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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해질녘 인월에 발도장을 남긴 뒤, 우리 일행은 구불구불 산길을 넘어 남원시내로 향했다. 대관령만큼은 아니지만 팽이가
돌아가듯 빙글빙글 수도 없이 돌고 돌아 내려오는 기분은 하루의 지친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는 짜릿한 느낌이었다. 냇가 너머
관광단지에 저렴하고 깔끔한 숙소를 잡고, 바로 옆의 고깃집으로 향했다. 추어탕을 먹고 싶었으나 같이 갔던 일행이 추어탕을 먹지
못한다고 하길래 어쩔 수 없이 갔던 그 집. 비수기라 손님은 많지 않았지만 맛만큼은 결코 빠지지 않았다. 고기의 차진 식감으로 오늘 하루 쌓였던 스트레스를 씹고, 개운하게 넘어가는 소주 한 잔에 고된 피로를 매끈하게 삼켰다.
숙소에
올라가서 이런저런 재밌는 이야기들을 유쾌하게 풀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새벽을 달리고 있었다. 겨우겨우 잠에 취하려고 몸을
뉘었지만 잠자리가 바뀌어서일까, 거의 스치듯 밤을 새웠다. 결국 지친 몸을 일으키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들었고, 아침 11시가
넘은 늦은 시간에서야 숙소를 빠져나왔다.
우중충하게 비만 추적추적 내리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말간 가을 하늘이 푸르게 드리웠다. 찌뿌둥한 몸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은 날씨다. 생애 처음으로 와보는 남원 시내의 민낯을 본격적으로 구경하는 순간이었다.
역사가 오래된 호남 4대 도시로 군림했던 남원시답게, 시내는 몇십 년 전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높은 건물은 외곽의 아파트를 제외하면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도로도 거의 2차선이다. 번화가의 간판은 90년대 말~2000년대 초의 형식을 온전히 갖추고 있다. 주변이 온통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이지만 시내는 평지에 있어서, 높은 산이나 언덕은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시내 도로는 좁지만 복잡하지 않고 쭉쭉 뻗어있다. 막히는 모습을 보기도 어렵다.
남원시외버스터미널은 시내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요새 추세가 고속도로 진입이 편하고 신호를 거의 받지 않는 시내 외곽으로 터미널을 빼는 것인데, 여기는 아직까지 2차선
시내 도로에 진출입을 의존하고 있다. 신호도 없고 인도도 없다. 서로가 타이밍을 재는 눈칫밥 싸움을 해야 해서 차와 사람이 오도
가도 못하고 제법 엉키는 것 같다.
건물의 모양은 2층짜리 콘크리트 기와를 얹은 아담한 모습이다. 전통의 멋이 살아있는 고장답게 나름대로 전통의 느낌이 살짝 있다. 그런데 버스터미널 간판은 간데없이 보이질 않고, 넓은 공터만 눈에 띈다.
그 공터에 입구라는 표식이 있고 버스가 들어가는 모습이 보이면 영락없는 터미널이다. 다만 외부에서 볼 땐 여기가 터미널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자기 본연의 모습을 꽁꽁 숨기고 있다. 분위기로 어렴풋이 여기에서 버스를 탈 수 있구나라는 것을 짐작할 뿐이다.
건물에는 없던 터미널 간판이 문 앞에 조그맣게 붙어있다. 그런데 바로 옆에 약국이라는 글자도 있다. 대합실이라는 조그만 글자는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얼핏 보면 여기가 '터미널 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약국으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보인다. 그나저나 위에 있는 간판은 무엇일까? 정말 오래전 누군가가 직접 붓으로 쓴 현판 같아 보이는데, 생뚱맞으면서도 굉장히 새로운 느낌이다. 뭐라고 쓰여있는지 해석은 못하겠지만, 버스터미널이면서 고풍스러운 멋을 한껏 올려주는 멋진 현판으로 보인다.
대합실 표지가 붙어있는 문으로 들어가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문구. '고객과 함께하는 시외버스터미널'. 고풍스러운 느낌 안에는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맛도 있다.
시선을 다시 돌려 정면을 향하면 이런 모습이 보인다. 아마 내가 찾은 문이 정문이 아니라 후문인 것 같다. 어쩐지 그렇게 좁을 리가 없지. 건물 안쪽의 모습은 딱히 이렇다 할 차별성을 보이진 않는다. 어딜 가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시골 터미널의 모습이다. 얼마 전에 리모델링을 한 듯 이질적이면서도 나름대로 어울리려고 노력하는 나무 재질의 디자인이 눈에 띈다.
리모델링의 결과인지 모르겠으나 버스를 타는 방면이 온통 창으로 도배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이런 디자인을 참 좋아한다. 매서운 칼바람이 온몸을 때리는 바깥으로 굳이 나가지 않아도, 자리에 앉아 편하게 TV를 보면서도 쉽게 내가 타야 하는 버스가 들어오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건물 안에 조명을 켜지 않아도 자연 채광만으로 훤히 실내를 밝혀줄 수 있으니까. 실제로 안에 켜놓은 조명이 하나 없는데도 그렇게 어둡진 않다. 과연 옛날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창문이 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면 얼마나 어두웠을까 지레 상상을 해본다.
