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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사랑의 또 다른 이름, 준비>
무엇이든 마구 밀어붙이던 과거 군사정부 시절
‘조직’에서 많은 고생하셨던 분들 생생하게 기억나실 것입니다.
높은 지휘관의 방문 날짜가 결정되면 큰 소동이 벌어집니다.
단 하루 안에 비포장도로가 포장도로로 바뀝니다.
갑자기 없던 화단 하나가 새로 생깁니다.
사실 그 지휘관은 누구입니까?
대단하지도 않습니다.
얼마 있지 않으면 자리를 내놓고 물러나야할 별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그를 위해 그 ‘쌩고생’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오실 주님은 누구입니까?
그 지휘관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크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영원히 세세대대로 온 천하를 다스리실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분의 오심은 어떻게 준비하고 계십니까?
과거 ‘어르신’ 한분이 한 도시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한 달 전부터 군관민이 일심동체가 되어 완벽한 준비와 점검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분의 동선 하나 하나에 대해 지뢰탐지기를 동원해서 점검했고,
그분께서 사용하실 식기까지 다 체크했습니다.
그 ‘어르신’은 누구입니까?
너무나 보잘 것 없는, 한 줌 흙 같은 나약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런 그분을 위해 온 도시 전체가 야단법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실 주님은 누구입니까?
그 ‘어르신’과는 감히 비교대상이 못되는 특별한 분이십니다.
우리 생명의 주관자이자 세상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다시 오심을 어떻게 준비하고 계십니까?
한 음악회를 참관하고 참으로 기뻤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소박한 음악회였지만 정말 정성껏 준비한 음악회였습니다.
프로그램 하나하나에 의미가 담겨있었고 최선을 다한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시종일관 알차고 짜임새 있었습니다.
음악회는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한 아름씩 선사했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준비한다는 것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잘 준비한다는 것은 이웃을 향한 가장 큰 배려요 예의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오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뭔가가 외적으로 드러나야 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준비’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은
대림시기를 맞이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잘 준비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잘 준비한다는 것은
각자의 믿음을 더욱 깊게 만드는 것입니다.
잘 준비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우리 각자의 신앙을 더욱 쇄신시키는 일입니다.
잘 준비한다는 것은
우리를 찾아주신 예수님을 참 하느님, 참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백인대장,
그는 비록 이방인이었고,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었지만,
예수님을 향한 믿음, 예수님을 향한 신뢰심, 예수님께 대한 충성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이런 백인대장의 강한 신앙에 예수님께서도 기쁘게 응답하십니다.
그의 종을 낳게 하시고
그의 굳은 믿음을 크게 칭찬하십니다.
- 살레시오회 수련원장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꿈과 비전, 그리고 희망>
꿈꾸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싱싱한 비전을 지닌 이가 매력적입니다.
혼자 꾸면 꿈이지만
함께 꾸면 현실이 됩니다.
빛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꿈과 비전, 그리고 희망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치열하게 살다가 28세의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어느 젊은이의 유고집,
<꿈과 희망, 그리고 사랑>이라는 제목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꿈과 비전, 희망을 잃은 젊은이보다 불행한 경우는 없습니다.
비전을 지니고 꿈꾸며 살 때,
두봉 주교님처럼 83세(1929년 생)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가장 멋진 삶’을 추구하는 영원한 청춘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꿈꾸는 비전의 사람들이요,
지금 여기서 비전을 앞당겨 사셨던 ‘영원한 청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 역시
하느님을 꿈꾸며 우리의 하느님 비전을 새롭게 하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꿈과 희망, 비전을 잃어버려 속화와 타락이요 무기력한 삶입니다.
오늘 1독서 이사야의 비전이 참 고무적입니다.
언젠가 모든 이들이 주님의 집에 모이게 될 그날을 꿈꿉니다.
“주님의 집이 서있는 산으로
모든 민족들이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말하리라.”
장차 온 인류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하나의 평화공동체를 꿈꿨던
원대한 비전의 예언자 이사야였습니다.
