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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요 수 ( 大 遼 水 )
<우선 아래 글은 조금 깁니다. 아주 지루하실 것 같습니다. 미리 감안하시기를......>
● 조선사(朝鮮史)에서 가장 문제(問題)가 되고, 걸림돌이 되는 것이 바로 『요수(遼水)와 패수(浿水)』건이다. 반도사학【식민사관 포함】에서는 이들 두 하천(河川)이 모두 『서(西)쪽 바다로 들어간다.』고 해설한다.
●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 : 본인이 주장하는 대륙조선(大陸朝鮮)설】에서 『요수(遼水)와 패수(浿水)는 동(東)쪽으로 흐른다.』고 주장(主張)한다. 왜??????? 그것은 원전(原典)에 증거(證據)한다. 그것을 고증하려 하는 것이다.
● 위 두 주장(主張)을 보면, 정반대(正反對)의 입장(立場)으로, 대립(對立)된다. 이러한 조선사(朝鮮史)의 입장을 바라보면 분명 한 가지 주장(主張)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조선사(朝鮮史)의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직결(直結)되는 것이다. 대륙 사(大陸史)의 원전(原典)과 조선사(朝鮮史)의 원전(原典), 그리고 근대조선(近代朝鮮)시대의 관리(官吏) 및 유학자(儒學者)들의 개인 문집(文集)속에 기록된 것들을 보면, 이들 하천은 동류【東流 : (물이) 동쪽으로 흐른다.】하는 것이 옳다.
● 또한 대륙의 황하(黃河)와 장강(長江)사이의 하천(河川)과 그 유역(流域)을 기록한 “수경 주(水經注)”의 원전(原典)을 보면 <동류(東流)한다. 서류(西流)한다>등으로 인용(引用)한 문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수경 주(水經注)는 황하(黃河)와 장강(長江)사이의 하천을 소개한 기록』이란 것이다. 수경 주(水經注) 이곳에 요수(遼水)나 패수(浿水)가 기록되었다면, 그것은 당연히 대륙(大陸)에 있는 하천에 대한 설명이다. 무엇이 옳고, 그릇 것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아래는 수경 주(水經注) 원문(原文)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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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 遼 水 (대 요 수)
大遼水出塞外衛白平山,東南入塞,過遼東襄平縣西,遼水亦言出砥石山,自塞外東流,直遼東之望平縣西,王莽之長說也.屈而西南流逕襄平縣故城西 : 대 요수는 새외(塞外) 백 평(白 平)산에서 나와, 동남 변방(塞)으로 들어와, 요동 양평(襄 平)현 서쪽을 지난다. 요수(遼水)는 또 말하기를 지석(砥石)산에서 나오는데, 변방 밖(塞外)의 동쪽으로 흘러, 곧바로 요동(遼東)의 망평(望平)현 서쪽으로 온다. 왕망(王莽)의 “장설”이다. 물은 굽어서 서남으로 흘러 양평(襄平)현 고성(故城) 서쪽으로 곧장 간다. 秦始皇二十二年滅燕置遼東郡,治此,漢高帝八年,封紀通為侯國,王莽之昌平也,故平州治. : 진시황(秦始皇) 22년 “燕 (연)”을 멸하고 설치한 요동군인데, 이곳에서 다스렸다. 한(漢) 고제(高 帝) 8년, 기통(紀 通)을 봉하여 후국으로 하였다. 왕망(王莽)의 창 평(昌平)이며, 예전의 평주(平州)에서 다스렸다. 又南逕遼隊縣故城西,王莽更名之曰順睦也.公孫淵遣將軍畢衍拒司馬懿于遼隊,即是處也. : 또 남쪽 요 대(遼 隊)현의 옛 성(城) 서쪽으로 곧장 가는데, 왕망(王莽)이 이름을 바꿔 ‘순 목’이라 하였다. 공손연이 파견한 장군 ‘필연(畢 衍)’ 이 요대(遼 隊)에서 사마의(司馬懿)를 막던 곳인데, 곧 바로 이곳이다. 又東南過房縣西,地理志,房,故遼東之屬縣也.: 또 동남(東南)의 방(房)현 서쪽으로 지난다. 지리지에, 방(房)현은 옛 요동(遼東)의 속현(屬縣)이다. 遼水右會白狼水,水出右北平白狼縣東南,北流西北屈,逕廣成縣故城南,王莽之平虜也,俗謂之廣都城. : 요수는 오른쪽(右)에서 백랑(白狼)수와 만나는데, 백랑 수는 우 북 평 ‘백랑 산’ 동남쪽에서 나와, 북쪽으로 흐르다가 서북쪽으로 굽어져, 광 성 현의 옛 성 남쪽으로 곧장 간다. 왕망의 평 노(平 虜)이다. 속세에서 말하기를, 광도(廣 都)성이라 한다. 又西北,石城川水注之,水出西南石城山,東流逕石城縣故城南,地理志,右北平有石城縣.北屈逕白鹿山西,即白狼山也. : 또 서북의 석성천수에 물을 대는데, 석성천수는 서남쪽의 석성(石城)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석성 현 옛 성 남쪽으로 곧장 간다. 지리지에 ‘우 북 평’에 석성 현이 있다. 물은 북쪽으로 굽어 백록(白鹿)산 서쪽으로 간다. 곧 백랑 산(白 狼 山)이다.
