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은총에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나이다. 태중의 아들 또한 복되시나이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축복을 받고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기뻐 뛰노나이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권세 있는 자는 자리에서 내치시고 비천한 이를 끌어 올리시나이다. 부유한 자를 내 치시고 가난한 이를 축복하시나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소풍은 없습니다.
세종대왕은 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다른데 글은 중국 글자를 사용하니 백성들의 고충이 많다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말을 우리의 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글’을 창제하였습니다. 그것을 ‘여민락(與民樂)’이라고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 또한 ‘여민락’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던 마노와의 아내가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삼손’이며 태양의 힘을 가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이는 그 힘으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절망과 좌절 중인 여인에게 희망을 주었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즈카리야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가질 수 없던 아내 엘리사벳이 아이를 가질 거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요한’이며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많은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새로운 길을 준비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자라서 회개의 세례를 주었고, 주님보다 앞서서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성탄 무렵에 많이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천사라는 뜻입니다. 저는 저의 세례명을 참 좋아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왕이면 좋은 뜻을 전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때로 날개 잃은 천사가 되어서 방황하기도 하지만 저의 세례명처럼 주님의 뜻을 전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자신이 이룬 일로 정해지는 이름도 있습니다. ‘독재자’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과 욕망에 따라서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독재자의 폭력에 의해서 희생되기도 했습니다. ‘선구자’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이름입니다. 밤을 새워 새로운 길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류는 그런 사람들이 밝힌 길을 따라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며 살았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목적은 세상의 명예와 세상의 성공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길은 바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초는 자신을 태울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듯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를 태워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 이 또한 ‘여민락’의 삶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
251219. 12월 19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실재(Reality)에 대한 경외심!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2월 18일 목요일- 쉰한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은총의 은밀한 업적
경외(敬畏)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더 크신 분 앞에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서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는 우리를 둘러싼 세상 안에서 ‘경외’를 체험하기 위해 필요한 ‘겸손’(Humilitas)에 대해 기록합니다:
고전 철학자 폴 우드러프(Paul Woodfruff)에 따르면, ‘경외’는 인간이 하느님처럼 행동하려는 유혹으로부터 지켜주는 덕목입니다. 그는 말한다. ‘네가 단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하느님처럼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것이 바로 경외의 반대입니다.’ [1] 오늘날 우리는 돈, 권력, 학문, 종교를 숭배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지만, 우드러프는 참된 경외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거나 다룰 수 있는 어떤 것에도 향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경외'란 자기 자신보다 더 크신 무엇을 인식하는 것입니다—곧 인간의 창조나 통제를 넘어서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실재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는 물론 그 기준에 합당하시지만, 탄생, 죽음, 성(性), 자연, 진리, 정의, 그리고 지혜 또한 그러합니다….
경외는 우리 자신을 압도하는 어떤 실재 앞에서 놀라움 속에 서게 합니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한계를 온전히 깨닫게 하며, 그로 인해 서로를 더욱 경외하는 눈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반대로, 자신보다 더 높은 것 앞에서 경탄할 줄 모르는 불경한 영혼은 자신보다 낮다고 여기는 것 앞에서도 존중을 느낄 수 없습니다. [2]
저술가 빅토리아 루르즈(Victoria Loorz)는 더 느린 걸음이 우리로 하여금 자연 세계와 타인 안에서 ‘경외’를 체험하도록 이끈다고 설명합니다:
경외는 느리고 의도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놀라움이 우리의 폐를 가득 채우고 눈에 눈물을 맺게 하며, 혈관을 은총의 힘과 생명력으로 흘러넘치게 한다. 경외 속에서 걷는다는 것은 세상을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더 이상 타인을 단순한 아름다움이나 유용성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경외는 나무와 물, 작은 개미들까지도 각각의 존재로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자기 생존과 삶의 기쁨을 우리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개별적 존재로 인정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계 안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존재입니다. 켈트 시인이자 철학자이며 사제였던 존 오도노휴(John O’Donohue)는 ‘아남 카라’(Anam Cara, 영혼의 벗)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경외는 존엄을 부여하며, 오직 존엄의 빛 안에서만 한 사람의 아름다움과 신비가 드러납니다.’ [3] 이 진리는 나무나 장소, 심지어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비인간적 존재들에 대해 처음에는 이러한 공손한 존중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더라도, 단지 ‘경외’의 자세를 의도하는 것만으로도 관계의 공간이 열리게 됩니다. 이는 곧 ‘거룩한 현존’(Praesentia Sacra)을 위한 자리를 마련합니다. 오도노휴(John O’Donohue)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무엇을 만나고, 인식하며, 발견하는가는 상당 부분 네 접근의 질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경외의 자세로 다가갈 때, 위대한 것들이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4]
우리 공동체 이야기
시간이 흐르면서, 우주와 땅, 그리고 자연은 나를 열어 주어 내가 얼마나 판단적이고, 이기적이며,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깨닫게 했습니다. 이러한 인정은 변화로 이어졌고, 그 변화는 끝없는 여정입니다. 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안이 채워집니다. 나는 밤하늘을 바라볼 때 그것이 내 영혼 깊은 곳(Anima)으로 흘러드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나는 하느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우주와 자연의 체험이 나로 하여금 나 자신과 타인을 더 분명히 바라보게 하고, 용서와 평화의 길을 보여주었다는 것만은 압니다.
—Catherine B.
References
[1] Paul Woodruff, Reverence: Renewing a Forgotten Virtue, 2nd ed. (Oxford University Press, 2014), 1.
[2] Barbara Brown Taylor, An Altar in the World: A Geography of Faith (HarperOne, 2009), 21.
[3] John O’Donohue, Beauty: The Invisible Embrace (Harper Perennial, 2005), 31.
[4] Victoria Loorz, Church of the Wild: How Nature Invites Us into the Sacred (Broadleaf Books, 2021), 76–77, 77–78; and O’Donohue, Beauty, 23, 24.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ieke Campbell, untitled (detail), 2021,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아이의 눈을 크게 뜬 경이로움은 경외에 마음을 연 심장을 비추어 줍니다. 가장 평범한 순간 속에서도 성스러운 빛남을 바라보게 합니다.
----------------------------------------------------
251219. 12월 19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로서 즈카르야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으로서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루카 1,5-7)
사제 가문 출신인 요한
성경은 우리가 칭송하는 인물들뿐 아니라 그들의 부모도 칭송받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칭송하는 이들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흠없는 순결함도 칭송받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거룩한 복음사가가 이 대목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세례자 요한의 놀라운 일들과 임무와 열정, 그리고 그의 부모를 돋보이게 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거룩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칭송받는 것도 이런 까닭입니다(1사무 1,2 참조) . 이사악도 부모로부터 고귀한 신심을 물려받아 그것을 후손에게 물려주었지요. 그래서 즈카르야는 그냥 사제가 아니라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였고, 그의 아내 또한 아론의 자손이었습니다. 이렇게 성 요한의 고귀한 핏줄에는 그의 부모뿐 아니라 선조들로부터 내려온 유산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세속 권력을 이어받아 고위층 신분이 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승계를 통하여 존중받을 신분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마땅히 그만한 선조들을 모셨어야할 터인즉, 그가 담대하게 주님의 오심을 선포한 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선조들로부터 받은바 사명이었고, 자연법에 따른 결과였다 하겠습니다.
-암브로시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6
성령은 빠르게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를 신화시킨다
강물의 줄기들이 하느님의 도성을, 지존의 거룩한 처소를 즐겁게 한다(시편 46,4).
