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재떨이에 쌓인 담배꽁초의 수를 세었다. 여덟. 지금 물고 있는 것까지 합하면 아홉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담배연기를 피해 몸을 왼쪽으로 틀었다. 머리에 꽂은 상중(喪中)을 표시하는 리본이 가늘게 흔들렸다. 여자의 어머니는 주민등록상으로 1946년 3월 19일 생이었다. 죽기에는 조금 이른나이군.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는 서류를 한 장 넘겼다. 사망 원인은 화재에 의한 질식사였다. 경찰은 기도를 하기 위해 켜 두었던 촛불이 커튼에 옮겨 붙으면서 불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 그러니까 17일이죠, 그날 어머니는 헬스클럽에 등록을 했어요. 그것도 세 달치를 한 번에 냈다구요. 세 달치를. 여자는 그에게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이면서 세 달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6개월 과정의 제과제빵학원에 등록한 사람도 있었죠. 그사람은...... 그는 여자가 매달리고 있는 끈을 끊어 버리고 싶은, 끈 따위는 끊어지면 그만일 뿐 아무 희망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거기까지만 하자.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 그래요. 여자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떡이며 대답했다. 그렇다니. 그는 여자의 대답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뜻인지, 그게 자기와 무슨 상관있냐는 뜻인지. 여자는 실망하는 기색도, 당황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서류 한 켠에 이렇게 적었다. 자살이 아닐 가능성은?
죽기 한 달 전에 제빵학원에 등록했던 남자는 사업에 실패한 중소기업 사장이었다. 중학교 1학년인 아들과 초등학교 2학년인 딸, 그리고 부인 앞으로 남겨진 보험금은 모두 13억. 그중에서 그의 회사가 지불해야 할 돈은 8억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한푼의 보험금도 받지 못했다. 교통사고를 위장한 자살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유가족들은, 사업에 실패한 후 한동안 실의에 빠져 지낸 것은 사실이었지만 최근에는 새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누구보다도 강했다고 주장했다. 남자는 제과제빵학원에 등록을 했고, 자격증을 따면 빵집을 차릴 것이라며 인근 빵집들의 사진을 찍어 두기도 했다. 노트에는 디자인이 독특한 빵집의 사진이 가득 붙어 있었다. 남자는 시 외곽의 국도에서 교통사고 다발지역이라고 쓴 경고문을 들이박고 죽었다. 사고는 너무 지나치게 깨끗했다. 비 오는 날이었고, 1년이면 열 명은 족히 죽는다고 알려진 도로였다. 새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너무 강했으므로 남자의 죽음은 더욱 빛났고, 사람들에게 도대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회의를 느끼게까지 했다. 그래서 그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남자는 왜 교통사고 다발지역이라는 경고문을 들이박았을까?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결코 자살이 아니라고. 단순한 교통사고 로 봐달라고. 남자는 죽으면서까지 완전한 증거를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1 윤성희의 그림자들
것이실수였다. 교통사고 다발지역. 그것은 죽은 남자가 남긴 유서였다.
여자의 어머니가 가입한 보험은 모두 네 개였다. 그는 머릿속으로, 여자가 탈 수 있는 보험금이 얼마나 되는지를 계산하였다. 1억과 1억 5천만원, 그리고 20년 동안 매년 지급되는 돈이 각각 300만 원과 400만 원이었다. 보험금을 노린 사건치고 큰 액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월 납입료가 많은 부담감도 불구하고 사망시 유족에게 지급되는 금액이 큰 상품에만 강비했다는 것, 노후보장을 위한 연금성 보험들 두 개나 가입했다는 것이 의심스럽다며 과정이 그에게 이 사건을 넘겼다.
왜 연금성 보험을 두 개나 가입했을까요?
여자는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무엇인가를 찾았다. 박희영 씨네요. 어머니에게 보험을 권했던 설계사분 이름이요. 그분이 그러시는데, 어머니가 자식이라곤 딸이 하나밖에 없어서 연금이라도 많이 가입해 둬야겠다고 했대요.
대부분의 유가족들은 사고였는지 자살이었는지를 알고 있다. 어떤이들은 죽기 전까지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으려 애를 쓰겠지만, 자살을 생각한 순간부터 자기의 몸에서 무엇인가가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은 막지 못한다. 그래서 가족들은 자신의 배우자 혹은 부모님이 비어 가고 있다는, 언젠가는 허공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 할 수 있다. 물론 그가 만난 유가족 중에 그것을 인정하려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서 그는 자기가 밝혀 낸 자살 중에서 , 몇 건이 진짜였는지는 모른다.