복음의 예수님 역시 ‘하늘나라’를 꿈꾼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바로 이 예수님의 하늘나라 비전이 고스란히 앞당겨 실현되는
이 거룩한 하늘나라 미사 잔칫상입니다.
이사야의 다음 비전 역시 고스란히 미사를 통해 실현됩니다.
“자,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
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주님의 집 미사잔치에 참여하여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의 비전을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하늘나라 비전을 앞당겨 실현하신 복음의 주님은
이방인 백부장 종의 치유를 통해 이미 하늘나라의 풍요로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 백부장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할 때
우리 또한 생생한 하느님 비전을 지니고 살 수 있습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우리 역시 매일 미사 때마다
백부장과 함께 주님께 믿음을 고백함으로 치유 받고
더 큰 믿음을 선사 받게 됩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하느님 비전을 새롭게 하시어
매일 새 하늘, 새 땅, 새 날의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청춘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베네딕토수도회 성요셉수도원 원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 살아 계실 때 기자가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수녀님은 매일 기도를 오래하신다고 들었는데
기도할 때 주로 어떤 말을 하세요?”
그러자 수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저 듣기만 해요.”
기자는 다시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그러자 수녀님께서는 아무렇지도 않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도 듣기만 하세요.”
데레사 수녀님의 이 말을 통해 듣기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도 나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듣는 것보다는 말하는 것에만 집중할 때가 더 많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잘 듣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말을 들으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강생하신 것만을 보아도 알 수 있지요.
하느님께서 완벽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
이는 우리들의 입장을 배려하고 당신 자신을 낮추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잘 듣고 있었을까요?
하느님의 말씀도 잘 듣지 않으면서
내 뜻만 관철되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을 간직하며 살고 있는 우리인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처럼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셨듯이,
우리 역시 최고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입장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닌
내 이웃의 입장을 배려하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나를 높이는 이기심이 아니라
나를 최대한도로 낮출 수 있는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을 보십시오.
그는 당시의 지배층이라 할 수 있는 로마의 백인대장입니다.
따라서 자기네가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리와라 저리와라 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배려하며 동시에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지요.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이 주님의 기적을 일구어 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연 어떠한가요?
혹시 듣지 못하고 말하기만 하는 이기심으로 주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러한 상태에서는 주님과 나의 간격이 더욱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 최인비 신부님의 묵상글 *
<겸손이란>
어느 대학에서 “복사할 것이 5장밖에 안 되는데 먼저 좀 하면 안 될까요?”라는 부탁을 어떻게 표현할 때 성공률이 높은지 실험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그냥 “미안합니다만, 복사할 것이 5장 있는데 먼저 좀 하면 안 될까요?”
다른 하나는 공감할 수 있는 이유 6글자를 덧붙여서
“미안합니다만, 복사할 것이 5장 있는데 먼저 좀 하면 안 될까요? 많이 바빠서요.”
마지막은 반복되는 이유를 달았습니다.
“미안합니다만, 복사할 것이 5장 있는데 먼저 좀 하면 안 될까요? 왜냐하면 복사를 꼭 해야 돼서요.”
실험을 마치고 통계를 내어보니 각각 60퍼센트, 94퍼센트, 90퍼센트의 성공률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세 번째 실험에서 “왜냐하면 복사를 꼭 해야 돼서요.”와 같이 반복되는 내용을 이유로 댔는데도 많은 사람이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형식적인 것일지라도 이유를 대며 친절하고 정중한 말씨’로 부탁을 하면 들어줄 확률이 높다고 결론을 냈다고 합니다.
곧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대할 때
상대방은 나의 부탁이나 청을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림 첫 주간에 등장한 백인대장의 모습에서 겸손한 자세를 봅니다.
겸손은 솔직한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고 내가 누구인지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백인대장은 예수님 앞에 세속적인 지위는 잊고
그분을 신뢰하며 겸손한 한 인간으로 서 있었습니다.
우리가 맞는 대림의 첫걸음도 이런 겸손이길 바라봅니다.