하느님은 바깥의 도움을 받지 않은 채 혼자서 이 일을 하십니다. 어떠한 천사도 이 일을 하시는 하느님을 도울 수 있을 만큼 고귀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존엄한 사람이라도 하느님을 도울 수 없습니다. 설령 한 천사가 자기의 고귀한 본성으로 하느님을 돕고자 해도, 하느님은 피조물이 자신의 이일을 돕도록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때는 이미 하느님께서 피조물이 도달할 수 없는 본향 위로 영혼을 들어올리신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설명 천사가 이 일을 할 수 있고, 하느님께서 그를 자신의 종으로 삼으셨다고 해도, 영혼만큼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때쯤 되면 피조물과 뒤섞인 모든 것이 영혼의 비위에 맞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영혼은 은총의 빛 속에서 하느님과 하나가 되지만, 자기가 이 빛 속에서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지도 알지도 못 한다면, 그 빛을 역겨워하고 말 것입니다.(529)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펠라지오에서 시메온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원천으로부터의 삶
1. 인간의 삶에 대한 전통의 의미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을 완전히 무로부터 시작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이 세상 안에서 자신을 위한 자리를 구축하여 고유한 삶을 시작하기 이전에. 우리는 이미 전통으로부터 성립된 삶의 자리와 가치관에 속해 있다. 이들은 우리의 고유한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요소이다. 우리 자신이 자유를 행사하기 이전에 이미 많은 요소들이 결정되어 있다.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로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선택할 여지도 없이 그 안에 소속되어 자라 온 사회,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배운 교육, 모국어 등은 우리 이전에 이 땅에 이미 존재해 온 것이고, 그것을 배워 사용하면서 우리 역시 후손들에게 전통으로 물려주게 된다. 이들은 모든 사람들의 삶의 시작부터 함께한다.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는 일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고귀한 가치라는 것이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사람은 기본적으로 묶여 있는 자신의 뿌리와 전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전통을 통해 우리는 잘 다듬어진 삶을 물려받아, 시행착오를 적게 하면서 바른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자유를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15)
----------------------------------------------------
251219. 12월 19일. 갑곳성지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 탄생 예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선, 이 이야기는 불가능 속에서 일어나는 하느님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사제 즈카르야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의로운 사람들이었지만, 아이가 없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모든 희망이 끊긴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 ‘불가능한 자리’에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십니다. 요한의 탄생은, 하느님께는 어떤것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증언하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체험하는 기적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의 끝에서 시작하시는 하느님.
요한의 탄생은 구원의 길을 준비하는 부르심을 상징합니다. 요한은 주님보다 먼저 와서 사람들의 마음을 회개로 이끌고, 구세주를 맞이할 준비를 시켰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작은 요한’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 삶의 선택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이끄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믿음에의 응답을 묻습니다.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로 입이 닫히게 되죠. 그러나 그 침묵의 시간은 단순한 벌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게 하는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의 여정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즉각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침묵 속의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때가 되면 약속을 이루신다는 신뢰입니다.
요한의 탄생 이야기는 단순한 기적담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침묵의 세상 속에서 새 희망을 여시는 이야기입니다.
불가능 속에서도 하느님은 역사하시고, 믿음을 통해 우리는 그분의 일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일을 세상에 전하도록 우리는 오늘 또다시 파견됩니다.
⭐거짓말
아이들의 거짓말은 금세 부모에게 걸리고 맙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속았다 생각하지만
부모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끔 속아 넘어가 주는 것이 부모입니다.
어른도 거짓말을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
혹은 다른 이유로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런 어른들의 거짓말에 하느님은 속아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
==========================================================
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
----------------------------------------------------
251219. 12월 19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책을 읽다가 이제까지 몰랐던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와인은 무엇일까요? 1977년에 처음 대중적인 국산 와인이 출시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처음에 ‘진로 포도주’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어렸을 때, 가게에서 파는 것을 본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초의 와인은 ‘마주왕’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미사 때마다 영하는 성혈인 포도주로 사용하는 것이 마주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래되고 유명한 포도주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이 포도주가 달라 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알아야 달라 보입니다. 주님은 어떨까요? 주님도 알면 알수록 다르게 보입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만 진정한 희망이 있음을 깨달으면서,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미사를 하는데 별 감응이 없다고 하십니다. 또 기도하는 것이 지루하기만 하다고 합니다. 굳이 봉사활동을 해야 하고, 봉헌과 나눔을 해야 하냐고 물으십니다. 주님 안에서 별다른 감응을 느끼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주님을 알기 위해 조금 더 노력했으면 합니다. 더군다나 전지전능하신 분이기에, 알면 알수록 더 많은 은총과 사랑 안에서 머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는 하느님께서 침묵을 깨고 인류 구원을 위해 다시 개입하기 시작하셨음을 알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의 부모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을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이라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음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불임을 겪고 있으며, 노령이었음을 이야기하지요. 이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치욕’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인간적으로는 어떤 가능성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하느님의 역사가 시작됨을 보여줍니다.
사제인 즈카르야가 사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러 갔는데, 그곳에서 주님의 천사를 만나게 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즈카르야에게 천사는 청원이 받아들여졌다는 것,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요한’으로 하라고 말합니다.
이때 즈카르야는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라면서 인간적인 한계를 근거로 의심합니다. 성모님은 천사의 말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지요. 성모님은 ‘방법’을 묻는 것이고, 즈카르야는 ‘표징(증거)’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 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신비가 완성될 때까지 인간의 말을 멈추고 침묵 속에서 기다려야 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우리 삶 안에서 계속 이루어집니다. 인간적인 판단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판단이 가장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알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행운은 눈이 멀지 않았다. 따라서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을 찾아간다. 앉아서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걷는 사람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노력하는 사람에게 행운이 찾아온다(클레망소).
----------------------------------------------------
251219. 12월 19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말은 사람에게서 배우고 침묵은 하느님에게서 배우시오!" - 성 골롬바노
즈카르야는 지상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 곧 우리가 흔히 성전의 '지성소'라고 하는 곳에 서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방금 받은 메시지의 설명을 찾으려 했으나, 곧바로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지성소는 설명과 해석을 위한 곳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신앙의 모든 것을 설명하려 이해하려 하며, 때로는 신앙 전체를 단순한 해석으로 축소해 버립니다. 교회의 많은 교사들에게서는 지성소가 책으로 가득 찬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예수 시대의 지성소는 완전히 비어 있었고, 이는 언제나 '관상'의 강력한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곳을 말로 채우고, 모든 설명을 끝내고 나면 더 이상 '신비'도, '매혹'도, '경이'도 남지 않습니다. 오직 불필요한 말들의 메아리만 남을 뿐입니다. 왜 우리는 즈카르야처럼 벙어리가 되지 않을까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신비주의자'라 불립니다. 이 말은 본래 ‘침묵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많은 신비주의자들은 오히려 많은 말을 남겼습니다. 물론 어떤 신비주의자들은 하느님 체험을 거의 말하지 않았지만, 모든 신비주의자들이 공통으로 지닌 것은 '말보다 더 깊은 신비'에 대한 자각입니다. 그들의 모든 말 아래에는 ‘위대한 침묵’이 자리합니다. 에크하르트는 익숙한 사물에서 이름과 꼬리표를 제거하여 다시금 그것을 신비롭게 만드는 은총의 은사를 지녔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군가 내게 ‘하느님께서 왜 육화(Incarnatio)하셨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 태어나시고, 영혼이 하느님 안에 태어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그 이유로 모든 성경이 기록되었고, 그 이유로 하느님께서 세상과 모든 천상적 존재들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 태어나시고, 영혼이 하느님 안에 태어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영혼은 이름이 없습니다. 아무도 하느님의 참된 이름을 찾을 수 없듯, 아무도 영혼의 참된 이름을 찾을 수 없습니다. 비록 수많은 책이 이에 대해 쓰였을지라도….'"
그는 많은 말을 했지만, 결국 벙어리였습니다. 하느님 체험이 그를 벙어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지성소에서의 즈카르야처럼 말입니다....