● 위 원문(原文) 중에서 “백랑(白 狼)산”은 본시 이름이 “백록(白鹿)산”이다. 언제부터 누가 “백록(白鹿)산”을 “백랑(白 狼)산”이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백록(白鹿)이란 ‘흰 사슴’을 말하는 것이고, 백랑(白狼)이란 ‘흰 이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산의 이름을 바꾼다면 그에 상응하는 이유(理由)가 있었을 것이다. 『백랑(白 狼)』이란 “털빛이 하얀 이리”를 뜻하는 말로 이러한 산의 이름은 돌궐(突 厥)조상의 시조(始祖)기록에서나 가능한 이름이다. 아래의 돌궐(突闕)의 기원에 대한 통전의 한 구절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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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通典卷第一百九十七.邊防十三.北狄四.高車.稽胡.突厥上 편중에서 돌궐 상 <통전 인용>
突 厥 之 先, 平 涼 雜 胡 也, 蓋 匈 奴 之 別 種, 姓 阿 史 那 氏. 後 魏 太 武 滅 沮 渠 氏, 阿 史 那 以 五 百 家 奔 蠕 (蠕), 代 居 金 山, 狀 如 兜 鍪, 俗 呼 兜 鍪 為 突 厥, 因 以 為 號. <兜: 투구 두. 䥐 : 투구 무> : 돌궐의 선조는 평 량의 잡 호(雜 胡)이다. 모두 흉노의 별종인데, 성은 ‘아사나’씨이다. 후위(북위)태무제에게 멸망당한 ‘저거’씨와 ‘아사나’씨의 500 가(家)가 연연(蠕蠕)으로 도망을 가 번갈아 금산(金山)에서 살았다. 모양(狀)이 “두무(兜鍪)”와 같았다. 속세에서 부르기를 두무(兜鍪)를 『돌궐』이라 하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호(號)가 되었다.
或 云, 其 先 國 於 西 海 之 上, 為 鄰 國 所 滅, 男 女 無 少 長, 盡 殺 之. 有 一 兒, 年 且 十 歲, 以 其 小 不 忍 殺 之, 乃 刖 足 斷 臂, 棄 於 大 澤 中. 有 牝 狼 每 銜 肉 至 於 兒 處 所 , 此 兒 因 食 之, 得 以 不 死 。<刖 : 벨 월. 팔꿈치를 자르다. 牝 : 암컷 빈> : 혹 전하기를, 그 선대 나라가 서해(西海) 위에 있었는데, 인접한 나라에 의해 멸망당하는 바람에, 어린이나 어른 할 것 없이 남녀 모두를 죽였다. 이 중에서 유일하게 10세의 남아가 살았다. 이때 그들은 조금도 참지 않고 (그들을)죽였는데, 발꿈치를 자르고, 팔(臂)을 자르고는 대 택(大澤) 중에 버렸다. 암컷 이리(狼)가 있어 매일 지키면서 고기를 어린아이의 처소에 가지고 왔다. 이 어린아이는 이로 인해 먹었으며, 죽지 않았다.
其 後 遂 與 狼 交, 狼 有 孕 焉. 負 於 西 海 之 東, 止 於 山 上. 其 山 在 高 昌 西 北, 有 洞 穴, 狼 入 其 中, 遇 得 平 壤 茂 草, 地 方 二 百 餘 里. 後 狼 生 十 男 , 長 大 外 託 妻 孕, 其 後 各 為 一 姓, 阿 史 那 即 其 一 也. 子 孫 蕃 育, 漸 至 數 百 家 . 經 數 代, 相 與 穴 處 而 臣 於 蠕 (蠕). : 그 후에 어린아이가 자라 이리(狼)와 주고받아 잉태하였다. (잉태한 이리는)서해(西海)의 동쪽으로 와 산꼭대기에서 멈췄는데, 그 산은 고창【高昌 :신 강성 천산 산맥의 북쪽】의 서북(西北)에 있었으며, (산꼭대기에) 동혈이 있어 이리(狼)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평평하고(平) 기름지고(壤 : 보드라운), 풀이 무성한 땅을 우연히 얻었는데 사방 2백 여리였다. 후 이리(狼)는 열 명의 남아(男兒)를 낳았는데, 먼 곳 두루 밖에 의탁하여 처(妻)를 얻어 잉태(孕胎)하게 하였다. 그 후에 각각 일성(一 姓)을 갖게 되었는데, “아사나”도 곧 그 중의 하나이다. 자손을 기르고 느니, 점차 수 백가(數 百家)에 이르렀다. 수대를 내려와 서로 동혈(洞穴)의 사는 곳에서 함께 연연(蠕蠕)의 신하(臣下)가 되었다. <연연(蠕蠕)의 위치도 고증이 되는 대목이다.>
又 云, 先 出 於 索 國, 在 匈 奴 之 北. 其 部 落 大 人 曰 阿 謗 步, 兄 弟 十 七 人, 其 一 曰 伊 質 泥 師 都, 狼 所 生 也. 謗 步 等 性 並 愚 癡, 國 遂 被 滅. 泥 師 都 既 別 感 異 氣, 能 徵 召 風 雨 。娶 二 妻, 云 是 夏 神 、冬 神 之 女, 一 孕 而 生 四 男. 其 大 兒 名 訥 都 六 設, 眾 奉 為 主, 號 為 突 厥. 都 六 所 生 子, 皆 以 母 族 為 姓, 阿 史 那 是 其 一 也, 號 阿 賢 設. 此 說 雖 殊, 然 俱 狼 種 也. : 또 이르기를, 선조는 색 국 (索 國)에서 나왔는데, 흉노의 북쪽에 있었다. 그 부락대인은 “아 방 보(阿 謗 步)”였다, 형제가 17인이었으며, 그 중의 하나가 ‘이 질 니 사 도’이고, 그는 이리의 소생이었다. ‘아 방 보’등의 성격은 어리석고, 미치광이로 나라를 멸망케 하였다. ‘니 사 도’는 갈라져 이미 특별한 기운(예감)으로 바람과 비를 가져오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두 아내(妻)를 맞았는데, 이르기를 ‘여름의 신(夏 神)’과 ‘겨울의 신(冬 神)’의 여자였다. 한 번 잉태하였는데 네 명의 남아가 태어났다. 그 큰 아이의 이름이 “눌도육설(訥 都 六 設)”이었다. 무리(衆)들이 그를 주인으로 받들었다. 호를 『돌궐(突厥)』이라 하였다. “눌도육설(訥 都 六 設)”에게도 아들이 있는데, 모두 어머니 종족의 성(姓)이다. 아사나(阿 史 那) 역시 그 중의 하나이며, 호를 “아 현 설 (阿 賢 設)”이라 하였다. 이 설이 비록 다를지라도, 이들은 모두 이리(狼)의 핏줄이다. <통전. 돌궐. 인용. 끝>
