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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 7. 주일 큐티
요한삼서 1:1 ~ 8
사랑하는 자를 위한 간구
※ 사도 요한은 세 편지를 기록했습니다. 세 편지는 길이에 따라서 성경 안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가장 긴 편지가 앞에 위치하고, 가장 짧은 편지가 뒤에 위치합니다. 요한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서신들에서도 예수를 부인하는 이단과 싸우는데 주력합니다. 격려와 책망, 그 중심에는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밧모섬으로 추방되기 전에 사도 요한은 A.D. 90년 경에 세 번째 사랑의 서신을 썼습니다. 특별히 요한 삼서는 선교론적인 문제를 다룹니다.
관찰 :
1) 문안
- 1절.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 사도 요한은 자신을 하나 남은 유일한 그리스도의 사도로써, 초대 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사도 요한의 권위는 드러나는 것이기에 그런 것에 지면을 낭비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달리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그의 사도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도리어 사도 요한은 자신의 사도권을 증거하지 않고, 자신이 기뻐하는 직분인 장로를 통하여 자신의 증거를 마칩니다. 많은 장로들이 있었는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그렇게 섬기는 것을 요한은 기뻐하고 기뻐하면서 자기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 삼서는 가이오 개인에게 보내는 서신의 성격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이 쓴 빌레몬서와 유사한 성격이 있습니다.
- 수신자인 “가이오”는 당시에 흔한 이름이었으며 그 뜻은 '기쁨', '환희'입니다. 가이오라는 이름은 세 사람에게서 발견됩니다. 첫째는 바울이 세례를 주었고, 후에 데살로니가의 첫 감독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고린도의 가이오(롬16:23; 고전1:14)입니다. 둘째는 바울의 동역자로 데살로니가와 아리스다고 그리고 에베소에서 고난을 같이 한 마게도냐의 가이오(행19:29)입니다. 셋째는 바울의 마지막 선교 여행에서 그리스로부터 마게도냐를 지나 드로아까지 동행한 더베의 가이오(행20:4)입니다. 이 세 번째 가이오는 나중에 사도 요한의 의해서 버가모의 첫 감독으로 임명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볼 때, 이 세 번째 가이오가 요한 삼서의 수신자가 되는 가이오로 여겨집니다.
-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 “네 영혼이 잘됨 같이”라는 말은 가이오의 영혼과 주님과의 관계가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것이 기초가 되어서 다른 문제들이 잘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자칫 이 세상의 형통과 부요함을 위한 간구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과의 영적 관계가 모든 문제들의 핵심에 처하게 되는 것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의 그 어떠한 형통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주님과의 관계이고, 그것이 바르게 될 때, 다른 문제들은 자연히 해결되고 바르게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는 말씀이 전제되고 있는 바의 말씀입니다.
2) 가이오가 진리 안에 거하는 것으로 인한 기쁨
- 3절.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 당시의 교회의 성도들은 함께 왕래하며, 함께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고, 진리가운데 살고자 격려하고 권면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 형제들이 사도 요한에게 와서 가이오가 얼마나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는지에 대해서, 그와 교제하는 것을 통해 알리고 있습니다. 당시에 많은 이단들, 특별히 영지주의의 심각한 폐해가 있던 상황속에서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본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은 사도 요한에게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은 그렇기에 모든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이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하고 마땅한 자세입니다.