그는 서류에 55세라고 적고는 그 위에 동그라미를 여러 번 그렸다. 주민등록상으로 55세가 된 날, 여자의 어머니는 죽었다. 두 개의 연금보험은 55세를 기준으로 각각 100만원이 더 지급된다. 그러나......시집도 안 간 딸을 놔두고 자살한 어머니. 그럴 정도의 절박한 상황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5년만 더 있으면 매달 40만원의 연금이 지급될 것이고, 그러면 멋진 노후를 설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말 제 어머니가 자살을 했다고 생각하세요?
그는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4억이나 되는 보험금을 놓칠지 모르는데도 여자는 초초해하질 않았다. 여자는 말을 할 때마다 오른쪽 입꼬리를 살짝 올렸는데, 그럴 때마다 오른쪽 눈가에 옅은 주금이 생겼다. 그는 서류를 덮으면서 이 일은 그만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설사 자살이었다 하더라도 입증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는 여자처럼 입꼬리를 한번 실룩거린 다음,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만일 자살이 아니라고 확신한다면, 저를 설득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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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단 기어가 있는 자전거, 라고 그녀는 수첩에 적었다. 그러고는 그 옆에 괄호를 치고는 자전거 색에 맞는 운동복이라고 썼다. 스포츠용품점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수첩 한 장이 가득 채워졌다. 생활용품이 있는 5층으로 올라가면서 그녀는 수첩을 다음장으로 넘겼다. 백화점에는 유리창이 없다. 그녀는 백화점 식품매장에서 3년을 일했지만, 오늘에서야 유리창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식품매장은 지하 1층에 있으
2 윤성희의 그림자들
니 유리창 따위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3층매장을 돌다, 그녀는 비가 오는 날이면 백화점 정문에서 나눠 주는 우산 덮개 비닐이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비가 오나, 그녀는 고개를 들어 밖을 보려했지만 어디에도 유리창은 없었다.
오늘부터 13일 간 백화점은 세일에 들어갔다. 11시부터 있었던 반짝 세일에서, 그녀는 100상자 한정으로 한우 갈비세트를 판매했다. 물건은 15분이 지나지 않아서 동이 났고 물건을 사지 못한 사람들은 그녀에게 항의를 했다. 발단은 줄을 섰을 때는 분명히 100명 안에 들었다는 한 아주머니로부터 시작되었다. 아주머니는 자기가 분명히 87번째였다고 우겼고, 그 말에 아주머니가 앞줄에 서 있던 사람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물건은 100개가 아니었을지 모른다고 누군가 말하자, 사람들은 소비자권리를 운운하며 책임자를 찾았다. 관리자가 나서 해명을 하는 동안 그녀는 탈의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1층부터 쇼핑을 하기 시작했다.
5층에서 한 직원이 그녀를 알아봤다. 언니, 이 시간에 웬일이야. 몇 달까지만 해도 지하 식품매장에서 같이 일을 하던 직원이었다. 나 백화점 그만뒀어. 그녀는 유니폼을 입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청바지를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그건 그렇고, 여긴 왜 창문이 없니. 언닌 그것도 몰랐어. 백화점에는 원래 창문이 없어. 시계도 없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쇼핑하라는 뜻이잖아.
그녀는 패스트푸드점에 앉아서, 도로 건너에 있는 공사중인 건물을 바라보았다. 6층 건물이 철근 구조물에 싸여 있고 인부들이 매달려 있었다. 건물은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겉만 보수를 하는 중이었다. 2층 미용실에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저 건물 지하에는 카페가 하나 있었다. 자리마다 칸막이가 쳐 있고 조명 대신 촛불을 밝혀 주던 곳. 입구에는 여덟 개의 촛불이 켜져 있었는데 밑에 쌓여 있는 촛농이 가게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녀가 처음 그 카페를 출입했을 때가 고등학교 2학년. 촛농이 무릎 높이로 쌓여 있었다. 촛농에 덮여 볼 수 없지만 촛대의 아래쪽에는 정말 근사한 장식이 있다고 그녀에게 카페를 소개시켜 준 E가 말했다. 그런 식으로 E는 자기가 얼마나 오래된 단골인지를 자랑하고 싶어했다. 그곳에 드나들던 친구들이 각자 흩어지면서, 그녀도 발길을 끊었다. 마지막으로 간 게 5년 전인가. 그녀는 수첩을 꺼내 카키색 사파리라고 적었다. 고등학교때 제일 부러워했던 것은 E가 입고 다니던 카키색 사파리였다. 그녀는 카운터로 가서 치즈버거와 콜라 하나를 시키고는, 카운터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3시 23분. 탈의실에서 나왔을 때가 11시 40분쯤이였으니까, 거의 네 시간동안 백화점을 돌아다닌 것이다.
