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무대 위에서 또 ‘용사 드링크’를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 죽고 싶은표정의 친구에게 혼자만의 눈빛으로 작별을 고하며 광장을 떠났다.
베르스 건국 이후 백여 년의 시간 동안 증축(增築)을 반복하여 마치 암석생명체처럼 점점 커져가고 있는 왕궁 ‘세아스말’은 수도 아스말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냉정하게 말해 나의 조국인 베르스는 이 세계에서강대국이 아니다. 아니 도리어 주변 나라 눈치 깨나 봐야 하는 약소국에가깝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휘감긴 넝쿨들이 주름살처럼 연륜을보여주는 세아스말의 자태는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일면 신성한 느낌까지들었다. 인위적인 건축물도 오랜 시간 대지에 뿌리를 박고 있다보면 제법자연과 어울릴 수 있나 보다.
‘이거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난 왕국의 정문 앞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당연히 평민의 신분으로 왕궁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고 내 추천장에는 어디에 가서 이걸 제출하라는말 따위는 없었기 때문에 난 한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왕성 정문 근처에있는 민원상담소로 걸어갔다. 말하자면 그곳은 평민들의 하소연을 담은탄원서를 받거나 그 외의 잡다한 평민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처리하는 공공기관이었다. 하아. 이토록 사연들이 많은 걸까? 이 콩알만한 민원상담소는 저마다 사정이 급한 평민들의 행렬로 인산인해, 만원사례였다.
“밀지 좀 말아요!”
“젠장! 나도 어제부터 기다렸다고! 줄 서!”
“또 서류가 부족하다고 받아주지 않으면 자살할 거야! 정말이라고!”
'억울한 사정의 평민'들로 구성된 인산인해를 보자마자 난 졸도할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올해 안에 이 추천장 제출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 작렬의 햇빛 속에서 북적거리는 사람들의 얼굴은 말 그대로 전투적이었고 세치기라도 하는 날엔 살인이 날 것 같았다.(진심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행렬 옆에선 왕실에서 파견 나온 상인들이 (무척이나 비싼 값으로) 얼음이나 물 따위를 팔고 있었다. 망할! 그럴 힘이 있으면 접수창구라도 좀 늘려달라고!
“기다리세요!”
벌써 네 시간이나 기다렸건만 감색의 제복을 입고 있는 접수창구의 여자로부터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말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라는 것뿐이었다. 난앞으로 누가 인내심을 수련할 장소를 찾는다면 주저 없이 이곳을 소개할것이다. 난 결국 수건 하나가 흥건해 지도록 땀을 닦으며 자그마치 여섯시간이나 기다려야 했고 그때서야 돈을 더 내면 빨리 민원을 처리 받을 수있다는 요상망측한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틀이나 기다리고 있다던내 옆의 아저씨가 점점 석화(石化)되고 있는 것을 보자 위기감이 엄습했다.
‘여기까지 와서 망부석이 될 수는 없어!’
결국 난 피눈물을 흘리며 '급행료'를 지불하고 나서야 그 잘난 민원접수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돈으로 할 수 없는 일도 있긴 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
예전 내 마담이 격언처럼 입버릇 삼던 그 말을 투덜거리며 난 접수창구앞에 설 수 있었다. 머리를 뒤로 땋은 감색 제복의 여자는 날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그럼 나도 생긋.
“예쁘게 생긴 분이시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솔직히 나는 '은화 10전을 내야만 볼 수 있는 접수창구 아가씨가 바로 너였냐!'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경비병들 곤봉에 두드려 맞고곧장 왕실 감옥 구경하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난 직업병에 가까운 환한미소를 보이며 추천장을 건네주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내 추천장을 받아든그녀가 날 바라보며 말했다.
“스왈로우 나이츠....... 네요?”
얼레? 이 의미심장한 웃음은 대체. 그녀 역시 아이히만 노인네와 카론이보여줬던 '우후후후' 미소를 보이면서 추천장을 내게 돌려주었다.
“이건 이쪽에서 처리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그럼 어디서!!”
나도 모르게 절박한 비명이 나왔다. 여섯 시간 기다리고 은화 10전을 내서야 겨우 겨우 통과되나 싶었는데 여기가 아니라니! 그럼 대체 어디야!
왕실 화장실인가! 당장 말해라 이 못된 마녀! 그때 그녀가 입술을 쭉 빼며가리켰다.
“조오쪽.”
“네?”
“조오기 작은 문 보이시죠?”
“네. 보이기는...... 합니다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문이 하나 있긴 있긴하다.
“저 문을 열고 길을 따라 쭉 걸어가다 보면 작은 사무실 같은 게 나와요.
거기 가면 키스 님이 계실 거에요. 그 분께 추천장을 전달하세요. 아참!
그리고 키스님에게 어젯밤 재밌었다고 전해주시구요.”