● 이러한 곳에 『랑산(狼 山)이니, 백랑(白狼)산』이니 하는 이름으로 가능할 것이다. 아무 곳에나 백랑(白狼)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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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書國志曰:遼西單于蹋頓尤強,為袁氏所厚,故袁尚歸之.數入為害,公出盧龍,塹山堙谷五百餘里,未至柳城二百里,尚與蹋頓將數萬騎逆戰,公登白狼山望柳城,卒與虜遇,乘其不整,縱兵擊之,虜眾大崩,斬蹋頓,胡漢降者二十萬口. : 위서(魏書)국 지리지에서 이르기를, 요서(遼西)선우 “답 돈”이 더욱 강하였는데, 이는 원 씨(袁 氏)가 두텁게 자리 잡고 있어서인데, 원상(袁 尙)이 돌아가자 수차례에 침입하니 해(害)가 되어, 공(曹操 : 조조)이 노 룡(盧 龍)에서 나와 산길을 뚫고, 계곡을 메워 오백여리를 갔는데, 아직도 유성까지 이 백리이다. 상(袁 尙)과 답 돈(蹋 頓)의 장수와 병사들의 수 만기(數 萬騎)가 역습하여 싸웠다. 공(曹操를 칭)은 백랑(白 狼)산에 올라 유성(柳城)을 바라보았다. 병사들이 오랑캐(虜)들을 우연히 만나 그들이 군대를 정비하기 전에 늘어서 치자, 오랑캐 무리들은 크게 무너져, 답 돈(蹋 頓)의 목을 베고, 오랑캐와 한인(漢人) 20만 명이 항복하였다.
英 雄 記 曰: 曹 操 于 是 擊 馬 ( ) 於 馬 上 作 十 片, 即 于 此 也. : 조조(曹操)의 시 격 마 ( )는 말 위에서 십 편을 지은 것인데, 곧 이곳에서 지은 것이다.
應 劭 曰: 今 昌 黎 也. ➡高 平 川 水 注 之, 水 出 西 北 平 川, 東 流 逕➡➡倭城北,蓋倭地人徙之.又東南逕乳樓城北,蓋逕戎鄉,邑兼夷稱也.又東南注白狼水.白狼水又東北,自魯水注之,水導西北遠山,東南注白狼水.白狼水又東北逕龍山西,燕慕容皝以柳城之北,龍山之南,福地也,使陽裕築龍城,改柳城為龍城縣十二年,黑龍,白龍見于龍山,皝親觀,龍去二百步,祭以太牢二,龍交首嬉翔,解角而去.皝悅,大赦,號新宮曰和龍宮,立龍翔祠于山上.白狼水又北逕黃龍城東,十三州志曰:遼東屬國都尉治昌遼道有黃龍亭者也,魏營州刺史治. : 응소가 이르기를, 지금의 창 려(昌黎)이다. 고평 천(高 平 川)물이 흐르는데(注), 물은 서북의 평 천 (平 川)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왜성(倭 城)의 북쪽으로 곧장 가는데, 모두 왜(倭)땅의 사람이 옮겨왔다. 또 동남으로 곧장 유 루성(乳 樓 城) 북쪽으로 간다. 이는 융 향(戎 鄕)으로 가는 것인데, 고을은 아울러 이(夷)라 부른다. 또 동남(東南)쪽의 백랑(白 狼)수에 물을 붓는다. 백랑(白 狼)수 다시 동북(東北)에 노수(魯 水)에 물을 붓는다. 물길은 서북(西北)의 먼 산에서 와 동남(東南)의 백랑(白 狼)수에 물을 댄다. 백랑 수는 또 동북(東北)으로 곧장 용산(龍 山)으로 간다. 연(燕)나라 모용황(慕容 皝)의 유성(柳城) 북쪽이며, 용산(龍 山)의 남쪽이며, 복지(福地)이다. 양유(陽 裕)가 용성(龍城)을 쌓았으며, 유성(柳城)을 고쳐 용성(龍城)현으로 하였는데, 12년 흑룡(黑龍)과 백룡(白龍)이 용산(龍 山)에서 보여, 모용황(慕容皝)이 친히 보았다. 용(龍)은 이백 보 가량 떨어져 있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태뢰【太牢=大牢 : 제사(祭祀)에 소를 통째로 제물(祭物)로 바치던 일. 처음에는 소ㆍ양ㆍ돼지를 아울러 바치는 것을 대뢰하고 하였으나, 뒤에는 소만 바쳤다고 한다.】를 두 번 하였다. 용(龍)은 서로 머리를 비비며 빙빙 돌아 날며 즐거워하였는데, 새 뿔이 나려고 묵은 뿔이 떨어졌다. 모용황(慕容 皝)은 기쁨에 넘쳐 대사면(大赦)을 하였고, 새로 지은 궁전의 이름을 왈, 화룡 궁(和 龍 宮)이라 하고, 산(山) 상에 용 상사(龍 翔 祠)를 세웠다. 백랑(白 狼)수는 또 북쪽으로 가는데 황룡 성(黃龍 城) 동쪽이다. 13주지(十 三 州 志)에서 이르기를, 요동속국도위가 다스렸는데, 창 요 도(昌 遼 道)에 황룡 정(黃 龍 亭)이 있다. 위(魏)나라 때는 영주(營州)자사가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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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평 천(高 平 川)】 : 고평 천(高 平 川) 또는 고평 수(高 平 水)는 감 숙성 고원 현(固 原 縣)의 남쪽 개성 령(開城 嶺)에서 발원(發源)하여 북쪽으로 흘러 영하 성 중위 현(寧 夏 省 中 衛 縣)에서 황하(黃河)와 합류(合流)한다. 이 하천이 바로 청 수하(淸 水 河)이며, “울 여수” 또는 “호 노하”라 칭하기도 한다. 여기서 고평(高 平)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
【청산(靑山)은 감 숙성 환 현(環 縣) 서쪽에 있다. 이곳은 後漢(후한) 建 武(건무) 6년에 호(匈奴)들이 항복해 온 곳인데 21년에 안정국(安定國)에 있던 이들이 반란(叛亂)을 일으키자 (장사)長史 진 흔(陳흔)이 이들을 토벌(討伐)한 곳이다. 안정국은 한(漢) 時에 제후국을 둔 곳으로 옛 평 량(舊 平 凉), 고원 주(固 原 州), 경주(涇 州)지역이다. 안정국(安定國=安定 郡)이며 고평 현(高 平 縣)에서 다스렸다. 후한지군국지(後 漢書 郡 國 志)편을 보면 “고평제일성(高 平 第 一 城)”은 “안정국 고평 현(安 定 國 高 平 縣)”에 있는 성(城)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 따라서 위 대 요수(大遼水) 유역을 설명한 글에 “감 숙성(甘肅省)”에 있는 하천을 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왜성(倭城)】; 『왜(倭)들이 이주(移住)하여 세운 성(城)』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왜(倭)는 또 어떤 왜(倭)인가?