우리 자신을 먼저 살펴서 덧씌워진 허영과 허식을, 헛된 자존심과 욕심을 치워버리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첫걸음을 내딛어 봅시다.
- 인천교구 가톨릭아동청소년 재단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백인대장의 믿음>
오늘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떤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주시는 이야기입니다.
백인대장이 자기 종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자
예수님께서 그의 집으로 가겠다고 하셨고,
백인대장은 그러실 필요는 없다고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하시면서 그 백인대장을 칭찬하십니다.
1) 백인대장의 믿음은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권능을 믿고, 병을 고쳐달라고 청하기 위해 몰려든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모든 사람'이 믿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청할 때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마르 9,22).' 라고 말하는데,
'하실 수 있으면'이라는 표현은
그의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반신반의했을 것입니다.
또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 중에는 예수님의 권능을 안 믿은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백인대장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입니다.
또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제국 군대의 장교입니다.
외적인 상황만 생각하면 그가 예수님을 식민지의 보잘것없는 떠돌이 랍비라고 멸시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믿음이 더욱 특별하게 보입니다.
그는 모든 외적인 상황이나 조건 때문에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는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극복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아마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실한 심정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단한 믿음입니다.
2) 백인대장의 믿음은 예수님의 '현존'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의지와 마음이 있는 그곳에 예수님도 현존하신다는 믿음입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말씀만으로 병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원격 치유' 능력이
무슨 리모컨을 사용하는 것 같은 방식은 아닙니다.
또 백인대장이 믿었던 예수님은
단순히 병을 잘 고치는 의사나 기적가가 아니라
병을 지배하시는 분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병'이라는 것에게 명령만 하셔도 병자를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었고,
그 명령을 직접 현장으로 가지 않고 멀리서 해도 효력이 발생한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어디에나 '현존'하실 수 있고, 명령하실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고
'그저 한 말씀만' 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3) 백인대장의 믿음은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믿음입니다.
권능만으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셔야만 합니다.
백인대장이 자기의 간청을 예수님께서 거절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은 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은 것입니다.
4) 백인대장의 믿음은 '사랑을 바탕으로 한' 믿음입니다.
백인대장이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한 병자는 그의 '종'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기의 노예를 위해서 예수님께 와서 간청한 것입니다.
우리는 백인대장과 그 노예가 어떤 관계인지 모릅니다.
다만, 그 노예를 아주 대단히 사랑하고 아꼈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면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지 왜 그대로 노예로 데리고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주제와 상관이 없습니다.)
어떻든 백인대장은 자기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서 간청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랑과 백인대장의 사랑이 합해져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대림 첫 주 첫 평일 복음 말씀에 이 이야기가 배치된 것 자체가
'대림'의 의미를 새롭게 묵상하게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대림'이라고 쉽게 설명하는데,
이런 설명은 자칫 잘못하면 어디 다른 곳에 계신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 대축일 때 하늘로 가셨다가 성탄절 때 되돌아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셨다가, 몇 달 동안만 함께 계시다가 다시 떠날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 분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대림' - '기다림'이란 무슨 뜻일까?
한 말씀만 하셔도 되는 예수님,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예수님,
그분을 왜 기다리고 있는가?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우리 자신이 떠나 있는 것이 아닌가?
- 전주교구 함열 본당 상지원 공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거룩한 무한경쟁>
우리가 잘 아는 세계 1위 필름 회사인 ‘코닥’이
몇 년 전 더 이상 필름 생산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 아시는 바와 같이 필름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시대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디지털 시대에 대비하지 못했을까요?
사실은 디지털 카메라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회사가 코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결국 자신들이 개발한 디지털 카메라 때문에 자신들의 매출이 줄어드는 제 살 깎아먹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개발하지 않는다고 다른 회사들도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코닥은 필름으로 자족하고 자신만만해 하다가
디지털 카메라를 내놓은 다른 회사들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런 예는 너무도 많습니다.
소니의 ‘워크맨’도 그렇습니다.
