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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죽음과 세례의 의미(3)
의롭다함을 얻은 자들의 삶의 원리
로마서 6:1-14 / 조상호 목사
저는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제26회 순복음 선교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지난 월요일에 출국하였다가, 어제 토요일에 돌아왔습니다. 저는 3박4일 동안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2~3개월만에 다시 돌아온 것과 같은 생각이 듭니다. 아마 이것은 바쁜 스케줄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것들을 보고, 많은 것들을 듣고, 많은 것들을 경험하는 등, 시간에 비해서 많은 것들을 했기 때문이고, 또 여러분들을 보고 싶어서 짧은 일정임에도 불구하고 길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한번 깨달은 것은 역시 옛날 어른들이 '집 떠나면 고생이고, 집 떠나면 집이 가장 좋다는 것을 알게 돼!'라는 말씀입니다. 서울에 가 보니 이곳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3박4일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저 스스로 변해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국에서의 삶은 유혹도 많을 뿐 아니라, 믿음대로 살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곳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참으로 복되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번 선교대회를 통해서 저 개인적으로는 말라가던 심령을 성령과 사랑의 단비로 촉촉하게 적시는 은혜를 맛보았고, 다시 한번 주의 사명 감당을 다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동안 기도해 주신 여러 성도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에 한 가지 숙제를 가지고 돌아 왔습니다. 우리가 한국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중에 7월 위기설이 있습니다. 제2의 IMF가 7월에 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한국 제일의 현대 그룹이 큰 문제에 빠져 휘청거렸습니다. 제가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세가지 주요 뉴스가 있었는데, 김대중 대통령의 북한 방문 뉴스, 그리고 현대 그룹의 위기, 마지막으로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조성민이라는 프로야구 선수와 톱탤랜트 최진실과의 결혼 뉴스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 현대 그룹의 자금난에 대한 뉴스는 단연코 한국의 톱 뉴스였습니다. 여러분! 현대가 어떤 회사입니까? 세계적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회사 아닙니까? 그런데 그 회사가 기우뚱거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 부흥을 위하여 많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고국의 경제를 위해서도 많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영인들을 위해서, 직장인들을 위해서, 정치인들을 위해서, 온 국민들이 정신을 차리도록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2년6개월 전의 IMF를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흥청망청병'이 다시 도졌습니다. 저희가 묶고 있는 여의도 관광호텔에 손님이 엄청납니다. 외국 사람은 딱 한 사람 보았고 대부분의 손님이 한국 사람으로서, 주차장에 자동차가 가득합니다. 근처에 있는 술집, 음식점은 저녁이 되면 불야성을 이룹니다. 공항에 골프채 들고 골프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건망증 환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비행기에 올라, 눈을 감고 3박4일의 한국 체류를 마감하는데 영적으로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도 영적인 건망증 환자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IMF 당시에는 주일예배에, 수요예배에, 금요철야에, 새벽기도회까지 사람들이 가득 가득했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도움이 너무나도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조금 살만하니 또 다시 교회를 떠나 살고 있습니다. 건망증환자처럼 말입니다. 또 믿음으로 나는 죄인이며, 나는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셨으므로 나는 구원받은 존재요, 주님의 사랑받는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건망증환자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번 선교대회의 세미나에서 강의하신 분 중에 신세대 목사님이신 새안산교회의 김학중 목사님은 한국에 <사오정 시리즈>가 유행한다고 합니다. 사태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동문서답하는 사람이나, 주제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을 손오공 소설에 나오는 '사오정'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사오정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또 배우면서도, 그 말씀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사오정 신자입니다. 정말 구원받은 크라이스트처치순복음교회 성도인지, 아니면 저 산 속에 있는 사찰을 오고 가는 불교 신자인지, 자신의 신분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오정 같은 영적인 건망증 환자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있어 최대의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죄 사함의 기쁨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형선고 받고 사형 날짜를 기다리는 사형수에게 있어, 대통령의 은혜로 사형을 면해주겠다는 특별사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나를,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날짜를 기다리는 것과 같던 나를, 한없는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해 주시고, 새롭게 해 주셨다는 이 기쁨 보다 더 큰 기쁨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의 최대의 슬픔이 있다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망각하고 건망증 환자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미 용서받은 확신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망각한 채, 옛날 주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 저지르던 죄악들을 계속해서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죄를 정당화합니다. "목사님!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니까, 더 큰 죄를 지으면 어떻습니까?"라고 하며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더 큰 용서를 받기 위해서 더 큰 죄를 짓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2절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씀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Certainly No!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By no means! 무슨 의미인가? 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AD1세기경에 살던 로마의 성도들에게, 아니 21세기에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삶의 원리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사망이 들어 왔었지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이 들어 왔고,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변화된 신분에 걸 맞는 삶의 원리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사오정같이 자신을 알지 못하는 건망증신자에게 그 사람의 , 즉 그 <사람의 신분>과 삶의 원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해주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것으로 끝내지 아니하십니다. 