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니안 섬 티니안((Tinian) 섬은 길이가 19km이고 가장 넓은 곳의 너비가 5km, 면적 약 101㎢인 작은 섬이다. 사이판과 마찬가지로 스페인·독일·일본의 통치를 거쳐 제2차 세계대전 후 유엔 신탁통치령이 되었다. 그 후 1981년에는 주민투표를 거쳐 미국 자치령으로 결정되었으며, 1986년 11월에 정식으로 자치정부, 마리아나 제도 자치령의 일원이 되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말에 태평양의 캐롤라인 제도, 마셜 제도, 사이판·티니안을 포함한 마리아나 군도를 독일로부터 빼앗아 식민지로 삼았으나, 1944년 7월 미해병대가 사이판·티니안 등을 점령하였다. 미군은 이곳에 길이 2.6km 내외의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활주로를 건설하여 티니안을 대일본 전략폭격의 중심기지로 삼았다. 미군이 티나안을 선택한 이유는 당시 전략 폭격기 B-29의 전략 비행거리 1,500마일(2,400km) 때문이다. 일본은 티니안의 정북 쪽 방향으로 2,000km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에놀라 게이(Enola Gay)에 탑제된 리틀보이(Little Boy)가 135,000명의 사상자를 낸 사흘 후인 1945년 8월 9일 이른 아침, 벅스카(Bock's Car)라 불리는 B-29 전략폭격기는 루터교와 가톨릭 군종의 기도와 축복을 받으며 티니안(Tinian) 섬을 출발했다. 우선적인 타깃은 고쿠라(小倉)였고 조종사는 찰스 스위니(Charles Sweeeney)였다. 탑재된 폭탄은 리틀보이에 사용된 U235가 아닌 플루토늄을 사용한 것이었다. 플루토늄 폭탄의 코드 명은 당시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의 모습을 빗대 지은 뚱뗑이(Fat Man)였다. 벅스카가 투하 지점인 고쿠라에 도착했을 때는 도시 전체가 구름으로 덮여 있어 육안으로 확인한 후 폭탄을 떨어뜨리라는 지침을 따를 수 없었다 세 번을 선회했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연료문제가 심각히 대두될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벅스카는 두 번째 타켓인 나가사키(長崎)로 향했다. 어떻게 보면 나가사키 주민들은 억세게 재수 없었다. 1945년 4월 첫 모임을 가진 표적선정위원회(Target Committee)가 선정한 다섯 개 도시 중 나가사키는 빠져있었다. 날씨 문제만 아니었으면 팻맨은 고쿠라에 투하되었을 터이다. 게다가 최초 계획에 따르면 두 번째 폭격 날짜는 8월 11일이었으나 기상 상태의 악화를 염려하여 이틀 앞당겨졌다.아무튼 여러 우연이 겹쳐 나가사키는 두 번째 피폭 도시가 되었다. 표적이 된 마리아 대성당 나가사키는 일본 기독교의 역사에서 명성이 높은 곳이다. 그곳에는 동양에서 가장 유명했던 성 마리아 대성당(St. Mary's Cathedral)이 있었고, 일본 내에서 제일 규모가 큰 신앙공동체가 있는 곳이었다. 전설적인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 자비에르(Francis Xavier)가 1549년, 이곳에 선교교회를 설립한 뒤 여러 세대에 걸쳐 급속히 성장하였다. 하지만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및 기타 새로운 지역이 발견됨에 따라, 자비에르의 선교활동을 지원해오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일본의 자원 등을 착취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꾸었다. 오직 그들의 상업적 이익 때문이었다. 의심받던 외국인의 종교는 곧 잔인한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자비에르가 선교교회를 세운지 60년, 기독교는 박해의 대상이 되었고 신앙 고백 행위는 범죄가 되었다. 공포의 종교박해가 끝난 후, 일본에서 기독교는 소멸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박해가 시작된 지 약 250년 후인 1850년대에 일본은 페리(Perry)제독에 의해 강제로 개항이 되었다. 