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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 http://cafe.daum.net/Europa/1AT/22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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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기독교 왕국들과 파티마 왕조의 싸움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비잔티움 제국에서도 정치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1260년 스테파노스 네마냐를 강제로 수도원에 집어넣고 황제를 자칭한 마미아 바크바키쉬빌리는 내전에 지쳐가는 비잔티움인들에게 빠른 내전 종결을 약속했다. 네오피토스는 새로운 자칭 황제에게 교섭을 시도했지만 마미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스테파노스는 네오피토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전략을 썼지만 마미아는 더 나아가 외교전과 동시에 적극적인 전투를 통해 네오피토스를 쫓아내려고 했다. 한동안 불편한 소강상태였던 두 세력은 전투가 다시 벌였다. 테살로니카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지역들은 쑥대밭이 되었다. 또 마미아는 즉위하기 직전 폴란드 왕국에 정치 공작을 시도했다.
<최초의 조지아 출신 비잔티움 황제. 마미아 바크바키쉬빌리>
1138년 폴란드 왕 볼레스와프 3세 피아스트는 자기 형과 왕위 쟁탈을 했던 일을 고통스럽게 여겨 자기 자식들에게는 영지를 공평하게 나눠주었다. 그의 자식들은 아버지의 뜻과 다르게 서로를 정복해 폴란드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고자 했다. 볼레스와프 3세의 장남 브와디스와프 2세는 처남인 독일왕 콘라드 3세-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의 삼촌이기도 했다.-의 지원을 받으며 폴란드 통일을 시도했으나 동생 볼레스와프 4세에게 패하고 독일로 망명했다. 콘라드 3세는 브와디스와프 2세를 다시 왕위에 앉히기 위해 폴란드를 공격했다. 볼레스와프 4세를 쫓아내진 못했지만 그와 유리한 협상을 맺은 콘라드 3세는 독일로 돌아갔다. 브와디스와프는 독일에 계속 체류하게 되었고 대신 황제에게 알텐부르크를 영지로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폴란드 왕위를 포기하지 않은 브와디스와프 2세는 새롭게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에게 폴란드 원정을 요청했다. 1157년 바르바로사의 폴란드 원정을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볼레스와프 4세의 충성맹세를 받은 것에 만족한 바르바로사는 브와디스와프를 복권시키지 않았고 그는 1159년 알텐부르크에서 죽었다.
볼레스와프 4세는 1146년부터 1194년까지 장기 집권했다. 1194년 이교도 리투아니아인과 싸우던 볼레스와프 4세는 창을 맞고 전사했다. 아들 레셰크 1세가 뒤를 이었다. 레셰크 1세는 폴란드 내의 내분과 신성로마제국의 내정 간섭에 골치를 썩이며 왕위를 유지했다. 레셰크 1세의 아들 볼레스와프 5세가 왕위를 물려받았고 다시 볼레스와프 5세의 아들 레셰크 2세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레셰크 2세는 무능한 이였다. 10년 동안 그의 통치를 참은 귀족들은 결국 폭발하여 1250년 레셰크 2세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왕의 먼 친척인 헨릭 피아스트를 새 왕으로 모셨다. 헨릭은 나이도 충분하고 명망도 높았지만 아내가 죽은 뒤 재혼하지 않았고 불과 3년전 외동딸을 잃은 뒤론 영지에서 두문불출하던 인물이었다. 갑자기 귀족들에 의해 왕에 오른 헨릭은 왕국을 통치하는 것을 무척 부담스러워했다. 그럭저럭 나라를 운영하던 헨릭은 1259년 성전에 참가하기 위해 왕위를 던져버리고 이베리아로 가버렸다. 폴란드인들은 경악해하면서도 새 왕을 선출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왕가인 피아스트의 귀족이 왕위에 차지할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까진 스테파노스 네마냐의 충복이었던 마미아 바크바키쉬빌리가 폴란드에 도착했다. 마미아는 어마어마한 돈을 뿌리면서 귀족들을 포섭했다. 또 신성로마제국의 내정간섭을 막아주겠다, 폴란드인들과 좋은 조건의 무역조약을 맺겠다는 등 각종 약속을 내걸면서 자신이 후원하는 후보를 밀었다.