워크맨은 처음에 한 작은 회사에서 이용되는 녹음기를 사장이 이어폰을 만들어 녹음 대신 걸으면서 그것으로 음악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음악은 집에서 조용히 듣는 것으로 생각 되었던 시대에 매우 획기적인 발상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상용화하는 데는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니에서는 이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워크맨을 만들어 내었고 세계에 4억 대를 판매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명성을 잃었습니다.
MP3 Player가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소니는 이 경쟁에서 옛날 명예를 되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쉴 새 없이 발전하는 전자기술 환경에선 한 번 뒤쳐진 기술은 좀처럼 따라잡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회사들도 손 놓고 기다려주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회사들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자신들이 잘나가는 것에 만족하고 교만해 하였습니다.
남들이 자신들을 넘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교만이 결국 기술개발을 저해하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발전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뒤처지게 마련입니다.
떠오른 태양은 다시 저무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에서도 이런 일은 여전히 일어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백인대장의 믿음을 감탄하시고 칭찬하시고
이스라엘에서도 그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세계에서 유일하게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선민의식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망친 것은 바로 이런 선민의식과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믿음도 노력하고 개발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노력하지 않았던 이스라엘의 믿음이
이제 노력하는 이방인에게로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런 이방인의 믿음을 보고 반성하고 더 노력하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을 더 높여주는 예수님을 미워하기만 하였습니다.
우리 개인도 지금의 믿음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보아야 합니다.
주일미사만 나오던 신자는 평생 거기에서 발전이 없습니다.
평일미사 나오는 신자들을 보고 그들처럼 더 열심할 결심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뒤처지는 것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도 경쟁이라고 말합니다.
“경기장에서 달리는 이들은 모두 달리기는 하지만,
한 사람만이 상을 받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시오.”
(1코린 9, 24)
우리는 마지막 날까지 우리 자신의 믿음을 증가시키기 위해 경쟁해야 합니다.
‘삼인행이면 필유아사 (三人行必有我師)’라 하였습니다.
세 명이 걷고 있으면 그 중에 반드시 내가 배워야 할 스승이 있다는 뜻입니다.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잘 하는 것을 배우고,
더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도록 배워야 합니다.
삼성도 기존의 핸드폰만 고집하다가 아이폰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자신들의 정책을 버리고 스마트폰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스펙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핸드폰을 만들어 냈습니다.
믿음에 있어서도 서로 경쟁합시다.
경쟁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무한경쟁에 뛰어들어 거룩한 경쟁을 할 때
나의 부족함을 알고 서로 발전시켜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성인이 난다면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성인 못지않은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오산본당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나의 믿음에 달려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대전 공설 운동장에서 한국성체대회가 거행되던 날,
하늘은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이었고 태양은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추기경님의 파견 강복이 있기 직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기 뭐 나타났어요?”
그 말씀에 자극을 받아 참가자 모두가 환호하며 하늘을 바라보았고 저도 태양을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성체모양으로 빛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런 현상에 부정적인 저였지만
저도 모르게 성호경을 그으며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때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어야죠!”
예수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으셨지만
당신을 의심하는 고향사람들 앞에서는 별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 13,58).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셨지만
그 말씀의 능력은 믿음을 바탕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힘을 내느냐 못 내느냐는
그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행하면
능력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믿음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라 하시면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명하는 것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믿고 행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그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람을
유다인이 아닌 한 이방인 백인대장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다인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들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은 당연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열심하다고 하는 사람, 활동을 많이 하고 본당의 여러 직책을 맡은 사람들, 성직자나 수도자도
믿음을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은 많을지 모르나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믿음에는 소홀할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히브 11,1. 6)
믿음으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기도로 마칩니다.
“오 하느님,
믿음으로 당신을 부르나이다.
인간이 되신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당신을 선포하신 아드님의 일생을 통하여
제게 불어넣어주신 그 믿음으로
오 하느님!
당신을 애타게 부르나이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순례지 본당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
<병의 치유가 아니라 사랑의 체험인 구원>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저는 요즘 가슴이 저미는 아픔을 느낍니다.
