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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9일 인천공항을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 몇 주 후면 온 우리나라는 불볕더위와 열대야로 뒤덮일 것이다. 이번 미국 클라이밍 투어는 캘리포니아의 타퀴즈(Taquiz), 조슈아트리(Joshua Tree), 비숍(Bishop), 하이시에라(High Sierra) 순례로 스케줄을 짰다. 그중 인크레더블 헐크(Incredible Hulk)가 타깃이다.
시에라네바다(Sierra Nevada)의 인크레더블 헐크는 유튜브에 올라 있는 등반 영상 하나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때 최고의 솔로 클라이머였던 남자와 잘 나가는 여자 볼더러가 함께 인크레더블 헐크를 등반하는 영상이었다.
그 영상의 내용이 어떤 건지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시에라네바다의 수많은 암봉 중에서 그들은 왜 유독 인크레더블 헐크를 택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얀 눈 사이로 우뚝 솟은 수직 바위벽들, 끝없이 펼쳐진 시에라네바다의 장대한 아름다움은 한동안 나를 사로잡았다.
한국에서 김진모 선배와 강레아 사진작가가 합류해 입산허가 신청일에 맞춰 미국 북동부에 위치한 시에라네바다로 향했다. 해발 4,000m가 넘는 봉우리들이 여럿 있는 산맥이지만 고온 건조한 기후와 강렬한 태양은 그 영역을 넓혀 최고봉 마운트 휘트니(Mt. Whitney·4,421m)조차 눈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인크레더블 헐크는 요세미티국립공원의 북쪽 경계에 있다. LA에서 등반 관문인 브리지포트(Bridgeport)까지는 자동차로 9시간 넘는 거리다. 시에라네바다산맥 우측 종단도로인 395번 도로를 타고 가는 동안 하이시에라의 수많은 벽을 볼 수 있고 볼더 지역으로 유명한 비숍을 지나게 된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캘리포니아 로컬 김명철씨 안내로 비숍의 버터밀크(Buttermilk Boulders)로 향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곳이거니와 기회가 된다면 많이 보고 많이 경험해야 한다. ‘다음에 가지 뭐’ 하고 지나쳤다가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좀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 때가 많았다.
새벽 4시에 출발한 우리는 늦지 않게 트윈레이크(Twin Lakes)야영장에 도착할 수 있어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7월의 마지막 날을 아쉬워하는 것처럼 열풍이 버터밀크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많은 곳을 등반해 보고 싶었지만 비시즌이었고, 이번 등반의 목표는 따로 있었기에 대표적 루트인 아이언맨 트래버스(Iron Man Traverse, V4)를 오르는 것으로 만족하고 다시 브리지포트로 향했다.
넓은 초지대를 만들어 축산업을 하는 브리지포트마을을 지나자 후버 와일더니스(Hoover Wilderness)의 암봉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 높은 봉우리 중 하나가 우리가 오를 인크레더블 헐크겠지’ 하면서 연신 어느 면일까 하며 상상해 본다.
브리지포트에서 20km 거리의 트윈레이크에 도착해 예약해 둔 파하캠프장(Paha Campground)에서 야영과 등반 준비를 하고 계획을 세우니 어느덧 시에라의 밤하늘에 은하수들이 펼쳐져 있었다.
하루에 8명만 야영객 허가하는
야생의 지역
8월 1일 아침, 브리지포.트 레인저 사무실을 다시 찾았다. 5명을 입산 신청했으나 4명만 허가가 나온 상태라 한 명이 더 허가를 얻어야 했다. 후버(Hoover) 야생지는 등반 허가뿐만 아니라 출입과 야영 허가를 받아야 하는 곳이다. 이 지역의 하루 허가 인원은 8명이며 당일 출입은 별도의 허가가 필요하지 않다. 미리 허가를 얻지 못했어도 선착순으로 입장할 수 있지만 하루 허가 인원에 한해서다. 시즌에는 최소 2주 전에 신청해야 원하는 날짜에 입산이 가능하다.
기다림 없이 1명 추가 허가를 받고 야생지역에서의 주의 사항에 대해 설명을 듣는다. 야생동물의 피해를 받지 않으려면 식량을 어떻게 보관해야 하는지와 산에서 지켜야 할 기본사항들이다.
