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믿는 것은 영광과 함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닥칠 박해의 시대가 오면 그들도 십자가를 져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을 보내시기로 약속하신다.
보호자이신 영을 통하여 제자들은 온갖 박해 속에서도
예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그분을 증언하게 될 것이다(복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언젠가는
당신에 대하여 증언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제자들이 증언의 삶을 살게 될 때 두 가지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는 진리의 영을 맞이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박해를 겪는 것입니다.
이를 우리의 삶에서 다음과 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언할 때에는
반드시 성령을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제자들을 박해하면서도 그것이
하느님께 봉사하는 일이라며 착각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것은
반드시 고난을 겪는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 순교자를 뜻하는 영어 ‘martyr’는 본디 ‘증거자’
또는 ‘증인’의 뜻을 지닌 그리스 말 ‘martys’에서 온 것입니다.
이는 곧 증언의 삶과 순교의 삶은
매우 밀접하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풍요와 안락만을 바라며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면,
그 증언은 아무런 힘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되돌아봅시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제대로 증언하고 있습니까?
증언의 삶을 위하여 성령을 모시고
어떠한 고난도 달게 받아들일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까?
인간이면 누구나 굴레처럼 안고 사는
‘고독’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고독은 높은 정신 세계를 가진 고등 동물에게만 존재하기에,
인간이면 누구나 숙명적으로 고독합니다.
고독은 우리 인간의 한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서
어느 누구도 그 자리에 함께 할 수 없는 ‘홀로 있음’의 자리입니다.
고독은 고립과는 다릅니다.
고독은 홀로 있어도 열려 있지만,
고립은 함께 있어도 막혀 있는 것입니다.
고독은 세상 한복판에서도 고요하지만,
고립은 고요 속에서도 혼란스럽습니다.
고독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느님과 통교하는 장소이지만,
고립은 아집과 독선에 사로잡힌 분열과 단절의 장소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고독한 자리에서만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평생 늘 고독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당신 사명을 홀로 감당하시며 사셔야 했습니다.
광야에서 매우 심한 유혹에 시달리실 때도,
오천 명을 먹이시고 난 뒤
군중의 환호를 뒤로하시고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실 때도,
그분 삶의 한가운데에는 고독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떠나고 홀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실 때,
십자가상에서 성부 하느님마저도 침묵하실 때,
예수님의 고독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이런 고독과 친구입니다.
세상의 온갖 유혹에 시달릴 때도,
사람들에게 얻은 인기와 환호에도,
모두 떠나고 혼자 남아 있어도,
고통 중에도, 신앙인의 고독은 삶의 그 모든 순간에
오로지 우리의 보호자이신 성령께 의탁하며
진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유한한 우리가 무한하신 주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을 바라보며 세상의 모든 외로움을 견디는 것입니다.
첫댓글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언할 때에는
반드시 성령을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인의 삶은
오로지 우리의 보호자이신
성령께 의탁하며
진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우리가 기도 드릴 때, 우리가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더라도,
항상 주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을 먼저 들어주시려 하십니다.
청하되 가장 중요한 성령님을 먼저 청합시다.
나머지는 저절로 받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