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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먼
600세이브. 신화를 쓰다 ⓒ gettyimages/멀티비츠 |
2007년 최초로 500세이브 고지에 올랐던 호프먼은 8일(한국시간) 세인트루이스전에서 사상 최초로 600세이브를 달성했다. 하지만 600세이브보다 더 값진 것은, 그가 이 자리에 서기까지 이겨낸 역경들이다. 최고의 마무리라는 화려함에 가려져 있지만 그 누구보다도 험난했던, 호프먼의 야구 인생을 돌아봤다.
[mlb.com 영상] 호프먼 600세이브 달성의 순간
신장 하나가 없는 선수
호프먼은 1967년 애너하임에서, 해병대를 제대한 한 직업 가수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장기 공연에서 돌아온 어느 날,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았다. 큰 아들이 자신을 보더니 "엄마, 저 아저씨 누구에요?"라고 한 것.
그 길로 당장 가수를 그만 둔 아버지는 우체국에 취직했다. 그리고 밤에는 부업으로 에인절스 구장에서 좌석 안내를 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국가를 부르기로 한 사람이 오지 않자 대신 노래를 불렀다. 이 때부터 호프먼의 아버지는 노래하는 좌석 안내원(Singing Usher)으로 불리며 에인절스 구장의 명물이 됐다.
호프먼에게는 7살 위의 둘째 형 글렌이 있었다. 지역 최고의 고교 유격수였던 글렌은 졸업반이었던 1976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2라운드 지명을 받았다. 호프먼은 여름 방학이 되면 트리플A 팀이 있는 포터킷으로 가 형과 함께 지냈다. 호프먼에게 형은 우상이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형과 같은 재능이 없었다. 호프먼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력밖에 없었다.
고교 졸업 당시 호프먼의 체격은 168cm 59kg에 불과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신장 한 쪽이 없다는 것이었다. 태어난지 6주 만에 왼쪽 신장이 기능을 멈춘 호프먼은, 6살 때 이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부모님은 <미식축구를 하지 말 것> <물을 많이 마실 것> 두 가지 철칙을 제외하고 호프먼에게 모든 것을 허락했다.
프로는 물론 대학으로부터도 아무런 장학금 제안을 받지 못한 호프먼은 애리조나에 있는 사이프레스대학에 진학해 야구를 계속 했다. 그 해 여름, 호프먼의 키는 갑자기 8cm가 자랐다. 자신감을 얻은 호프먼은 애리조나대학 야구 팀에 노크를 했다(배리 본즈가 다닌 학교는 애리조나주립대다).
하지만 호프먼의 입단은 거부됐다. 이유는 공에 다른 쪽 신장을 맞게 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 호프먼은 코치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코치님, 내 한 쪽 신장은 오른쪽에 있어요. 그리고 나는 우타석에 들어선다고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야구를 할 겁니다." 결국 코치는 입단을 허락했다.
3학년이었던 1989년, 유격수인 호프먼은 타율 .371를 기록하는 대활약을 했다. 하지만 드래프트에서는 신시내티로부터 11라운드 지명을 받는 데 그쳤다. 1루수로 타율이 호프먼보다 3푼5리가 낮았던 팀 동료 J T 스노가 양키스로부터 5라운드 지명을 받았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역시 신장이 문제였다. 신시내티는 '싫으면 말라'는 식으로 호프먼에게 단돈 3000달러의 입단 보너스를 제시했다. 호프먼은 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이를 악 물었다.
불투명했던 미래
1990년 호프먼이 싱글A에서 .212에 그치자, 짐 렛 감독은 총알 같은 1루 송구를 뿌리는 호프먼에게 투수 전향을 제안했다. 리틀리그 이후 한 번도 투수를 해보지 않았던 호프먼은 과감히 이를 받아들였다. 1991년 호프먼은 싱글-더블A 41경기에서 평균자책점 1.89에 9이닝당 10개를 넘는 삼진을 잡아냈다. 1946년 25살의 나이로 외야수에서 투수로 전향, 결국 명예의 전당까지 오른 밥 레먼 이후 최고의 투수 전향 사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92년 트리플A에서 고전하고 있던 호프먼은 원정경기를 위해 방문한 버펄로의 한 바에서 첫 눈에 반한 여성을 만났다. 호프먼은 다가가 이야기를 나눴지만 '부동산회사에서 일하는 트레이시'라는 것밖에 알아내지 못했다. 호프먼은 에이전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에이전트는 회사를 알아냈다. 호프먼은 점심시간에 맞춰 회사에 찾아갔다. 그녀는 호프먼의 노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6개월 후인 1994년 1월31일.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 있는 로즈보울에서는 댈러스 카우보이스와 버펄로 빌스의 슈퍼보울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빌스의 치어리더이기도 했던 트레이시는 통로에서 한 낯이 익은 사내가 걸어나오는 모습을 봤다. 호프먼이었다. 호프먼이 번쩍 치켜든 피켓에는 큰 글씨로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져 있었다. 'WILL YOU MARRY ME?'
