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는 이미 거문도에서 시작됐다.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한 거문도에 대해서 글마루8월호가
이번에 다루었더라구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의 식민지는 거문도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니 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거문도 가는 방법은 여수여객선터미널에서 출발한
쾌속선은 시속60km로 매우 빠르게 거문도를 향해 달렸다.
망망대해의 넓은 품에 안겨 하염없이 푸른 물결을 바라보기를 2시간 남짓하면 초도, 손죽도, 나로도를 지나 어느덧 거문도 고도에 도착한다.
거문도는 고도, 동도, 서도의 섬을 통틀어서 지칭하는 말이다. 원래는 고도라고만 불렀다. 또 왜구는 왜도, 19세기 영국군은 포크해밀턴. 중국인들은 거맏라고 불렀다.
지금의 명칭은 학식이 높았더 선비 '귤은 김유'가 이 섬에 산다하여 거문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귤은 김유는 조선말 여수지경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거문도에서 후학을 가르치면 학문에 전념했던 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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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은 1885년부터 1887년까지 무려 2년동안 거문도를 무단으로 점거하고 산위에다 영국기를 게양했다.
타국함대의 진입을 막기 위해 목책을 만들고, 중국군과의 통신을 위해 해저케이블도 만들었다. 남의 나라의 섬 전체를 요새화하며 막사를 지어 수천명의 군인들을 상주시켰다.
자신들의 놀이를 위한 테니스장도 설치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무단 침입자와 그 땅의 주인들, 사이좋게 지낼이유가 없을법한데 오히려 평화공존이 유지했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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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거문도를 점령한지 22개월 만인 1887년 2월 27일에 철수했다.
거문도 점령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러시아와의 아프가니스탄 문제가 해결 단계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러시아가 거문도를 점령하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철수하겠다는 의사를 청국에 밝혔고 러시아 역시 점령 의사가 없음을 청에게 알렸다.
영국은 러시아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는 모든 책임을 청이 지도록 하는 조건도 걸었다. 철수하는 그 순간까지도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 러시아 남하 정책을 막으려 했다.
어쨌든 영국군 철군 과정에서도 주권국인 조선을 철처히 배제됐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글마루 8월호에서 확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