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 전기 문신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쓴 《미암일기(眉巖日記)》
1575년 10월 29일 기록을 보면 다락방의 책을
중당(中堂, 집 가운데의 마루)으로 옮기는데 모두 3,500권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암일기》에 여러 차례 걸쳐 책을 옮기는 얘기가 있는 것을 보면
이 3,500권은 일부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책 구하기가 쉬운 요즘에도
개인이 책 3,500권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흔치 않아 3,500권만 해도 엄청난 양이지요.
▲ 유희춘 《미암일기(眉巖日記)》와 미암집 목판(문화재청 제공)
조선시대 책의 인쇄본은 중앙의 교서관(校書館)과
지방의 감영, 군ㆍ현 등에서 찍는 소량일 뿐입니다.
또 그것마저 교서관에서 찍은 것은 일부 진상하고,
일부는 중앙부처가 간직하게 하며,
그 나머지가 종친이나 높은 벼슬아치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교서관이나 지방관에게 부탁하여 별도로 후쇄본을 찍기도 하지만,
인쇄본을 얻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또 어떤 이는 중국에 서장관으로 가는 이에게 부탁하여 사 오는 일도 있습니다.
그렇게 인쇄본을 구하기가 어려우니 책을 일일이 베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베끼는 것도 남에게 부탁해야 하므로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미암일기》 1568년 9월 12일 기록에 보면
“오대립이 필사한 《국조보감(國朝寶鑑)》과 《역석(易釋)》을 가지고 왔다.
나는 황모필((黃毛筆, 족제비 꼬리털로 만든 붓)과 부채를 주어 사례하였다.
”라는 내용이 있는데 귀한 황모필 등으로 사례한 것을 보면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선조수정실록》에 유희춘의 졸기(죽은 사람에 관한 마지막 평가)가 있는데
“지나칠 정도로 책을 좋아하여 음악이나 여색에 빠진 것과 같았다.”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유희춘은 책을 정말 좋아했던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