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왕비 암살과 슬픈 장례식의 기록
명성황후 시해 그리고 슬픈 장례식의 기록
- 왕비 암살과 알려 지지 않은 이야기들-
-MBC 시사매거진 2580,13일 ( 일요일 ) 오후10시 35분 방영
1. 칼은 왜 신사에 보관 되었는가.
- 일인 자객 < 명성황후의 시해 > 를 참회 합니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자객에
의해 사용된 칼은 아직도 남아 있다.
일본인 자객 토오가쯔아키는 본인이 사건당시
사용한 칼을 신사에게 기증 했다고 한다.
< 사진 1 > 명성황후 시해 시간에 사용된 토오가쯔아키 의 칼. ' 히젠도( 肥前刀 )라고 불린다.
사진= 혜문 스님
그러나 이칼이 쿠시다 신사에 보관된 연유에 대해
신사의 책임자.아베켄노스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 이곳은 신사 입니다.
이 지방 사람들이 신성하게 생각하는 곳이지요.
히진도는 16세기 부터 수많은 사람의 거둔 칼이고 또한
유명한 칼이니까. 이곳에 기증하지 않았나 생각 합니다"
쿠시다 신사에서 수킬로 떨어진 거리에 센신원 ( 節信院 )란
임제종 ( 臨濟宗 ) 계파의 절이 있었다.
이절에 방문해 서야 취재팀은 칼의 내력을 들을수 있었다.
히젠도 ( ) 라고
< 사진 2 > 센시원의 전경 사진 = 혜문 스님.
" 토오의 친척 되는 분과 이절과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토오는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참회하고
칼을 이곳에 맡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찰에는 칼과 같은 흉기를 맡을 수가 없기 때문에
받을 수 없습니다. 그 대신 관음 불상을 시주 받았지요. "
사찰 관계자인 요시코 여사는 시종 진지한 어조와
미안 한듯한 표정을 한채 조심스례 설명을 이어 갔다.
< 사진 3 > 토오가 세운 관음상. 명성 황후의 얼굴을 참조
로 만들었다고 전해짐
사진 = 혜문 스님"
< 사진 4 > 관음상의 유래를 적은 비석
사진 = 혜문 스님=
그녀가 안내한 마당 한쪽 석조 관음상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에 관음상의 내력을 적은 비석이 있었다.
" 1895년 민비 사건이라고 불리는 일이 있었다"
국제관계의 소용돌이 속에 죽어간
왕비의 영혼을 위로하기위해 독지가들이 세웠다"
비석은 아무 말없이 회색으로 차가운 얼굴을
하고 우리쪽을 향하고 있었다.
착잡한 심경에 잠겨 있던 우리들에게
요시코 여사는 다시금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 저도 왕비암살 사건에 대해 공부하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어떻게 한나라의 왕비를 그렇게 무참하게....
토오도 많이 괴로워 했습니다.
노년에는 세상을 등지고 거의 수도승처럼 살았조
당시 사건에 연루된 후손들도 가끔 이곳을 찾아습니다.
다른분들도 많이 괴로와 했다고 하더군요"
2. 시해사건이 부른 피의 복수- 이토오 히로부미의 암살''
명성황후의 시해에 참가 했던 자객들은
이렇게 스스로의 죄 과를 뉘우치고 있었다.
근심스런 표정으로 나즉히 나즉히 관음보살상의
내력을 설명하는 일본인 할머니의 얼굴위로 야수쿠니
참배를 강행 하는 고이즈미의 얼굴이 겹쳐졌다.
국가 지상주의와 제국주의 팽창의 야욕이.
이렇게 평범하고 상냥한 한명의 개인을 전쟁의 귀신들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 왕비의 암살이 한국 사람들에게 준 슬픔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픔니다.
쓰노다후사코 여사도 일본의 왕비 암살은 역사의 참극.
복수의 피바람을 불렸다고 보았습니다.
한국의 안중근 의사가 이토오를 저격하며 그랬다는 군요..
왕비의 복수. 를 위해 이토오를 쏘았노라고....
결국 피는 피를 부르는 거 겠지요"
피는 피를 부른다..
백범 김구의 일대기가 스쳐갔다..
황해도 해주의 평범한 청년 , 김창수 ( 백범 김구의 본명 ) 가
파란의 일생에 접어든 이유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때문이다.
일본인의 만행에 분대한 청년 김창수는 일본인 군인을
타살( 打殺 ) 하고 사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갇힌다.
구사 일생으로 ( 九死一生 ) 으로 탈옥한 김창수는 독립운동
에 투신 임시정부 주석에 까지 취임 하게되는 것이다.
3. 지금의 한일 문제를 생각 한다.
- 오카모도 루노스케의 무덤 앞에서.
< 사진 5 > 오카모도 류노스케의 무덤.
그는 시해사건의 주모자이자 주동 자이다.
사진 = 혜문 스님=
오카모도류노스케. 그의 이름을 기억 하는
한국사람들은 많지않다
그러나 한국 근대사를 연구한 사람들은
오카모도의 이름에 몸서리를 치는 사람이 많다.
그가 바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음모를 꾸민 사람이고.
대원군을 납치하고 . 사건현장에 훈련대를 동원 함으로써
조선의 내분으로 왕비가 살해된 것 처럼 위장하려는
계획을 세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무덤은 도코 혼몬지라는 곳에 있다.
이곳은 재일교포 역도산의 무덤이 있는곳으로도 유명하다.
역도산 무덤으로 가는 화살표를 따라 약간 들어가면.