호프먼이 필드로 나오려 하자 경비원이 제지했다. 호프먼이 경비원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경비원은 "그렇다면 반지는 어디 있소?"라고 물었다. 호프먼이 꺼내든 볼품없는 반지를 본 경비원은 "그러면 가서 잘 해보슈"라며 허락했다. 호프먼은 무릎을 꿇었고 트레이시는 눈물을 흘렸다.
치어리더 출신 아내와 함께 ⓒ gettyimages/멀티비츠 |
프로포즈를 하기 두 달 전, 호프먼은 플로리다와 콜로라도의 창단으로 시행된 확장 드래프트에서 신시내티의 보호선수가 되지 못했다. 결국 호프먼은 플로리다의 선택을 받았다. 4월7일 호프먼은 감격적인 데뷔전에서 에릭 데이비스를 삼진으로 잡아냈다(1993년 플로리다의 역대 첫 경기 로스터에 들었던 선수 중 지금도 뛰고 있는 선수는 호프먼이 유일하다).
호프먼의 활약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플로리다에는 호프먼보다 두 살이 더 어리고 더 위력적인 공을 던지는 롭 넨이 있었다. 그 해 6월25일, 플로리다가 전년도 타격왕 개리 셰필드를 받아오면서 샌디에이고로 보낸 유망주 3명의 명단에는 호프먼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운명적인 어깨 부상
1994년 주전 마무리 진 해리스가 부진에 빠지고 제1 세업맨 제레미 에르난데스마저 부상을 당하자, 샌디에이고 짐 리글맨 감독은 미천한 경력의 2년차 호프먼에게 마무리를 맡겼다. 컵스에서 케리 우드를 망친 원흉으로 꼽히는 리글맨 감독 최고의 업적이었다. 호프먼은 기대 이상으로 잘해냈다.
대학 또는 프로에 외서 전향한 투수들의 공통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부상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어깨는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든 투수들의 어깨보다 더 쉽게 고장난다. 호프먼도 자신에게 문제가 생겼음을 눈치챘다. 파업으로 1994년 시즌이 일찍 끝나자 호프먼은 바로 어깨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1995년 4월 말, 개막에 맞춰 돌아왔다. 하지만 95마일 강속구는 사라지고 없었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직감한 호프먼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지금까지 전혀 던지지 않았던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1년전 떠돌이 마이너리거인 도니 엘리엇으로부터 배운 팜볼 그립의 체인지업이었다.
1995년 호프먼의 평균자책점은 전년도 2.57에서 3.88로 올랐다. 패스트볼 구속이 90마일 초반대로 떨어진 데다, 손에 익지 않은 체인지업을 계속해서 던진 탓이었다. 호프먼은 맞으면서도 체인지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강속구를 던질 수 없는 마무리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마리아노 리베라의 커터와 함께 이 시대 최고로 꼽히는 마구는 그렇게 탄생했다.
1996년 호프먼은 처음으로 40세이브에 성공했다. 그리고 존 스몰츠, 케빈 브라운, 앤디 베네스, 노모 히데오에 이어 사이영 투표 5위에 올랐다.
서클 체인지업이 대세인 상황에서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오직 호프먼 만이 마스터를 한 팜볼 체인지업에 대해 15년이 넘도록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낙하산 체인지업'으로 불리는 호프먼의 체인지업은 홈플레이트 바로 앞에서 '탁' 하고 낙하산이 펴진다.
지옥의 종소리
1998년 7월27일, 호프먼은 퀄컴스타디움의 음향 담당자를 찾아갔다. 그리고 영화 <메이저리그>에서 찰리 신이 등장할 때 나오는 '와일드 싱'과 같은 등장 음악이 없냐고 물었다. 이에 담당자는 AC/DC의 'Hells Bells'를 추천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멋진 등장음악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날 호프먼은 41연속 세이브 성공이라는 메이저리그 타이기록을 세웠다.
이틑날 호프먼은 음악 없이 등장했다. 그리고 9회초 모이세스 알루에게 동점 솔로홈런을 맞았다. 그 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록한 블론세이브였다. 이후 호프먼이 홈에서 음악 없이 등장한 적은 없다.
'헬스 벨스'가 울려퍼지는 순간 ⓒ gettyimages/멀티비츠 |
1998년 호프먼은 53세이브로 랜디 마이어스가 1993년에 세운 내셔널리그 기록과 타이를 이뤘다(2002년 스몰츠와 2003년 에릭 가니에게 55세이브로 경신). 그리고 단 1블론으로 시즌을 마감, 사상 최초로 '40세이브 이상 1블론 시즌'을 만들어냈다(2003년 가니에 최초의 노블론 시즌 달성).
