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 동네는 신작로가 가운데로 길게 뻗어있었습니다. 읍내로 가는 길 위쪽에 면사무소가 있고 그 반대편 끝으로는 프라타너스 나무가 줄지어 서서, 어린이들과 함께 커가는 초등학교가 있었습니다. 길 양편으로는 이발소, 병원, 고무신가게, 중국집, 한의원 등등… 고만고만한 가게들이 다닥다닥 이어져 있고 마을 한 가운데 자리한 기차역 바로 앞에는 지서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약방을 했던 우리 집은 지서와 역에서 매우 가까웠습니다.
대여섯 살 무렵의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엄마가 읍내에 가는데 언니와 동생은 떼어놓고 나만 데리고 간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서 더 우쭐하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게다가 새 옷도 사준다고 했습니다. 날아갈듯이 신이 나서 엄마 손을 잡고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역 앞의 지서 앞마당에 벚꽃이 활짝 피어있는 것을 처음 보게 되었습니다. 나무 가지가지마다 환하게 피어있는 벚꽃은 마치 커다란 뭉게구름이 나무에 떨어져 걸쳐져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꽃구름은 어찌나 찬란한지 눈이 부셔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 벚꽃에 압도 되어 숨도 못 쉬고 순식간에 꽃 속으로 빨려들어 가고 말았습니다.
엄청나게 커다란 벚나무였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거기서 꽃을 피웠을 텐데, 어째서 그제야 그 꽃을 보게 된 걸까요. 우리 집에서 아주 가까운데도 말이죠. 참 이상하고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무의식의 작용일지도 모릅니다. 어른들은 어린아이들이 보챌 때 걸핏하면 “에비 저기 순사 온다” 하면서 겁을 주곤 했습니다. 우리 집에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약방에 동네 사람들이 들락거렸고 아이를 데리고 온 어른들이 아이에게 그렇게 겁을 주는 장면을 흔히 봐왔습니다. 언제부턴가 내게도 지서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일제강점기는 끝이 났지만 그들이 행한 폭압적 만행의 기억은 사람들에게서 쉬 잊혀 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제 고향 충청도는 독립투사가 가장 많이 배출된 저항의 땅이었습니다. 일본놈들은 아무 죄 없는 사람들까지 죄를 뒤집어 씌워 괴롭히고 고문하였으며, 그들에게 부역하는 이들이 순사라는 완장을 차고 선량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가두고 죽였습니다. 그렇게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들이 우리 동네에도 여럿 있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밉보이면 순사에게 끌려가 매타작을 당하고 심지어 죽기까지 했던 뼈아픈 기억으로 말미암아,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순사’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지서는 그런 폭압적 만행의 현실적인 공간으로 ‘순사’와 더불어 가장 무서운 대상을 사람인 ‘순사’로 각인 시켰다니 참으로 슬픈 역사의 일면입니다.
나는 그렇게 무서운 지서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지나가야 할 때에는,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다시피 하고 뛰어 지나가곤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그렇게 황홀한 벚꽃이 피는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도 아니면, 아무리 벚꽃이 환하게 꽃을 피워도 아직 너무 어려 꽃을 감지하지 못했거나 혹은 꽃을 인식하지 못해서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요.
귀신이 산다는 상여집 만큼 무서웠던 지서였지만 벚꽃에 사로잡힌 후, 그런 마음은 온데간데없어졌습니다. 나는 그해 벚꽃이 질 때 까지 시도 때도 없이 지서 앞으로 달려가 넋을 잃고 벚꽃을 올려다봤습니다. 내겐 이 세상에서 그만큼 예뿐 것이 없었습니다. 보고 또 보아도 그 꽃은 암만해도 하늘에서 내려온 꽃 같았습니다. 그 나무가 깜깜한 땅 속에서 쉼 없이 수액을 빨아올려 피워낸 꽃이라곤 상상도 못해 봤습니다. 그리고 꽃은 마냥 피어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부터 꽃잎은 바람에 흩날렸고 어느 날 쏟아지는 빗방울에 무참하게 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내가 처음 경험한 상실의 아픔일 것 같습니다.