그 결과 포메랄리아 공작 슈체스니 수비슬라보빅이 폴란드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북해의 중요 무역도시인 슈체친(슈테틴)과 그단스크(단치히)를 소유한 슈체스니는 북해 무역으로 부를 쌓은 인물로 포메라니아 대공국의 주요경쟁자이기도 했다. 마미아 못지않게 슈체스니도 많은 돈을 뿌려 인망을 얻었다.
슈체스니는 후원자인 마미아에게 친교와 동맹을 약속하는 문서를 작성했다. 스테파노스 네마냐가 아닌 마미아에게 말이다. 마미아는 처음부터 스테파노스가 아닌 자신에게 우호적인 인물을 폴란드 왕으로 올린 것이었다. 왕위를 빼앗긴 피아스트 가문이 반항하느라 몇 년을 소모했지만 슈체스니는 마미아의 동맹국으로 콤네노스군을 공격했다.
<전통적인 왕가 피아스트 가문을 밀어내고 폴란드 왕이 된 슈체스니 수비슬라보빅>
북쪽의 폴란드가 헝가리를 공격하자 헝가리 군주 칼만 드루게스는 크로아티아에서 회군했고 마미아는 크로아티아의 병력을 빼내올 여유를 얻었다. 지난 필리포폴리스 전투보다 더 많은 군대를 끌고 온 마미아는 네오피토스 콤네노스를 노렸다.
1264년 마미아의 군대가 아드리아노플까지 진군하자 네오피토스도 아드리아노플 성주 안티오코스 카미체스가 마미아에게 넘어가는 걸 막기 위해서 출전했다. 머릿수는 밀렸지만 네오피토스는 잘 싸웠다. 네오피토스는 마미아의 군대를 가까스로 격퇴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큰 상처를 입었는데, 상처가 악화되어 결국 그해 9월에 사망했다.
드디어 콤네노스 황제가 사망하자 마미아는 즐거워하며 콘스탄티노플 입성을 준비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시민과 원로원, 총대주교 모두 마미아를 새 황제로 모시는데 반대했다. 그래도 마미아는 개의치 않아했다.
왜냐하면 네오피토스 콤네노스에겐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잦은 전투로 가정생활을 돌볼 틈이 없었던 네오피토스에게 자식이라곤 딸 하나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황후 뱃속의 아이뿐이었다. 비잔티움의 법에 따르면 네오피토스의 딸이 여황제로 오르고 그녀의 남편을 공동황제로 세워 황위를 이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네오피토스의 딸, 토마이스 콤네노스의 남편이 시칠리아 왕국의 왕족이었기 때문이었다.
시칠리아 왕국은 개국과 함께 비잔티움 제국을 괴롭힌 노르만인들의 나라였다. 네오피토스의 아버지인 포르피리오스 때에도 그리스를 침략한 적 있는 시칠리아 왕국은 양식 있는 비잔티움인이라면 누구나 싫어하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네오피토스는 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오랜 적인 시칠리아 왕국에게 손을 내밀었고 시칠리아의 사자심왕 시몬은 그 손을 잡았다.
시몬의 손자이자 현 시칠리아 왕 ‘잔혹한’ 세이예르의 동생인, 토마이스의 남편 시몬 드 오트빌이 공동황제가 되면 시몬이나 시칠리아 왕국이 비잔티움 제국에게 간섭하거나 황위에 대해 요구하리라고 두려워한 비잔티움인들은 선듯 토마이스에게 황제 즉위식을 치러주지 않았다.