이 무렵, 나가사키에서 카타콤을 연상케 하는 모습으로 세례신자 수천 명이 신앙을 지키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이 공동체는 즉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국제적인 압력으로 박해는 중단되었고 나가사키 지역의 기독교는 지하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1917년, 일본 기독교 공동체는 정부의 도움 없이 나가사키의 우라카미 강변 근처에 거대한 세인트 메리 성당을 건립했다. 하지만 건립 이후 20여 년 동안 가톨릭뿐 아니라 일본기독교의 상징이었던 세인트 메리 성당은 이제, 벅스카 관측병에게 표적(landmarks)의 하나로만 인식되는 신세가 되었다. 31,000 피트 상공에서 확실하게 찾을 수 있는 표적은 오직 성당의 첨탑뿐이었다. 그리고 성당을 확인한 그는 폭탄 투하를 명령했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 기독교는 태양보다 뜨거운 방사성 불덩어리로 태워졌고 증발해버렸다. 모진 박해를 견디고 역동적인 그리고 충실한 일본 기독교의 상징이자 중심부는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가 되어 버렸다. 기독교 박해의 시절, 일본 정부가 200여 년 동안 할 수 없었던 일을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단 9초 만에 완수해냈다. 우라카미 성당(浦上天主堂)의 비극 ▲ 피폭 이전 성 마리아 성당의 미사 장면 © 이정섭 기자 |
|
원자폭탄이 터졌을 때 우라카미 지역 신앙공동체에서 살고 있던 12,000여명의 가톨릭 신도 중 8천여 명이 사망했다.당시 성당에는 2명의 신부(니시다와 다마야)와 30여 명의 신도들이 일주일 후에 있을 성모승천대축일 행사를 준비하다가 모두 사망하였다. 이곳에는 수녀회가 경영하는 준신과 주세이 두 개의 여학교도 있었다. 교장 이하 교원 대부분은 수녀들이었다. 물론 이들도 학생들과 함께 대부분 숨이 끊겨 재가 되었다. 나가이 다카시(永井隆 1908-1951)는 27명의 수녀들이 서로 껴안은 채 죽어 있는 것을 치료차 보낸 수련의들에게서 피폭 다음 날 아침에 전해 들었다고 증언한다. ▲ 피폭 후 잔해만 일부 남은 성 마리아 성당의 모습 © 이정섭 기자 |
|
우라카미 성당은 당시 아시아에서 규모가 가장 큰 교회로 로마네스크풍의 아름다운 성당이었지만,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는 깨졌으며 벽이 무너지고 제단이 불타고, 쇠종이 녹아내리는 참변을 당했다. 그 와중에도 나무로 만든 성모 마리아 상(像)의 두상만은 용케 남았다. 신자들이 믿었던 신(하나님)의 권능은 핵무기의 위력 앞에서 어떠한 역할도 발휘하지 못했다. 성당의 꼭대기에 있던 직경 5.5미터 무게 30톤의 종루(鐘樓)돔이 핵폭풍으로 날아가 35미터 떨어진 흙더미 속에 파묻혔다. 그곳은 하나님 나라와는 동떨어진 지옥도(地獄圖)의 모습이었다. ‘마리아의 마을’과 ‘에로스의 거리’ 성 마리아(우라카미) 성당은 마을의 중앙 언덕에 있고 위치도 좋아 250년간 계속된 신앙의 상징적인 장소였다. 1895년에 짓기 시작해 20년간의 근로봉사와 헌금헌납으로 벽돌을 한 장 한 장씩 쌓아올려 1914년 3월, 당시로는 동양에서 가장 크고 6,000명이나 수용이 가능한 적벽돌의 대성당이 완성되었다. 높이가 26미터나 되는 쌍탑이 생긴 것은 1925년인데 착공에서 30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나가사키는 ‘마리아의 마을’과 ‘에로스의 거리’로 구분된 도시였다. 기독교인을 박해했던 지배층의 자손과 친지 그리고 가톨릭에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상인들은 나가사키 역과 항구 부근에서 살았는데 기독교인들은 이곳을 ‘에로스의 거리’로 불렀다. 한편 긴 박해를 견딘 가톨릭 신도들은 자신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완공한 우라카미 성당을 중심으로 소위 ‘기리시탄’ 마을을 이루어 살았는데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마을을 ‘마리아의 마을’이라고 명명했다. 그런데 ‘에로스의 거리’로 불리던 구 시가지의 사람들은 피폭을 면했지만, ‘마리아의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사망하였다. 