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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시 여행] 박달재의 고려 영웅 김취려 장군 전적비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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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시 여행] 박달재의 고려 영웅 김취려 장군 전적비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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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재의 '박달'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신성한 神木[신목]을 뜻하는 신단수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은 무리 3천 명
을 거느리고 태백산정에 있는 신단수 아래에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후 학자들은 '박달'을 박달나무가
자라는 식생과 관계없이 하늘에 제사 지내는 신령스러운 곳으로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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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록]을 봐도 '제천과 충주에 있는 천등산, 인등산, 지등산이 천하의 명당'이라고 쓰여 있고 실제로 박달재에서
시랑산 정상을 향해 가다보면 단군 비석이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이 많이 깃든 장소가 어떻게 남녀 사랑이 담긴
전설의 장소로 변했을까? 이는 결과적으로 제천시의 콘텐츠 마케팅이 한몫 했다고 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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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콘텐츠 마케팅이란 단순한 광고가 아닌, 유용하고 재미있는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고객의 관심을 끄는 방법 중
하나이다. 다시 말해서 블로그, 유튜브 영상, 인포그래픽 같은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브랜드[박달재]와의 관계를
형성하고 신뢰를 쌓아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장기적으로 브랜드 충성도를 높이는데 가장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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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박달재의 박달과 금봉 이에 관해서는 앞서 박달재 여행기에서 충분히 설명을 하였기에 생략하기로 한다,
그러나 박달재는 박달과 금봉이의 사랑이야기 외에도 제천과 충주를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서 우리나라 역
사속 전쟁사에서도 빠짐없이 등장하는 곳 중 한곳이 박달재 이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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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김취려 장군은 철저히 군법을 지키고 남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는 기록
들이 있다. 무신 정권 당시 난장판이던 고려를 지켜낸 몇 안 되는 무신정권 시대의 위인으로 볼 수 있는 김취려장
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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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박달재 정상에는 안국사 주지스님이 건립한 '고려명장 김취려장군 대첩비' 등이 있어 800여 년 전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알리고 있을 뿐이다. 10여 년 전쯤엔 장군의 동상도 있었지만 동상도 없어지고 지금은 아쉽게도
모두가 문을 닫아버려 안타까움만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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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쟁사에 길이 남아있는 박달재의 주인공은 고려 金就礪[김취려] 장군이란 걸출한 무장이 있었다. 오늘의 주
인공 박달재 김취려 장군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전쟁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역사 속 인물 중 절대 권력을 행
사했지만 마지막 욕망을 절제해 권력을 유지한 인물이 있다. 바로 고려 무신 정권에서 무려 62년을 집권한 최 씨
정권의 시작점인 ‘崔忠獻[최충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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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강력한 권력자였다. 무장 출신인 그는 무신의 반란, 혼란한 권력 교체기를 수습하고 정권을 수립했다. 최충
헌이 돋보이는 것은 4대, 62년간 세습된 최 씨 무신 정권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권력 세습이 국왕의 전유물이던
시대에 최 씨 무신 정권은 왕실을 대신해 독보적인 존재로 고려를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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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명장 김추려 장군 대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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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시 뛰어난 지략과 용병술로 거란을 물리친 김취려 장군은 전투에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용장이었지만 결
코 호전론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일찍이 몽골과 형제 맹약의 체결을 가져왔고 이에 따라 한동안 고려는
몽골로부터 군사적 압박을 모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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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최충헌은 영웅이나 위인은 분명 아니다. 오히려 그의 무신 정권이 고려 멸망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최충헌의 존재로 고려가 멸망한 것은 아니다. 이미 고려의 국운은 기울고 있었고 거란과 몽골의 기
세를 고려가 막아내기에는 힘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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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난세에 영웅이 나는 것처럼 이때 당시 고려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영웅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金就礪[김취
려] 장군이다. 김 장군이 활약한 가장 유명한 전투는 제천 박달재와 평양 강동성 전투외 5건의 전투였다. 김추려
장군은 7번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모두 승리 하였다. 하지만 울주 언양 출신의 명장인 김 장군의 생애와 업적은
오늘날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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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나 문헌을 보면 박달재는 [고려사]에 김취려 장군이 1218년 7월 3만의 거란 군을 크게 물리친 곳으로 기
록돼 있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박달재 내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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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장군을 만나보기 위해서는 시간을 거꾸로 돌려 고려 말 1217년(고종 4) 음력 7월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大遼收國[대요수국]을 세운 거란의 고려 침공은 선발대와 후발대, 투 트랙으로 펼쳐졌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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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1차로 거란군 승상 야율걸노가 이끈 선발대[5천여 명]를 고려군은 평북 향산에서 겨우 꺾을 무렵 곧바로 야
율금시가 이끄는 거란 후발대[10만여 명]가 내려온다. 청천강·대동강 방어선이 뚫리고 1218년 3월에는 개경 등
경기 일대가 위협받는다. 거란군은 앞서 전투 등에서 많이 사장 자가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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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제정세를 꿰뚫어 보고 몽골과 화평관계를 체결하면서도 기개를 잃지 않았다"며 "무인정권 시절 권력을
좇는 무리들과는 달리 오직 국가와 백성을 위해 전쟁터를 누볐던 애민정신은 당시 큰 귀감이 됐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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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열공(威烈公) 김취려(金就礪) 장군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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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군은 방비가 탄탄한 개경을 에둘러 피하고 기수를 돌려 남하 5월에 3만여 명의 거란군의 주력부대가 원주를
점령한다. 충주와 제천이 눈앞이었다. 이곳이 거란 군에게 넘어가면 경상·전라·충청도에서의 후방 지원이 끊긴다.