회의론자들과 불가지론자들은 우리가 인생의 해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이들이 지적 교만을 내려놓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느님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내가 어떻게 인생에 목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무신론자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세상은 무(無)에서 비롯되어 아무 목적 없이 어디론가 향해 달려간다.” 또 다른 이들은 그저 순간만을 살며, 왜 여기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조차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치 바다 밑에 있는 조개처럼, 무관심이라는 단단한 껍질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관심조차 없습니다. 나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는가?
우리는 물질 세계를 흙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술가가 그것을 가지고 아름답거나 추한 것을 빚어내듯이 말입니다. 물질은 도덕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인간 외에 악을 행하는 능동적 힘은 없는 듯합니다. 오직 인간만이 악한 의도(원한, 악의, 증오, 복수)나 선한 의도(사랑, 선의)를 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삶의 흙으로 추한 것을 만들 수도, 아름다운 것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삶은 이 삶의 원천이신 하느님 안에서만 본래의 거룩한 모습으로 형성되어 갑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서 말입니다. 조용히 그 사랑 안에 머무는 것, 그 사랑을 바라보는 것, 다른 해석이나 설명을 요구하지 않은 채 조용히 머무는 것, 이것이 바로 관상입니다. 긍정의 마음 안에서요....
예전에도 한 번 언급해 드렸습니다만, 성 골롬바노가 말하기를 "말은 사람에게서 배우고 침묵은 하느님에게서 배우시오!"라고 했습니다. 침묵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거기에는 무한한 의미가 있습니다. 진정한 거룩함은 설명이나 해석에 의해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원천이시요 이 침묵 안에서 완전한 거룩함으로 존재하시는 하느님 안에 침묵 속에 머물 때 조금씩 조금씩 더해 갈 수 있는 덕입니다!
----------------------------------------------------
251219. 12월 19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생명] 대림 3주간 금요일 - 조용히 보호 받아야 할 신비
(Week 03. 말씀이 얼굴을 갖추는 시간 / 임신 10–28주 / 대림 3주)
조용히 보호 받아야 할 신비
#되어감 #존재의존엄 #생명존중
생명은 늘 요란하게 시작되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새로운 생명은 환호 속이 아니라, 늙은 사제의 떨리는 손과 아이를 기다리다 지쳐 버린 한 여인의 침묵 속에서 잉태된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삶에는 오래된 결핍이 있었다. 그 결핍은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았고, 쉬운 위로로 채워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결과가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하느님 앞에 머무는 삶을 선택했다.
성소 안에서 즈카르야는 말을 잃는다. 그의 침묵은 벌이 아니라 준비가 된다. 설명하려던 입이 닫히고, 통제하려던 손이 내려놓아질 때 하느님은 인간의 계산을 넘어 일하시기 때문이다.
침묵은 무능력이 아니다. 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존재가 먼저 말을 건다.
그 사이, 엘리사벳의 몸 안에서는 아무 소리 없이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아직 이름도, 얼굴도, 목소리도 없지만 그 생명은 이미 하느님의 시선 안에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았지만 이미 관계 안에 있었다. 임신 초기, 태아의 얼굴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이 시간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 만들어지는 시간이다.
엘리사벳은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낸다. 기쁨을 외치기보다, 설명하기보다, 그 신비를 먼저 지킨다.
생명은 처음부터 평가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조용히 보호받아야 할 신비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의 시선보다 생명 그 자체의 시간을 존중했다.
이 복음은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언가를 해내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거기에 있음인가. 태아는 아직 말하지 못한다. 아직 선택하지도, 기여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 존재는 이미 하느님께서 굽어보신 자리에서 존엄으로 불리고 있다.
존엄은 능력에서 오지 않는다. 존엄은 존재 그 자체에 내재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존엄은 사랑받고 있음에서 시작된다. 하느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 그곳에 이미 존엄이 있다. 태아는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존재함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들어와 있다.
대림의 시간은 태아의 시간과 닮아 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살아 있고,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미 하느님의 일이 시작된 시간. 우리는 완성을 기다리지만, 하느님은 이미 그 시작 안에 계신다.
우리는 자주 묻는다. 언제부터 생명인가, 언제부터 존중받아야 하는가. 그러나 복음은 이 질문을 조금 다른 자리로 옮긴다. 나는 아직 보이지 않는 생명 앞에서 침묵할 수 있는 사람인가. 아직 설명되지 않는 존재를 서둘러 판단하지 않고 지켜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생명은 태어날 때 존엄해지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순간부터, 이미 조용히 보호받아야 할 신비로 이 세상에 와 있다. 엘리사벳이 다섯 달 동안 그 신비를 지켰듯이, 우리도 보이지 않는 얼굴 앞에서 경외로 머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행위 이전의 자리로 초대받는다.
무엇을 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는 자리, 말하기 전에 이미 사랑받는 자리, 증명하기 전에 이미 환대받는 자리. 태아는 바로 그 자리에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한때 그 자리에서 시작했다.
대림은 우리에게 묻는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신뢰할 수 있는가.
보이지 않는 생명 앞에서, 당신은 침묵할 줄 아는가.
작은 이의 기도
주님,
아직 말하지 못하는 생명을
서두르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을 주소서.
보이지 않아도 이미 존엄한 존재를
평가하지 않고 조용히 보호할 수 있는
사랑을 주소서.
침묵 속에서 자라는 생명을
당신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시고,
그 신비 앞에서
경외로 머무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51219. 12월 19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에게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구약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는데
그 계약의 선물로 하느님께서는
장수, 후손 그리고 땅을 말씀하십니다.
이 부부에게 아이가 없다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표지였습니다.
하느님과의 계약을 지키면
축복의 의미로 주시겠다는 것을 받지 못한 그들은
어떻게 보면 계약에 충실하지 않은 사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그들을, 특히 엘리사벳을
힘들게 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즈카르야는 사제였으며
엘리사벳은 아론의 자손으로
그들에게 아이가 없다는 것은
즈카르야의 사제직이 합당한지에 대한 문제로도
연결되었을 것입니다.
계약에 충실하지 않은 사람이
사제 직무를 수행해도 괜찮은지 의문도 있었을 것입니다.
요한의 탄생은 천사가 말한 것처럼
많은 이가 기뻐할 일입니다.
요한의 탄생으로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요한의 탄생은
엘리사벳의 치욕을 없애주신 일입니다.
마리아가 노래한 것처럼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신 일로
엘리사벳은 직접 그 구원을 경험합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이며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결코 계약에 충실하지 않은 사람이 아님을
하느님께서 몸소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자녀를 굽어보십니다.
나 자신이 겉으로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하느님께서 모른 척하시거나
멀리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하느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시는만큼
당신께서도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것처럼 보이면
하느님과의 관계에 머물러 있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한 사람들의 시선은 나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시선 때문에 더 힘든 나날을 보내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우리를 힘들게 만들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것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믿고
오늘 하루도 묵묵히
우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251219. 12월 19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5-25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 하게 될 것이다.”