나무그늘 져 음산하고 으시시한
귀퉁이에 오카모도의 무덤이 있었다.
동광 ( 東光 ) 오카모도 유노스케.
동광- 평생을 정치공작에 힘써온
그의 일생을 대변해 주는 말이었다..
이른바 대동아 공영권의 기초를 놓고 있었던 시기.
일본의 대륙 진출을 위해 그사람이 살아간
문제의식을 그대로 노출시킨 단어였다.
무덤에는 찾아온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었다.
다만 누군가 수년전에 향과 초를 피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아마도 자손이 없는듯 수년째
아무도 찾아 오지 않는다고 했다.
조선의 심장을 찌르겠다는 무시무시한 음모를 구미고.
한나라의 왕비를 무자비하게 살해한 오카모도.
국가는 그를 이용해서 조선을 파멸시컸고.
결국 그도 상해에서 궁색하게 죽도록 강요 했다.
그는 아마도 스스로가 우국지사라고 생각 했을 것이다.
자부심도 있었을 것이다.
일본의 대륙 진출을 위해 이한몸을 바쳐도 좋다고.
일본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삶을 활활 불태우고 싶다고.
자신에게 스스로 수없이 다짐했을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성공 했을때.
회심의 미소를 짓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선민족이 얼마나 아파했는지 몰랐을 것이다.
4. 명성황후 시해 그리고 슬픈 역사를 되새기자.
- 에조 보고서 " 나채 만든뒤 국부 검사 사실' 보고.
해방 61 주년을 맞은 오늘날의 한일 관게을 되돌아 본다.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놓고
일본의 우경화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오카모도의 무덤앞에 서면 섬짓함이 느겨진다.
언제 또 어느 일본의 우국의 지사가 한반도를
차지하지 않으면 일본의 미래가 없다고 주장할까
두러워 서이다.
정작 우리는 우리의 왕비에 대한
기록이나 아니 기억 조차없다..
이번 취재에서 전문을 구한 ' 에조보고서'에 의하면
왕비는 시해후 나채로 국부 검사까지 받았다고 한다.
평상시 남자들에게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던 우리의왕비는
죽어서 이국의 사내에게 나체로 발가 벗겨졌던 것이다.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오전 8시경 고종을 알현하고 시신을 확인한
조선공사 미우라는 경북궁 녹산에서
화장 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석유를 붓고 불태워진 명성황후는 시체조차 없었다.
장례식은 고종의 아관 파전등으로 연기되어 2년 2 계월
동안 치려 지지 못했다.
역사상 유례가 없이 슬프고 기나긴 국상이었다.
그 아픈 국상의 기록이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 왕궁에 안에 있다는 웃지못할 비극이
오늘 나로 하여금 무거운 글을 쓰게 한다.
< 사진 6 > 명성황후 국장도 감의궤 < 발인 반차도 >
현제 일본궁내 청에 소장 되어 있다.
한영우 ,< 조선왕실의궤 > 에서 사진 인용.
관련 카페 http;//cafe.daum.net/doorgatemoon
후기 명성황후의 죽음 그리고 슬픈 국상의 기록
- 조선 왕조 실록 환수위기가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 반환 운돈을 시작 합니다.
지난 7월 7일 조선실록 오대사본이
93년만에 고국으로 되돌아왔다.
조선 왕조 실록 환수위
( 공동의장 월정사 주지 정념. 봉선사 주지 철안 )는
2004년 도코대가 오대산 사고본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약탈의 경위와 소장 목록을 조사했다.
그리고 반환 운동을 추진하며 기존에 알려졌던 46 책 이외.
중종실록 1책이 더 존재 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성과를 얻기도 했다.
또한 환수위는 1913 오대산 사고 에 소장된
3.000 여 책의 전적중 일본 궁내청 왕실도서관에 "
' 왕실의궤' 오대사본 44 종이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도 입중 했다.
그중에는 명성황후의 죽음과 2년 2개월에 걸친 슬픈
국상의 기록'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국내청 소장의궤 반환 운동의 과정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 그리고 암살당시 사용된 칼과 마주치게 되었다.
( 이글은 MBC 2580 취재팀과 환수위 간사 혜문스님이
8월 1 일부터 4일까지 일본 일정을 정리힌 취재기 입니다.. |
첫댓글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는 사람도있으니 이런 제기럴............
조금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자세하게 들여다 볼줄이야...고맙습니다 정말 치가 떨립니다 일본은 우리의 영원한 적입니다 잊지맙시다 여러분 손자들에게 자세하게 좀 더 크면 더 자세하게 아르켜줄 겁니다
까마귀님. 소꼽친구님 안녕하세요. 꼬리글 감사 합니다 더운날씨에 우째 지내십니까? 몇일만 꾹 참아보입시다 곧 서늘한 가을이 옵니다. 농부의 비찌땀을 흘리신 결실의 계절 오곡이 무르익는 황금들녁 맑고 높고 푸른 가을 하늘 아 아~` 생각만해도 좋다.
우리 아버지 청일전쟁때 붙잡혀가서 싸움터에서 온몸에 동상이 걸려서 돌아가셨고 우리 할아버지 진사이지만 꼼작도 못하고 당하기만 했고. 우리집 놋그릇 40여불 일논놈이 총알 만든다고 몽땅다 빼앗아 갔고 놋그릇 빨리 않내어놓는다고 총뿌리로 우리엄마 두들겨 패고 피해자의 입장에서 일본놈들 잇발이갈린다.
석류님 좋은글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