“......”
그녀가 비밀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내게 속삭였다. 기, 기사단 입단이라는것이 원래 이렇게 은밀한 거였나? 민원실 뒤편의 작은 문을 열고 한참 동안 걸어가서 이름 모를 사무실 안에 있을 키스라는 사람을 만나라고? 아니그리고 어젯밤 재밌었다는 건 또 뭐냐고! 마약 거래도 이렇게 복잡하진 않을 꺼다. 하지만 난 그녀가 '다음 분!'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불안한 표정으로 그 '작은 문'을 열 수 밖에 없었다. 문을 열자마자 장미정원 사이의 긴샛길이 눈에 들어왔다.
7.
난 결국 비밀문을 통해서 왕성에 첫발을 내딛은 은밀한 인간이 되었고 한참 동안 인적 없는 붉은 장미정원 사이를 걸어갔다. 두 손에 커다란 가방을 들고 허리에는 검까지 차고 긴 금발을 내린 채 장미정원 속을 지나가고있는 내 모습이 낭만적이라기보다는 영 궁상맞아 보인다. 무엇보다 불안하다! 갑자기 사방에서 험악한 놈들이 튀어나와 '우하하하! 잘도 속았구나!
네깟 놈에게 작위를 줄 성 싶냐! 이제 넌 왕실 소유의 몸종이다!'라고 덮쳐도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란 말씀이야. 난 침을 꼴깍 삼키면서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갔고 그녀의 말대로 한참을 가서야 작은 나무집이 보였다. 그리고 그 나무집 간판에는.......
“스왈로우 나이츠 사무실? 뭐야 이거.......”
아니 기사단 사무실이라는 것이 이런 장미정원 속의 통나무집이라는 것도웃기고 무엇보다 길드나 아카데미도 아니면서 무슨 사무실이람? 난 떨떠름한 표정으로 문을 두드렸다. '저어. 기사단 면접 보러 왔는데요?'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굉장히 한심한 대사 같아서 그만두었다.
“계, 계세요?”
“들어오세요오오.”
화들짝! 분명 방금 집안에서 간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뭔가 몸이 마구 뒤틀려 있는 상태에서 힘겹게 내뱉은 듯한 그런 목소리. 설마 요가라도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키, 키스라는 분을 만나러 왔는데요.”
“저에요오오오 들어오세요오오오.”
“.......”
솔직히....... 들어가면 잡아먹힐 것 같다. 그러나 이대로 돌아갈 수도없었으므로 난 결국 용기를 내서 문을 열었다. 쫘악하니 펼쳐지는 사무실의 풍경. 그런데 어디에도 키스는 없다. 얼레? 분명히 목소리가 들렸는데?
“키, 키스 님?”
“여기에요오.......”
“허억!”
키스는 내 발 밑에 뒤엉켜 있었다. 오른 팔이 왼쪽 다리 밑으로 들어가고왼팔이 오른쪽 밑으로 들어간 채 바닥을 뒹굴며 내게 방긋 웃는 미남자 키스는........ 정말 무서웠다. 데굴데굴 굴러서 내 앞까지 다가온 키스 씨가 나를 올려보며 이곳에 오신 걸 환영해요! 라는 친절한 미소로 인사를했고 난 나도 모르게 외계 생명체 같은 키스를 걷어차 버렸다. 결국 몸이공처럼 엉켜 있는 그는 저쪽 벽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어어! 몸이!”
무섭고도 얼빠지는 희귀한 기분을 체험하는 순간이다. 자신의 의지와는상관없이 굴러가 버린 키스는 무시무시하게 엉켜 있는 자신의 몸을 풀며난감한 웃음을 보였다.
“아아 역시 이런 식의 인사법은 아직은 너무 앞서가는 것인가. 하지만50년쯤 후에는 분명 대유행이 될 꺼야!”
50년 후에 그 따위 인사법이 유행하게 된다면 난 앞으로 49년까지만 살거다! 우주멸망과 다를 바가 없는 요가 인사법에 심취해 있는 이 키스란사람이 대체 스왈로우 나이츠와 뭔 관계람! 키스는 뒤늦은 의연한 태도로'정상적인' 인사를 청했다.
“스왈로우 나이츠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아 예. 저는.......”
“난 키스 세자르. 스왈로우 나이츠 기사단장이에요.”
“웃기지마! 이 요가 인간아!”
엇. 나도 모르게 소리쳐 버렸다. 신체가 자유자재로 휘어지는 요가 인간이 기사단장이라니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 키스는 서운한 표정으로차를 준비하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진짠데.......”
(첫인상이 하도 경악스러워서 그렇지) 확실히 키스는 상당한 미남자였다.