뚱보(fat man)가 폭발한 중심지가 기독교 금교령(禁敎令) 시대로부터 ‘7代 250년’에 걸쳐 잠복 기독교 신자들이 살았던 우라카미(浦上)의 한 가운데 이었기 때문이다. ‘에로스의 거리’에 살던 사람들은 피폭된 기독교 신자들을 향해 “당신들이 불교ㆍ신도(神道)를 믿지 않고 기독교를 믿었기 때문에 천벌을 받았다”며 저주했다. 이러한 에로스 거리의 사람들이 저주하는 ‘천벌’을, 나가이 다카시(永井隆)를 비롯해 일부 기독인들은 "피폭이라는 천벌을 받았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이다"라고 하면서 ‘피폭=번제’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어느 쪽의 주장이 옳을까? 종교 혹은 신의 섭리가 저주의 한 방편으로 해석되는 자체가 씁쓸하기만 하다. 원자폭탄을 축원하는 목사와 신부 기이한 역사의 아이러니는 폭격기 조종사가 가톨릭 신자였고, 그의 안전 귀환을 바라는 미사를 집전한 것도 가톨릭 군종 사제였다. 그리고 그 폭탄이 떨어진 정확한 지점도 일본 더 나아가 동양의 대표적인 성당이었다. ‘마리아의 마을’ 주민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난 후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원자폭탄을 싣고 히로시마ㆍ나가사키를 향했던 미군 폭격기(에놀라 게이, 벅스카)가 티니안 섬을 날아오르기 직전에, 그곳에서 근무하던 종군 성직자들 -루터파의 종군목사인 윌리암 다우니(William Downey)와 가톨릭 사제인 죠지 자벨카(George Zabelka)- 은 원폭탑재 폭격기의 출격을 축복해주었다. 먼저 다우니 목사가 히로시마 출격 명령을 받은 ‘에놀라 게이’호 승무원에게 다음과 같이 축원 기도를 올렸다. 아래는 축원 기도문 원문과 번역문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지금부터 당신의 하늘(天空)에 과감하게 올라가서, 적에게 일격을 가하려는 이들과 당신이 함께 하여주시길 바랍니다. 이 비행을 호위해주시고 당신의 힘으로 이들의 승무원들로 하여금 전쟁의 종지부를 빨리 찍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소서. 전쟁이 조기에 종결되어, 평화가 지상에 재현되도록 하여 주십시오. 오늘 밤 비행하는 사람들을 지켜주시고 무사히 우리들의 품으로 귀환하도록 해 주세요. 앞으로 끊임없는 신의 가호를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윌리암 다우니(William Downey) ▲ 루터교 군목 윌리엄 다우니(William Downey) © 이정섭 기자 |
|
다우니 목사는 2차 대전 종전 이후에 원폭공격을 신의 이름으로 기원해준 것을 크게 후회했다. 자신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전론(정의의 전쟁론)에 따라 시민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배워 익혔는데 에놀라 게이가 출격할 때 그런 가르침(아우구스티누스의 정전론)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말한 다우니 목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원폭투하에 대한 정신적 트라우마(Trauma)를 지닌 채 병사들을 상담해주는 사람이 되었으며 어떠한 핵무기도 반대하는 평화주의의 길을 걸었다. 특히 다우니는 국가를 위한 전쟁에 참여하고 난 뒤 살인자라는 고통을 받는 군인들을 위해서 상담을 하였다. 후일 그는 대량 살상 무기든지 단 한 알의 총알에 의한 것이든지 모든 살인을 비난했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책은 다니엘(Daniel Hallock)의『지옥, 치유와 저항』이다. 틱낫한(Thich Nhat Hanh)은 이 책에서 베트남전쟁 참전 용사들이 경험한 지옥 그리고 이후의 현실에 대하여 대처하는 법을 제시하고 있다. 원폭을 축원하다 - 죠지 자벨카의 참회 ▲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축복한 미군 군종 신부죠지 자벨카(1915-1992) © 이정섭 기자 |
|
