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타너스
김현승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감께 신(神)이 아니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窓)아 열린 길이다.
(『문예』 17호, 1953.6)
[작품해설]
김현승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강인한 의지와 민족적 낭만주의 경향의 시들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김현승을 일제 말기에는 타협을 거부하여 붓을 꺾고 10년의 세월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해방 이후에야 비로소 다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이 시는, 종래의 생경한 수사(修辭) 취미가 사라진 대신, 완숙한 경지의 서정성과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김현승 문학의 제2기의 작품이다. 시인은 플라타너스는 가로수를 ‘너’라는 다수 개념으로 의인화시켜 인생의 반려(伴侶)로 삼는다. 시인은 이러한 플라타너스를 통해 생에 대한 고독과 우수, 그리고 꿈을 간직한 사랑의 영원성을 노래한다. 또한 시인은 간결한 시어의 구사로 시상을 압축, 리듬감 있는 운율로 시적 감각을 최대로 살리고 있다.
1연은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는 플라타너스의 모습을 통하여 인간과 마찬가지로 꿈을 가진 존재로서의 플라타너스를 보여 주는 부분이다. 2연은 자연의 예지를 드러내고 있는 부분으로, 사람처럼 사모할 줄은 모르지만, 자신의 몸으로써 그늘을 만들어 남을 쉬게 해 주는 플라타너스의 희생과 헌신적 사랑을 보여 준다.
그리하여 3·4연에서 인생이라는 고단한 길을 걷는 화자가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그늘을 늘여 주는 플라타너스야말로 인간과 함께하는 삶의 반려자로서의 모습이다. 이러한 플라타너스에게 화자는 ‘뿌리 깊이 / 영혼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자연과의 교감 내지 일치하고 싶어하지만, 결국 이 같은 소망이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마지막 연에서는 인간의 한계 의식 또는 운명 의식을 드러낸다.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이란 일생의 종말을 맞이하는 죽음의 시간이며, ‘검은 흙’은 ‘수고하고 짐 진자’로서의 인간이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곳으로 죽음의 세계이다. 화자는 그 같은 죽음의 시간을 맞이할 때 갖게 되는 고독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며, 죽음이라는 것도 유한적 존재인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숙명임을 깨닫는다. 화자는 마침내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어’ ‘별과 창이 열린’ 세계로 영원하기를 기원한다.
이렇게 이 시는 ‘자연-인간-신’의 상관관계 속에서 삶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꿈과 의지를 담고 있다.
[작가소개]
김현승(金顯承)
남풍(南風), 다형(茶兄)
1913년 광주 출생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재학중 시 「쓸쓸한 겨울 올 때 덩산들」이 양주동의 추천으로
『동아일보』에 발표됨. 숭실전문학교 문과 졸업
1951년 조선대학교 문리대 교수
1955년 한국문학협회 중앙위원
1960년 숭전대학교 문리대 교수
1973년 서울시문화상 수상
1975년 사망
시집 : 『김현승시초』(1957), 『옹호자의 노래』(1963), 『견고한 고독』(1968), 『절대 고독』(1970), 『김현승시전집』(1974), 『마지막 지상에서』(1975), 『김현승』(1982), 『김현승전집』(1985), 『김현승의 명시』(1987),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