사실 이런 구조의 터미널을 올 때마다 드는 의문점이 있다. '이런 건물의 2층에 있는 상가들에도 사람이 올까?' . 도시 생활을 워낙 오래 해서 드는 일종의 편견 같은 것이다. 뭔가 센트럴시티나 유스퀘어만큼 크고 화려한 느낌의 건물이 아니라면, 굳이 이런 아담한 건물 2층의 상가에서 영업을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찾아올까 싶은 거다. 주변의 다른 건물들도 많고, 올라가는 길도 굉장히 좁은데다 찾기 어려운 곳에 있으니 말이다. 여태까지 다녀보고 눈으로 본 결과, 이런 구조의 건물들은 대개 확률이 반반이었다. 아예 망해서 문을 걸어 잠그는 곳 반, 활짝 문이 열려있는 곳 반. 남원은 후자였다. 1층에 문을 닫은 곳 없이 꽉꽉 들어찬 상점들을 비롯하여 2층에는 아예 병원이 자리 잡고 있었고, 장사가 제법 되는 듯 최신 문구로 번듯하게 영업을 하고 있다.
빈 공간 없이 상가들이 꽉 찼다는 것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수요가 많다는 건 바로 유동인구가 많음을 뜻한다. 바로 이게 여기만의 최대 강점이 아닐까 싶다. 번화가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서 버스 이용자 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 쉽게 말하자면 '접근성이 좋다는 것'이다. 남원시외버스터미널이 갖고 있는 최고의 메리트이자 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같은 지역의 기차역, 고속버스터미널만 하더라도 시내에서 한참 떨어져 있어서 택시나 시내버스를 타지 않으면 이용하기가 굉장히 힘들다. 남원역에 내리면 당장 들리는 소리는 풀밭의 개구리 울음소리이고, 농사철엔 소똥 냄새가 진동을 할 정도다. 고속버스터미널은 시내 구석에 있어 그 정도는 아니지만 적막한 공기에 무심하게 달리는 화물차 소리가 들릴 것이다. 반면 여기에서 내릴 경우 당장 눈에 보이는 게 음식점이나 화장품 숍, 편의점 같은 시설들이다. 내가 지역 주민이라면, 아니면 정말 볼 일이 있어서 남원에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선택지가 여기로 향하지 않을까. 접근성이 좋다는 것은 나 자신이 정보가 부족한 외지에 발을 디뎠을 때 느끼는 심리적 안정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축구에 비교하자면 우리 팀에 노이어라는 걸출한 골키퍼가 있어 무슨 위기 상황에서도 든든하게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아닐까?
다만
도시가 커지면 커질수록 시내 한복판에 버스터미널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당장 여기와 인구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정읍만
해도 버스터미널로 인해서 주변이 상당히 혼잡하고, 더 나아가 익산 정도만 되어도 이런 위치에 버스터미널이 있다면 온통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전북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전주만 봐도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수시로 드나드는 버스가 교통의 흐름을 막고, 그
때문에 주변이 마비되는 일 때문에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버스터미널을 어떻게든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남원의 경우, 아무리
시내라고 해도 그 정도의 인구가 되지도 않고, 경제력도 미비하고 고령화도 심각해서 그만큼의 차를 끌고 나올 수요가 없기에
번화가에 있어도 유지가 되는 것이다. 다른 면에서 보면 발전에 소외된 지역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필자가 여기 왔을 때는 시장통처럼 북적이는 것과는 거리가 먼 분위기였다. 굉장히 조용하고 점잖은 분위기에 많지 않은
사람들이 차분하게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눈에 보이는 광경은 1년 365일을 통틀어서 가장 사람이 적은 평일 낮 시간대의
모습이다. 사람이 북적이는 주말이 되면, 놀러 가는 사람들로 가득한 휴가철이 되면, 그리운 가족들을 만나러 오는 명절이 되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뭔가 여기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것 같다. 대체로 매표소가 있는 맞이방 쪽이 버스를 기다리는 승차장보다 넓은 편인데 여기는 정반대로 승차장이 훨씬 규모가 크다. 문과 버스 간의 간격도 널찍하여 드나들기 편리하고, 비교적 낡았지만 깔끔하게 정돈되어 관리도 무척 잘 되어 있다. 여기 나름의 분위기와도 잘 어울려서 좋고 여유가 있어 보여서 좋다.
하지만 승차 홈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은근히 도로 인프라가 나빴던 지역이었기 때문인지, 여러 길이 한데 모이는 교통의 요지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지역치고는 규모가 굉장히 아담하다. 가장 인기 있는 노선은 단연 전주행이며, 그다음으로는 광주행이다. 이 두 노선이 사실상 이 터미널을 먹여살린다 봐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 시외버스터미널에서는 서울행이 큰 축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여기서는 동서울행 3번이 전부로 서울 가는 노선이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만약 고속터미널 또는 기차와 경쟁한다고 남부터미널행이라도 하루 수십 번 간격으로 운행했다면, 고속터미널은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여기는 오로지 서울 노선에 의존하는 버스터미널이기 때문이다. 수요 중복으로 인한 영업방해를 피하기 위해 두 터미널이 서로 담당 구역을 정해서 중복의 마지노선을 정한 것일지도 모른다.