만약 주변의 누군가 죽는다면, 이런 봄날 죽었으면 좋겠다. 뒷자리에서 들려오는 말에 그녀는 햄버거를 씹다 말고 삼켰다.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겨 봤지만 가슴에 얹힌 햄버거는 내려가질 않았다. 너, 검은색 정장이 봄옷 한 벌뿐이라 그러지, 미친년. 뒷자리에 앉은 여자들이 낄낄대고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콜라 뚜껑을 열고는 남아 있는 콜라를 마셨다. 컵에 남아 있는 얼음까지 모두 먹은 다음에야 가슴이 시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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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입구에는 통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그 카페가 지하에 있는지, 있다면 입구에 밝혀 놓은 촛불도 여전한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차도 건너편에서 볼 적에는 건물에 많은 사람들이 매달려 있던 것 같았는데, 건물 아래에서 보니 5층쯤에 두 명의 인부만이 보였다. 그중 한 남자가 발을 헛디뎠다. 그 바람에 그녀의 눈에 무엇인가가 들어갔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벌리고는 다른 손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눈에 들어간 티가 빠지지 않자 고개를 숙이고는 눈물을 흘려 보려고 애를 썼다. 그 순간, 그림자가 그녀를 스쳤다.
건물에 매달려 있던 남자가 떨어졌다. 건물에 쳐 놓은 안전망은 남자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고 안전망을 지탱하던 파이프 하나가 지나가던 사람의 어깨를 내리쳤다. 남자는 그녀 앞으로 떨어졌다. 그녀가 조금만 몸을 돌렸어도 남자는 그녀의 목을 덮쳤을 것이다. 떨어진 남자의 머리에선 피가 흘렀고 그 피가 그녀의 구두 밑창으로 흘렀다. 남자의 오른손은 그녀의 발목에 닿아 있었다. 손에 무엇인가 반짝이는 것을 쥐고 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남자의 손을 옆으로 옮기는 척 하면서, 쥐고 있는 물건을 꺼냈다. 손목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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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C역에서 내렸다. 역 광장은 작고 아담했다. 광장의 오른편에는 햄버거 가게가 하나 있고, 왼편에는 3층이 넘지 않는 건물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그는 햄버거 가게로 가, 광장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 일자형의 테이블에 앉았다. C역의 주변 건물들은 모두 C역을 닮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건물 꼭대기에 모형 볼링핀이 세워진 건물을 보았다. 그가 중학교 때 지은 건물이었다. 지하1층의 오락실부터 2층의 당구장까지, 주말이면 학생들로 가득 찼었다.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을 했던 아이네 집이었는데, 그들은 그 건물 3층에서 살았다. 그 건물에서 나오는 걸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들키면, 손가락으로 맨 꼭대기 층을 가리키고는 이렇게 말했다. 친구네 집에 왔던 거예요. 볼링장 옆에 지어진 건물들은 그가 C를 떠난 다음에 지어졌다. 1년에 한두 번씩 C에 내려오면 역 주변은 항상 공사중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느 건물에서도 새것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새 건물이 지어지면 상대적으로 초라해지게 되는 옛 건물들도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C는 태어날 때부터 조숙한 아이, 그러나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아이와 같았다. C에서 태어나 C에서 자란, 그와 그의 친구들이 그런 것처럼.
종업원이 다가와 그가 앉아 있는 자리를 닦았다. 더럽지도 않은 탁자를 닦는 것은 음식을 시키든지 이제 그만 나가든지 하라는 뜻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햄버거 가게에는 햄버거를 사 먹는 사람보다 팔짱을 끼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의 옆에 앉은 여자도 한 시간 넘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통유리로 된 벽에 맞대어 있는 일자형의 탁자에는 그와 그 여자만이 앉았다. 여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