어제 복음과 오늘 복음에서는 ‘의로움’이라는 도덕관념이 공통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묵상했던 요셉의 의로움은 계명이나 율법의 준수 여부에만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음으로써 얻어진 ‘참된 의로움’이었지요. 그런 의로움을 지니고 있었기에 머리로 이해하기 어렵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하느님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따를 수 있었습니다. 반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즈카르야의 의로움은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도달하는 ‘인간적인’ 의로움입니다. 문자로 명확하게 규정된 하느님의 뜻을 어기지만 않으면 되니 부족한 의로움이고, 자기 능력과 힘으로 계명과 규정을 지키면 도달할 수 있다고 여기니 교만한 의로움이지요. 그런 불완전한 의로움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식별할 수도, 제대로 따를 수도 없으니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즈카르야는 가브리엘 대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자녀를 얻기를 바라는 즈카르야 부부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이제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시어 그들의 청을 들어주려고 하시는데, 즈카르야는 자기도 아내도 이미 나이가 너무 많이 들어 아기를 잉태하기 어려운 몸이 되었는데, 하느님의 말씀대로 되리라는 걸 자신이 어떻게 납득할 수 있겠느냐며 의구심을 품은 겁니다. 이런 모습은 즈카르야 뿐만 아니라 우리도 비슷하지요. 자신이 바라는 걸 하느님께 청하기는 잘 하면서도, 정작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당신 뜻을 이루시는 건 이해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워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세상의 논리와 기준에 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하느님께 마음을 활짝 열지 못하고, 그분께서 나를 통해 당신 뜻을 이루시도록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지 못하게 되지요. 그러면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복을 내 안에 담을 수 없습니다. 그릇은 비어 있어야만, 그리고 그 열린 부분이 하늘을 향해야만 그 안에 뭔가를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즈카르야의 의심과 불신에도 불구하고 그를 통해 당신 뜻을 이루시려는 계획을 철회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즈카르야가 당신 뜻을 마음에 간직하고 곰곰히 생각하여 깨닫도록, 당신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의 입을 잠시 닫아두십니다. 엘리사벳이 잉태하여 아들을 나으면 즈카르야는 그제서야 자신의 무지함과 편협함을,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자비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시키신대로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음으로써 하느님이 얼마나 자비로운 분이신지를 온 세상에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성탄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기에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 것은 내 안에 즈카르야 같은 모습이 없는지 성찰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의심많고 부족한 나를 통해서도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신다는 점을 되새기며 그분께 마음을 열고 순명하기 위함입니다.
----------------------------------------------------
251219. 12월 19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
X X X X X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박윤식”님을 찿아 들어 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위에 X X X X X 로 표시)
----------------------------------------------------
251219. 12월 19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김건태 신부님_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
무대의 막이 걷히고, 구원의 드라마가 펼쳐집니다. 우리는 구약성경 시대에서 나와 신약성경 시대로 들어섭니다. 즈카르야에 이어 마리아에게 전달된 대조적인 두 가지 탄생 예고 말씀이 시대의 넘어섬을 일러줍니다.
즈카르야를 향한 예고에서 우리는 아직 예루살렘 성전과 엄숙하고 화려한 전례, 곧 분향, 구약의 제도적인 성직자가 규정에 따라 올리는 저녁 제사, 군중의 무리가 멀리서 기도로 함께하는 전례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와 달리, 마리아를 향한 예고는 평범한 일상생활 중에 처녀가 머무는 조촐한 집에서 전개됩니다. 외부에서 규모 있게 거행되던 예식에서,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이루어집니다.” 하고 예수님이 앞으로 그토록 강조하실, 마음으로 올리는 전례로 건너갑니다. 어느 군중도 나자렛의 평범한 집에서 강생(降生)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내적 사건, 신비로운 사건이었습니다.
즈카르야와 마리아를 향한 예고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다른 문턱, 기다림의 세계와 이루어짐의 세계 사이에 놓인 문턱을 넘어섭니다. 태어날 아기의 이름은 ‘주님께서 은총을 베푸신다.’ 하는 의미의 요한입니다. 요한은 주님께 ‘은총을 베푸실 주님을 받아들일 백성’을 준비시켜 나갈 것입니다. 모든 것이 미래를 향해 있던 시기가 끝나고, 이제 주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 서둘러야 할 시기가 열립니다. 요한이 은총을 베푸실 분을 향해 백성을 준비시켜나갈 그분은 예수님, 곧 ‘주님께서 구원을 베푸신다.’ 하는 의미의 예수님입니다. 하느님의 은총 가운데 은총인 구원을 이루기 위해 오시는 분입니다.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느님의 지고의 뜻인 구원을 이루실 분입니다.
그러나, 이 지상에서 삶을 살아가는 동안 내내, 우리는 곧바로 쉼 없이 열심히 살아가야 할 현재와 신비로운 영원을 향해 달려가야 할 미래라는 두 가지 실존을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땅에 발붙이고 살면서도 하늘을 지향해야 하는 사람들, 주어진 삶에 충실하면서도 미래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이 대림시기, 세례자 요한이 준비하고 가르쳐준 길을 따라 성심껏 걸어가는 가운데,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오늘도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주님의 은총, 나아가 주님의 구원을 미리 맛보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
================================================
================================================
“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442
12월19일 [금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인천교구 유성현 베드로(연안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대림특강◇
그 모범은 성모 마리아 / 영성, 마음, 분별시대 / 지성에서 영성으로, 생각에서 마음으로, 성찰에서 분별로, 관찰에서 선택으로 I 곽승룡 비오 신부I
https://www.youtube.com/watch?v=8noMBu5LIzM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너는 늙어가지만, 여전히 나의 사랑이다!>
오늘 성전에서 사제직을 수행하던 노사제 즈카르야는 주님의 천사와 대화를 나눕니다. 천사의 알림에 즈카르야는 한심하다는 듯, 따지듯, 한 마디 말을 건넵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나이도 많습니다.”
오늘 우리도 종종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다양한 방식과 형태로 다가오는 하느님의 초대앞에 많은 경우 우리도 비슷하게 말해왔습니다.
“형제님, 이번에 본당 사목평의회 새로 구성되는데, 총무 역할을 하실 분이 마땅치 않은데, 좀 맡아주시면 정말 좋을 텐데...”
“신부님, 지금 아프리카 남수단에 선교 사제가 너무 부족합니다. 거기 형제들은 한 사람이 열몫을 합니다. 여기서 이러시는 것 보다 그리로 가셔서 인생의 황혼을 활활 불살라보시면 안될까요?”
그럴 때 우리는 벼락같이 화를 내면서, 그 이유로 나이를 말합니다. “대체 무슨 그런 험한 말씀을 하십니까? 올해 제 나이가 몇 살인지 아십니까? 안그래도 허리 디스코에, 고혈압에 저는 절대 안 됩니다.”
즈카르야도 늘그막에 아이를 갖는다는 것을 백번 천번 생각해도 불가능하다는, 인간적 생각에 머물러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당분간 그의 입을 막아버립니다.
그러나 나자렛의 마리아는 어떠합니까? 물론 두렵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했지만, 하느님께서 그리 원하시니, 그렇게 하시라고 순순히 응답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바야흐로 우리 나라 사람들이 백세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80에 세상 뜨면 너무 빨리 가셨다고 다들 안타까워합니다.
길고 긴 노년기를 잘 보내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건강 관리도 잘 하고, 재정 관리도 튼튼히 해놓고, 즐기고 만끽할 취미활동도 준비하고...다른 무엇에 앞서 영적으로 더욱 성장하고 지혜롭고 충만한 노년을 살기 위해 더 많은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되어 머리가 하얗게 세고, 기력도 떨어지고, 세상의 무대에서 점점 뒤로 물러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는 언제나 그러하셨듯이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너는 늙어가지만, 여전히 나의 사랑이다. 나는 너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한다. 너의 주름진 손, 앙상한 다리, 하얗게 센 머리카락, 깜박깜박 잊어버리거나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조차 사랑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너의 마음을 사랑한다. 산만함 속에서도 나를 향해 있는 너의 마음을!”(브라이언 그로간 신부, 품격있는 황혼, 바오로딸)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Q5CKSSYmLpg?si=mD5jiwx8QDLvAbTm
++++++++++++++++++
<3일 안에 하느님 만나는 법>
찬미 예수님!