성숙한 삶을 살도록 우리를 도우십니다. 이 땅에서 저와 여러분들과 동행하십니다. 3절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4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5절 "그의 부활하심을 본 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계속해서 '주님과 합하여', '주님과 연합하여'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에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이 임마누엘이라는 단어는 구약 이사야에 나옵니다. 특별히 (사8:8)를 보면,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같은 앗수르 군대들의 힘 앞에서, 나라가 어렵게 되어 소망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고백하였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이 모든 세력을 물리칠 것이다"라고 백성들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고백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나와 연합되었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 따라서 나는 외롭지 않다'라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EX) 저는 크라이스트처치에 온 이후로는 하지 않습니다만, 제가 더니든에 서 사역할 때에 수영장에 다닌 적이 있습니다. 보통 때에는 새벽기도 끝나자마자 가지만, 월요일 오후에는 아이들과 함께 가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둘째 아이를 물 속으로 끌어들이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집에서는 수영장을 가자고 난리를 치지만, 막상 수영장에서 수영복을 입으면 물 속에 절대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렵게 아우르고 달래서 겨우 물 속에 들어오게 하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그런데요. 시간이 흐르자, 이제는 거꾸로 물 속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작은애가 매주 한번 씩 수영장에 놀러 가다 보니, 몇 주 후에는 서서히 물에 대해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아빠가 물 속에 있을 때는 아빠를 믿고 그냥 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그 애를 보지 않고 다른 곳을 보고 있는데도, 그 애는 깊은 물 속으로 무작정 뛰어드는 것이었습니다.
아빠가 멀리 있어도 거리와 상관하지 않고, 깊은 물 속으로 그냥 다이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어려서 수영도 하지 못하는 3살짜리 아이가 대책 없이 깊은 물 속으로 무작정 뛰어 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시에 그 애를 보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아이는 전에도 자기가 뛰어들면 아빠가 붙잡아
주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붙잡아 주실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 애는 아빠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빠가 자기 곁에 있으면 자기는 결코 물 속에서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는 하나님과 연합되었고, 그 하나님이 나를 건지신다. 그 하나님이 나와 항상 함께 하신다"라는 믿음이 있습니까?
임마누엘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주님은 결코 저와 여러분들을 떠나가지 않습니다. 믿으십니까?
우리는 때때로 주님께서 우리를 멀리 떠나신 것처럼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주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아멘입니까?
우리가 우리의 신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할 때, 우리는 능력있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알 때, 영적 싸움에서 승리합니다. 또한 악에 대해서 당당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신분, 또한 우리들의 Identity는 주님과 연합되어 항상 주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사는 사람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순간, 우리는 이제 예수와 함께 새롭게 태어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중생했다', '다시 태어났다'고 합니다. 영어로 'Born Again'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과 구세주로 영접함으로 우리의 신분이 바뀌어졌습니다. 우리는 이제 시시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문에 속한 뼈대있는 가문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아담 가문의 후손에서 예수님의 가문의 사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아담 족에서 예수 족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우리의 주소가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분명히 신분과 주소가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신분에 걸맞게 살지 못합니다. 분명히 지난 주일에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했는데, 눈물 콧물 흘리며 회개하고 주님을 믿겠다고 손을 들었는데도 1주일도 지나지 않아, 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신분은 분명히 아담족에서 예수족으로 바뀌었는데 사람의 모습이 바뀌지 않은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것은 예수를 믿으므로 말미암아 신분은 변화가 되었는데, 의식 수준이 변화되지 않아서입니다. 신분은 예수님과 연합된 자이지만, 의식 수준은 아직까지 주님 안에서 살지 않기 때문에, 죄로부터 자유하지 못하고 죄를 지으며 사는 것입니다.
EX) 영국에 줄리안 모리스라는 괴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 미아가 되어 걸인생활을 한동안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가 굉장히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부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집으로 돌아가, 막대한 유산을 받고 졸지에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부자가 되고 나서도 걸인 행세를 지속하는 유별난 사람이었습니다. 날이 밝으면 걸인의 옷차림으로 면도날, 비누, 샴푸 같은 것을 집집마다 팔러 다녔습니다. 다 떨어진 남루한 옷차림, 초점 없이 방황하는 눈동자를 보면 그는 영락없는 걸인이었습니다.
저는 때때로 오늘을 살고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아주 그와 흡사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예배 드리는 순간에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부자다운, 왕자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다음 날이면 삶의 현장가운데에서 좌절하고, 방황하는 연약한 모습을 나타내는 영락없는 거지같은 부자가 있습니다. 그러면 부자가 된 거지의 살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부자의식을 갖는데 있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가지고 있어도 부자라는 의식이 없으면 그것을 마음껏 누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제 부자다. 따라서 부자답게 살아야 하겠다"는 부자의식이야 말로 거지의 삶을 바꾸기 위한 필수 요소입니다.