- 4절.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 사도 요한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으로 말미암는 기쁨에 대해서 감추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말씀을 증거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인 자가 주님의 진리의 말씀 안에서 바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이 지극한 기쁨이 되는 것임을 사도 요한은 밝히고 있습니다. 그 기쁨은 사도 요한만의 기쁨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기쁨이 되어야 하는 영역입니다. 성도가 자식이 잘되고, 가지고 있는 재화가 늘어나고, 세상에서 잘되고, 높임 받음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진리 안에서 거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참된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3) 영접해야 하는 이들
- 5절.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 가이오는 형제들,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신실하게 대접했습니다. 여기서 나그네 된 형제들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그네 된 자들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복음이 필요한 곳으로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대접한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이들을 섬기는 것은 초대 교회의 매우 중요한 덕목이 되었습니다. 또한 당시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인해서 생계가 막히고, 살던 지역에서 떠날 수밖에 없던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그네 된 형제들을 섬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복음으로 인해서 생계가 막히고, 살던 지역에서 떠난 이들을 무조건적으로 섬기는 일이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당시에 이렇게 공개적으로 사역을 하는 가이오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소외와 냉대를 받았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감당하고 있는 가이오의 믿음에 대해서 사도 요한이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 6절.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 가이오에게 대접을 받고 환대를 받은 이들이 교회 앞에서 가이오의 사랑을 증언했습니다. 가이오는 진실된 사랑으로 그들을 섬겼던 것입니다. 거기에 사도 요한은 재정적으로도 후원하면 좋겠다는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선교를 위해서 이 일이 왜 중요한지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이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 7절.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 나그네 된 자들은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주님의 명령을 따라 나간 자들이지만 그들이 복음을 증거하는 대상인 이방인들에게 아무런 후원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사도 요한은 밝히고 있습니다. 나그네 되어 선교하는 이들의 물질적인 필요가 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섬겨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나그네들이 감당하고 있는 선교의 대상이 이방인들에 대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헌신한 자들에 의해서 무보수로 사역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역자들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초대교회의 복음이 흥왕하게 증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자들을 영접하고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사도 요한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 8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 사도 요한이 언급하고 있는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단순히 숙식을 제공하고 격려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들이 다음 목적지까지 어려움이 없이 갈 수 있도록 물질을 지원하는 것을 포함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선교사들이 마땅히 교회의 환대를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이유 즉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행한다는 것과 실질적으로 아무런 지원을 받지 않는다는 것 외에 한 가지 이유를 더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일원들이 선교사들을 환대함으로 선교사들이 선교 사역에 동참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질로 선교사들을 돕는 것이 선교사역에 동참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의미가 퇴색되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고, 강조되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따르지 않은 채 물질만으로 그 종교적인 부담을 채우려는 차원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입니다.
가르침 :
1) 사도 요한은 겸손하게 가르침을 베풀고 있습니다. 당시 초대 교회의 최고의 권위를 지닌 교회의 어른으로서 자신을 신격화 할 수도 있는 존재였지만, 사도 요한은 그런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주님의 진실한 제자로서 그런 것에 집착한다는 것은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으로 오신 본을 통해 참된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요한은 그 길을 걷기를 원했지 사람들로부터의 인정을 하나님의 인정보다 더 원하지 않았습니다.
2) 사도 요한은 가이오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가이오는 버가모의 첫 감독이 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나그네들을 선대했습니다. 여기서의 나그네는 복음 전도자들을 특별히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방인들에게 나아간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후원이 없었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그 명령을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을 착한 마음과 뜻으로 따뜻하게 대한 가이오를 칭찬하는 사도 요한은 그들에게 물질적인 후원도 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미 가이오가 하고 있는 일이었을 수 있지만, 다른 형제 자매들에게도 이 귀한 일을 알리고, 그 일에 동참하도록 하고자 한 것입니다.
3) 본문에서는 선교론적인 문제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드러나게 되는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초대 교회의 선교 정책은 첫째, 선교대상과 관련하여 볼 때 이것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 때의 선교는 헌신자들이 스스로 나간 형태였습니다. 셋째, 이 때의 선교사는 정착하지 않고 순회하는 방식의 선교를 했습니다. 넷째, 당시에 이미 선교 보고가 정착이 되었습니다. 다섯째, 이 때 선교에 헌신한 이들에게는 보수가 없었습니다. 요한3서에 나오는 증거들을 통해서만 보더라도 이렇듯 초대교회 당시에 선교론적으로 어떤 형태가 잡혀져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이렇듯이 주님의 복음이 온 세계에 증거되도록 하기 위해서 성도들로 하여금 상당한 준비를 하도록 인도해 주시고 계셨던 것임을 알게 됩니다.
4) 사도 요한은 주님의 복음이 증거되기 위해서 가이오와 같은 이들이 섬기는 일이 선교사들의 사역에 실질적으로 동참하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일에 헌신하는 자들의 수고가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게 해 주심으로 그 사역에 기쁨으로 동참하도록 하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용 :
1) 복음 전도자들을 섬기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중요한 일입니다. 그 일은 복음 사역에 구체적으로 동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지향해야 하는 선교적 태도가 무엇인지를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복음을 증거하는 이들의 상황속에서 그들을 섬겨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고, 물질적으로 섬기는 것 역시 그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 사역을 돕는 일의 일환으로서 재정적 지원이 중요한 도구가 되는 것임을 사도 요한은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2) 가이오와 같은 이들은 주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는데 소리없이 이름없이 사용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런 자들을 귀히 여기십니다. 오늘도 이 땅에서 주님 나라를 위해 섬기고, 쓰임받는 자들이 계속해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세워지는 소망이 이루어지게 될 것을 믿음으로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