위치를 생각하면 여기까지만 운행하는 노선이 상당히 많을 것 같지만, 의외로 여기는 종착지보다 중간 경유지로서의 역할이 더 크다. 여수, 순천에서 전주로 가는 노선과, 거창, 함양에서 광주로 가는 노선들이 잠깐 머물렀다 가는 용도로 주로 쓰인다. 그래서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버스는 몇 대 되지 않고, 그나마도 좁은 주차장의 일부를 공용 주차장으로 쓰고 있다.
도시의
입지치고 생각보다 규모가 작은 남원시외버스터미널. 지역 주민들은 너무 낡고 불편하다며 불만을 쏟아내는 편이라 한다. 이용자
입장에서 불편한 점이 꽤나 보이기는 하지만, 여기만이 가지는 장점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불만을 개선하기
위해 자리를 옮겨 새로 문을 연다 한들, 예전만큼의 사람들이 찾아올 것인 가에는 많은 의문이 남는다. 왠지 지금의 터미널은 현재의
위치를 스스로 즐기고, 현 상황에 만족할 것 같다.
나
역시도 그렇다. 아무런 걱정 없이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 위해 덧없이 떠난 여행, 시간과 체력은 조금 소모하지만 그만큼의
만족스러운 경험을 얻은 여행, 이 여정의 중간에 서 있다. 앞으로 남은 일정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을 채워줄 첫 장을 상당히
흐뭇하게 채우며 멋지게 도화지의 여백을 지웠다.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려가며 남은 페이지를 예쁘고 멋있게 장식할까, 그 뒷 장면을
기대하며 짧았던 시외버스터미널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눈다.
첫댓글 남원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북에 속해있지만 남원에 사는 지인들에 물어보니 물론 전주 말고도 인근에 88고속도로가 지나가서 광주나 대구도 생활권이라 하더군요...
세 도시 사이에 있어서 어느 쪽이든 편하게 갈 수 있는게 장점이죠. 다만 대구는 88고속도로 건설 전까지는 가는게 매우 힘들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남원에서 살아봤기에 말씀드리지만 ㅎㅎ 예전(90년대 중반 기준)에 전주 1시간 10분, 광주 1시간, 대구는 3시간 걸려야 갈수 있는 곳이었죠. 광주/전주 동시 생활권이었습니다.
꽤 규모가 있어보이는 터미널이라 서울행 노선이 있거나 고속과 함께 사용할 줄 알았는데 고속터미널은 따로 있군요. 고속버스 수요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구 규모가 한정적인 곳에서 터미널이 분산되어 있는 것은 외지인 눈에는 조금 덜 효율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불편할 사람들은 지역 주민들이겠죠... 붙어있다면 그나마 덜하겠지만 위치까지 떨어져 있으니 꽤나 혼란스러울 테니까요.
시외터미널 이전문제가 토지 소유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네요.
버스가 드나들기에는 힘든 구조의 터미널이죠.
그런 일이 있었군요. 어떤 문제던 땅과 관련되어 있으면 좋게 해결되는 법이 없는 것 같네요...
남원 시외버스터미널이 위치는 좋은데 버스 드나들기에 용이한 곳은 또 아니죠.
하지만 2016년 12월 기준 84188명밖에 안되는 인구 때문에 큰 무리없이 돌아가고 있답니다.
참고로 정읍시의 인구는 115173명이에요. ^^
남원 인구가 조금만 더 많았으면 지금 터미널 상태 그대로 운영하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정읍이 대략 1.4배 정도 많군요. 시내 인구도 남원 5만, 정읍 7만명 정도로 비슷한 비율이네요~
10여년 전 남원여행을 했었는데 다시 한번 가보고 싶어 집니다!
어디를 갔다 오셨나요? 전 고속도로만 쭉 따라가서 제대로 구경을 못해본게 항상 아쉽네요 ㅠ
@Maximum 남원 광한루와 춘향전기념공원? 남원의 대표적 관광지를 둘러 보고 왔습니다.
고속버스터미털은 광대고속도로와 17번 국도가 닿는 사거리에 가까이 있습니다.
시내와는 떨어져 있고, 대중교통도 어렵죠. 시외버스 터미널과 통합하면 시너지가 날텐데, 시외버스 터미널이 버스들고나기에는 너무 힘든 위치고 편도1차선이라 여의치는 않을듯.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봐야죠.
고속버스터미널은 예전 시내와 가까이 있을때가 나았습니다.
대중교통만 증차시켜도 나아지겠지만 그런데 관심이 별로 없는것같아 아쉽습니다.
남원-대구간은 과거에 광주-대구간 금호고속이 비포장이었지만 배차가 매우좋아서 접근성은 좋았을듯하고요, 남원-대구 간 직통노선이 생길때만하더라도 무리한 노선개설이 아닌가하는 노파심도 생겼지만, 이제는 어느정도 자리를 잡은것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