<魏書國志曰:遼西單于蹋頓尤強,為袁氏所厚,故袁尚歸之.數入為害,公出盧龍,塹山堙谷五百餘里,未至柳城二百里,尚與蹋頓將數萬騎逆戰,➡公登白狼山望柳城,卒與虜遇,乘其不整,縱兵擊之,虜眾大崩,斬蹋頓,胡漢降者二十萬口.>.........<➡公 登 白 狼 山 望 柳 城 : 공(公)이 白狼산에 올라, 유성(柳 城)을 바라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유성(柳 城)이다. 이 유성은 현재의 역사 해설에서 하 북 성에 있다고 하지만 이는 언어도단이요, 말장난이다. 유성(柳 城)은 번족(蕃족)들이 살아가던 청해 성과 신강(新疆)사이 변방지역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당서 안 록 산 傳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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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土地記曰:黃龍城西南有白狼河,東北流附城東北下,即是也.又東北,濫真水出西北塞外,東南歷重山,東南入白狼水.白狼水又東北出,東流分為二水,右水,疑即渝水也. : 위토지기(魏 土 地 記)에서 이르기를, 황룡 성(黃龍 城) 서남(西南)에 백랑(白 狼)하가 있다. 동북쪽으로 흘러 부성(附 城)의 동북(東北)아래로 간다. 또 동북(東北)의 람 진 수(濫 眞 水)는 서북 새외에서 나와 동남을 의 중산(重 山)을 지나, 동남(東南)쪽의 백랑(白 狼)수에 들어간다. 백랑(白狼)수는 또 동북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르며 두 물로 나누어지는데, 오른쪽(右)의 물은 아마도(의심스럽지만) 곧 유수(渝 水)이다.
地理志曰:渝水首受白狼水,西南循山,逕一故城西,世以為河連城,➡疑是臨渝縣之故城,王莽曰馮德者矣.渝水南流東屈,與一水會,世名之曰( )倫水,蓋戎方之變名耳,疑即地理志所謂侯水北入渝者也. : 지리지에서 이르기를, 유수 (渝 水)는 백랑(白狼)수보다 먼저 받는데, 서남(西南)의 산을 돌아(循), 옛 성의 서쪽으로 흐르는데, 때에 부르기를 “하연 성(河 連 城)”이라 하였다. 아마도 림 유 현(臨 渝 縣)의 옛 성일 것이다. 왕망이 풍 덕(馮 德)이라 하였다. 유수(渝 水)는 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굽어 하나의 물과 만나는데, 때에 “( ) 륜 수”라 하였다. 모두 융【戎 : 되놈. 오랑캐】 방식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아마도(의심스럽지만) 즉 지리지에서 말한 후수(侯 水) 북쪽으로 들어오는 물이 유수(渝 水)이다.
● 수경주의 기록을 보면 아주 혼란스러운데, 위의 대 요수(大 遼水) 기록 역시 이런 경우이다. 특히 말미(末尾)의 『림 유(臨 渝)현과 유수(渝 水 또는 渝 河 = 臨 渝 河)』가 그렇다. 위 설명은 분명히 요수(遼水)에 관한 그 유역(流域)에 대한 것임에도, 『전혀 엉뚱한 수천(數千)리 서쪽지역의 땅 이름과 하천의 이름을 설명한다.』는 것은 당시 “요수(遼水)”의 실체를 알려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아래를 보자.
❶ 유 현 (渝 縣)과 림 유 현 (臨 渝 縣)!
❷ 유 하 (渝 河)와 림 유 하 (臨 渝 河)!
❸ 유 산 (渝 山)과 림 유 산 (臨 渝 山)!
❹ 유 관 (渝 關)과 림 유 관 (臨 渝 關)!