여러분! 새로운 신분이나 위치에 대한 분명한 의식만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줄리안 모리스는 오랫동안 거지로 살아왔기 때문에, 때때로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거지로 행동하였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았음에도,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이라 할지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인 같은 삶을 살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자신의 신분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이 말을 쉽게 풀어보면 "하나님을 만날 때까지, 천국에 이를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의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또한 나는 이미 주님으로부터 용서함 받아 주님의 백성이 되었고, 주님의 백성답게 주님 안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의식을 품고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identity, 즉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사는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예수 안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멘입니까?
셋째로, 우리는 우리를 의의 병기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우리는 영적인 전쟁을 합니다. 악한 마귀 흑암의 세력은 어찌하든지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범죄케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만약 눈을 통해서, 손을 통해서, 발을 통해서, 또한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을 가지고 우리를 범죄케 하고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면, 그것은 사단의 장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악한 흑암의 세력을 대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싸움꾼입니다. 세상의 싸움꾼이 아니라, 믿음의 싸움꾼들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선한 싸움을 하는 영적인 싸움꾼들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전신갑주를 입고 악한 흑암의 세력을 대적해야 합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할렐루야! 소극적으로는 우리 몸을 불의의 병기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적극적으로는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의의 도구로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도둑이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도둑질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일하지 않고 빈둥빈둥 놀면서 매일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도둑질하지 말아야지. 나는 도둑이 아니야"라고 주문을 외우듯이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가 일하지 않고, 돈벌지 않으면 또 다시 도둑질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도둑질을 하지 않으려는 결심 뿐 아니라, 무슨 일이든지 찾아서 그 일을 할 때, 도둑질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의의 병기로 드리는 것은 무엇을 하지 않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한 도구로 헌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도록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을 오해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주의 종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할수 있는 대로 자기의 환경에서 주님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공부하는 학생은 학교에서 주님의 의의 병기가 되십시오. 직장인은 직장에서, 가정 주부는 가정에서, 사업가는 사업장에서 주님을 위한 의의 병기로 드리십시오. 때때로 닥치는 어려움에도 주님의 영적 군사요, 의의 병기로서 주님께 순종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아직도 주님을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예수족이 되었고 하나님의 가문의 후손이 되었고, 거지의 신분에서 부자의 신분으로, 종의 자녀에서 주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바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살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과 연합되어 주님과 항상 동행하는 사람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을 만날 때까지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사람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흑암의 세력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험악한 이때에 우리 몸을 불의의 병거가 아닌,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어 주님께 영광 돌리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례의 의미
벧전 3:21-22, 롬 6:1-5, 갈 3:27 /
여러분은 모두 다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만일, 아직 받지 못했다면 꼭 세례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질문 하나 드려보겠습니다.
세례는 꼭 받아야 합니까? 아니면 안 받아도 됩니까?
이 질문에 대한 성경적인 답을 꼭 얻어야 한다.
왜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세례 안 받으면 구원을 못 받나요?
그렇게 믿는 교단이나 종파가 있다.
그래서 세례에 관해서 양극단적인 오류가 있다.
1) 하나의 극단은 : 세례를 구원의 필요조건으로 보는 잘못된 견해이다.
(막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이 성경을 보라 누가 구원을 받나?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믿음 + 세례 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 받기 위해서는 세례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례가 구원의 조건이라면, 구원은 세례에 달려 있다.
(CF) 만일 어떤 사람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게 되었다.
그런데 다음 세례식 날짜까지 살지 못하고, 어떤 사고로 죽었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못 받는다는 말인가? 그럴 순 없다.
(예화) 예수님 십자가의 한 쪽 강도는 세례 받을 틈도 없이 죽었으나, 낙원에 갔다.
그러므로 세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세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해석해서 [구원= 믿음 + 세례]라고 이해하는 것은 극단적인 오류이다.
(예) (고전 1장) 교린도교회는 세례 문제로 파당이 생겼다.
내가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는가?
그것 때문에 교회 안에 당파가 생긴 것이다.
ㄱ) 아볼로 파 : 담임목사 위치다. 여기가 가장 정통 세례 교인이다고 주장
ㄴ) 베드로 파 : 예수님의 수제자 아닌가? 여기가 가장 정통 세례 교인이다고 주장
ㄷ) 바울 파 : 창립 목사, 원로목사 격이다. 여기가 가장 정통 세례 교인이다고 주장
ㄹ) 그리스도 파 : 아볼로도 아니고, 베드로도 아니고, 바울도 아닌 그리스도 파도 나타났다.
그렇게 세례 문제로 교회 안에 파당이 생기고 분열이 되니, 바울이 이렇게 말했다.
(고전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라고 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사도 바울을 고린도 교회 보내신 것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고,
복음을 전파하려 하심이라는 말이다.
만일 세례가 구원의 조건이라면 반드시 복음 전파와 함께 세례도 주었어야 했다.
세례 문제 때문에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느냐는 문제로 교회에 파당이 생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세례를 안 주고 말리라.