28세 쯤 되었을까? 큰 키에 산들거리는 발걸음이 어울리는 호리호리한 체구. 곱실거리는 갈색 머리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귀엽고 붉은 눈망울까지 꼭 수사슴을 의인화시켜 놓은 것 같은 남자였다. 여간한 마스크로는 어울리기 힘든 보랏빛 우단(羽緞) 옷을 단정하게 입은 모양새까지 보통 센스가 아니다. 하지만 장검은 커녕 단도 하나 차고 있지 않았다. 단지 아주능숙하고 우아한 손놀림으로 두 잔의 차를 타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결론은....... 어디가 기사단장이라는 거야?
“전 동부 리튼에서 온 엔디미온 키리안이라고 합니다!”
“목소리 예쁘네요?”
“예?”
“이름도 예쁘고.”
“........미, 미온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만.”
뭐, 뭐야, 저 질투어린 시선은! 왜 흘겨보는 거냐고.
“아! 민원실 아가씨가 재밌었다고 전해달라는데요? 그러니까 어젯밤에...”
“이히히히.”
오싸악. 키스가 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히죽 웃었다. 난 이 사람이 어렸을 때 머리를 크게 다쳐서 이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예상을 하며 추천서를 꺼냈다.
“입단 추천서인데요.”
이제야 조금 가슴이 뛴다. 추천서 한 장 만으로 기사가 된다는 것에 대해스스로도 얼마나 많은 의심을 했던가. 굉장한 입단 시험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숲 속에 혼자 던져 놓고 하루 안에 백 마리의 몬스터를 잡아오라고 시킬지도 몰라. 혹은 책 한질의 '기사도 입문'을 다 외우라고 시킬지도 모른다. 과연 나 같은 놈이 그런 시험에 통과할 수가....... 응? 키스가 날보고 또 히죽 웃으며 차를 건넸다.
“당신은 이미 통과되었습니다. 미온 씨.”
“얼레?”
내, 내가 뭘 했다고? 여기가 무슨 꼬마들의 여름캠프도 아니고 그냥 통과라니. 우아한 포즈로 차를 마시던 키스가 말했다.
“이제 슬슬 숙소와 동료들을 소개해........”
“자, 잠깐만! 통과라니요!”
“통과의 의미를 모르세요?”
키스가 친절한 얼굴로 '통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당신은 이제부터 기.사.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째서 그렇게 간단한 거냐고요!”
작위식은 고사하고 최소한 내 기사도 맹세 정도라도 들어 달라고! 십수년동안 기사수행해서 겨우 겨우 작위를 따내는 다른 기사들은 바보들인가!
키스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였다.
“스왈로우 나이츠는 특.별.한. 기사단이니까요. 아 참 그리고.”
키스가 드르륵 서랍 문을 열더니 화려한 글씨체로 빽빽이 문장이 들어차있는 종이 한 장을 꺼내 내게 건넸다.
“여기 사인하세요.”
“이게 뭔데요?”
“기사 계약 증명서랍니다.”
“......이봐.”
계약서 쓰는 기사도 있던가. 잘 나가는 길드 매니저나 호스트의 경우에는독점 계약서를 쓰기도 하지만, 이게 무슨 가게 인수하는 것도 아니고 어째서 기사가 되는데 계약서 같은 게 필요한 거지? 그런데 그 계약서에는 아주 의미심장한 문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계약일 이후 10년간 스왈로우 나이츠의 일원으로서 성실 봉사를 해야합니다? 뭡니까 이건?”
“말 그대로 10년간 의무적으로 기사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
의무 봉사 시간? 기사라는 거, 본래 작위 몰수당하기 전까지는 영원히 하는 거 아닌가? 이거 뭔가 불안한데... 그때 키스가 내 어깨를 으스러지도록 꽉 잡으며 날 쏘아보는 바람에 난 비명을 지를 뻔했다. 빨간 눈동자에서 무서운 광선까지 뿜으며 말이다.
“설마....... 이런 사소한 문제 때문에 결심이 흔들리고 있는 건 아니겠죠? 미온 씨?”
사, 사소한 문제라니!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말하지 마!
“분명히 미온 씨는 기사가 되기 위해 이곳에 왔어요. 그렇죠?”
“그, 그렇긴 합니다만.”
“그토록 되고 싶었던 기사를 이토록 쉽게 시켜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는없겠지요?”
“아?”
“그렇죠오?”
“아아?”
“사인 하실 거죠오오?”
아, 아프잖아! 어깨뼈가 부서져 버릴 것 같다! 무시무시한 위압감 덕분에난 결국 홀린 듯이 이 '괴문서'에 사인을 해 버렸다. 그리고 계약서를 잽싸게 품속 깊숙이 넣는 키스가 포옥 한숨을 내쉬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하아. 요즘에는 사람 뽑기도 힘들어서....... 순진한 녀석이라서 다행이야.”
이봐. 지금 그거 무슨 의미야!
-Blind Talk...음악에 대해서는 잡식성이라고 자부한다.