<시칠리아 왕족 시몬 드 오트빌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최악의 인기를 자랑했다.>
토마이스는 직접 원로원과 총대주교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하다못해 황후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총대주교 테오파네스는 토마이스를 제위에 올리는 걸 앞장서서 반대했다. 노르만인에게 뿌리 깊은 혐오를 가진 비잔티움인들은 전쟁기엔 군인황제가 필요하다는 총대주교의 설득을 받아들였다. 원로원은 헝가리 군주 칼만 드루게스를 콘스탄티노플로 소환했다.
토마이스와 시몬 부부는 칼만 드루게스가 콘스탄티노플로 오는 걸 방해하려고 시도했지만 여론은 그들에게 적대적이었다. 칼만 드루게스가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해 시민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총대주교를 만났다. 칼만은 스스로 진정한 로마인(비잔티움인)이자 정교도라고 성토하며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내고자 했다.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칼만 드루게스를 새 황제로 옹립했다. 비잔티움 제국 역사상 최초의 헝가리인 황제였다.
칼만이 황제에 오르자 토마이스 부부는 새 황제가 보낸 사람들에게 감시당하는 처지에 놓였다. 칼만은 시민들의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선 군공이 필요하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로 돌아갔으나 콘스탄티노플에 배치한 그의 부하들은 도시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전부 보고했다.
<마미아와 마찬가지로 최초의 헝가리계 비잔티움 황제 칼만 드루게스>
마미아는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자기 대신 헝가리인을 황제로 추대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몹시 화를 내며 칼만에게 원한을 품었다. 칼만의 근거지인 헝가리를 집중공격하자 상대적으로 콘스탄티노플은 이전같이 전투의 위협에 두려워하지 않는, 평온한 상태가 되었다.
다뉴브 강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치열하게 싸우게 된 비잔티움 제국은 여론전과 전투를 펼쳤다. 칼만은 비잔티움인이 아닌 조지아인이 어찌 황제가 될 수 있냐고 마미아를 비난하며 적어도 자신은 가문의 시초부터 정교도를 믿는 비잔티움인이라고 홍보했다. 사실 그의 가문이 불과 그의 할아버지부터 시작된, 짧은 역사를 가졌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비잔티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마미아도 조지아 정교에서 정교회(비잔티움 정교)로 신앙을 바꿨지만 외국인이라는 꼬리표는 그를 계속 쫓아다녔다. 대신 마미아는 칼만이 정통 비잔티움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칼만의 제국은 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이 아니라 카르파티아 제국이라고 말했다. 아예 근거없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 카르파티아인 즉 헝가리인과 일부 블라키아인들은 그들의 문화를 유지하며 비잔티움에 흡수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칼만 본인도 헝가리의 전 군주였던 아르파드 가문이 문화와 종교를 비잔티움의 것으로 완전히 교체했던 것과는 달리 비잔티움 문화보단 헝가리 문화가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의 세력중심지가 카르파티아(구 헝가리 왕국)이었던 점도 있었다.
조지아인과 헝가리인이 황제를 자처하며 서로를 비난하는 이상한 일이 생긴 셈이었다.
토마이스와 시몬 부부는 콘스탄티노플에 반쯤 유폐된 채 정치적으로 고립된 상황이었다. 난처해진 그들은 아직 콤네노스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는 킬리키아로 달아날 계획을 짰다. 그래도 시몬이 노르만인인 이상 황제가 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다행스러운 일이 생겼다. 황후(이제는 태후) 아다나의 알렉세이아가 남편 네오피토스가 죽은 지 일 년 후인 1265년 남자아이를 출산한 것이다. 칼만이 제위경쟁자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여긴 태후는 두려움에 떨었다. 자기보다 어린 태후에게 고향 킬리키아의 아다나로 가 자식을 보호하자고 꼬드긴 토마이스는 태후와 함께 킬리키아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산후에 건강이 약해진 알렉세이아는 킬리키아로 가는 배에서 아기에게 ‘판크라티오스’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사망했다.