509혼성부대의 군목은 개신교 목사인 다우니 외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부인 조지 자벨카(George Zabelka)도 있었다. 당시 그는 원폭투하가 올바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여러 해 뒤, 그는 현대의 육상·공중전을 통하여 행해지고 있는 대량 살육을 종교적으로 합법화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임을 깨달았다. 그는 최종적으로 미국의 적이 하나님의 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예수처럼 이웃을 사랑해야하는 것이 진리임을 깨달았다. 자벨카는 “예수의 가르침과 전쟁은 정반대고 물과 기름인데, 종군사제인 자신은 폭력을 퇴치한 예수의 손에 무리하게 기관총을 안겨주었다. 그러한 모독적인 예수의 모습을 진실이라며 병사들에게 가르쳤고 ‘주를 극구 칭찬한다.’ 며 찬미가를 부르며 총탄(銃彈)을 건네주었다. 에놀라 게이와 보크스카의 승무원에게 그러한 모독적인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심게한 것은 자신이었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아래에 자벨카가 1985년, 원폭 40 주년을 맞아 연설한 내용의 일부를 소개한다. 제목은 “원폭을 축하하며(Blessing the Bombs)” 이다. 신부 자벨카는 변하였다. 특히 모든 형태의 군사적 폭력에 저항하는 비폭력 운동에 그는 나머지 삶을 헌신하였다. “전쟁 중 민간인 학살에 대하여 교회는 늘 절대 불가를 주장해왔다. 만약 한 병사가 나에게 와서 어린아이의 머리에 총을 갖다 대며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으면 물론 절대 해서는 안 될 행위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1945년 티니안 섬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비행장이 있었다. 수많은 비행기가 일본으로 날아가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들에게 폭격을 가하였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단 한 차례도 민간인 살해에 대하여 설교를 하지 않았다. 나는 세뇌 당했던 것이다. … 비행기 공습에 의한 대량학살에 대하여 미국의 추기경이나 주교 그 누구도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 침묵은 곧 긍정의 표시라고 봐야 된다. 전쟁 후 민권투쟁 운동을 할 때 나는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과 함께 일했다. …형제자매 여러분, 기독인에 의해 저질러진 잔혹행위를 고백하는 이 기념일에, 나는 정말 끔직한 실수를 저질렀음을 가장 먼저 고백해야할 죄인이다. 나는 거짓의 아버지였다. 나는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등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거짓말 대회에 참가하였다. … 공군 군종 사제로서 나는 기관총을 지닌 예수의 손을 그렸고 그것을 진리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주를 찬양하라고 찬송하며 핵병기의 탑제를 못 본 체했다. 509혼성부대의 가톨릭 군종 사제로서 아놀라 게이와 벅스카의 승무원들에게 사기로 만들어진 예수의 이미지를 조작했다. 오늘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틀렸다는 사실이다. … 늦었지만 나는 이제 용서를 구한다. … 나가사키의 폭격은 히로시마보다 더욱 큰 의미로 다가선다. 1945년 8월 9일, 그 폭탄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분명하게 알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떨어뜨렸다. 일본에서의 가톨릭 중심지인 나가사키에 위치한 우라카미 성당에 가톨릭 신자인 벅스카 조종사에 의해 폭탄이 투하되는 것을 가톨릭 군종 사제로서 나는 그저 바라보기만 하였다. 나는 성 프란시스 자비에르(St. Francis Xavier)가 일본에 가톨릭을 전파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날, 학교도 교회도 종교적 소명도 모두 소멸되었음도 알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첫댓글 원수도 사랑하라 가르치면서 행동은 정 반대인 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