깊게 아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냥 하염없이 음악들을듣는 편이니까 말하자면 '에잇. 어제는 스파케티을 먹었으니오늘은 오향장육이 좋겠어.'라고 중얼거리는 듯한속물적인 식탐가(아니 음탐가)라고나 할까.
그리고 스토리를 구상할 때는 뛰면서 하는 편이니(사실 밀레니엄 타워 스카이 카페에서 1만원이 넘는 커피를 마시며
구상하고 싶지만 그럴 돈 없으니 패스.)
뛰면서 음악을 들으려면 CDP도 MP3겸용 CDP도 곤란하다.
대충 몇년간 파악한 내 음악 감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원할 때 원하는 곡을 곧바로 듣지 않으면 안된다.(워크맨 X)
2.뛰거나 운동하면서 듣기 때문에 쇼크에 강해야 한다.(CDP X)
3.매체를 자주 바꿔 끼우거나 녹음 시간이 길면 질색이다.(MD X)
4.음질 따윈 노이즈만 없으면 되니까 너무 비싸면 안된다.(idp X)
5.음악이 아주 많이 많이 들어가야 한다.(MP3플레이어 X)
...내가 생각해도 참 뻔뻔하기 짝이 없는 요구사항이다.
위의 기기들 중에 idp 빼고 다 써 봤는데 하나 같이 위의 문제점들 중에하나가 걸렸다.
가장 최근에는 iFP-190TC(아이리버 256M MP3플레이어)를 구해서썼는데 정말 굉장히 편리한 물건이긴 했지만 256M로는 내가 요구하는음악저장용량에 턱도 없이 모잘랐다. 그렇다고 USB로 자주 음악을바꾸자니 이것도 정말 귀찮은 일. 이 정도 귀찮음이야 예전 실로 거지같은 산요 구식 워크맨으로 음악을 듣던 내 고생에 비하면야 천국이지만사람 욕심 끝도 없다고 뭔가 더 좋은 휴대용 기기는 없을까, 고민하게된 것이다.
이번에 아이리버에서 iFP-195TC라는 굉장한 물건이 나왔단다.
이것은 516M이고 안전성이나 편리함은 아이리버 답게 상당히 좋고디자인도 이노디자인의 것으로 훌륭한데다가 번들 이어폰 역시이번에도 젠하이저 MX300이라는 꽤 고급스런 것이고 데이터 전송속도도 빨라진데다가 암밴드도 준단다.
(더욱 최근에는 IFP-395라는 놈도 나왔다.)
...그런데 값이 36만원이던가. 실로 피를 토하는 고가다.
어째서 MP3플레이어 주제에 이런 값이 나온 거냐! 라는 생각도들었지만 국내에 거의 유일무의한 516메가이니 그럴만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금단의 선을 넘어 버렸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사람들로부터 '저걸 사는 놈은 미친 놈'이라는소리를 들어오던 그 유명한 컬트상품 애플 ipod였던 것이다.
이것은 실로 휴대용 쥬크박스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용량은 종류별로 5기가, 10기가, 20기가라는 말도 안되는 용량이고(마이크로 하드 탑재) 인터페이스 역시 애플 특유의 독자적인 노선인데다가 디자인도 실로 의료기기를 떠올리게 할 정도고... 뭐든지상식을 넘어선 수준이다.(불행하게도 무게도 그렇다.)
주변에 이것을 구입한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그 친구는 나와는 달리 무섭게 잘 사는 녀석이니 뭘 사도 상관 없겠지만.)
지금 내가 아이포드를 구입하면 나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리는셈이 된다.(일단 파는 곳도 거의 없고 할인도 안되고 카드무이자는더더욱 없고 무엇보다 그 살인적인 값은 보는 것 만으로도 공포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IFP-195TC가 36만원이라는 것을 예상할 때아이포드 5기가가 48만원이니까... 후자가 이익이 아닌가!
..라는 말도 안되는 자기정당화를 나는 해버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이포트 5기가 IBM용은 국내에 매물이 하나도없었다. 게다가 가죽케이스(5만5천원)도 없고 리모콘(5만5천원)도없단다. 하지만 아이포트 10기가(56만원)는 그것들도 모두 주고자그만치 10기가 짜리 이동식 하드 겸용 MP3플레이어란다! 이것은실로 궁극의 머쉰이다!
..라는 뻔한 대리점 직원의 감언이설에 나는 넘어가 버렸다.
결국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손에는 이 저주 받을 아이포트 10기가가들려 있었고 한 손에는 영수증이 꼬옥 쥐어져 있었다.
대체 10기가를 mp3로 채워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라는 본질적인의문이 든 것은 이미 물건을 들고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올 때였다.(늦었어!)
이것은 그 무시무시한 firewire를 지원한다.
즉 CD한장을 담는데 40초도 안 걸린다! 혁명적이다!