그래서 바울은 자기 손으로 세례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실제로 (고전 1:14) 바울은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했다.
주님이 나를 보내신 것은 복음 전파이지, 세례 주라는 것이 아니다.
결국 이 말의 뜻은 세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구원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는 말이다.
2) 정 반대의 극단적인 오류가 있다.
세례는 하나의 의식(儀式)에 불과하다는 견해이다.
그러니까 세례는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된다는 입장이다.
세례는 단지 종교의식의 하나로 보는 것이다.
하나의 기호(嗜好)처럼 자신이 채택하든지, 안 하든지, 별 다른 의미와 가치가 없는
하나의 종교의식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세례에 관한 또 다른 극단의 오류이다.
그렇다면 세례가 구원의 조건도 아니고, 꼭 받아야 되는 것도 아니라면 :
★ 과연 성경적인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가?
(1)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는 구원의 표이다. (21절)
(21절)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세례는 내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는 표이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아야 구원받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구원 받은 자가 자신이 받은 구원의 신앙을 공표(公表)하는 것이다.
내가 이제는 더 이상, 세상에서 방황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공표(公表)하는 것이다
(예) 초대 교회 당시에는 예배당 안에서 세례를 준 것이 아니라,
동네에 나가서 강가에서 세례와 침례를 주었다.
그러기 때문에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보고 있다.
내가 세례를 받는 것을 보면서 "저 사람 예수 믿게 되었구나..." 다 들어나게 된다.
그 때 부터 예수 믿는 사람으로 신자답게 살아야 한다.
그런가 하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삶에 어려움과 핍박을 당할 수도 있다.
왕따,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드러내 놓고 세례와 침례를 받았던 것이다.
정말, 초대 교회 당시에는 그런 각오없이는 세례 받지 못했을 것이다.
참으로 구원받은 신앙이 아니면 세례 받지 못했을 것이다.
(2) 세례의 본질적인 의미는 [연합] Union 이다.
누구와의 연합인가? 2가지와의 연합이다.
(ㄱ)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롬 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반복되는 단어가 [합하여]이다. 즉 연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다.
내가 세례 받을 때, 예수님이 세상에 대하여 죽으신 것처럼,
나도 이제는 세상에 대하여 죽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나도 하나님을 위하여 다시 산 자로 살아가겠습니다고 하는 것을 공표하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 속에 나도 연합되어 나도 세상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의(義)에 대하여 사는 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서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것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건이 곧, 나의 사건으로 화(化)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되었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누구와의 연합인가?)
(ㄴ) 둘째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의 연합이다.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한 몸]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교회의 지체가 되고, 교회의 멤버가 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연합되는 것이다.
세속에 물들어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던 내가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서 세례를 받을 때 나는 :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둘째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연합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믿게 되었을 때, 주님과 연합되었고, 교회의 지체가 된 것은 :
참으로 놀라운 영적인 Fact (실제) 사건이다.
문제는 영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눈으로는 보이지 않으니까, 볼 수 있는
가시적인 [물]로서 영적인 연합의 실제를 외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세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은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
내가 구원 받기 위해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조건으로 세례 받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으니, 이제는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연합되었음을 고백하고 공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는 반드시 받아야 한다.
(예화) 어떤 교인들은 교회를 샤핑하고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아 다녔다.
어떤 교회에 출석하다가도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또 교회를 쉽게 옮긴다.
그런데 교회 다니던 연조가 길다 보니, 서리집사, 안수집사까지 불리우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그런 직분자로 알고 있다.
문제는 아직도 세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세례받을 겨를도 없이 어쩌다 보니, 직분을 받은 것이다. 크게 잘못된 것이다.
(사실은 교회에서 확인했어야 한다.)
이 사람은 이것이 고민 되었다.
내가 얼마 후에는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설 텐데...?
내가 직분은 받았으나, 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 양심에 걸린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찾아와 목사님에게 고백하며 상담했다.
정말 그는 존경받을 만한 정직한 사람이다. 양심적인 사람이다.
사람들이 지금, 나를 안수집사로 알고 있는데 이제 와서 세례를 받는다면 창피스러운 일이다.
지금까지 속여 왔다는 말이 아닌가? 비난도 들을 수 있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이목 보다 더 중요한 것은 :
어떻게 세례도 받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모든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수치를 무릎쓰고, 결단하고, 세례를 받았다.
정말, 잘한 일이다. 참 잘 내린 결단이다.
그 사람이 세례 받는 것을 보고 놀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초신자처럼 세례를 받았으니, 눈총주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개의치 않고 용감하게 세례를 받고 그 기쁨을 간증했다.
그는 주님 안에서 마음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예) 또 한 사람의 경우가 있었다. 이번에는 여자 분이다. 권사님이다.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앞의 남자 안수집사님의 경우를 들면서 개의치 말고 세례를 받으라고 해서 받았다.