모노 빌리지(Mono Village)에 주차한 후 짐을 챙겼다. 3일 동안 머무는 데 필요한 취사야영장비와 식량, 그리고 등반장비를 담은 배낭은 제법 무게가 나갔다. 키 큰 소나무 숲 사이로 나 있는 트레일을 따라 1시간 반 정도 가면 풀밭이 군데군데 나오면서 시야가 트이기 시작한다. 리틀 슬라이드계곡(Little Slide Canyon)에 가까워지면 풀밭을 가로 질러 로빈슨 크릭(Robinson Creek)을 건너야 하는데 비버댐이 있어 쉽게 건널 수 있었다.
가파른 사면을 오르니 시야가 더 넓어지면서 인크레더블 헐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상에서 바닥까지 내리 뻗은 수직의 크랙들. 이런 곳에 모든 것을 압도할 만큼 웅장한 암봉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5시간 동안의 어프로치가 제법 고도를 올려서인지 잔설들이 남아 있고 해는 건너편 산을 넘어 가고 있다. 쌀쌀해 온도계를 보니 10℃를 가리킨다. 해발 3,000m에 가까우니 해가 들지 않으면 한기가 느껴진다.
60년 세월 지나도 초등 이후의 등반 흔적 보이지 않아
내일은 몸을 풀고 촬영도 할 겸 헐크에서 가장 쉬운 루트인 레드 다이히드럴(Red Dihedral)을 등반하기로 했다. 일찍 저녁을 먹은 뒤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두 여자 클라이머가 찾아왔다. 내일 몇 시에 갈 것인지 그리고 몇 명이 등반할 건지 물어왔다. 그들도 우리가 계획한 레드 다이히드럴을 오르려 했고 먼저 가고 싶어했다. 두 명이라 먼저 출발하면 문제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여기 올 정도면 등반은 좀 할 것 같아 선뜻 먼저 가라고 했다.
2일 새벽, 밤새 불어대던 바람이 잦아들고 날씨 또한 청명해졌다. 계획대로 그들은 벽을 향해 갔고 뭔가 잘 진행된다 싶더니 출발점을 찾지 못해 헤매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의 등반 속도는 생각보다 너무 느려서 우리가 오전 7시30분경 출발지점에 도착했을 때도 제2피치를 가지 못했다.
오늘 등반은 김명철, 김진모, 강레아씨가 한 팀을 이루고 아내 이명희와 내가 한 팀으로 파티를 이뤄 하기로 했다. ‘좀 기다리면 올라가겠지’하고 기다렸지만 그들은 좀체 속도를 내지 못했다. 그들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무어라 할 수도 없었고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12시30분 드디어 4피치의 레드 다이히드럴 구간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사이 한계에 다다른 그들은 하강하겠다고 한다. 한편으로 불편한 마음도 있었지만 최선을 다해 등반하는 모습이 정말 멋지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들이 내려가길 정말 잘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이곳은 우리나라와 달리 기존 루트들은 확보지점이 없는 곳이 대부분이어서 스스로 확보지점을 만들어 확보를 보고 탈출하려면 장비를 버리면서 하강해야 한다. 이곳에 오기 전 타퀴즈에서 최초의 5.9 난이도 루트인 ‘오픈북(Open Book)을 등반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1952년 로열 로빈슨이 오픈북을 초등하고 6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어떠한 추가 확보물도 보이지 않았다. 초등 전의 바위처럼 사람이 남긴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강지점이 없는 루트라 우리 장비로 하강 포인트를 만들고 하강 후 로프를 풀어 주었다. 이제 빠른 속도로 정상을 향해 등반해 가는 일만 남았지만 벌써 오후 2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내년엔 한방에 그놈을 해치울 터
앞으로 8피치가 남아 있고 분명 정상에 도착할 때쯤 어두워지리라는 예상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등반 난이도가 낮지만 루트 전반에 걸쳐 난도가 나오면서 루트길이가 길었다. 길 찾기의 어려움은 크지 않지만 3,000m가 넘는 곳에서 고소순응 없이 등반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분명 더 높은 난도의 암벽등반을 하고자 한다면 적응을 마치고 등반해야 할 것이다.