그러나... 그 잘난 firewire를 쓰기 위해서는 슬롯카드를 별도 구입해야한다는 것을 나는 아이포드 값을 지불한 직후 들었다.(그런 건 일찍 말해!!!)
결국... 5만5천원에 달하는 랜카드를 피눈물을 흘리며 구입한 나는(어째서 애플의 푸품들은 모조리 5만5천원일까. 잭필드와 비슷한 이유인가?)
현재 인스톨과 충전을 하면서 애플이라는 회사가 얼마나 디자인에 대해결벽증과 난독증을 가지고 있는지 새삼 놀라고 있는 중이다.
이건 거의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다.
현재 가지고 있는 CD들을 모조리 mp3로 바꾸고야 있지만10기가를 모두 mp3로 담아봐야 다 들을 일도 없으니 나머지 분량에는18금만화 디빅동영상이나 넣어 볼까나... 물론 액정이 흑백이고 동영상지원 따위는 되지도 않으니 단지 저장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으음. 게다가 마이크로 하드라도 하드는 하드니까 충격 받으면 금방 고장나고고장나면 DHL이라는 놈을 통해 싱가포르까지 보내서 고쳐야 한다고 하니까...앞으로 나는 이것을 상전 모시듯 고이고이 가방안에 넣고 들으면서머슴처럼 일해서 이 돈을 값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스스로 만든 지옥... 갑자기 카이지가 생각나는 것은 어째서 일까.
후후후. 그래도 앞으로 마음껏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아주 기쁘군요.
...사실 이 글은 얼마 전에 모 비밀게시판에 올렸던 글인데 오늘은 딱히할말이 없어서 재탕해 봅니다.
EGO-WRAPPIN'의 색채의 블루스, 를 들으며(시부야계 음악들을 얼마전부터 자주 듣고 있는데, 에고레핑은 그쪽에선유명한 그룹이긴 하지만, 저도 참 좋더군요. 초기앨범이 더 좋긴 하지만...)
#005 제1화 :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
#005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화 :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
8.
왕궁 세아스말 내부는 하나의 작은 도시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많은 건물들과 시설이 있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키스를 뒤따라졸래졸래 따라가고 있는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왕립 기사들의 수련터였던것이다! 이런 것마저 왕궁 내부에 존재하는지 미처 몰랐지만 드넓은 평지위에는 마상 수련을 위한 정교하고도 으리으리한 시설들이 늘어서 있었고격투술과 검술을 위한 가죽인형들이 쭉 설치되어 있는데다가 중앙에는 기사들의 대결을 위한 이른바 ‘특설 링’이 설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한켠에는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한 궁중의사들도 상주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수십여명의 어린 수련생들이 서로 검을 치고받고 있었고나이 지긋한 기사가 내지르는 강한 억양의 호통소리도 간간이 들여왔다.
이쯤이면 이 베르스 왕국에서 최고로 호사스런 수련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긴가요! 앞으로 제가 기사의 의무를 다할 곳이!”
난 뜨겁게 달아오르는 가슴을 느끼며 말했다. 그러나 내 격양된 목소리를들은 키스의 표정은 ‘너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냐.’였다.
“이런 땀내 나는 곳에서 흙먼지 뒤집어 쓸 일은 영원히 없습니다. 미온 경.”
별명에다가 멋대로 '경'이라는 근엄한 칭호 붙이지 말아주세요 키스 단장님. 그런데 검술을 수련할 일이 없다고? 그럼 뭘 하겠다는 거야. 곧바로실전?
“스왈로우 나이츠는 그보다 좀 더 은밀하고 고상하며 아름다운 일을 합니다.”
뜬금없는 대답이었다. 은밀하고 고상하며 아름다운 일이 뭐냐 대체! 은밀하게 적국의 무도회장에 침투해서 고상한 댄스로 적들의 눈을 현혹시킨 뒤에 아름다운 공주를 납치해 오기라도 하는 건가........ 라는 발상은 내가생각하고도 민망하군. 아무튼 그런 단서만으로는 도저히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속 시원히 좀 알려달라고 키스!
“가보면 알게 됩니다.”
키스가 그 화사한 미소를 다시 보이며 다시 산들 걸음으로 앞장서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 손에는 어느새 화관(花冠)이 엮어져 있었다. 남정네가 그런 것 만들어서 어쩌겠다는 거야! 역시 왕궁은 수도 아스말의 4분의 1을차지할 만큼 넓었다. 수련터의 가장자리를 한참 걸어가며 다음 지역으로넘어갈 때 즈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입단했군. 스왈로우 나이츠에.”