전에는 이 아픔이 어떤 것인지 솔직히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아픔이 제 가슴에 온통 자리하고 있습니다.
저의 어머니 덕분입니다.
몇 달 전부터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지금은 거의 잡수지도 못하고 입이 거의 타들어가 말씀도 간신히 하십니다.
어머니를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는 벌써 되어 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것이 슬프기만 한 것도 아니지만
돌아가시기 전의 마지막 고통을 힘겹게 견뎌내시는 것을 보면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음에 생각할 때마다 속으로 눈물이 납니다.
저의 어머니뿐이 아닙니다.
제 주변에 너무나 아픈 분들이 많습니다.
몸으로도 아프고, 마음으로도 아픕니다.
저의 어머니 덕분에 그들이 겪는 아픔을 생각하면 가슴을 저미는 아픔을 느낍니다.
얼마나 힘들까, 얼마나 외로울까.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의 마음이 이런 것 같습니다.
자기 종의 고통을 너무도 마음 아파하여 주님께 찾아옵니다.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까짓 종이 아픈데!"하고 무시해버리지 않고
괴로워하고 있는 종과 같이 괴로워하고 있음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열이 잘 전도되는 전도체 같은 백인대장입니다.
어떤 열도 전류도 흘러들어오는 것을 마다하는 절연체도 있는데
백인대장은 감정의 빗장을 열어놓고 가슴을 청진기마냥 그의 가슴에 대고 그의 아픔을 그대로 전해 받습니다.
백인대장의 그 아픔을 예수님도 그대로 전해 받습니다.
그래서 지체 없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마.”
두 가지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몸소 가시는 수고가 그 하나이고
고쳐주시는 수고가 다른 하나입니다.
백인대장의 말처럼 한 말씀으로도 얼마든지 고쳐주실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몸소 가시겠다고 하십니다.
몸소 오심.
하늘에서 한 말씀으로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으시고
육화하여 우리에게 오시는 것,
이것이 우리 주님의 사랑이고
이것을 우리가 이 대림시기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구원은 병의 치유가 아니라
사랑의 체험입니다.
- 작은 형제회
* <굿뉴스> '매일미사'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자존감, 자존심, 자만심은 비슷한 것 같지만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 자존감이 높다고 하면 긍정적으로 들리지만,
자존심이나 자만심이 강하다고 하면 부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자존감이 높다는 것은
속이 잘 익은 과일처럼 성숙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들은 대인 관계에서도 스스로 존중감이 있어서
내면 깊숙이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을 방어하려고 화를 내거나 변명하지도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스스로 내면에 가진 것이 별로 없다는 열등감으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려움을 방어하고자 내세우는 것이 자존심입니다.
그래서 자존심이 센 사람들은
열등감을 감추고 자신을 지키려고 상대를 먼저 공격을 하거나, 고집을 부려서 자신을 보호합니다.
사람들에게 쉽게 상처받고, 분노하고, 사람들과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까닭은
자존감이 낮아서 그 방어 기재로 자존심을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자만심 역시 자존심처럼 자존감이 낮은 데서 비롯합니다.
이런 사람들도 스스로 내면에 별로 든 것이 없다는 열등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의 빈 곳을 엉뚱한 것으로 채워 넣습니다.
곧 자신이 가진 조그만 지식이나 재물이나 재능을 부풀려서 내면의 빈 곳을 채우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드러내 보이고 자신을 내세우고 싶어 하며,
공명심과 허영심이 많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생색내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을 가진 것이나 능력으로 평가합니다.
자기보다 잘난 사람과는 가까이 사귀고 싶어 안달하고,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기면 무시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백인대장이 보여 준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겸손은 자존감이 낮은 자기 비하와는 다릅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의 부족함, 죄스러움, 약함, 그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하느님께서 잘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약함과 부족함을 오히려 더 사랑하신다는 믿음에서
겸손함이 나옵니다.
우리의 높은 자존감은 겸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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