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서오릉에 한 많은 여인의 묘가 있다.
한때는 왕비였으니 능명을 갖을 수 있었으나,
그녀의 기구한 운명으로 궁녀에서 왕비가 되었다가
왕비에서 다시 폐서인이 되고
결국에는 자신이 사랑하던 왕이 내린 사약을 받고
큰 한을 품은채 죽어갔던 여인의 무덤인 것이다.
그 여인은 다름이 아닌 숙종의 비였던 장희빈(정옥정)이다.
장옥정은 궁녀에 뽑혀서 궁중에서 시녀생활을 하다가
젊은 숙종의 눈에 들었다.
그러나 왕이 왕비보다 궁녀에 불과한 장옥정을 가까이하는 것을 눈치챈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현종의 비)는 장희빈을 궁밖으로 내좇아버렸다.
그런데 궁밖으로 내쳐진지 3년 만에
그녀를 미워하던 명성왕후가 승하하자
숙종은 명성왕후의 탈상이 다음에 끝나자
옥정을 곧바로 다시금 궁으로 불러들여 왕자 '윤'을 낳았다.
그 왕자가 후에 경종이 되었다.
왕자 '윤'은 자신을 낳아준 장희빈에 의하여 성불구자가 되었다.
옥정은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고 인경왕후의 뒤에 왕비가 된
인현왕후와 철저한 암투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적인 인현왕후를 어떻게든 밀어내고
자신이 왕비가 되려고 권모술수를 썼고,
그 결과 인현왕후를 폐서인으로 강등시켜 쫓아내는대 까지 성공하였다.
그러나,
인현왕후의 입장에서 보면
천하에 못된 년이 들어와 임금의 눈을 흐리게 하고,
귀를 막아 자신을 비롯한 충신들을 모함하여 나라를 망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숙종이 몰라주니
어찌할 도리가 없는 한스러운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 임금으로써 마음을 다잡지 못하던 상태에서
인현왕후의 곁에서 시중을 들던 궁녀인 최여인(무수리)를 알게 되었고,
그녀가 전해준 장희빈의 인현왕후 무고와
인현왕후를 죽게 하기 위한 저주사실을 알게 된 후
상황은 정 반대가 되고 말았다.
장희빈은 무고와 저주한 사실이 밝혀져 왕비에서 폐서인이 되었고,
폐서인이 된 뒤에도 전혀 반성하지 않는 행실에
결국 극형인 사약을 받고 말았다.
한 때 만인의 지상이었던 그녀가
죽어 가장 악녀로 기록되게 되었고,
죽어서는 능에도 뭍히지 못하고
한 낱 묘에 묻히여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있었다.
그녀의 묘는 원래 구리시 근처에 있다가,
숙종시절 광주시 오포면 진해촌으로 이장 되었다가
최근 1969년 광주의 도로계획에 따라
묘자리가 도로에 편입되어 묘마져 없어질 위기까지 맞았으나,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뜻에 따라
숙종의 능이 있는 이곳 서오릉의 한 언덕으로 이장하여 자리잡게 되었다.
대빈묘는 왕릉과 그 격을 달리하는데,
왕릉이라면 비석을 묘 앞에 세우지 않고 별도로 세우고
비각으로 보호하는데 반하여 비석을 묘의 앞 중앙부에 세웠으며,
왕릉이라면 능의 앞에 혼유석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제사음식을 마련하는 상석을 두었으며,
묘의 앞 좌우에는 무인석은 없고 문인석만 1기씩 좌우에 도열하고 있다.
여러모로 그 크기와 격식이 떨어지는 대빈묘이지만,
한 때 왕의 총애를 받아 귀한 왕가의 왕자를 낳았다.
왕비가 되었다가 폐서인이 되고,
또 사약까지 받고 세상을 떠났던 여인의 묘를 돌아보며,
인생의 무상함과 만족하지 못하는 과욕을 부리면
패망하고 만다는 세상사를 되집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