어? 놀랍게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멋지게 넝쿨진 건물에서 걸어 나오던카론 샤펜투스, 내 순결의 수호자였다. 시력이 나빴는지 차가운 눈매에 살짝 안경이 걸쳐 있었고 손에는 두꺼운 책까지 들고 있었는데도 확실히 기사다운 날카로운 기세가 느껴진다. 그것도....... 무척이나 냉혹한 기사같다고나 할까? 카론을 보자마자 산딸기를 발견한 아낙네처럼 환하게 웃는키스가 종종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같은 기사인데....... 저렇게 차이가 날 수가 있다니. 마음 참 울적해 지는군.
“와아. 여전히 만지면 얼어버릴 것 같은 얼굴입니다 카론 경.”
그, 그게 안부 인사? 항상 새로운 인사법에 몰두하는 키스의 무례하다면무례한 인사치례인데도 카론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안경알 너머 저 차가운 시선은 정말로 이 햇빛 속에서도 얼어붙을 것만 같다.
키스가 그의 머리에 화관을 씌워주며 '역시 당신에겐 왕관이 어울려요,'라고 하자 카론은 아무 말 없이 화관을 벗어재껴 꾸깃꾸깃 접어서는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렸다. '아아 겨우 만든 건데!'라며 쓰레기통을 뒤지는키스...... 경.
“너무하네요. 남의 성의를......”
키스가 화관을 털며 투덜거리고 있을 때도 카론의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저 녀석, 쓸만해?”
“오호호. 이제부터 이리저리 굴려봐야 알겠죠오.”
그런 음흉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지 마라 요가 인간 키스! 카론은 알만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내 옆을 지나쳤다.
“이제...... 엔디미온 경이라고 불러야 하나? 뭐 아무래도 좋아. 한 가지만 명심해라. 왕궁은 거만한 돼지들의 사육장이야. 짓밟히고 싶지 않으면 짓밟고 올라서는 수밖에 없다.”
그 무서운 말은 또 뭡니까! 카론은 '치졸한 전쟁터에 온 걸 환영한다.'라는 분위기의 말을 남기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갑자기 멈춰서곤 키스를돌아보는 것이 아닌가.
“키스 세자르. 너 같은 녀석이 어째서 이런 광대들의 놀이터로 돌아온거지?”
“전 지금이 좋습니다아.”
“씁쓸한 농담이로군.”
얼레? 이건 또 무슨 분위기지. 카론은 시선을 거두며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고 키스는 여전히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웃음으로 카론을 마중했다. 그런데 이 인간이 내 옆에 와서는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것이 아닌가.
“미온 경. 카론 경을 알고 있었어요?”
“예. 절 설인의 손에서 구해주신 분이에요.”
“설인?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아?”
“아무것도 아닙니다아.”
설인과의 달콤한 추억 따위는 빨리 빨리 머릿속에서 지워버리자. 난 무거운 가방을 들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9.
수련터를 지난 뒤에 왕국 최강 미녀(혹은 미소녀)들의 집합소라는 무녀(巫女)들의 탑 '펠리오스'를 지나서 30분이나 걸어서야 스왈로우 나이츠의 본부'리더구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음부터 본부는 사무실에서 가까운 곳에 좀 설치하란 말이야!
“자아! 여깁니다아! 멋지죠?”
키스가 팔을 쫙 펴며 마치 무슨 고급 사교장 같은 분위기의 고풍스런 저택을 바라보았다. 리더구트라...... 확실히 멋지긴 한데 말이야, 이거 기사단 본부 아니야? 약간은 검을 휘두르는 소리라든지 기사도를 읊는 소리라도 들려야 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이 드넓은 꽃밭은 또 뭐냐고. 산들바람까지 불어오는 이 발랄한 분위기 어디가 기사단이란 말이야!
“키스...... 경. 당신, 지금 나 속이고 있지....... 요?”
“속이다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아?”
이봐 키스 씨. 그렇게 시선을 피하면서 말하면 설득력이 없잖아.
“아무튼 계약이 되어 있는 이상 이제 와서 돌아가겠다는 말은 곤란합니다아.”
“역시 속였구나! 요가 인간!”
“아니라니까요. 들어가 보시면 알게 됩니다!”
“우아악!”
키스에게 팔목이 잡힌 나는 뭔가 상당히 의심스러운 대저택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그런데 아까부터 느끼는 거지만 이 사람, 보기와 달리 힘이 정말 세다. 팔목 아프단 말이야!
10.
저택 안은, 그러니까 일반 대귀족의 호화스런 저택과 비슷했다. 예전에실명을 밝힐 수 없는 타국의 모 고객 아가씨 저택에 출장을 갔을 때(인생상담이었습니다. 정말임!) 봤던 것과 비슷한 호화스러운 구조. 그러니까결국 피와 땀이 넘실대는 기사단과는 전혀 어울리는 구석이 없다는 의미다!
상당히 실망스런 표정의 나를 보며 키스가 근엄한 목소리로 일장훈계를 시작했다. 역시 뜬금없는 사람이다.