오늘은 1974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있었던 아주 충격적인 예술 실험 이야기로 문을 열까 합니다. 행위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감행한 '리듬 0'이라는 퍼포먼스입니다. 그녀는 전시장 한가운데에 마네킹처럼 서서 관객들에게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테이블 위에 72가지의 도구가 있습니다. 깃털과 장미 같은 부드러운 것부터, 칼과 가위, 심지어 탄환이 든 권총도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6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저 도구로 저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겠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조심스러웠습니다. 장미를 손에 쥐여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지요. 하지만 그녀가 완벽한 침묵 속에 무기력하게 서 있자, 사람들의 내면에 숨겨진 본성이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가위로 그녀의 옷을 잘라내자, 군중 심리가 발동했습니다. 어떤 이는 그녀의 몸에 낙서를 하고, 어떤 이는 살을 베어 피를 맛보기도 했습니다. 급기야 누군가는 장전된 총을 그녀의 머리에 겨누기까지 했습니다. 그녀가 '멈춰' 있는 동안, 사람들은 그녀를 인격체가 아닌 물건처럼 다루며 자신들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약속된 6시간이 지났다는 방송이 나왔습니다. 그 순간, 마네킹처럼 굳어있던 마리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눈을 맞추며 한 걸음 내딛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방금 전까지 그녀를 괴롭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추악한 본성을 목격한 '살아있는 눈동자'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반면, 그녀의 상처를 닦아주려 했던 소수의 사람들은 그 자리에 남아 그녀를 맞이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사탄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정신없이 움직이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쁘게 돌아갈 때는 누가 나를 해치는지, 누가 나를 사랑하는지,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구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음과 속도는 사탄의 가장 좋은 은신처입니다.
C.S. 루이스의 소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보면 고참 악마가 조카 악마에게 이렇게 조언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인간을 타락시키는 최고의 무기는 '소음'이다. 그들이 절대 침묵하지 못하게 해라. 침묵하면 그들은 원수(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즈카르야 사제는 평생 하느님의 일을 했지만, 정작 하느님의 능력보다는 자신의 '계산기'를 더 믿었던 사람입니다. 천사가 나타나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자 그는 즉시 계산기를 두드렸습니다.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악마는 즈카르야에게 끊임없이 의심의 소음을 불어넣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즈카르야를 보호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내리십니다. 바로 '침묵'으로 그를 격리시키신 것입니다.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된 것은 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강제된 피정이었습니다. 입을 닫고 귀를 열라는 하느님의 자비였습니다. 그 고요함 속에서 즈카르야는 자신의 불신앙을 뼈저리게 식별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의 배가 불러오는 것을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 자신의 좁은 계산기를 부숴버렸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즈카르야처럼, 그리고 저 예술가처럼 잠시 멈춰 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피정(Retreat)'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음을 차단하고 하느님 안에서 침묵할 때, 우리를 갉아먹던 악한 것들은 그 고요함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칩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우리 곁에 남는 것은, 마리나의 눈물을 닦아주던 손길처럼, 우리에게 선한 영향을 주는 주님의 목소리뿐입니다.
사도행전의 사울을 보십시오. 그는 살기등등하게 다마스쿠스로 가다가 강렬한 빛을 받고 눈이 멉니다. 그는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그 3일 동안 그는 무엇을 했을까요? 자신이 알고 있던 율법, 지식, 신념이라는 '계산기'가 강제로 꺼진 상태에서 그는 어둠 속에 홀로 있었습니다. 육체의 눈이 닫히자 비로소 영혼의 눈이 떠졌습니다. 그는 그 3일간의 캄캄한 침묵 속에서 자신이 박해하던 예수가 곧 주님임을 깨닫습니다. 눈을 감아야만 진리가 보이는 '즈카르야의 시간'을 겪은 것입니다.
자연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치라는 '절대 침묵'의 공간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밖에서 볼 때 고치는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엄청난 재창조가 일어납니다. 만약 답답하다고 고치를 찢고 나오면 나비는 날지 못하고 죽습니다.
즈카르야의 열 달은 단순한 벙어리 생활이 아니라, '의심하는 애벌레'가 '찬미하는 나비'로 바뀌는 필수적인 고치의 시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시 지금 하느님의 뜻이 들리지 않아 답답하십니까? 그렇다면 내가 너무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생각, 내 계획, 내 판단이라는 소음을 끄십시오. 저도 신학교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사흘 동안의 전 인격적인 침묵이 있었습니다. 죽음이 사흘 동안 지속되면 부활을 만나게 됩니다.
며칠 간의 피정이 어렵다면, 단 하루, 아니 단 10분이라도 귀와 눈을 가리고 나를 '0'으로 만들
용기를 내야 합니다. 멈추십시오. 그래야 보입니다. 침묵하십시오. 그래야 들립니다. 그 침묵의 끝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Fort Boggy State Park’로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지난 10월 11일 그곳에서 중남부 꾸르실료 야외 미사가 있었습니다. 공원에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었고, 주변에는 산행 코스가 있었습니다. 시간 나면 한번 가고 싶었고, 몇몇 분들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달라스에서는 2시간 거리여서 그리 멀지도 않았습니다. 호수에는 아이들이 부모님과 함께 물놀이하고 있었고, 어른들은 투망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소풍은 ‘쉬엄쉬엄 거닐며 바람을 쏘인다.’라는 의미입니다. 적당한 구름이 햇빛을 가려주었고,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게 하였습니다. 거닐면서 묵주기도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도 생각났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노라고 전하리라.’ 그렇습니다. 이 세상을 소풍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소풍 와서 다툴 일도 없고, 소풍 와서 그리 걱정할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지친 이들은 모두 나에게 와서 쉬어라.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
묵주기도 환희의 신비 2단은 ‘아름다운 소풍’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막 임신한 마리아는 임신한 지 6개월 된 친척 엘리사벳을 찾았습니다. 나자렛에서 아인카렘까지 길을 떠났습니다. 달라스에서 포트 부기 공원까지 가는 거리와 비슷합니다. 마리아는 늙은 나이에 아이를 가진 친척 엘리사벳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이제 막 임신한 마리아에게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은총에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나이다. 태중의 아들 또한 복되시나이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축복을 받고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기뻐 뛰노나이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권세 있는 자는 자리에서 내치시고 비천한 이를 끌어 올리시나이다. 부유한 자를 내 치시고 가난한 이를 축복하시나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소풍은 없습니다.
세종대왕은 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다른데 글은 중국 글자를 사용하니 백성들의 고충이 많다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말을 우리의 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글’을 창제하였습니다. 그것을 ‘여민락(與民樂)’이라고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 또한 ‘여민락’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던 마노와의 아내가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삼손’이며 태양의 힘을 가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이는 그 힘으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절망과 좌절 중인 여인에게 희망을 주었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즈카리야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가질 수 없던 아내 엘리사벳이 아이를 가질 거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요한’이며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많은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새로운 길을 준비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자라서 회개의 세례를 주었고, 주님보다 앞서서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성탄 무렵에 많이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천사라는 뜻입니다. 저는 저의 세례명을 참 좋아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왕이면 좋은 뜻을 전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때로 날개 잃은 천사가 되어서 방황하기도 하지만 저의 세례명처럼 주님의 뜻을 전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자신이 이룬 일로 정해지는 이름도 있습니다. ‘독재자’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과 욕망에 따라서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독재자의 폭력에 의해서 희생되기도 했습니다. ‘선구자’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이름입니다. 밤을 새워 새로운 길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류는 그런 사람들이 밝힌 길을 따라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며 살았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목적은 세상의 명예와 세상의 성공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길은 바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초는 자신을 태울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듯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를 태워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 이 또한 ‘여민락’의 삶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 딸들 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아이를 못낳는 여자에게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생명의 선물을 알리시는 이야기가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 내용입니다. 삼손의 잉태 소식은 어머니에게, 요한의 잉태 소식은 아버지에게 전해집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들에게서 생명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이들의 삶에 개입하시어 사막에서 꽃을 피워 내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 자연의 원리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을 이루어지게 합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 자기의 인간적 한계를 말하는 즈카르야의 이러한 반응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을 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한계에서 일을 시작하시는 분이심을 더 명확히 드러내 줍니다.