호프먼은 사이영 투표에서 가장 많은 13표를 얻었다. 하지만 총점에서는 11장의 1위 표를 얻은 글래빈에게 밀렸다. 사이영 투표 역사상 더 많은 1위표를 얻고도 수상에 실패한 선수는 호프먼과 지난해 애덤 웨인라이트뿐이다.
2002년 호프먼은 8년 연속 30세이브 신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2003년 어깨가 다시 고장났다. 이듬해 돌아온 호프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품었다. 첫번째 수술에서 돌아왔을 당시 호프먼은 27살이었지만 이번에는 36살이었다. 하지만 호프먼은 41세이브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2번째 복귀 이후 지난해까지 6년간 호프먼의 평균 세이브수는 39.8개로, 앞선 8년의 40.9개와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호프먼은 어떻게 해서 이런 꾸준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일까. 지금은 182cm 98kg의 거구이지만, 어린 시절 호프먼은 언제나 또래보다 작았다. 이에 호프먼은 시즌 중이든 아니든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체력 훈련을 해왔다. 호프먼은 자신과 공동 훈련을 하고 싶어하는 젊은 투수들의 요청을 거절한 적이 없다. 하지만 호프먼의 훈련량을 견뎌낸 투수 또한 없었다.
호프먼의 규칙적인 생활은 지독할 정도다. 호프먼은 데뷔 후 첫 10년간 매일 똑같은 티셔츠를 입고 오후 훈련을 했다. 너덜너덜해져 더 이상은 입을 수 없게 되자 수소문 끝에 똑같은 티셔츠를 구했을 정도다. 편집증적일 만큼 똑같은 훈련 조건을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호프먼은 "운동을 거르려는 생각이 아예 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그에게 훈련은 하루 세 끼 식사와 같다.
경기가 있는 날도 마찬가지다. 호프먼은 불펜에서 정확히 5회까지 경기를 관전한 후 클럽하우스로 들어가 정성껏 스파이크에 광을 낸다. 뜨거운 물 샤워 후에는 스트레칭. 불펜으로 돌아와서는 정확히 5분 동안 정해진 개수의 공을 던진다. 경기 초반에 점수 차가 크게 나더라도, 호프먼은 똑같이 준비를 한다.
세이브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
호프먼은 자신이 세이브를 거둘 때마다 공을 가져와 집 벽에 걸어 둔다. 이는 통산 첫 세이브를 따낼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호프먼의 집 벽에는 300여개의 공이 걸려 있고 나머지 공들도 잘 보관돼 있다. 호프먼은 공에 날짜, 세이브 숫자, 상대 팀, 스코어와 함께 특별한 일이 있을 경우 간단한 메모도 적어넣는다. 이는 호프먼의 일기장이기도 하다.
2005년 호프먼은 존 프랑코를 제치고 역대 2위로 올라선 425번째 세이브 공에 특별한 이름 하나를 적어넣었다. 샌디에이고에서 10년째 자신의 공을 받아주고 있었던 불펜포수 마크 메릴라였다. 마이너리거 때 뇌종양 수술을 받고 현역에서 은퇴, 샌디에이고의 불펜포수를 맡아 온 메릴라는 당시 뇌종양이 재발, 병마와 싸우면서도 홈경기 때마다 불펜에 나와 호프먼의 워밍업을 도왔다(메릴라는 결국 얼마전 세상을 떠났다).
주변 사람들의 공통적인 증언은, 경기 중에는 말도 못 걸 정도로 무서운 그가 경기가 끝나면 한 없이 다정한 사람으로 돌변한다는 것이다. 일찌감치 아내와 함께 신장 재단을 세운 호프먼은 세이브를 거둘 때마다 200달러씩 기부하고 있다. 매주 토요일 홈경기에는 신장병을 앓는 어린이들을 초청한다. 또한 아버지의 제안으로 상이군인과 가족들에게 매년 1000장의 무료 티켓을 보내준다.
역대 최고의 <1이닝 마무리>는 리베라다. 호프먼은 리베라보다 더 꾸준했을지 몰라도, 그와 같은 강력함은 보여주지 못했다. 리베라가 포스트시즌 마운드에 88번이나 오른 반면 호프먼은 12경기밖에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이를 단지 '팀 복'이라고 하기에는, 호프먼은 포스트시즌과 (2007년 단판승부와 같은) 그에 준하는 중요한 경기들, 그리고 올스타전에서 너무 많은 실패를 보여줬다.
호프먼이 세우고 은퇴할 세이브 기록은 리베라에 의해 경신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가 보여준 투혼과 노력을, 그를 알고 있고 야구를 사랑하는 모두가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SI, ESPN, USA투데이, 위키피디아 등을 참조했음을 밝힙니다.
영원히 기억될 호프먼의 하이 키킹 ⓒ gettyimages/멀티비츠 |
첫댓글 이 경기 생중계로 봤음. 67년생이라는 해설자의 마지막 감탄사가 기억에 오래 남을 듯.
짜릿함으로 말하자면 600번의 홈런보다 600번의 세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