“현실의 기사단이라는 것은 영웅담에서 나오는 것과는 달리 교양과 우아함을 추구하는 집단이에요. 칼을 휘두르고 말을 달리는 것만이 기사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 그런!”
“이제 뭔가 아시겠습니까! 미온 경!”
“그딴 억지에 속을 것 같습니까?”
“쳇. 안 속네.”
이미 당신이라는 사람을 불신하기 시작했는데 뭔 말을 하던 속을 리가 있겠냐.
“어 그런데.”
순간 나는 이상한 것을 느꼈다. 각종 룸이 한 백여 개는 있을 것 같은 이5층짜리 거대 저택 리더구트에는 그에 걸맞게 단정한 제복을 입은 적잖은수의 시종들이 옷이며 차(茶)수레 따위를 운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좋은데 이상한 것은.......
“어째서 시녀가 한명도 없는 거죠?”
뭐 내 고객 중에는 정말로 수십 명의 시종들을 정말로 미성년의 남자들로만 세팅한 부유한 취미의 여백작도 있었고 순결을 지켜야 하는 몇몇 공녀들의 경우에 그녀의 주변 시종을 모조리 여자로만 도배하는 관례도 있긴하다. 그러나 여긴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곳인데 어째서 성차별을 하는 거지? 곧 이것에 대한 키스의 해설이 이어졌다.
“그건 이곳이 금녀(禁女)의 구역이기 때문입니다.”
“잉? 금녀?”
“일단 스왈로우 나이츠의 일원은 결혼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말은 계약서에 없었잖아!!”
“상식이잖아요 그건.”
“어째서 그게 상식이야!!”
10년간 독신을 유지하는 것이 '상식'이라는 말은 이 세계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을 거다.
“신관기사인 우리들은 자신의 몸을 항상 정결하게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여자를 받아들여선 안 됩니다.”
키스는 자못 격양된 어조로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앞뒤가 안 맞잖아!
“잠깐.”
“예?”
“그럼 어제 밤 만나 재.미.있.었.다.는. 민원실 여자는 뭡니까.”
“그, 그건!”
위기에 내몰린 자의 표정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로군. 키스는 애절한얼굴로 날 바라보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저, 전 그녀의 육체가 아닌 영혼을 위로해 주었던 것뿐입니다.”
“.......”
그런 말엔 원숭이도 안 속아 키스 경. 그때 붉은 색 비로드가 깔린 대리석 계단에서 커다란 가방을 든 소년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자승자박의위기 탈출 기회를 노리던 키스는 재빠르게 그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와아아아! 지스 경. 이번에는 어디로 가십니까아?”
“......남부의 공작령.”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대충 대답한 나만큼이나 긴 머리의 '지스 경'은 몸집만큼이나 커다란 가방을 두 손으로 힘들게 든 채로 우리들을 지나쳤다. 꽤 작은 키에 엷은 푸른빛이 감도는 머리칼에 그것과 똑같은 눈동자가 꼭 인형 같았지만 얼음 방패를 몸에 두른 듯한 태도는 카론님과 막상막하인 녀석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지스의 본래 이름은 지스킬 윈터차일드로 미성년자인데다가 검은 써본 적도 없고 말도 타본 적이 없으며 몸도 허약하고 성격도 더러웠다. 그래도 자랑스런 스왈로우 나이츠의 일원이란다.
싫은 일을 억지로 참고 있는 듯한 지스킬의 뒷모습을 좀 측은한 표정으로바라보던 키스에게 내가 물었다.
“저 사람. 지금 어딜 가고 있는 겁니까?”
“아 지스 경? 지명(指名)받은 거에요.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중이지요”
“지, 지명?”
병약 미소년, 지명, 여행용 가방, 남부의 공작령, 성스런 임무, 검은 써본 적도 없음, 기사단. 뭐냐 이 하나도 안 맞는 퍼즐들은!
“아마...... 지스 경이 당신의 룸메이트가 될 겁니다.”
“룸메이트?”
아니 객실도 많은데 기사한테 이인일실이라니 너무 쩨쩨하잖아! 기숙사냐!
“동료애를 키우기 위해서 랍니다. 그럼 동료들에게 안내해 줄께요오.”
“으아악!”
그리고 난 또 다시 엄청난 힘에 이끌린 채 이층으로 끌려갔다. 난 이렇게우악스럽게 저택 관광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Blind Talk자아. 이것으로 오늘 연재를 끝마치겠습니다.
땀이 많고 더위에 약한 성격이라서 여름은 정말 질색입니다, 운명처럼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지만 비빔면을 마음껏 맛볼 수 있다는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습니다. 역시 비빔면은 팔도 뿐입니다. 최근에는 전분으로 면을 만들었다는 해표 감자라면을 먹어 봤는데 생각보다 면이 쫄깃하고비린내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놀랐습니다. 대신 면발이 거의 너구리 수준이니 굵고 질긴 면을 싫어하시는 분들이라면 피해야 할 것 같군요.