이 여자 분을 아는 분들이 그를 <권사>로 알고 있었는데, 초신자처럼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참 잘 한 것이고, 정직한 것이다.
성경에 꼭 직분을 받아라. 그렇게 말씀한 성경구절은 없다.
그러나 믿고 세례를 받으라는 말씀은 분명히 있다.
이것은 주님의 지상 명령에도 있다.
(마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믿는 자는 세례 받으라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다. 지상명령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집사, 권사, 장로 직분 받은 것으로 자랑할 수 있나요?
자랑거리가 안 된다. 상급과 칭찬은 직분과 상관이 없다.
그 직분은 교회와 성도를 섬기라고 주신 문자 그대로 직책일 뿐이다.
(결 론)
세례는 침례처럼 물에 잠기든지, 세례처럼 손 손례로 하든지,
세례의 의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의 연합이 되는 것이다.
세례받을 때, 나의 옛 사람은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는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서약(誓約)하고 공표(公表)하는 거룩한 예식이다.
(21절)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가 하나님 앞에 감사해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영적인 실제를 가시적으로, 공표(公表)하며 고백하는 참으로 고귀한 예식이 세례의 의미이다.
세례의 의미를 깨달았으니, 예수 믿지만 아직도 세례 받지 못한 분들은 꼭, 세례 받으시고,
세례받으신 분들은 그 세례의 의미대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복된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다가, 어느 좋은 그 날 아침에 주님이 부르시면,
주가 예비하신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 멘)
용서의 결과
로마서 6:1-6 / 김태환목사
여러분은 정녕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은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와 별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 상처는 시간이 가면 쉽게 잊혀집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는 쉽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런 상처는 내 마음에 “쓴 뿌리”가 되어서 오래 동안 나를 괴롭힙니다. 성경 히브리서에 보면 “쓴 뿌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 쓴 뿌리와 같은 사람들이 생겨나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런 사람은 많은 사람을 괴롭히거나 더럽힙니다(히브리서 12:15).” NIV 성경에는 “No bitter root grows up to cause trouble and defile many”라고 했습니다.
내 마음에 “쓴 뿌리”가 치유되지 않고 남아 있으면 본인에게도 문제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문제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에는 이런 쓴 뿌리가 자라나서 공동체를 해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합니다. 치유되지 않은 쓴 뿌리는 그 사람 개인에게도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어느 모임에서나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가 섬기는 공동체 안에 쓴 뿌리가 자라지 않도록 잘 살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쓴 뿌리에서 나오는 쓴 물이 공동체 전체를 오염 시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용서의 결과”입니다. 요절 말씀은 로마서 6:6 말씀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했고, 쉬운 성경에는 “우리는,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죄의 몸이 무력하게 되었으므로, 우리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했습니다. NLT 성경 말씀을 보면 이 말씀의 개념이 쉽게 파악됩니다. “We know that our old sinful selves were crucified with Christ so that sin might lose its power in our lives. We are no longer slaves to sin”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옛 사람(sinful selves)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합니다. “so that sin might lose its power in our lives” 죄가 더 이상 우리의 삶에서 power를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합니다. 이제 죄가 우리 몸에서 power를 행사하던 우리의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우리는 죄로부터 벗어날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죄가 이끄는 대로 살았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죄가 우리 몸에서 왕노릇 한다(로마서 6:12)”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죄가 그 속에서 왕처럼 힘을 가지고 군림하던 우리의 옛 사람은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더 이상 우리에게서 힘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로 살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삶의 결과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읽은 말씀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의 죽음에 참여하였다면, 그분과 연합하여 그분의 부활에도 참여할 것이 확실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을 가지고 산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지으며 살 수 없습니다(1-2절).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듣고,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지으면 안 됩니다” 성경 말씀은 이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 말씀이 로마서 6:13에 이렇게 나옵니다. “여러분은 육신의 한 부분이라도 죄에 내맡겨 불의의 도구가 되게 하지 말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처럼 여러분을 전부 하나님께 드려 의로운 일에 쓰일 도구가 되게 해야 합니다.”