그녀의 아버지인 아다나 남작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의 새로운 보금자리이자 비잔티움 황후의 추억이 담긴 고향, 킬리키아는 콤네노스의 도피처가 되었다.>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황후 알렉세이아는 끝내 고향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칼만은 토마이스와 시몬 부부가 네오피토스의 아들을 데리고 킬리키아로 탈출했음을 곧 알게 되었지만 손쓸 도리가 없었다. 보스포루스 서쪽의 제해권은 마미아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미아도 키프로스 절도사에게 킬리키아를 공격하라고 명했지만 겁 많은 절도사는 콤네노스에게 적대하길 망설였다. 때마침 이슬람 해적들에게 키프로스가 공격당하고 있는 중이었기에 키프로스군의 킬리키아 침공은 취소되었다.
칼만은 남의 마미아와 북의 폴란드에 맞서 싸우느라 바쁜 상태였다. 폴란드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비잔티움 제국에 귀순하여 트란실바니아 공작으로 오랜 세월을 보낸 보유타 피아스트를 폴란드의 진정한 왕으로 내세웠다. 그는 비잔티움인보다는 헝가리인에 가까웠지만 어찌되었든 충직한 정교도이자 칼만의 지지자였다. 칼만이 피아스트 가문원을 내세워 폴란드를 공격하자 슈체스니는 반격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폴란드 남부에 많은 영지를 갖고 있던 피아스트 가문의 귀족들은 피아스트가 아닌 왕을 인정하지 않으며 반항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칼만의 군대가 폴란드 남부를 정복해나갔고 폴란드 왕국의 전통적인 수도였던 크라코프까지 함락했다. 슈체스니는 자신의 영지인 그단스크까지 도망쳤다. 그단스크는 폴란드 최북쪽, 북해 연안에 있는 도시였고 왕의 줄행랑은 폴란드군의 사기를 꺾었다. 칼만의 폴란드 원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마미아는 헝가리를 공격하며 칼만의 후위를 노렸다.
<칼만의 폴란드 원정>
<비잔티움에 귀순한지 오래되어 문화와 종교까지 바뀐 보유타 피아스트>
토마이스는 킬리키아에서 스스로 여군주(데스포이나, 데스포트의 여성형)를 자처했다. 아나톨리아에서 그나마 칼만의 영향권이던 킬리키아가 토마이스에 의해 마미아 측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칼만은 토마이스의 직위를 인정했다. 킬리키아가 칼만 측에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마미아는 투르크와 칼만측 도시들을 견제하느라 아나톨리아의 병력을 유럽으로 빼오지 못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칼만이 동유럽에서 급박한 상황이었던 점도 컸다.
정식으로 킬리키아 공작이 된 토마이스는 장남을 시칠리아 왕국에 인질로 보내 시칠리아 왕국과의 동맹을 돈독히 하며 어린 동생이자 콤네노스 가문의 희망이 된 판크라티오스 콤네노스의 교육에 열성을 다했다.
과연 비잔티움 제국의 미래가 어찌될 지는 하나님만이 알 따름이었다.
<킬리키아에서 다시 힘을 키우기 시작한 토마이스 콤네노스>
<판크라티오스 콤네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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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1166년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연대기 글 내용 중 1166년 이전에 대한 내용은 역사기록을 그대로 적어놨습니다.
이번편은 비잔티움 제국 이야기로만 가득 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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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르메니아의 왕족들:우리도 내전을 일으켜야지!로마인이라면 내전을 일으켜야(?) 한다!
꼬추 잘리고 싶은 사람은 내전 일으켜보시오.(진지)
저 오트빌가문도 그리스인화되겠군요
문제는 모계결혼이 아닌데다 장남은 시칠리아로 보내놔서 문화변경도 안될듯 싶은데 과연...
@회색실패작 설마 노르만에 카돌릭믿는다고 작위강탈당하는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