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으로 가는 처방전 -가장 큰 정보는 무심코 주고받는 대화 속에 있다.- 앤디 그로브
윗입술 한쪽으로 감각을 잃어간다. 괜찮아지려니 하면서 6개월이 지나니 혹여 이로 인하여 엉뚱한 곳에 이상이 생기지나 않을지 염려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이렇게 소소하게 몸에 이상이 생기면 스스로 움직일 수 있을 때 병원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다만 이렇게 애매하게 문제가 생기면 어느 전문의를 선택해서 가야 할 것인가도 망설일 때가 종종 있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신경과로 가 보기로 했다. 그런데 어디에 이상이 생겨 이러한 증상으로 나타나는지 병원에서도 모른다는 것이다. 또한 원인을 모르니 치료 방법도 없을뿐더러 처방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흔한 비타민이라도 받아가라는 어처구니없는 의사의 답변에 참으로 황당하고 아득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처방받은 약을 받아 일주일을 복용해보았으나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대학병원이라도 가 보아야 할 생각에 소견서도 받을 겸 다른 신경과를 찾아보기로 했다. 역시 똑같은 답변과 함께 원인도 없고 처방도 할 수 없으며 이것은 큰 병도 아니라는 것이다. 내 몸에 이상 증상이 생겨 불편한 것은 물론 입 주변이 마비가 되어 가는데 문제될 것이 없다니 이럴 때 의사의 책임은 참으로 수세적이다. 이처럼 가끔 병원을 찾게 되면 의사는 환자에게 설명의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의사들이 이 설명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을 불 수 있으며 이러한 비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는 환자의 선택폭을 늘리기 위해 정보를 충분히 제공해야 하고 충분한 설명을 해야 한다는 당연한 것에는 지극히 합당한 일일 것이다. 사람의 몸에 이상이 생기고 불편함을 느끼는데 어찌 원인도 없고 치료 방법이 없을 수 있겠던가 말이다. 아울러 의사는 환자에 대한 진정성을 공감에 이르게 하는 것도 책임의 또 다른 영역일 것이다. 큰 병도 아니고 염려할 일이 아닐지라도 불편한 환자의 심각함을 해소할 수 있는 설명은 충실하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던가 말이다. 얼마 전 응급실에 근무하는 의사로부터 참으로 공감 가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90세가 된 어르신께서 응급실에 오셔서 의사는 그 어르신의 상태를 관찰하고 가족들에게 “입원하시게요.”라고 나오는데 이 어르신께서 의사의 하얀 가운을 잡으시면서 “의사양반 나는 도대체 지금 어디로 가는 거요? 왜 나한테는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 거요? ”라고 묻더라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나이 들어 병원엘 가도 모든 것을 보호자에게만 설명해 줄 뿐 환자에게 구지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노인을 가족이든 의사이든 치료의 대상으로만 여길 뿐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지 않는다. 이러한 일들은 주변에서 흔히 보아온 일이다. 사회적 정서가 이렇다면 우리는 스스로 공부하고 알아가야 할 지혜로움을 터득하여야 한다. 알아야 소통하고 소통할 수 있어야 어떠한 경우라도 알 권리를 찾는 존재의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는 단편 ‘시골의사’에서 ‘처방전을 쓰기는 쉬우나 환자와 소통하기는 어렵다’라는 명문을 남겼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늘 그렇다. 상대방이 원하는 바를 파악하고 적절히 대응하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 날이 갈수록 소통 불능인 현대 사회에서 내 이웃의 아픈 마음도 어루만지며 소통하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의 바람이다. 또한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튼실하지 않다면 접근하기 쉽지 않다. 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대에 적응하는 데에도 앞서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를 가거나 어느 장소에서나 모두가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풍경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것은 전문가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상식이 인터넷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풍경을 이해하여야만 하며 그렇게 상식을 넘어 때로는 전문분야까지 알아두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혜로움이며 따라서 매사에 공부해야 하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 모두의 몫이다. 어릴 때는 모든 것을 어른에게 물어물어 깨닫고 터득하며 자라왔다. 요즘은 젊거나 늙거나 인터넷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만큼 명쾌한 답이 들어 있는 시대이며 어른이나 전문가가 아니라도 전문 상식을 얻을 수 있는 시대이니 얼마나 편리한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끼리끼리 모여 시시한 이야기로 소통보다는 감정에 상처를 주고받으며 시골이라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치부하며 그러려니 살아가는 모습들이 안타까운 농촌생활의 현실이다. 소통(疏通)은 사전적으로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뜻이 서로 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적 접근이 필요하다. 소통을 위해서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내가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줄 때 상대방의 마음의 문도 열린다. 그때 어떠한 이야기라도 들어줄 수 있는 기본자세와 상식이 갖추어져 있을 때 사소한 오해를 뛰어 넘을 수 있는 것이다. 결코 오해는 무지에서 오는 것이며 소통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결국 시대에 접근하기 위하여 끈임 없이 공부하는 자세야말로 상대방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도록 곡선의 길을 안내할 수 있으며 내 마음과 상대방의 마음이 통하는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 나라거나 내 지방이거나 국민 모두가 각자의 기본에 충실하는 것은 소통의 물꼬가 되어 무엇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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