이제 지금까지 여러분이 들은 말씀을 모두 뒤집어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죄가 이끄는 대로 불의의 도구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의의 도구로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의 의미가 전적으로 달라졌습니다. 우리의 생에 새로운 목적과 의미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용서 하지 사람들의 특징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닫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마음을 닫습니다.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서 상처 받고 싶지 않다는 심리적인 요인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만큼 감정적으로 구속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TV에서 격투기 장면을 보셨습니까? 보통은 링 위에서 싸우는데, 어떤 때는 링 위에 철창을 만들어 놓고 두 사람이 처절하게 싸웁니다. 이 철창을 cage라고 합니다. 둘 중에 누가 쓰러져야 cage에서 나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cage안에서 사는 사람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 마음을 닫고 있기 때문에, 감정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지 못합니다. 이 사람은 자기 마음에 만들어 놓은 cage 안에 갇혀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대개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수반합니다. 이 사람이 비록 크리스천이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느끼는 기쁨과 자유는 매우 제한됩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이런 사람은 몸의 많은 부분들이 마비된, 그래서 정상적으로 팔 다리를 쓸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가복음 2장에는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고쳐 주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가 감동적인 것은 이 사람의 친구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이 사람의 병을 낫게 해 주려고 예수님께 이 사람을 데리고 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안 친구들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그 집의 지붕을 뜯고 이 사람을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아픈 곳에 손을 대시고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다소 엉뚱하게도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가복음 2:5)”고 말씀하심으로 이 사람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이것은 이 사람의 병이 이 사람의 죄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살았던, 그래서 고통스럽게 인생을 살았던, 그래서 마침내 그 고통이 병이 되어 몸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린, 그런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이 사실을 아신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죄를 먼저 사해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의 중풍병이 나았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삶의 결과 중에 또 하나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교제의 삶이 메말라 점점 생명을 잃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이유 중의 하나는 “너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 너를 통해서 나의 용서의 은혜가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게 하라” 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잘 깨달은 사람 중의 하나가 예수님의 제자였던 요한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한일서 4:11).” 이 말씀은 용서의 문제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께서 이같이 우리를 용서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렇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또 에베소서 4:32에 보면 바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은혜는 다른 사람에게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말씀 아닙니까? 비록 그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당신도 하나님께로부터 용서 받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나도 용서해 주세요” 이렇게 우리에게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도 확장 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그냥 우리 속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받은 용서의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않고 사는 삶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끝으로, 용서하지 않는 삶의 결과는 필연적으로 깨어진 관계(broken relationship)를 가져 옵니다. 한번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미안합니다. 나를 용서해 주세요”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정말 말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당신의 사과를 받아 들이겠습니다, 그러니, 나도 용서해 주세요”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정말 주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니고서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깨어진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이 이런 어려움을 이기고 관계 회복을 위해서 노력한다면, 하나님은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전보다 더 든든한 관계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죄를 그 자신이 짊어지셨습니다. 우리는 그 결과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을 나눈 자의 삶
로마서 6:1-14 / 유영설 목사
초대교회에 다음과 같은 주장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을 받는다면, 자유롭게 죄를 지어도 괜찮다. 둘째, 죄가 많을수록 용서해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욱 넘치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은 죄를 짓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2절)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 이기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세례 받음으로 그것이 증명되었으며, ‘부활’이란 새로운 생명이 주어짐으로 ‘중생’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울은 칭의를 경험한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며 살아야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강조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교리를 따라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강력하게 말씀했습니다.
1. 죄가 너희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12절).
바울은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우리 몸을 ‘죽을 몸’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육체에 대하여 너무 관심이 많습니다. 현대인들은 몸짱과 얼짱이 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허비하고, 건강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염려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죄가 육체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라 했습니다. 사도는 우리가 정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어야 된다고 말하는데 정욕에 굴복하는 순간 우리는 존귀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정욕에 굴복한 자는 자기의 진정한 자존심이 없습니다. 정욕으로 굴복한 사람은 무가치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우리의 삶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깨어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2. 우리들 자신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13절).
“너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오직 너의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처럼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로서 그리스도십니다. 그 분은 죄와 관계없고 죄의 지배를 받지도 않는 자유로운 몸입니다. 우리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를 믿을 진데 그 분 안에서 새 생명을 살게 되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죄의 지배 받지 않도록 해야 우리 육체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으며, 하나님께 의의 무기로 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말은 ‘곁에 둔다’ 혹은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대신 제물로 바친 것은 여호와의 산에서 이미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준비되어 있기 위해서는 연마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혼자 일하시지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새 생명을 살면서 자기 육체를 의의 무기로 성별한 자가 쓰임받습니다.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고, 가인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이 모든 과정들을 볼 때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독자적으로 일하시지 않고 사람들과 동업하는 분이십니다.
3. 은혜 아래 있어야 합니다.
