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 나훔 예언서의 말씀 2,1.3; 3,1-3.6-7
1 보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이 산을 넘어온다. 유다야, 축일을 지내고 서원을 지켜라. 불한당이 다시는 너를 넘나들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완전히 망하였다. 3 약탈자들이 그들을 약탈하고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들을 망쳐 버렸지만 정녕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영예처럼 야곱의 영예를 되돌려 주시리라. 3,1 불행하여라, 피의 성읍! 온통 거짓뿐이고 노획물로 가득한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다. 2 채찍 소리, 요란하게 굴러가는 바퀴 소리, 달려오는 말, 튀어 오르는 병거, 3 돌격하는 기병, 번뜩이는 칼, 번쩍이는 창, 수없이 살해된 자들, 시체 더미, 끝이 없는 주검. 사람들이 주검에 걸려 비틀거린다. 6 나는 너에게 오물을 던지고 너를 욕보이며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라. 7 너를 보는 자마다 너에게서 달아나며 “니네베가 망하였다! 누가 그를 가엾이 여기겠느냐?” 하고 말하리니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해 줄 자들을 찾으랴?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6,24-28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오늘 복음은 일종의 ‘제자 모집 광고’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 16,24) 오늘날 ‘성소자 모집 광고’를 이렇게 낸다면 누가 따라 나설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나를 따르려면'으로 시작되는 것은 곧 앞에서 예고하신 수난의 길을 함께 가려는 자를 제자로 모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누구든지'라는 말 속에서 보듯이, ‘원하기면 하면 누구나’ 따라 나설 수가 있으니, 곧 그가 이방인이든 죄인이든 노예든 자유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병자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길입니다.
이 말씀은 먼저 우리는 진정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조건으로 두 가지를 제시하는데, 곧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두 번째 조건인 ‘제 십자가를 지고’에 대해서만 보고자 합니다.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지 고통을 받아들여 짊어지는 것만은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죄인을 못 박는 사형도구이기에,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곧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곧 죄를 지고 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허약함과 무력함을 품고 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다’ 라는 말의 원어의 뜻이 ‘어머니가 애기를 가슴에 끌어안다’ ‘가장 소중한 것을 가슴에 품다’라는 의미이기에, 십자가는 마지못해 억지로 떠맡아지는 것이 아니라, 흔연히 자발적으로 품는 것이요, 사랑으로 끌어안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곧 자신의 죄와 허약함을 소중히 맞아들여 품고 사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십자가를 지셨는가? 예수님께서는 그 본보기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십자가를 만나면, 곧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 자신의 나약함이나 무능력을 만나면, 그것을 제거하고 해결하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 십자가를 제거하지도 해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제거할 수 없으면 그것을 피하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것을 피하지 않으셨고, 우리는 십자가를 피해갈 수 없기에 참고 견디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것을 참고 견디지도 않으시고 기꺼이 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견디기 힘들어서 건너 뛰거나 초월하고 싶어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십자가를 건너 뛰지도 초월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결국 우리는 십자가와 타협하거나 무관심하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것과 타협하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기꺼이 흔연하게 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사랑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사랑하고 고통 속에서 사랑하는 데에 있는 까닭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있고, 우리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바로 그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록 죄와 허약함과 고통 중에 있어도 그것을 벗어나기보다 바로 그 속에서 사랑하라고,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마태 16,24)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아니, 당신께 붙들려 가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며, 당신을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뒤따르게 하소서! 무엇을 하든, 오직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