【<臨>자를 보면 “림 할 림”으로, 『대개 임하다(臨) : 어떤 사태나 일에 직면하다』 등의 뜻으로 많이 사용되는 글자이다. <臨>자를 붙이면 『유현(渝 縣)에 임하여, 유하(유수)에 임하여, 유산(渝 山)에 임하여, 유관(渝 關)에 임하여』 등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臨”자를 맨 앞에 가(加)하여 본시의 이름을 혼란스럽게 만든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 조선사(朝鮮史)에 아주 중요시 하는 하천인 대 요수(大 遼水)를 통상의 역사해설에서 “요수(遼水)”라 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위 수경 주에서 설명하는 “대 요수(大 遼水)”의 유역은 전혀 다른 지방을 말하고 있다. 아래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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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遼 史 卷 四 十 / 志 第 十 地 理 志 四 / 南 京 道 / 南 京 析 津 府 / 灤 州>
【 灤 州, 永 安 軍, 中, 刺 史. 本 古 黃 洛 城 。 灤 河 環 繞 , 在 盧 龍 山 南 。 齊 桓 公 伐 山 戎 , 見 山 神 俞 鬼 , 即 此 。秦 為 右 北 平 。 漢 為 石 城 縣 , 後 名 海 陽 縣 。 漢 末 為 公 孫 度 所 有 。 晉 以 後 屬 遼 西 。 石 晉 割 地 , 在 平 州 之 境 . 太 祖 以 俘 戶 置. 灤 州 負 山 帶 河, 為 朔 漢 形 勝 之 地. 有 扶 蘇 泉, 甚 甘 美, 秦 太 子 扶 蘇 北 築 長 城 嘗 駐 此 ; 臨 榆 山, 峰 巒 崛 起, 高 千 餘 仞, 下 臨 渝 河. 統 縣 三 : 義 豐 縣. 馬 城 縣. 石 城 縣 】
〔란 주 【영안 군. 중. 자사】: 본시 옛 황락 성【고죽국의 성이다】이다. 란 하(灤 河)가 빙 둘러 에워 싸 있으며, 노 룡 산 남쪽에 있다. 제(齊)환공이 산융(山戎)을 칠 때 산신(山神) ‘유귀’【俞=兪. 俞 鬼】를 보았던 바로 이곳이다. 진(秦)나라의 우 북 평이요, 한(漢)나라의 석성 현이며, 뒤에 이름이 해양 현이다. 한(漢)말에 공손도가 이곳을 소유했다. 진(晉)나라 이후 요서(遼西)에 속했으며, 석진(石 晉)때 이 땅을 쪼개었고, 태조(遼=요)가 사로잡은 호(戶)들을 평주지경에 설치하였다. 란 주 (灤 州)는 뒤에 산을 지고, 하천이 띠를 두른 듯하며, 한(漢) 북쪽의 뛰어난 땅이다 (形 勝 之 地). “부소 천(扶蘇 泉)”이 있는데 물맛이 대단히 감미롭다. 진(秦)나라 태자(太子) “부소(扶蘇)가 북쪽의 장성(長城) 쌓기 위해 머물렀던 곳이다. 림 유 산(臨 榆 山)의 봉우리 뫼가 우뚝 솟아 일어나 높이가 천여인(仞)이며, 아래에 유 하(臨 渝 河)가 임하였다.(또는 림 유하가 있다).〕
● 위와 같은 지형, 지세를 갖춘 곳은 영하 성과 감 숙성을 흐르는 황하 서쪽지방이다. 특히 빼도 박도 못하게 설명하고 있는 『진(秦)나라 태자(太子) “부소(扶蘇)”가 북쪽의 장성(長城) 쌓기 위해 머물렀던 곳이다.』라는 설명 때문이다. 시황제(始皇帝)에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은 황하(黃河)를 말하지 않고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으니 말이다. 결국 현 하 북 성 북경(北京)주위를 옛 “우 북 평”이라 했다는 역사해설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기만(欺瞞)행위인 것이다.
현재의 『하 북 성의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위의 곳으로 옮겨 놓으면 『조선(朝鮮)의 역사 전개과정과 강역은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곳이 바로 하(河)의 북쪽인 “하 북(河北)”인 동시에 하【河 : 청해(靑海)성으로부터 흘러 감 숙(甘肅)성과 내몽골을 흐르는 황하(黃河)가 요하(遼河)다.】의 서쪽지방인 요서(遼西)지방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지방에 “유하(渝 河)” 가 있으므로 “유 관 (渝 關)”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유관(渝 關)은 楡關(유관)이며, 림 려 관(臨 閭 關)이며, 산해 관(山海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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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三州志曰:侯水南入渝.地理志蓋言自北而南也.又西南流注于渝.渝水又東南逕一故城東,俗曰女羅城,又南逕營丘城西,營丘在齊而名之于遼,燕之間者,蓋燕,齊遼迥,僑分所在.其水東南入海. : 13주지에서 이르기를, 후수(侯 水)가 남쪽의 유수(渝 水)로 들어간다. 지리지에서 모두 말하기를 북쪽과 남쪽이다. 또 서남으로 흘러 유수(渝 水)에 물을 낸다. 유수(渝 水)는 또 동남으로 하나의 옛 성의 동쪽으로 가는데, 속세에서 부르기를 여 라 성(女 羅 城)이다. 또 남쪽으로 가는데 영구성(營 丘 城)서쪽이다. 영구(營 丘)는 제(齊)의 요(遼)에 대한 이름인데, 연(燕) 사이에 있는 것이며, 모두 연(燕). 제(齊)를 요(遼)의 물이 도는데(迴), 임시로 나누어 있는바, 그 물은 동남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地理志曰:渝水自塞外南入海.一水東北出塞為白狼水,又東南流至房縣注于遼. : 지리지에서 이르기를, 유수(渝 水)는 새외에서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하나의 물은 동북 변경 밖에서 나오는 백랑(白狼)수이고, 또 동남으로 흘러 방 현(房 縣)에 이르러 요(遼)수에 물을 댄다.
魏土地記曰:白狼水下入遼也.又東過安市縣西,南入于海,十三州志曰:大遼水自塞外西南至安市入于海. : ‘위토지기’에서 이르기를, 백랑(白 狼)수는 아래에서 요(遼)에 들어가는데, 또 동쪽으로 안시(安 市)현 서쪽을 지나, 남쪽으로 가 바다로 들어간다. 13주지에서 이르기를, 대 요수(大 遼水)는 새외(塞外)의 서남에 이르러 안시(安 市)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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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경 강 역 고(盛京疆域考) 삼만(三萬)위> 편을 인용해보자.
