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R7MW6d9Gmnk?si=vLtQNqXhkIt0HiPY
7년전 고인이 되신 아버지께서 1955년 부터 1976년까지 근무하신 석탄공사.
부친께서는 내가 중3부터 고2때까지 3년간(1974~76년) 소장으로 재직하고 퇴사한 직장이 "장성광업소"다.
퇴사후에는 연탄공장 (고용)경영자로 취업하셨다가 10년후인 1986년 소유경영자가 되셨고,
이후 25년간 공장을 운영하시다가 2010년 폐업하셨다.
지금 아버지 사업장은 식자재 마트에 임대를 주고 아버지께서는 7년전 돌아가시고,
이와함께 아버지께서 젊음을 불태운 직장 "석탄공사"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착암기 잡은 손에 힘이 뻣친다
우리는 이나라에 산업에 용사
캐내자 무진장의 기름진 탄을
조국에 근대화에 이바지하자
석공 석공 우리 석공
캐내자 무진장의 기름진 탄을
조국에 근대화에 이바지 하자.
1969년 장성광업소에서 수직갱이 만들어 지고 석탄공사 "사가"가 지어졌다.
이 사가는 지금도 LP판으로 보관중이다.
나는
1966년 태백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67년 아버지께서 정선으로 전근하셔서 정선초등학교로 2학년 전학을 갔고,
1968년 자식교육을 위해 부친께서는 채탄현장에서 기러기 생활을 하시고
우리 삼형제는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이사했다.
이때 명지초등학교로 3학년 전학했으나, 중학교 평준화가 발표되자 경제적 부담을 줄일겸
1969년 우리 3형제는 집근처 전동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당시 4학년 ,
이후 누나만 한학기 마치고 곧바로 명지초로 재 전학.
장성광업소는 1937년 개발되었고
1960년대에는 기간산업의 육성으로 국내 최고의 직장으로 각광을 받았다.
1969년 경부선 개통과 71년 포철준공, 이후 중화학 공업 육성으로 다른 신규업종에 밀리기 시작했다.
1971년 유류파동이 일어나고 다시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소장으로 재식하신 74년부터 76년은 예전 60년대 만큼의 영화를 누리지 못했다.
유튜브에 나온 영상에서 여러 만감이 교차하면서 옛생각에 잠겨봤다.
이사진은 장성광업소 장성탄광과 소장실이 위치한 광업소 중심장소.
사택과 광업소 사이에는 석탄물이 뒤덮힌 하천이 흐르고 여기에 접하여 내가 다녔던 태백초등학교(사진 우측중앙)
그리고 사택이 있다. (좌측 아파트, 과거에 4칸사택으로 내가 태어난 곳)
유서깊은 2중교 다리, 초등학교 입학전 장성 시내에 있는 유치원 등.하원 할때 선생님이 인솔하에 이 길을 지났었다.
지금은 국가보전 유적으로 지정되었다.
내가 어렸을 적 본 모습과 흡사하다. 이중교 위에 석탄을 실은 전차가 지나간다. 이곳을 지날때 항상 보던 전경....이사진은 내가 살았던 1967년보다 한참 더 오래된 사진같다. 우측에 걸어가고 있는 여학생이 집으로 가고 있는 우리 어머니 일지도 모른다.
1969년 이때 부친께서는 정선 나전광업소 생산차장으로 근무하셨다.
1974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교입학때까지 장성에 머므를때 처음으로 갱도에 들어가 봤다.
당시 수직갱도에 대해 "갱도까지 공기를 공급하고 채탄시설을 갖추었다"는 설명을 생생히 기억한다.
이사진은 광업소와 주택지를 구분하는 도로와 그위로 석탄을 나르는 전차길이 어우러진 사진이다. 주택지 주거형태는 단층 4호 연립에서 중층 아파트로 바뀌어 졌고, 도로도 4차선으로 넓혀 졌지만 지형은 옛날 그대로.....
이중교 다리를 지나 장성시내로 가는길. 좌측은 연탄공장이 있고 조금 더가서 광업소로 진입 입구가 나온다.
오른쪽 하천은 당시 시커먼 석탄물로 여기는 목재 출렁다리로 건넜는데 콘크르트 다리로 교체 되었다.
우측에도 광업소 직원 사택이 있었는데...
이곳은 장성시내 중심 하천을 끼고 2층상가가 도로에 접한 노점상가이다. 그 앞에 영화관, 아버지 재직시 설립한 새마을 회관이 보인다. 하천에 접해 다리(사진우측)에서 200M가면 우리가족이 자주가던 중국집 "태백류"가 있었다.
그 중국집 주인부부 가 우리와 친해서 우리가 타지로 이사한 후 아버지께서 태백에 출장가셔서 들리면 누나 갖다 주라고 쵸코랫을 드렸다. 그집 '냉내'라고 불리던 딸이 우리를 무척 잘 따랐다.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 석탁공사 그리고 장성광업소.
여기엔 석탄생산을 위한 아버지의 열정이 있었고
어릴적 우리가족의 삶과 애환이 함께 담겨있고,
우리가족을 오늘까지 있게한 아버지의 소중한 일터이자 나의 출생지이다.
초등학교 3학년때 서울로 이사왔지만
난 지금도 강원도 사투리를 쓴다.
이후 태백에 살았던 삼촌, 이모 그리고 부모님, 형제와 대화 할때만 사투리를 썼지만
이제는 집사람과 자식과 대화를 나눌때도 사투리를 쓴다.
이유는 출생지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려는 나의 애향심 때문이며
소중한 가족에게는 나의 찐모습과 본래 말투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출처 https://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1270818
아버지 인터뷰
https://www.e2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9692
마산 유일 연탄회사 35년 만에 폐업 입력 2010.05.06
https://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164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