다음해부터 지서 마당의 벚나무 꽃 봉우리가 봉긋해지면 하루에도 열 번도 더 왔다 갔다 했습니다. 어서 꽃이 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지요. 설레며 기다리던 벚꽃이 활짝 피면 친구와 노는 것도 잊어버리고 엄마의 심부름도 귓등으로 듣고 벚꽃만 보러 다녔습니다. 너무 좋아서일까요. 내게 슬며시 다른 마음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단지 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게 된 것입니다. 나는 이미 저 예쁜 꽃이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라지기 전에 벚꽃 한 가지를 꺾어 내 손에 꼬옥 쥐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소망이었습니다. 벚나무는 무서운 지서 안에 있고, 설령 몰래 들어가서 아무리 높이 깨금발을 하고 힘껏 손을 뻗어도 도저히 닿을 수 없는 키가 큰 나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직껏 못 보았던 잘 생기고 멋진, 젊은 순경이 우리 집엘 찾아온 것입니다. 너무 놀라서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엄마아버지가 나뿐 일을 한 걸까? 설마, 엄마나 아버지를 잡으러 온 건 아니겠지. 나는 겁이 나서 잔뜩 긴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지요. 그 순경은 우리 동네 지서로 새로 부임해온 엄마의 친정 조카였습니다. 마침 대 고모인 우리엄마가 그 동네에 살고 있어 인사를 하러 들른 것이었습니다. 외가 친척이라지만 그날 처음 보았습니다. 놀랐던 마음이 풀리자마자 나는 남몰래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 친척이 지서에 왔으니 벚꽃을 꺾어줄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어찌나 좋은지 가슴이 벌렁벌렁해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매불망, 그리도 손에 쥐고 싶어 안달이 났던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다음 날 지서 앞을 서성이며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그 친척 순경이 밖으로 나오기를요. 마침 점심을 먹으러 나오는 그에게 어렵사리 용기를 내어 나의 간절한 소원을 말했습니다. 그는 내 말을 듣자마자 흔쾌히 벚꽃 한 가지를 툭 꺾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기어이 벚꽃 한 가지를 내 손에 쥐고야 말았습니다. 어찌나 기뿐지 온 몸이 떨리고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남 앞에서 부끄럼을 많이 타서 얼굴이 빨개져 고개도 못 들고 말 한마디 못하는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참으로 가상했습니다.
벚꽃가지를 들고 집에 가는데 둥둥 떠가는 것 같았습니다. 빨리 가서 식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었지만 혹시, 언니나 동생에게 빼앗길까봐 몰래 뒤꼍으로 갔습니다. 나무에 매달려 있어 올려다보기만 했던 꽃이기에 손바닥에 올려놓고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벚꽃에서는 아주 조금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습니다. 꽃잎의 촉감은 차가운 듯 했지만 보드라웠고 색깔도 연연해서 신비스러웠습니다. 그 순간 내 가슴속에서도 벚꽃구름이 한가득 뭉실뭉실 피어올랐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날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시절 벚꽃 한 가지는 내겐 더 바랄 것 없는, 최고의 행복이었습니다. 이후 그토록 순수하게 벅찬 감동을 느낀 적은 별로 없습니다. 나는 몸이 커가듯이 욕심도 점점 커져갔습니다. 끊임없이 바라는 것이 생겼고 새로운 것이 필요했고 갖고 싶은 것이 늘어갔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그것들을 채우느라 고단했을 뿐 아니라 쓸쓸하고 외롭고 괴롭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어느 날부터인가 서서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건 바로 맨 처음 벚꽃을 내 손에 쥐었을 때의 기쁨보다 결코, 더한 기쁨이 아니었으며 또한 소중하지도 않고 아무 가치도 없는 것들이었음을. 그런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을 붙잡으려고 일생을 허비하며 헤맨 느낌입니다.
이제 나는, 벚꽃 한 가지에게로 돌아가려합니다. 그 순수한 행복과 만족의 순간으로 돌아가길 열망합니다. 돌고 돌아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을 소망하기까지 무려 육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