《原注洪武二十四年建韓王府永樂二十二年遷於陝西平涼西北有金山東有分水東嶺北有分水西嶺西有大清河東有小清河流合焉下流入於遼河又北有土河東北有艾河流合焉謂之遼海即遼河上源也 : 원주에, <명 홍무 24년에 한 왕 부(韓 王 府)를 건치(建置)하였는데, 영략 22년, 섬서 평량(平凉)서북으로 옮겼는데, 금산(金山)이 있다. 금산(金山)의 동(東)쪽에서는 물길이 동(東)쪽으로 흐르고, 금산(金山)의 북(北)쪽에서는 물길이 서(西)쪽으로 갈라져 흐른다. 금산(金山)의 령(嶺) 서쪽에 대청하가 흐르고, 그 동쪽에는 소청하가 흐르는데, 이 두 물이 합쳐져 하류에서 요하(遼 河)에 유입된다. 또 북쪽에 <토 하>가 있는데, 동북에서 <애하>와 합류한다. 이르기를, “요해(遼 海)”이며, 곧 “요하(遼河)의 상류(上流)발원지”이다.》
위의 기록을 쉽게 풀어보자 : 평 량(원주) 서북방지대로 가면 <金山금산>이 있는데 이 <금산>에서 발원하는 물줄기가 금산의 동쪽 물은 동으로 흘러가고, 금산의 북쪽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는 서쪽으로 흘러간다는 말이며, 금산의 서쪽 산줄기에서 흐르는 “대 청하”가 흐르는데 그 동쪽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소 청하”와 합쳐져서 흘러가다가, 이 물줄기가 “요하(遙賀)”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또 여러 물줄기가 합쳐지는 “요하(遼河)”의 상류 측을 “요해(遼海)”라 칭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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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금산(金山)”에 대한 도 하나의 가능성을 염두(念頭)에 두자.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건주(建州) 여진(女眞) 편을 보면,
《通典唐乾封二年薛仁貴破髙麗於金山進拔夫餘城(案夫餘城東接挹婁西接鮮卑在遼為通州金為威平府地).明統志金山在開原西北三百五十里遼河北岸又西北三十里曰東金山又二十里曰西金山三山緜亘三百餘里與烏梁海接境 : 통전 ; 당(唐) 건 봉 (乾 封) 2년, 설인귀가 금산(金山)에서 고려(高句驪)를 파하고, 진격하여 부여(夫餘)성을 빼앗았다.【안(案) : 부여(夫餘)성은 동쪽으로 읍루(挹婁)와 접(接)하고, 서쪽에는 선비(鮮卑)와 접(接)하였는데, 요(遼)의 통주금은 함평 부 땅이다.】명(明)통지 ; 금산(金山)은 개원서북 350리 요하(遼河)의 북안(北岸)에 있다. 또 서북 30 리에 ‘동 금산’이 있고, 또 20 리에 ‘서 금산’이 있는데 이 세 산의 뻗친 줄기가 3백 여리에 달하는데 “오 량 해(烏 梁 海)”와 접경(接境)을 이루고 있다.》
※ 『금산(金山)의 뻗친 줄기가 오 량 해(烏梁海)와 접경을 이루고 있다.』고 하였으니, 『오 량 해(烏梁海)』종족에 대해 알아보자. 이들이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가를?
중국고금지명대사전 : 亦 作 兀 良 哈, 明 時 居 直 隷 長 城 外. 卽 蒙 古 東 部 地 方, 爲 朶 顔. 福 餘. 泰 寧 三 衛, 後 徙 外 蒙 古 西 北 部, 其 種 爲 突 闕 族, 語 言 風 俗, 則 以 喀 爾 喀 人, 自 稱 東 巴. 居 唐 努 山, 阿 爾 泰 山 之 間. 分 爲 三 部, 一 曰 唐 努 烏 梁 海, 二 曰 阿 爾 泰 烏 梁 海, 三 曰 阿 爾 泰 諾 爾 烏 粱 海. : <오량 해>는 <올 량 합>이라고 하며, 명(明)나라 때 명의 직례 성【현 ‘하 북 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장성(長城) 밖의 북쪽지방 즉 몽고(蒙古)의 동부에 있었다.【몽고(蒙古)의 동부(東部)란 현재의 외몽골 동부지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옛 몽고(蒙古)는 색목인(色目人)으로 타타르를 말한다.】 즉 <타안. 복여. 태녕>의 삼위(三衛)【명 태조가 설치했으며, 중원 서북방지역이다. 전회(前回)에 자세한 설명을 하였다.】를 설치한 곳이다. 이들은 후에 외몽고 서북방지대로 옮겨갔다.【이것은 역사를 왜곡(歪曲)한 것이다. 왜냐하면 옛 몽고인은 타타르를 말하기 때문이며, 색목인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돌궐(突闕)종족이다. 언어 및 풍속은 모두 돌궐(突闕)과 같았으며, 한 측으로는 객리객인이라 한다. 이들은 스스로 칭하기를 “동파(東巴)”라 했고, 당노 산(唐努山)과 아이태산(金山)사이에서 살았다. 3부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첫째는 ‘당노 오량 해(烏梁海)’, 둘째는 ‘아이 태 오 량 해(烏梁海)’, 셋째는 ‘아 이 태 락이 오 량 해(烏梁海)’』이다.
● 이러한 자들이 “오 량 해(烏梁海)” 종족이다. 이들은 ‘돌궐(突闕)종’이다. 이 주위에 “금산(金山)”이 있었다는 것이며, 설인귀(薛仁貴)가 고구려(高句驪)군을 이곳에서 깨드리고는 “부여 성”으로 진격했다는 역사 전개의 진실 된 모습이다. 더하여 이곳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요수”의 상류 발원지라는 이야기다.