은혜라는 말은 본래 희랍어에서 「카리스」로 쓰이는데 ‘아름답다.’ ‘사랑스럽다.’ 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대가 없이 주시는 하나님 사랑을 말할 때 쓰이고 있습니다. 바울 서신에 100회 이상 언급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고자 함이라”(눅 19: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본질적인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져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분이 십자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지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내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이 은혜의 사건은 내가 어떤 공로가 있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가운데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 여기에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의 의의 무기로 드려야 합니다. 헛된 것을 위해 자기 생명을 허비하는데도 그것을 사명이라고 하는 자들 있습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이기적인 삶임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육체를 위해 생명을 바치라고 하는 세상의 유혹을 분별할 수 있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박해를 위해 사명감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잘못된 사명은 사람을 죽이는 범죄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 15:10)고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을 나눈 자의 삶은 죄의 지배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 언제든지 우리들 자신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은혜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먼저 구속의 은총에 대한 확신과 감격을 체험해야 합니다. 기독교가 행함의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행함의 능력이 은혜에서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 안에 있을 때만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앎’이나 깨달음의 종교가 아니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고 주님과 대화하는 종교입니다. 오늘도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이 사실을 확증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승리하는 방법
로마서 6:1-14 / 이동규 목사
저는 딸들에게 노력파가 되라고 늘 말합니다. 저는 머리가 그리 썩 좋지 못합니다. 천재형이 아닙니다. 그래서 늘 노력파가 되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뭐 천재형을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머리는 좀 모자라지만, 노력으로 커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영 나빠서 수준 이하라면 몰라도 중간 정도의 머리라면 노력으로 얼마든지 맘먹은 것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소위 천재라는 사람들도 노력이 들어갔을 때 빛을 발하게 되지요. 어쨋든 저는 딸들에게 노력파이기를 주문합니다. 물론 우리 딸들이 그리 뭐 천재형이 아닌 것 같아서 자꾸 강조하는 면도 있지만 말이지요.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천재형은 필요 없습니다. 한번 세례 받고 한번 죄 사함 받았으면 됐지, 자꾸 몸부림치고 자꾸 회개하고, 자꾸 육체는 죽이고 뭐 그리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애를 쓰나? 이렇게 비웃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성화는 분명 노력의 산물입니다. 무슨 노력인고 하니 몸부림의 노력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노력입니다. 죄의 고백의 노력입니다. 이런 노력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몸부림치는 사람에게는 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노력파는 변합니다.
사실 거룩이라는 말의 뜻은 물론 구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몸부림이란 뜻도 됩니다. 하나님을 향해 가는 몸부림, 빛을 향해 가는 몸부림, 성결을 향해 가는 몸부림! 이것이 하나님께 거룩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절대 기준을 보시지 않습니다. 80점 이상! 이런 기준이 없습니다. 상대 평가입니다.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자, 자신의 몸부림을 치열하게 하는 자, 여기에 점수를 주는 겁니다. “Do Your Best"입니다. 까닭에 나의 몸부림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낮은 기준, 즉 20점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의 거룩을 향한 몸부림은 일평생 동안 치열했습니다. 그래서 70점으로 올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타고난 성정이 좋고 바탕이 좋아 70점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통해 80점의 거룩에 도달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칭찬할 것 같습니까?
절대점수는 낮지만 그의 치열한 몸부림으로 50점이나 끌어올린 자를 거룩하다 칭찬할 것입니다. 이것이 상대평가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해서 구원얻는 다면 한 사람도 구원얻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저 우리의 몸부림이 거룩입니다. 그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고, 감사하고 감격하는 마음으로 몸부림치는 자, 그저 일평생 빚진 자 되고 죄인 되어, 늘 빛을 향해 몸부림 치는자, 이는 거룩한 자입니다.
성도는 그런 의미에서 성도입니다. 빛을 향해 몸부림 치고 있습니까? 그대는 이미 충분히 거룩한 자입니다. 회개를 향해 몸부림 치고 있습니까? 이미 그대는 충분히 거룩한 자입니다.
시대의 탕아가 어거스틴이 되고, 우뢰의 아들이 사랑의 사도가 됩니다. 죄를 벗기 위한 노력, 회개하기 위한 노력,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한 노력의 땀을 뻘뻘 흘리는 사람에게는 당할 장사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보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는 노력파가 되어야 합니다. 죄짓고 회개하고 죄짓고 회개하는 데는 노력파라야 합니다. 육체의 정과 욕심을 못 박는 일에는 노력파라야 합니다. 이 사람이 승리의 사람이 됩니다.
죄에 대해 단호히 죽음을 선포합시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합디다. 왜 교회 나가는지 아느냐고? 예수쟁이들은 주일날, 하루 실컷 회개하고 마음 놓고 일주일 동안 편하게 죄 지을려고 교회나간다고. 일 주일동안 맘대로 죄지어도 좋은 면죄부 티켙 받으러 가는데가 교회일 줄 아는 겁니다.
어떤 분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참 편리하다고 합니다. 죄짓고 회개하고 죄짓고 회개하고, 그러면 되니까 아주 편리한 구조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주 편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큰 죄도 다음날 회개하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단순한 구조를 비웃습니다만,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세상 사람들은 또 어떻습니까? 죄 한 번 짓고는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이 자존심입니까? ‘회개는 내 사전에 없다’이러면서 자신에게만 충실하다가 자신에게만 책임지며 살다가는 것이 용감한 것입니까? 아무리 신앙인들이 욕을 먹지만, 그래도 회개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비교적 깨끗하게 삽니다. 이 사실은 아마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죄짓고 회개할 때 너무 가벼이 한다는 데 문제가 있어요. 칭의의 교리를 잘 못 이해하면 죄에 대한 면역이 약화될 수 있습니다. 죄지으면서도 주일 예배 때 가서 회개하면 되지. 고백하면 되지. 뭐 이럽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심각성이 약해집니다. 이런 회개는 십자가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회개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할 때는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리는 고통을 맛보아야 합니다. 내가 죽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끝에 주님의 용서가 있는 것입니다.