10피치의 등반을 마치면 북동릉을 따라 정상을 향하게 된다. 정상까지는 비교적 넓은 크랙과 침니로 형성되어 있다. 침니를 통과해 개구멍을 빠져나가면 모든 피치가 끝나고 10여 m만 더 오르면 정상이다.
텅 빈 정상에는 바람만 불고 있었다. 다섯 명 모두 정상에 올랐을 때는 이미 황혼 빛마저 사라졌다.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하산루트인 남릉으로 내려갔다. 클라이밍 다운으로 쉽게 내려갈 수도 있었지만 어둡고 처음 가는 길이라 먼저 명철이 로프 확보를 받으며 클라이밍 다운해서 내려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하강해서 내려갔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이 클라이밍 다운을 하며 내려갔다. 그래야 좀더 안전하고 로프 엉킴이나 낙석이 적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명철은 어둠 속에서도 하강 지점을 예상보다 쉽게 찾아냈고, 그는 다시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로프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모르는 길을 먼저 내려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는 언제나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든든한 파트너이면서 좋은 친구였다. 우리는 내년 등반계획도 함께 세웠다. 그는 미국에서 나는 한국에서 각자 땀을 흘린 후 목표 삼은 한 곳을 올라갈 것이다. 아주 멋지게 한방에 그놈을 해치울 것이다.
새벽 2시가 넘어서야 더 이상 로프를 쓰지 않는 지점에 다다랐다. 비록 손발이 붓고 몸은 조금씩 지쳐갔지만 밤하늘 위로 더욱 빛나는 별처럼 모두의 눈은 빛났다.
등반 팁
인크레더블 헐크
높이 해발 3,438m 등반표고 450m
위치 Little Slide Canyon, Hoover Wilderness, Humboldt-Toiyabe National Forest 북38?ª07'14.93" 서119?ª24'49.39"
등반루트 현재 13개의 루트가 있음. 햇빛은 12시 이후 듦.
등반난도 루트별 최고난도 5.10~5.13까지 다양.
등반시즌 6월 말~9월 초. 해발 3,000m 이상이므로 눈이 많지 않고 기온이 낮지 않을 때가 등반하기에 적당하다. 8월 초 밤 기온이 5~10℃였다.
하강 정상에서 남릉을 따라 100여 m 클라이밍 다운한 다음 하강한다. 하강 포인트가 설치된 루트로 전면 하강하는 방법도 있다. 3~4시간 소요.
등반장비 루트마다 조금씩 다르나 2조의 캠과 너트가 필요하다.
접근방법 트윈레이크의 길이 끝나는 모노빌리지에 주차한 다음 바니 레이크 트레일(Barney Lakes Trail)을 돌아 걸어가면 로빈슨 크릭(Robison Creek)이 나오고 1시간 정도 지난 뒤 리틀 슬라이드 캐니언(Little Slide Canyon) 입구가 보인다. 넓은 풀밭을 왼쪽으로 가로질러 로빈슨 크릭의 물을 건넌다. 벽까지는 보통 3~4시간, 짐이 많으면 5시간 이상 소요된다.
야영 텐트 칠 곳은 많으며 마모트(marmot)가 있어 음식물 보관에 주의해야 한다.
입산허가 ‘http://www.fs.usda.gov/detailfull/htnf/home/?cid=stelprdb5238673&width=full’에서 신청서를 내려 받은 후 작성해서 브리지포트 레인저(Bridgeport Ranger) 사무실에 우편으로 보내야 한다. 최소 2주 전 신청해야 원하는 일정을 얻을 수 있다. 홈페이지에 여러 주의사항에 대해 잘 나와 있다. 허가 수수료는 인당 3달러다. 입산신청을 못 했을 경우 사무실에서 선착순으로 허가 받을 수 있다. 주소 Bridgeport Ranger District HCR 1 Box 1000 Bridgeport, CA 93517 (760) 932-7070
등반정보 High Sierra Climbing 가이드북, http://www.dreaminvertic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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