※ 또한 요수(遼水)와 금산(金山)등은 광역(廣域)의 유주(幽州) 관내(管內)에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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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사(北史) 열전(列傳)을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姚萇亦遣使結好,拜衛辰使持節,都督北朔雜夷諸軍事,大將軍,大單于,河西王,幽州牧. : 요장【姚萇 : 강 족(羌 族)의 요장이 세운 오호 십육국(五胡十六國)의 하나로, 후진(後秦)이라고 사가(史家)들이 명명하였다. 도읍지(都邑地) 장안(長安)이었다고 하며, 세조(世祖) 요장은 불교(佛敎)를 독실(篤實)히 믿었다고 전한다.(384년~417년)】이 또한 사신을 보내 좋은 의를 맺으니, 『위 진사지절, 도독 북 삭 제 이 제 군사, 대장군, 대 선우, 하서(河西)왕, 유주 목』으로 벼슬을 내렸다. 》
● 하서(河西)왕 관할지역이 “유주(幽州)”지방이란 이야기다. 이제 여러분도 믿을 수 있겠는가!
하서(河西)지방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바로 청해(靑海)성으로부터 흐르는 황하(黃河)의 서쪽지방으로 넓게 보면 <황하(黃河)의 서쪽과 서북쪽지방>을 망라한다. 이러한 땅이 “유주(幽州)”관할 지대이며, 이런 곳에서 “돌격기마대(突擊騎馬隊)”가 있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가 아니겠는가!
첨언(添言)한다면 ; <성경강역고나 만주원류고>를 인용하면서 반도조선(半島朝鮮)이나 현 만주(滿洲)지방을 칭한다는 어리석은 조선사(朝鮮史) 역사해설은 이제 중단(中斷)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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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는 조선(朝鮮)인 유학자(儒學者)가 기록한 문집(文集)속에서 그 물줄기들이 어디로 물을 대는지를 알아보자.
(1) 東 都 懷 古 (동도회고 : 계림 즉 반도 경주를 칭) 浮 査(부사 ; 성 여 신)/ 成 汝 信 1546년(명종 1) 1632년(인조 10)
鷄 林 黃 葉 起 西 風 ; 계림에 서풍이 일고 낙엽이 진다
玉 笛 聲 中 逝 水 東 ; 옥피리 노래 소리에 세월은 가고 물은 동(東)으로 간다.
五 十 代 傳 宮 礎 在 : 오십대 왕이 살았던 궁궐의 주춧돌은 있는데,
一 千 年 過 殿 基 ( ) ; 일천년이 지나고 나니 궁궐터는 없고,
亭 名 鮑 石 秋 蕪 錄 ; 포석정의 이름만이 남아있고, 가을 잡초가 우거져 있네.
<이하 중략>
※ 동도(東都)라면, 신라(新羅)의 경주(慶州)를 말하는 것이다. 이곳에 어떤 하천이 있어 동쪽으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다. 최소한 위의 기록대로 <세월은 흘러가고, 물은 동쪽으로 흐르니, 세상만사 이치대로 간다.>는 뜻 일게다.
(2) 西 都 懷 古 (서도 회고 :서경 즉 평양을 칭)
肇自檀君逮太師 ; 처음으로 나라를 열어 스스로 단군으로부터 태사(기자)에 이르렀다.
封侯立國始堯時 ; 요(堯)시에 후(侯)로 봉을 받고 처음으로 나라를 열었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요(堯)가 단군(檀君)이므로 동일인을 말하는 것이다.】
星分箕尾䧺東土 ; 기의 꼬리(등)부분으로 웅장한 동쪽의 땅,
地接高句界北陲 ; 땅은 고구려와 접하고 북쪽은 변방인데,
人貴揔兵唐鎭設 ; 인귀(설인귀)가 당 병사들을 끌고 와 쳐 진지를 세웠고,
右渠違詔漢軍夷 ; 우거가 한(漢)왕의 조서를 어기고 달아났다.
悠悠興廢東流水 ; 흥폐에도 유유히 물은 동쪽으로 흘러간다.
芳草離離舊殿基 ; 옛 궁궐의 기초에 잡초는 무성하고 꽃향기는 멀어졌구나.
※ 서도(西都)라면, 평양(平壤)을 말하는 것이며, 대륙 사에서는 “장안”을 말하는 것이다. 반도(半島)에서의 서도(西都)는 평양(平壤)을 칭하는데, 이곳에 있는 “대동강(大同江)”은 서해(西海)바다로 물이 흘러간다. 그러면, 위에서 말하는 서도(西都)는 반도(半島) 북방의 “평양(平壤)”이 아니라는 증거(證據)요, 고증(考證)이다. 자, 무엇이 옳은 것인가?
어떤 이들은 말한다. 시(詩)란 과장(誇張)되거나, 은유(隱喩)을 나타내거나, 뭐 이런 식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은 한 가지 빼먹은 것이 있다는 것을 모를까? 시(詩)에서도 지형지리(地形地理), 방향(方向), 지형적인 특징, 기후(氣候), 지리적 특수 관계 등에 대해서는 사실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을...........!!!!!!!!!!! 곧 <서해(西海)바다로 흐르는 물을 동해(東海)바다로 흐른다거나, 백두산(白頭山)이 탐라(耽羅)에 있다거나, 두만강(頭滿江)이 서해(西海) 의주(義州) 앞 바다로 흐른다.>는 등등. 이런 것들의 지형적 특색을 각색(脚色)하여 시(詩)의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 조선사(朝鮮史)에서 가장 중요한 멘트는,
1) 『반도조선(半島朝鮮)은 대륙조선(大陸朝鮮)』을 담을 수 없다.
2) 『아시아/조선 역시 대륙조선(大陸朝鮮)』을 담을 수 없으며,
3) 『대륙조선(大陸朝鮮)은 아시아/조선이나, 반도조선을 몽땅 담을 수 있다.』는 점이다.