어쨋든 우리는 세례를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 하셨듯이, 몸 전체를 목욕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발은 씻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을 생활하면서 짓는 죄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죄를 회개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받은 세례를 확인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미 받은 세례 매일 매일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매일 매일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죽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죽기가 귀찮아서 잘 안 죽습니다. 죄에 대해 단호히 죽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례자의 삶입니다. 과감하게 죽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죄의 몸을 멸하고 장사 지내야 합니다. 완전히 멸망시켜야 합니다. 장사지내야 합니다. 장송곡을 불러야 합니다. 죄에 대한 장례 치르기. 이걸 명확히 해야 합니다. 과감하고 단호하게 해야 합니다. 엉거주춤 있어서는 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기대감 때문에 관 뚜껑을 반쯤만 닫아 놓고 장사지내는 사람 없지요? 무덤을 쓸 때 대충 묻어 버리고 숨구멍이라도 뚫어 놓는 사람은 없지요? 장사치를 때는 확실하게 합니다. 관 뚜껑 못을 꽝 꽝 박습니다. 무덤을 쓸 때는 어허라 덜구여 하면서 아주 꼭꼭 밟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옛 사람은 확실하게 장사 지내야 합니다. 다시는 살아 나오지 못하게. 날마다 죽여야 합니다.
우리 옛 사람은 십자가의 예수와 함께 못 박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죽어 버렸습니다. 육체는 죽었습니다. 죄의 몸은 죽었습니다. 정과 욕심도 죽었습니다. ‘정과 함께 그 욕심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죄의 몸은 완전히 멸했습니다.
살아나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살아나야 합니다. 무엇이 살아나야 합니까? 새 사람, 영적인 사람이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줄을 앎이로라
침체되어 있는 것도 죄입니다. 죽어라 죽어라 하면서 살아나지 못하는 것도 죄입니다. 죽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살지 못하는 것은 더 문제입니다. 십자가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문제는 부활의 능력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십자가입니까? 부활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죄에 대해 죽음을 선포하는 것은 의에 대해 살기 위한 것입니다. 승리입니다.
성만찬을 받을 때 어떤 분은 심각한 표정을 짓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에 지금 함께 참여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성만찬을 받습니다. 찬송도 고난 찬송만 부릅니다. 피 흘리고 찢기시며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더 심각하게는 나 자신의 죽음을 선포하는 것이지요. 정욕과 욕심에 대해 죽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면 문제입니다. 심각한 표정만 짓고 끝난다면 반쪽입니다. 성만찬은 또한 부활의 축제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만 있고 부활이 없다면 문제이지요. 때문에 성만찬은 죽음 다음에 살아남의 승리를 찬양해야 합니다. 고난으로 시작해서 축제로 끝나야 합니다. 이 전 과정을 다 경험해야 성만찬에 제대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어쩻든 우리가 일평생 동안 세례는 단 한 번 받습니다. 그렇지만 성만찬은 수 없이 반복해서 거행합니다. 그렇지요. 세례는 단 한번 받지만, 성만찬을 통해서 세례를 매번 확인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는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심과 그 능력을 누립니다. 때문에 살아나야 합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지만 속 사람은 날로날로 새로와 져야 합니다. 겉모습은 작고 초라해 지지만, 영적인 사람은 커져야 합니다.
의의 병기가 되도록
“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3절)
우리가 육체 가운데 있으면 무기가 됩니다. 악을 행하는 무기, 남을 헤치는 무기, 비방하는 무기, 쾌락을 퍼트리는 무기가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의의 무기가 됩니다. 평화를 건설하는 무기, 복음사역을 펼치는 무기, 사랑을 실천하는 무기가 됩니다.
불의의 무기가 될 것인가? 의의 무기가 될 것인가? 이걸 결정해야 합니다. 오늘도 결정해야 하고, 내일도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과거의 나를 장사지내는 일, 그리스도와 함께 새사람으로 부활하는 일, 그리스도를 위해 의의 병기로 헌신하는 일, 이런 과정이 매일 매일의 삶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매일의 세례요, 이것이 매일 매일의 성만찬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갈2:20)
날마다 세례를 받으며, 주님과 함께 손 붙잡고 살아 오늘도 승리하시는 신앙의 노력파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문)
주님, 이 죄악 된 육신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주소서. 주님의 신비한 새 몸으로 덧입게 하여 주소서. 주님, 저희가 아직도 육체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때묻은 육신으로 살아갑니다. 늘 날마다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부활하게 하소서. 늘 날마다 십자가를 경험하며 늘 날마다, 부활을 경험하게 하소서.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하게 도와주소서.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와 기쁨으로 간구하게 도와주소서.
주님, 날마다 육체에 대해 죽음을 선포하고, 날마다 영에 대해 살아남을 선포하는 힘있는 당신의 아들 딸들이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그리스도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