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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존 Layer 02 정여름
코코볼 연재번호 008
Layer 02 정여름 너무 늦기 전에 출발해야지. 나는 가끔 꾸물거리다가 적당한 때를 놓쳐버리곤 한다. 시작을 하기엔 너무 늦어버리는 시간.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점심시간에 늦어버릴 것 같다. 가는 김에 나도 가마에서 점심 먹고 와야지. 나는 내 도시락도 따로 챙겼다. 살짝 찐 호박잎을 도기로 된 도시락통바닥에 살며시 깔았다. 그리고 내가 먹을 샌드위치도 넣어야지! 음 오늘은 특별히 토마토를 넣어봤다. 나는 토마토가 싫지만 그래도 할아버지는 토마토를 좋아하시니까 뭐, 오늘만 특별히 내 샌드위치에도 토마토를 넣자. 토마토를 잘 먹으라고 할아버지는 늘 핀잔을 주시지만 나는 여전히 토마토는 싫다. 그 특유의 맛이 마음에 안 든다. 편식은 나쁜 거라고 하시지만 토마토는 싫은 걸.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토마토를 넣었다. 사실 지난번에 할아버지께서 거래처에서 토마토를 선물로 받았다고 보존마법이 걸린 토마토를 한상자나 가져오셔서, 이사람 저사람 나눠주고도 아직도 잔뜩 남아있다. 할아버지께서 혼자 다 드시려고 해도 으으 분명 할아버지가 밥을 만드는 날엔 내가 좋든 싫든 토마토를 넣은 요리가 나올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옛날에는 내가 싫어하는 건 절대로 주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 흐흠……. 어쩌면 할아버지는 내가 점점 나이를 먹어가는 아니 이건 늙어가는 파파할머니 이야기 같아. 커가는 모습을 보시면서, 조금 인정해주시는 게 아닐까? 어린아기처럼 뭐든지 해주시는 게 아니라, 조금은 싫은 것이지만 내게 필요한 것은 해 주시는 것일지도. 알고 있지만, 나는 3년 전에 비해 키도 하나도 안 자랐고 몸무게는 거의 두 근이나 빠졌고, 얼굴은 그대로 아기얼굴에 자란건 아무것도……아! 머리카락이 길어졌다. 전에는 어깨를 덮고 좀 더 아래로 내려올 정도의 머리카락이었는데, 지금은 거의 엉덩이로 깔고 앉아서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면 가끔 엉덩이에 머리카락이 끼어서 나오지 않는 비명을 지르고 싶을 때가 있다. 아무튼 다 됐다! 이정도면 템프 성의 요리장도 울고갈 무적의 샌드위치다! 달걀도 완벽한 두께와 모양! 양상추도 적당량! 어제 밤에 만든 마요네즈도 무지무지 맛있다! 게다가 오늘 할아버지께서 사오신 갓 구운 빵! 얇게 져몄지만 그 씹는 맛은 잃지 않은 햄! 결정적으로 토마토. 아니 토마토는 결정적인게 아니긴 한데, 그래도 아무튼 토마토가 빠지면 이 샌드위치는 완벽할텐데……아니 완벽하지 않아! 이래야 할아버지께 드릴 샌드위치랑 똑같은게 되잖아! 오늘은 이걸 가져가서 냠냠 쩝쩝 먹어서 할아버지께 ‘우리 미리 다컸네, 토마토도 다먹고.’ 라는 말을 듣고 말겠어! 라면서 쓸데없는 생각으로 불타오르던 나는 문득 점심시간이 코앞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나는 밖으로 나가……기 전에 일단 잠옷을 벗고 겉옷을……입어야 하는데 겉옷이 어디갔지? 그러고보니 요 며칠 추워서 나가기 귀찮다고 집에서 잠옷만 입고 있었구나. 딱히 옷을 갈아입는다고 해도 빨래도 자주 안 하니까 별 차이는 없지만, 그러고보니 속옷을 갈아입은 게 언제였더라? 나는 원피스 속치마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보았다. 뭐 집안 냄새랑 비슷한 걸 보니까 별로 냄새는 안 나는 거겠지.(단지 내 코가 이 퀴퀴한 냄새에 익숙해져있을지도.) 그래도 손은 자주 씻으니까 먹을 걸 잘못 먹어서 배탈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세수도 가끔 하니까, 얼굴도 대충 깨끗할 것 같다. 아무튼! 나는 머리를 대충 배배꼬아 묶고,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시트 아래 짚더미 속에 파묻힌 내 하나뿐인 겉옷을 발굴해냈다. 겉옷에 붙어있는 지푸라기를 손으로 팡팡 털어냈다. 지푸라기에 섞여 거미 한 마리가 떨어졌지만 뭐, 늘 있는 일이니까. 아무튼 이걸로 나갈준비 완료! 겉옷은 겨울 옷이라서 홑겹이 아니라 두겹으로 되어 있고 안쪽은 그럭저럭 보드라운 천으로 겉은 좀 거칠지만 두꺼운 천으로 되어 있다. 이제 슬슬 <희망> 월이 가까워지지만 아직 <추운 빛> 월이라 겨울은 겨울이다. 뭐, 이젠 눈도 오지 않고 여긴 위도가 낮은 편이라서 얼음도 빨리 녹고 있긴 하지만. 추운 건 추운거다. 문을 열자 머릿속에만 있던 추위가 몸속깊이 밀려들어왔다. 우그 그냥 집에 있을까? 나는 의지가 쬐끔 꺾이는 것을 느끼며 바퀴의자를 굴렸다. 겨울은 끝무렵에 더 매서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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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er 02 정여름 |
글틀 5.0 |
첫댓글 겨우 세 문단인 겁니까. 허허, 그것도 그 중 한 문단은 두 줄입니다. 바퀴의자라고 하면, 일반적인 현대식 의자가 생각납니다만, 휠 체어를 말하는 거겠습니다?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언제나 양보다는 문맥별로 끊고 있어서.. 이런 경우도 생기네요;
그것도 그 중 한 문단은 한 문장입니다.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므허허.
그러니까, 이거 코믹물인거죠? 내용에 대해서 아직 드릴 말씀이 없지만, 힘내세요 (죄송합니다. 허접이라...)
아니.. 코믹물이라니..OTL
흐응.. 원피스 속치마에 대고 킁킁대는 장면에서 주인공이 남자였고, 상황이 자신의 방이 아니었다면.. 참.. 무언가 상상되는군요; 노란 손수건.. 대략 OTL..//몰입이 잘되는 한편이었습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조금 더 여유있게 문단을 나눠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눈이 나빠서... 촛점이 흔들려 고생했어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