이때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거란을 물리친 영웅이 바로 김취려 장군이라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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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은 1차에서 거란군 선발대 300여명을 매곡에서 제압하고 2차로 거란군 3만의 주력부대를 맞이한다. 이때 고
려의 金就礪[김취려] 장군이 이곳 박달재의 지세를 이용하여 거란에 대승을 거뒀다는 역사적인 사실은 [고려사]
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 승리로 예기가 꺾인 적군은 대관령을 거처 국경 밖 여진 땅으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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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는 박달과 금봉이의 거대 동상 뒤편에 전망대 가는길에 보면 외소하게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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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고려군에 붙잡힌 거란족 사람들이 박달재 인근 지금의 봉양읍 공전리에 정착하였는데 이곳을 '글안장터'로
일컫는다. 그러나 거란군은 바로 세달 뒤인 10월, 갈라현 여진세력을 지원군 삼아 거란유민은 고려영내를 재 침
범 했다. 쫓고 쫓기고는 전투가 이어지는 가운데 설상가상 이때와 동시에 몽골제국이 남진하기 시작한다.[1차 여
몽전쟁 1218년 음력 5월] 1차 고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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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41년 후인 1258년(고종 45)에도 고려의 삼별초군이 박달재에서 몽골군을 격퇴하고 포로를 구출했다는 기
록 등이 남아있다. 이렇게 외세의 침략에 방패 구실을 하던 박달재는 항일 의병전과 현대의 6·25 전쟁 때도 중요
한 전략적 요충지가 되기도 했던 곳이 바로 오늘 유랑자가 방문한 오늘날 박달재의 모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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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취려(金就礪, 1172~1234)는 언양 출신으로 1216~1219년 두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격퇴하고 몽골과 형
제의 맹약을 체결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공적을 인정받아 관직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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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열공(威烈公) 김취려(金就礪)의 묘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산 15번지에 있는 고려 후기 무신 김
취려의 무덤이다. 김취려의 묘지명에는 강화 진강산 서쪽에 묘가 있다고 전하는데, 울산에 묘소가 조성된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 울산과 강화 묘소 모두 김취려의 무덤으로 인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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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미라면 천등산과 박달재가 같이 붙여져 언급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천등산이 신비롭게 보호되는
속에 시랑산 박달재에서는 크고 작은 역사적인 사건들이 많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박달재 여행 때 관심
\있는 사람들을 보았겠지만 울고 넘는 박달재에 가면 정상 부근에 잘 살펴보면 안국사라는 하나의 절집과 장군의
사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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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은 들어갈 수 없이 입구를 막아 놓았다. 그렇다. 박달재에는 김취려의 후손이 세운 ‘사당과’ ‘김취려 장
군 역사관’이 있다. 20여 년의 세월 속에 빛이 바래고 있고 낡은 나머지 안타깝게도 무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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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현재 언양金씨 중시조, 위열공(威烈公) 김취려(金就礪)장군(1172~1234) 언양 산소 진위 논쟁이 뜨겁게 달
아오르고 있다. 논쟁은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가 지역일간지에 기고한 글에 대한 송수환 전 울산대 연구교수의
반론에서 시작됐다. 반론에 대한 재반론이 이어지면서 논쟁은 진검승부로 치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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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 시대를 다시 한 번 복귀해보자. 12~13세기 초는 금[여진]과 거란, 몽고가 북방의 패권을 두고 그야말
로 절체절명의 생존 게임을 벌이고, 고려와는 줄곧 우호 관계를 유지해왔던 한족의 나라 宋[송]은 없는 거나 마찬
가지였고 금나라 역시 말기였던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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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대륙의 형세가 복잡하게 변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12세기 금이 흥기했을 때는 전쟁도 치르지 않고 금에
사대의 예를 표했을 만큼 유연했던 고려지만 13세기엔 몽고의 침입을 받고 만신창이가 된다. 이 사이 고려엔 무
슨 일이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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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재는 한말 항일 의병전과 현대의 6·25 전쟁 때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던 곳이다. 호좌의 진이 충주
부를 공격하기 위해 넘었던 고개였으며, 제천으로 물러선 이후에는 중요한 방어선 역할을 했다. 6·25전쟁 때는