● 본인이 원전【原典 : 현 중국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카피한 것과 소장하고 있는 원전을 말한다.】을 보고, 번역(飜譯)과 해설(解說)을 할 때는 여러 원전(原典)과 비교, 검토 후 게재를 한다. 그런데 가끔 한국에서 발행된 번역서에 나와 있는 해설이나 번역을 본인의 것과 비교하여, 본인의 번역과 해설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 있다. 물론 본인이 잘못알고 번역이나 해설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도사학 기준에서 본인의 대륙조선사 해설을 비교하면 당연히 잘못된 것이라 생각할 것이나, 『대륙조선사 입장에서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이게 중요한 것이다.』
특히 발해(渤海)와 하수(河水)건에서 “발해(渤海)”를 현재의 역사해설로 현 중국 산동(山東)성 앞바다로 인식하는 것이 바로 “반도사학(半島史學)”이다. “발해(渤海)”는 현재의 바다를 칭하는 것이 아니라, 내륙(內陸)의 큰 호수를 뜻한다. 또한 우(禹)가 치산치수(治山治水)를 할 때 황하(黃河)가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물길을 만든(鑿) 곳은 현 청해(靑海)성에 있는 대적석산이다. 【반도사학과 대륙의 민족주의 사학에서는 『영하 성 서북의 감 숙성 황하 주위에 있는 적석(積石)산이 우(禹)가 뚫은 것이다.』라고 해설하나 이는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다. 산해경의 곽박은 청해(靑海)성에 있는 대적석산이라고 해설한다.】따라서 하(河)는 발해(渤海)를 관통하여(貫), 적석(積石)산에 우(禹)가 뚫어놓은(鑿) 길을 따라(導) 흘러갔기 때문에 홍수를 막을 수 있었으며, 하(河)가 적석(積石)산에서 나온다고 한 것이다. <하(河)가 일만(一萬)리를 흘러 존재하지도 않은 발해【渤海 : 현 산동 성 앞 바다】를 관통한다? 는 말은 반도사학의 주장일 뿐이다.>
● 조선사를 공부하고, 연구함에 있어 선후(先後), 좌우(左右)를 항상 염두(念頭)에 두어야 하며, 항상 선대(先代)와 그 후대(後代), 중대(中代) 및 근대(近代)의 기록들이 모두 연관(聯關)성을 가질 때 비로써 조선사를 해설할 수 있는 때가 되는 것이다.
2011년 10월 23일 <글쓴이 :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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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긴 고지도상 신장성에서 내공골 바이칼 까지 포함한 거대 강줄기가...현 흑룡강 쪽으로 그려진 것도 있어...
요나라가 지배한 전 지역이 요수의 조건은 됀다 보입니다.
요하(遙河)는 또 다를 수도 있잖을까 찾아 좀 주셨음면 합니다.
제 막연하고 비 과학적 느낌엔...이르티쉬가 요하란 그 분의 계시가 있어서 그럽니다.
이르티쉬는 그 상류는 알타이 천지에서 나와 뭐 이리 저리 흐르다 서북 카자흐스탄으로 가는데...
그게 정북의 시베리아 흑해(카라어쩌고)로 빠질땐...카자흐 상류부터 대형 화물선이 오갈 정도의 큰 물길입니다.
중세 네르친스크 조약도 여기서 체결한 흔적은 당대 고지도상 타타르와 러시아(야인)의 영원한 경계가 이르티쉬였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이 달단지역 야인들과 먼 이역에서 농토쟁탈 보루전을 했던 녹둔도 역사여...
같은 시기 야인(러시아) 역사에도...따르따르와 이르티쉬 중류 투멘카에서 기지(보루) 쟁탈전을 수 없이 했단 기록이 있거든여...전 거기가 원조 토문(투멘)이라 예상합니다...물론 여러 투멘(두만)이 여기저기 산재했겠지만여...
정통제(수양대군?)이...야센(대금황제 이징옥?)의 포로가 됐단 토목보도...
고 근처에서 찾음이 어떠실지 부탁드려 봅니다.
동서 대륙을 통 털어...
대륙을 제패하자면...이 이르티쉬를 넘어야 합니다.
천산 남북로의 비단길은...당나구나 다니던 상인들의 길이지...저 하나만 짱돌 가지고 협박해도 낭떨어지서 떨어질까 못 넘을 고갯길이요...페르가나 계곡도 복병이나 수공엔 속수무책인 위험한 진군로입니다.
이르티쉬 강변을 끼고 대 기마군단이 오직 동서 대륙을 넘나들 수 있으며...
그래 거기서 역사내내 전쟁이 많아...요동을 차지한 자가 대륙의 패자가 돼는 이치였다 생각하기에 그렇습니다.
<해무>님! 그리고 <황의형>님!
두 분의 글을 보면, 극과 극을 달리는 것 같습니다. 우선 두 분에게 자제를 부탁드립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이곳은 여러 사람이 보는 공간이므로 욕설과 비속어는 안됩니다. 적대적인 내용, 상대방을 자극하는 내용, 기본적 예의를 벗어난 댓 글은 두 분이 알아서 자진 삭제를 권고합니다. 내일까지 두 분이 스스로 삭제하십시요.
이곳 공간은 누구든지 자유로운 글을 쓸 수 있으나, 예의를 벗어 난 행동, 적대적인 글, 비속어, 욕설등은 절대 사양합니다..
내일까지 스스로 삭제를 요청합니다. 삭제치 않으신다면 강제 삭제할 예정입니다. 두 분에게는 미안한 마음이나 공부하고 연구하는 이곳에서 이런 일은 결코 좌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용서하시고 두 분의 관용을 부탁드립니다.
본인들 스스로 삭제하지 않음으로 강제 삭제하였습니다. 앞으로 어떠한 일이 있도라도 차별적 언사, 욕설, 비방, 비난, 저속어를 사용하는 경우 삭제하겟습니다. 이해하여 주시기 바라며, 두 분의 화해를 부탁합니다.
너무 늦게 봤습니다만 궐한님의 이리티쉬강에 대한 의견에 많은 공감을 합니다 사서에 큰 강 3개가 있는데 황하, 장가, 압록이라고 ...황하와 장강은 동쪽으로 압록은 서쪽으로.. 그 압록이 이리티쉬가 아닐까요? 섣부른 의견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