교회 역사에서 인간이 노력하는 것만으로 구원을 얻어 낼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신앙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시고 성덕을 이루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 은총에 응답하여 삶 안에서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여 일상생활에서 가꾸며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청해야겠지요. ‘주님, 저는 할 수 없지만 당신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사막이지만 당신께서는 거기서 꽃을 피우실 수 있습니다. 제 안에 당신 생명을 키워 주십시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5-25: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
1. 은총의 표징으로 주어진 요한
요한은 엘리사벳의 불임 상태 속에서 태어난 기적의 아들이다. 그의 이름 “요한”(하느님은 은총이시다.)은 곧 그의 사명 자체를 드러내고 있다. 하느님은 은총으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시며, 인간의 불가능 안에서 가능성을 열어 주신다. 성 암브로시오는 “요한은 은총의 선물로 태어나, 은총을 선포하는 자가 되었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1,23)라고 말했다. 우리의 삶 안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불가능처럼 보이는 자리에서 은총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2. 즈카르야의 불신과 마리아의 믿음
즈카르야는 나이와 인간적 한계를 바라보다가 천사의 말씀을 믿지 못했고, 목소리를 잃었다. 반면, 마리아는 같은 천사의 말씀 앞에서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응답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즈카르야의 경우를 두고 “의로운 이조차 의심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를 버리지 않고, 믿음을 회복하도록 교정하신다.”(Hom. in Matth. 4,6)고 말했다. 이는 우리에게 믿음의 순종이 구원의 문을 연다는 것을 가르친다.
3. 엘리야와 요한의 예언자적 소명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녀”(루카 1,17) 이스라엘을 주님께로 돌려놓는 사명을 받았다. 그는 엘리야처럼 단순한 삶, 거친 옷, 광야 생활로 하느님의 도래를 준비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요한을 “새 언약의 문지기,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이어주는 다리”(Serm. 293,3)라고 불렀다. 요한의 삶은 오늘 우리도 회개와 단순함으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부르심이다.
4. 교회의 가르침
교리서는 “요한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마지막 예언자로서 ‘모태에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한 자’였다.”(717항) 가르친다. 또한 “요한의 출생은 엘리사벳의 불임을 극복한 기적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와 구원 계획이 실현되는 표징”이라고 설명한다(722항 참조).
5. 삶의 적용
불가능의 자리에서도 은총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삶의 막힘과 한계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새로운 생명과 은총을 일으키신다는 희망을 품어야 한다. 또한 믿음의 응답을 드리는 것을 배워야 한다. 즈카르야의 의심이 아니라, 마리아의 순종을 본받아 하느님의 말씀을 신뢰해야 하며, 예언자의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요한처럼 단순하고 진실한 삶으로, 이웃을 주님께로 이끄는 작은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엘리사벳이 “주님께서 굽어보셨다.”라고 고백했듯이, 우리도 받은 은총을 잊지 않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는 단순히 한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은총으로 시작된 구원의 역사, 믿음의 순종을 요구하는 신앙의 길, 그리고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의 삶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오롯이>
루카 1,5-25(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로서 즈카르야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으로서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 다 나이가 많았다.
즈카르야가 자기 조 차례가 되어 하느님 앞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할 때의 일이다. 사제직의 관례에 따라 제비를 뽑았는데, 그가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기로 결정되었다. 그가 분향하는 동안에 밖에서는 온 백성의 무리가 기도하고 있었다. 그때에 주님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분향 제단 오른쪽에 섰다. 즈카르야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즈카르야가 천사에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하고 말하자, 천사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한편 즈카르야를 기다리던 백성은 그가 성소 안에서 너무 지체하므로 이상하게 여겼다. 그런데 그가 밖으로 나와서 말도 하지 못하자, 사람들은 그가 성소 안에서 어떤 환시를 보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몸짓만 할 뿐 줄곧 벙어리로 지냈다. 그러다가 봉직 기간이 차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 뒤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였다. 엘리사벳은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오롯이>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루카 1,13)
믿고프나
믿을 수 없는
희뿌연 불신 한가운데서
드맑게 솟구치는
믿음이 품거든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오롯이 맡기고
굳건하게 믿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희망하고프나
희망할 수 없는
어두운 절망 한가운데서
새하얗게 밝히는
희망이 품거든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오롯이 맡기고
새하얗게 희망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하고프나
사랑할 수 없는
차가운 미움 한가운데서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이 품거든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오롯이 맡기고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 이야기는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의 선포입니다.>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즈카르야가 천사에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하고 말하자, 천사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루카 1,13-20)
1) 이 이야기는,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의 선포’이고, 루카복음에서는 ‘첫 번째 선포’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한 말을 잘 보면, 주님(메시아)께서 곧 오신다는 ‘기쁜 소식’이 핵심입니다. 천사의 말을 겉으로만 보고 “아이를 못 낳던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다.” 라는 예고로만 생각하는 것은, 핵심 내용을 보지 못하고 놓치는 일이 됩니다.
천사의 말에서 “그분보다 먼저 와서”라는 말에는, 그분이(메시아께서) 곧 오신다는 뜻이 들어 있고,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라는 말에는, “곧 오실 주님을(메시아를) 잘 맞이할 준비를 하여라.”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19절의 ‘기쁜 소식’은 ‘메시아 강생 소식’입니다.
그리고 14절의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이 아니라 메시아 강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말입니다. ‘많은 이’는 인류 전체를 뜻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가 기뻐할 것이라는 말은, “메시아 강생은 인류 전체에게 큰 기쁨을 주는 일이다.” 라는 뜻이 됩니다.
즈카르야가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라고 말한 것을 생각하면, 13절의 ‘너의 청원’은, ‘아들을 낳게 해 달라는 청원’이 아니라, ‘메시아를 보내 달라는 청원’으로 해석됩니다.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아들 낳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던 즈카르야가 아들을 낳게 해 달라는 청원기도를 바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즈카르야가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한 것은, ‘메시아 강생 소식’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아들의 출생 예고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 만일에 즈카르야가 천사의 말을 잘 알아듣고 믿었다면? 그러면 ‘기쁜 소식의 첫 증인’이라는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했고, 믿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 영예는 성모 마리아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즈카르야의 말은, 믿기를 거부한 말이 아니고, 믿고 싶지만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고, 믿기가 어려운 일이어서 믿을 수 없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은, “그것을 제가 믿을 수 있도록 저에게 표징을 보여 주십시오.”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그가 얻은 표징은 ‘말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갑자기 말을 못하게 되었다가 요한이 태어난 후에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그에게 주어진 표징입니다.
즈카르야가 사제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가 말을 못하게 된 것은, ‘사제 직무 정지’ 라는 징계를 당한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기쁜 소식’을 선포할 자격도 없고, 사제 직무를 수행할 자격도 없습니다.>
3) 하느님께서는 왜, 희망도 없이 살아가던, 늙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을 선택하셨을까? 우리는 그 일을,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라는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고, ‘희망 없이’ 살고 있는 인류에게 ‘새 희망’을 주신 것을 상징하는 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희망’에 초점을 맞추면, 역시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으면, 희망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신앙인은 믿기 때문에 희망하고, 희망하니까 믿는 사람입니다. 믿음과 희망은 하나입니다.
4)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루카 1,6) 그러니 신앙과 신앙생활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부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를 들었을 때에 즈카르야의 믿음이 문제가 된 것은, ‘메시아 강생’이 그만큼 놀랍고 위대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즈카르야는 처음에는 믿을 수 없는 일이어서 못 믿었지만, 침묵 속에서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메시아 강생’을 깨달았을 것이고, 또 믿음에 도달하게 되었을 것이고,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천사가 지시한 대로(13절) ‘요한’이라고 지음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루카 1,63)>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고 그대로 행하게 하소서>
즈카르야와 엘리자벳은 경건한 사람이었다. 주님의 계명과 규율을 어김없이 지키고 살았다. 그러나 자식이 없었고, 어쩌다가 성전에서 봉사할 기회를 갖곤 하였다. 마침 즈카르야가 제비에 뽑혀 성전에 들어가 분향을 드리고 밖에서는 온 백성의 무리가 기도하고 있었다. 그때에 주님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루카 1,13-14)
그러나 즈카르야는 하느님께 기도하면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믿지 못했다. 아기가 받게 될 이름, 요한은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천사의 말을 의심하여 오히려 눈에 보이는 표징을 요구했다. 결국, 즈카르야는 이 불신 때문에 천사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질 때까지 벙어리가 되었다.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된 것이 곧 하느님께서 개입하셨다는 표징이 되었다.