충주에 주둔하던 미군이 이 고개를 넘어 제천 쪽으로 건너와서 작전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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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랑산 단군 제향비 3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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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단군대황조성령(國祖檀君大皇祖聖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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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산성화신령 국사산왕산신지령 (白雲山聖化神靈 國祠山王山神之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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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국 여진·거란·몽고 틈바구니에서 나라 지켜낸 장군! 몽고 침입 직전 고려의 역사를 김취려(1172∼1234) 장군
의 생애를 통해 되돌아본다. 김취려는 구국의 영웅이지만 그동안 강감찬·이순신 장군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조명
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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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6년 칭기즈칸이 몽고족을 통일하고 칼끝을 금에 겨누면서, 금의 국력은 급속히 약화된다. 요 멸망 후 금에 복
종하고 있던 거란족은 이 틈을 타 몽골의 허락을 받아 大遼收國[대요수국]을 세운다. 그러나 몽고의 칼이 거란족
이라고 비껴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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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사령영사령(三仙四靈令司靈),이라고 쓰인 세 개의 비석이 노송 및 바위와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
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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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박달재에는 박달원(朴達院)이 설치되어 많은 나그네가 쉬어 가는 시설로 활용되었다.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과거시험과 얽힌 슬픈 사연은 그러한 과정에서 남겨진 이야기이다. 박달재 정상에는 서낭당이 있어
나그네들의 소박한 소원을 들어 주었고, 아래에는 국가의 곡식을 보관하는 원서창(遠西倉)이 설치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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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는 요나라 유민들이 세운 대요수국이 자신의 통제권을 벗어나기 시작하자 사정없이 거란을 두들겼다. 견디
다 못한 거란인 들이 1217년 압록강을 넘어 고려 북방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니 로마 제국 말기의 연쇄 '민족 대이
동'을 연상케 하는 형국이었다. 당시 고려는 최 씨 집권 시대로 무신정권 후반기였다. 1231년 원 오고타이[몽골 2
대칸]가 대대적으로 고려를 침략하기 불과 15년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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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취려는 이 때 후군병마사로 참전해 제천 박달재 전투에서 3만여 명에 이르렀다는 거란 군을 물리쳤다. 거란은
다음해에도 쳐들어와 동주[東州·철원]을 함락했으나, 상장군에 임명된 김취려는 또 다시 거란 병사를 쫓아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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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유랑자는 맛 탕방 요릿집에서 가서 먹어 보고 별로이면 별도의 맛집 글을 올리지 아니하고 그냥 사진으로
만 담아 낸다는 점을 아시면 될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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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은 다음해인 1219년에 또 쳐들어왔는데 이때 침입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북방에서부터 거란족을 추격해 온
몽고군이 함께 고려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김취려가 거란 군을 쫓아 강동성까지 진군한 몽고 장
군 합진찰라[哈眞札剌]와 대면했고, 강동성의 거란 군에게 승리를 거둔 뒤 몽고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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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을 마음껏 두드리고 세계의 패자로 화려하게 등극한 몽고와, 3차례에 걸쳐 침입한 거란을 끝내 패퇴시킨 고
려가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한 것이다. 당시 김취려가 몽고와 맺었던 동맹관계는, 고려의 항복 뒤 사사건건
불거진 立城策動[입성책동·고려에 원의 행정기구인 '성'을 설치해 원과 고려를 병합하자는 주장]을 분쇄하는 논리
의 근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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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원과 고려를 수차례 오가며 입성책동을 저지했던 유학자 이제현은 "원과 고려를 병합하는 것은 고려와 형
제의 언약을 맺은 태조[칭기즈칸]의 뜻에 어긋난다"는 논리를 폈다. 북방과 중원의 세력 교체기는 늘 불온했고, 한
반도는 그때마다 암울한 전쟁의 그림자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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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취려 장군은 거란의 잇단 침입을 막아낸 것은 물론 몽고라는 거대제국의 세력 확장에 맞서 뛰어난 외교술로 고
려의 안녕을 지켜낸 구국의 영웅이었다. 결과적으로 김취려 장군은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가진 장군이었을 뿐 아
니라 선견지명을 가진 외교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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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시간표는 2024년 말기준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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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시간표는 2024년 말기준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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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김취려 장군은 최우 무신정권이 고종 19년[1232년 6월] 몽고의 2차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고려의 수도를 천
혜의 요새인 강화로 천도함에 따라 김취려 장군도 강화로 이주해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까지 올랐으나, 1232년 8
월 여몽 2차 전쟁 발발후인 고종 21년[1234.5월] 63세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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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마지막 일생은 이렇게 강화도에서 끝을 맺는다. 장군은 사후 위열[威烈]의 시호를 받았고, 고종[高宗]의 묘정
에 배향되었다. 이때 무신정권도 함께 몰락하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김취려 장군의 묘가 2개가 있는데 하나는
그의 고향인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산산15,(울산시 기념물)있으며 또 하나는 그가 죽은 인천시 강화군 양
도면 하일리 산 71번지(인천시문화유산자료)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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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시간표는 2024년 말기준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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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가을 박달재 에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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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가을 박달재 에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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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무덤이 두 개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이유는 역사적 상황과 처지에 따라 다를 것이다.
고려후기 유학자 ‘백이정’묘도 보령과 남해에 있고, 고려 제34대 군주이자 마지막 군주였던 ‘공양왕’ 왕릉도 삼척
과 고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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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생을 마감한 사육신 가운데 대표 격인 ‘성삼문’ 묘는 노량진과 논산에 있다.
그리고 세계 해전 사에 길이 남을 충무공이순신장군의 묘도 남해의 초장 지와 완도 고금도와 목포 고하도의 중간
기착 묘지, 그리고 아산의 묘처럼 많은데 전쟁 중에 한 번에 옮기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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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가을 박달재 에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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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재 김추려 장군 전적비 찾아가기
*주소: 제천시 백운면 박달로 231
*[지번]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 705
*관광안내소 043-642-9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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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메모
▶1:당일 여행 코스=정방사→능강솟대문화공간→청풍호 드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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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박 2일 여행 코스=의림지→박달재→청풍호자드락길 6코스 괴곡성벽길→(숙박)→정
방사→능강솟대문화공간→청풍호관광모노레일(비봉산)→청풍호 드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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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박 3일 여행 코스
★.해설사가 직접 동행하는 가스트로 투어.[제천미식이와 떠나는 셀프맛여행]★
►체험안내: 가스트로 A, B코스 (각 코스별 식당 5곳)~사전예약 필수
-A코스 : 관계의 미학 -덩실분식 찹쌀떡 -마당갈비 영양밥 -빨간오뎅 -샌드타임
-B코스 : 대장금식당 -상동막국수 -이연순사랑식 -제천 맥주 -빨간오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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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삼한의 초록길→의림지→역사박물관 →솔밭공원→비룡담 저수지(생태숲)→ (숙박)
2일차:가스트로 A.B →중앙시장→달빛정원 → 교동 민화마을 →관란정 → (숙박)
3일차:한방엑스포공원 →탁사정 →배론성지 →박달재 →목굴암 →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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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가는길
▷*버스=서울-제천,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30분 간격(06:30~21:00) 운행, 약 2시간 소요.
▷*열차[Itx.]무궁화=청량이-제천역 청량리 역에서 2시간 견격, [KTX 는 1시간 간격 운행]
약 1시간 53분 소요.[KTX는 1시간 소요]
►철도고객센터는 1544-7788,1588-7788이다.
▷*자가정보= 경부(중부)고속도로→영동(중부내륙)고속도로→평택제천고속도로→중
앙고속도로 → 남(북)제천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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