즈카리야의 의심, 그리고 유다인들이 표징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구원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불신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다.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조건 없이 그리고 끝없이 쏟아지는 하느님의 은총을 말릴 수는 없다.
하느님 은총의 역사에는 인간의 자발적인 협력이 꼭 필요하다. 인간은 이미 자유의지를 선물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시는 구원이나 멸망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의심함으로써 은총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니, 그 자체가 멸망이고, 믿는 이들에게는 구원의 근원이 된다. 사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요한 20,29).하다.
마침내 즈카르야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게 되었고 그가 고백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1,25)
즈카르야에게 말씀을 꼭 지키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주신 분, 엘리사벳에게 주님께서 굽어보셨다는 믿음과 감사를 고백하게 하신 분, 그분께서 우리에게도 구원을 약속해 주시고 우리를 지켜보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혹시 절망스럽더라도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은총의 비를 기다려야 한다. “주님, 당신의 길을 제게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제게 가르쳐 주소서. 당신의 진리 위를 걷게 하시고 저를 가르치소서. 당신께서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니 날마다 당신께 바랍니다.”(시편 25,4-5)
사랑합니다.
=====================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 하게 될 것이다”(루카 1,20). 하느님께서는 믿지 못하는 즈카르야를 ‘침묵’ 안에 머물게 하십니다. 침묵 속에서 그는 하느님의 신비를 깨닫게 되고, 세례자 요한의 할례식 때, “그의 이름은 요한”(1,63)이라고 글 쓰는 판에 아기의 이름을 적으며 하느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되었기 때문에, 엘리사벳은 나이 많은 자신이 어떻게 임신하게 되었는지 알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엘리사벳이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온전히 하느님의 시선 안에 머물게 하십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이 모든 일이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신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1,24-25 참조).
‘경건한 침묵’과 ‘온전히 하느님의 시선 안에 머무름’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는 방법이며, 하느님과 대화하는 방법입니다. 믿음은 침묵과 하느님의 시선 안에 온전히 머무르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자라납니다.
생각 없이 떠들어 대는 수다, 소란스러움, 요란함, 남들의 시선을 의식함 등 이런 방법으로 믿음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성체 앞에 있는 시간은 우리를 ‘경건한 침묵’과 ‘하느님의 시선’ 안에 온전히 머물도록 초대합니다. 예수님 성탄을 준비하며 성체 앞에 머무는 시간을 자주 가지면 좋겠습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 하게 될 것이다.” 아멘.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책을 읽다가 이제까지 몰랐던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와인은 무엇일까요? 1977년에 처음 대중적인 국산 와인이 출시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처음에 ‘진로 포도주’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어렸을 때, 가게에서 파는 것을 본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초의 와인은 ‘마주왕’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미사 때마다 영하는 성혈인 포도주로 사용하는 것이 마주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래되고 유명한 포도주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이 포도주가 달라 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알아야 달라 보입니다. 주님은 어떨까요? 주님도 알면 알수록 다르게 보입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만 진정한 희망이 있음을 깨달으면서,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미사를 하는데 별 감응이 없다고 하십니다. 또 기도하는 것이 지루하기만 하다고 합니다. 굳이 봉사활동을 해야 하고, 봉헌과 나눔을 해야 하냐고 물으십니다. 주님 안에서 별다른 감응을 느끼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주님을 알기 위해 조금 더 노력했으면 합니다. 더군다나 전지전능하신 분이기에, 알면 알수록 더 많은 은총과 사랑 안에서 머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는 하느님께서 침묵을 깨고 인류 구원을 위해 다시 개입하기 시작하셨음을 알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의 부모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을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이라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음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불임을 겪고 있으며, 노령이었음을 이야기하지요. 이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치욕’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인간적으로는 어떤 가능성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하느님의 역사가 시작됨을 보여줍니다.
사제인 즈카르야가 사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러 갔는데, 그곳에서 주님의 천사를 만나게 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즈카르야에게 천사는 청원이 받아들여졌다는 것,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요한’으로 하라고 말합니다.
이때 즈카르야는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라면서 인간적인 한계를 근거로 의심합니다. 성모님은 천사의 말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지요. 성모님은 ‘방법’을 묻는 것이고, 즈카르야는 ‘표징(증거)’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 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신비가 완성될 때까지 인간의 말을 멈추고 침묵 속에서 기다려야 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우리 삶 안에서 계속 이루어집니다. 인간적인 판단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판단이 가장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알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합니다.
=====================
[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루카 1,5-25)
대림 시기 후반부의 전례 독서와 복음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탄생하시는 과정에 협력하며 참여한 여러 인물들을 우리에게 소개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고자 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또한 오시는 구세주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맞아들여야 하는지를 묵상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사람들로 하여금 구세주를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이끌었던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얽힌 비화입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하느님 보시기에 의로운 이들로써, 그분께서 알려주신 계명과 규정들을 충실하게 실천하며 사는 거룩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는 한 가지 아픔이 있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의 나이가 되도록 자식이 없다는 것이었지요. 엘리사벳이 육체적으로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충실한 그들의 청원을 잊지 않고 기억하셨고, 당신께서 계획하신 ‘때’가 되자 가브리엘 천사를 즈카르야에게 보내시어 그들의 간절한 소망을 이루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얻게 해주시겠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즈카르야는 자신이 간절히 청했던 소망을 이루어주시겠다는 말씀을 듣고도 기뻐하지 못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능력보다 자신의 인간적 한계가 먼저 보였기 때문입니다. 본인도 아내 엘리사벳도 이미 아이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늙어버렸는데, 그 늦은 나이에 아들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고 의심한 것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간절히 기도하며 노력했음에도 아들을 얻지 못했던 실패 체험들이 그의 마음 속에 ‘나는 안된다’는 부정적 인식으로 각인되어 버린 탓이지요.
그릇은 비어 있어야만 그 안에 소중한 것을 담을 수 있는 법입니다. 인간적인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마음이 가득 찬 상태로는 하느님의 은총을 제대로 담을 수도, 그 은총이 열매 맺게 할 수도 없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엘리사벳이 출산할 때까지 즈카르야의 입을 닫아버리십니다. 침묵 중에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을 돌아보고 회개함으로써 마음 속에 담긴 부정적인 것들을 비워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고 난 뒤에 그 안에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 담아 참된 기쁨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즈카르야의 마음이 의심과 불신이라는 속박에서 자유로워져 하느님을 온전히 믿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요한의 탄생이 그들에게 하느님 자비와 구원을 드러내는 표징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즈카르야라는 이름에는 “하느님께서 기억해주셨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엘리사벳이라는 이름에는 “하느님께서 맹세하셨다”는 뜻이 담겨 있지요. 하느님께서 그들의 아픈 처지를 기억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토록 하느님께 충실했던 그들의 노력을 기억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그들의 청을 들어주시겠다고, 그들이 바랐던대로 아들을 얻게 해 주시겠다고 직접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큰 은총과 사랑에 감사하며 그분의 약속을 굳게 믿고 따랐으면 될 일입니다. 그랬다면 감히 하느님의 뜻을 의심했다는 죄책감 없이,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의 탄생을 마음껏 기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에 담긴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다”는 진리를 목청껏 외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즈카르야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받은 소명을 되새겨봐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과 사랑에 감사하며 그분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 그 말씀을 삶 속에서 충실히 실천하며 기쁘게 살아감으로써 하느님의 자비를 온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맡겨진 소명입니다.
=====================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찬미예수님
우리는 극심한 어려운 일에 처하게 되었을 때 신앙의 “어두운 밤”을 맞이하게 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고 그것을 내버려두신 하느님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특별히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는 분들은 하느님께서 왜 나에게 이런 벌을 내리시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마음에 침묵하시는 하느님을 의심하게 됩니다. 이러한 영혼의 시기를 십자가의 성 요한의 표현을 빌려 “어두운 밤”의 시기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 어두운 밤은 으레 낮이 지나고 밤이 찾아오듯 매우 자연스럽게 몇 번이고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순식간에 지나가기도 하고 아주 오랜 시간 우리 곁에 머물기도 합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이러한 시기를 겪는 청년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특별히 젊은 불임 부부들이 그렇습니다.
새로운 생명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데, 원인도 모른 채 아이가 생기지 않아 아무리 기도를 해도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며 원망하는 목소리를 종종 듣게 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바로 아이를 못 낳는 이들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독서에서는 삼손의 부모를,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부모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특별히 세례자 요한의 부모,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를 살펴보면 이들이 얼마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당시 즈카르야는 사제였고 엘리사벳은 구약의 대사제 아론의 후손이었습니다. 사제는 하느님을 섬기도록 봉헌된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이러한 사제 가문의 품위에 맞게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이었고 흠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즈카르야는 오늘 복음에 나오듯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도록 뽑힌 사제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로 아무나 할 수 없는 직분이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문화 안에서 결혼한 부부가 아이를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하느님의 벌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주인공이 되어 그들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도록 봉헌된 한 사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으니 사람들은 그가 흠 없는 사제가 아니지는 않을까 수군거립니다.
하느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살아왔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의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 간절히 아이를 주십사 청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저 침묵할 뿐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이제는 나이가 너무 많이 들어 더 이상 출산을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도 모든 것을 아는 주님이 계시니 계속해서 사제직을 수행하지만 그래도 하느님에 대한 의구심과 원망은 남아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 이제는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가 생겨도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 천사가 나타나 그들의 자손, 세례자 요한을 예고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나이를 운운하며 의심 섞인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국 천사의 말대로 이 예언이 이루어지고 그들은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아이를, 심지어 예수님의 길을 마련하는 매우 중요한 인물을 잉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즈카르야의 의심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역시 때때로 하느님을 믿는다고 이야기하며 간절한 소망을 이야기 하지만 인간의 잣대로 하느님을 재단하고 의심하곤 합니다. 그러다 막상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도 인간의 시선에서 그것을 바라봄으로써 미처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과 인간의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방식이 아닌 당신의 방식으로 기도를 이루어주시며 인간의 사소한 의심은 하느님의 계획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에 어두운 밤이 찾아온다면, 항구하게 흠없이 사제직을 수행한 즈카르야처럼 그 칠흑 같은 밤을 잘 이겨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에게 어려움이 있다면 겉으로는 그것이 아주 견고해 보일지 몰라도 그 안에는 분명 하느님의 도우심과 위로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견고해 보이는 시멘트도 시간이 지나면 갈라지기 마련이고 그 사이에서는 푸른 새싹이 돋아납니다.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은 전적인 하느님의 은총으로부터 생겨나고 그 열매는 사랑으로 맺어집니다. 인간의 의심과 실망 속에서도 끊임없이 준비되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의 잉태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영성체송은 이러한 우리의 기대를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떠오르는 태양이 높은 데서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 아멘.
=====================
[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즈카르야가 천사에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
우리나라 인구는 2024년 약 5,175만 명을 정점으로, 올해부터 감소하기 시작하여, 2025년 11월 기준 약 5,112만 명 수준이며, 현재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1,000만 정도로 전체 인구의 20%를 넘는 '초고령사회'로서, 2070년대에는 전체 인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고령자들은 ‘나이가 많다’는 고정관념을 거부하면서 ‘청년’처럼 사는 사람은 더 많아졌습니다.
나이가 많아진다는 것은 지혜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자신의 경험을 성찰하고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때 생깁니다. 경험이 많더라도 성찰하지 않고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고집만 세어집니다.
나이가 많아지면서 지혜로워지기 위해서 우리는 ‘작아지는 것’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작아지고’ 주님과 사람과 세상이 커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공간에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공간을 더 크게 만들고 나를 위한 공간은 더 ‘작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작아지는 것’은 스스로 져 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기거나 지면서 상처를 입는 힘의 경쟁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날 줄 아는 용기입니다. 사는 동안 경쟁에서 지면 죽을 것 같지만, ‘작아짐’을 선택하는 것은 두려움을 넘어 ‘죽으려 하면 살리라’는 말씀을 사는 것입니다.
‘작아지는 지혜’는 자신의 신념보다 말씀을 들어서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말하기보다 듣기를 더 하며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작아지는 삶은 말보다 행동으로 살기에 더 힘이 있습니다. 요란하지 않고 깊게 흐릅니다.
나이가 많아 생각이 경직되었기에 말씀을 듣고 믿지 못하였던 즈카르야가 말을 못 하게 되었습니다. 기쁜 소식을 들어도 말을 못 하게 된 즈카르야처럼 이제는 무엇보다 조용히 실천하는 몸짓으로 기쁜 소식을 전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나이 들면서 듣고서 물러 날 때를 아는 지혜보다 고집만 더 세어지는 "꼰데"같은 태도로 인해, 행여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있지는 않지 조심스러운 아침입니다. 차라리 말을 못 하는 사람처럼 되어 이 대림 시기에 말보다 행동으로 작은 사랑이나마 실천하는 마음을 조용히 다지는 아침입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루카 1,13)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요 주님의 성전!>
오늘 복음(루카 1,5-25)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인 주님의 성탄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 복음은 주님 성탄의 도구로 선택된 이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어제는 하느님의 선택된 도구인 '마리아와 요셉에 대한 말씀'이었고, 오늘 복음은 구세주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에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과 그의 부모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 다 나이가 많았다."(루카 1,6-7)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을 할 때, 주님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루카 1,13)
주님께서 의로운 이들을 당신 구원 사업의 도구로 쓰십니다. 능력을 보시지 않고,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부르십니다. 의로운 이들은 단순하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천국)는 의로운 이들의 나라, 의로운 이들이 넘쳐나는 나라입니다.
우리 안에 의로운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바로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가 되고, 주님의 성전이 되게 합시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 천사의 아룀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시어, 성령의 빛으로 주님의 성전이 되셨으니, 저희도 동정 마리아를 본받아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본기도)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마태 1,14)
하느님 때는
늘 정확합니다.
늦은 것처럼 보이지만,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삶은
가장 알맞은
순간에 열렸습니다.
즈카르야의 침묵은
실패가 아니라
준비입니다.
말하지 못하는 동안
그는 듣는 법을
배웁니다.
설명하지
못하는 동안
그는 하느님께
맡기는 법을
배웁니다.
구원은 서둘러
설명되는
사건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잉태되고
순종 속에서 자라나며
때가 차면
기쁨으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탄생입니다.
우리는 종종
지금을 원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때가 찼을 때를
아십니다.
기다림은
멈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맡기는
적극적인 선택입니다.
한 생명의 탄생은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와 여전히
함께하고 계심을
말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늘 약한 것,
작은 것,
말 못 하는
생명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신앙은 언제나
혼자가 아니라,
함께 견디고
함께 기다리는
삶 안에서
자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완벽한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다릴 줄 아는 사람,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떠나지 않는
사람을 통해
당신의 구원을
준비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자리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이미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가장 깊은 기적은
하느님을
떠나지 않는
바로 오늘
이 순간입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