여전히 Ego-Wrappin'의 색채의 블루스를 듣고 있습니다.
#006 제1화 :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
#006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화 :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
11.
이층에 응접실을 두는 것은 지극히 북부적인 호사취미다. 겨울의 냉기가스멀스멀 올라오는 곳이라 좀 더 따뜻한 곳이 이층이라나 뭐라나. 아무튼그 의문의 '지명'을 받지 않은 스왈로우 나이츠 멤버들 중 다섯 명이 응접실에 몰려 있었다. 총 멤버는 나를 포함해서 열명이라고 한다.(키스 제외)그런데 내 앞의 기사들은 모두 하나 같이........ 놀랍게도 하나 같이...
“어때요? 모두 미온 경 만큼이나 잘생겼죠?”
“.......”
아아 그래. 확실히 내가 있던 '미소년의 숲'에서도 스카우트 해갈만한 각양각색의 미남자들이다. 그런데 그거야 어쨌든 캐릭터 소설이니까, 라는핑계로 둘러댄다고 쳐도 대체 왜 아무도 기사 비슷한 사람조차 없냐는 거야! 근엄한 중년의 스승님은 대체 어디로!
“아아. 신입입니까? 내 이름은 루시온입니다. 잘 부탁해요.”
균형잡힌 몸매와 큰 키가 인상적인 루시온 경은 창가에 놓여 있는 욕조에서 태연하게 장미 목욕 중이셨다. 이봐 응접실에서 목욕하지마! 민망하다고!
“새로 오셨군요. 수치스럽고 힘들더라도 견뎌내셔야 해요. 아! 제 이름은 크리스티앙입니다.”
분명 분명 분명히 미성년자가 확실한 이 눈 커다란 소년기사가 바로 크리스티앙...... 경. 이 내 손을 꼭 잡으며 애처롭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수치스럽고 힘들더라도'를 몹시 강조하며 소개를 마쳤다. 꼭 곡마단에 잡혀온 서커스 꼬마 같잖아!
“큭큭. 얼마 견딜지 모르겠지만 이 짓도 계속 하다보면 할만하다고. 난쇼넨베르트.”
기사 주제에 담배까지 물어 피우고 앞섬이 다 드러나게 옷을 풀어헤친 채소파에 벌러덩 누워 있는 저 녀석의 이름은 쇼넨베르트...... 경! 여자 울리는 게 특기인 것 같은 능수능란한 저 얼굴 어디에도 기사의 흔적은 없었다.
“이것도 일이다. 그리고 일에는 귀천이 없어. 내 이름은 레녹. 별로 친해지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방해하진 말아줬으면 한다.”
첫인상부터 딱딱하게스리 바라보지도 않고 말을 던진 레녹 씨는 얼굴 전면에 야채팩을 한 상태로 시집으로 추정되는 책을 읽고 있었다. 고지식한공무원 같은 외모. 그런데 누구라도 야채팩을 하는 기사에 대한 이야기 들어본 적 있어?
“이야아. 얼굴이 참 반반한데. 어이 키스 경. 대단한 물건 데려왔네. 그런데 옷이 영 싸구려잖아! 좋아! 다음에 같이 쇼핑가주지. 난 루이블랑이다. 루이라고 부르면 오케이. 네 동료이자 라이벌이랄까?”
멋대로 내 외모를 채점하질 않나 대뜸 내 스타일에 흠을 잡고 난리인 이양반은 루이블랑...... 물론 경. 이런 날씨에 깃털장식 모피코트 입고 다니는 루이블랑 씨는 정말이지 고독한 스타일리스트였다. 지금 내 앞을 스쳐간 다섯 기사님의 공통점이라면 놀랍게도 '기사도를 수호하고 이 나라를지키는 기사님' 과 눈꼽만큼이라도 비슷해 보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보다 이 미남자들이 득실거리는 광경은......
‘어, 어디선가 많이 본 풍경인데 이거.’
잠깐 내 머릿속에서 추억 속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니까 그것은...
“미온 경. 어서 소개를 해야죠?”
스왈로우 금녀 기숙사 사감(舍監)인 키스가 헤죽 웃으며 다가올 때쯤 되자 내 머릿속에는 엄청나게 엉켜 있는 실타래가 가득 들어찬 것 같았고 내가 분명 뭔가 거대한 음모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난 키스의 팔을 끌고 응접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모습을 보고 '이야아아! 예상대로 멋진 기사단이네요!’라고 말할놈이 있겠냔 말이다!
“자, 자, 잠깐 나 좀!”
“아아! 아파요! 이거 놓고 말하세요!”
내 마음이 더 아파!
12.
“바른 데로 말해라 이 요가 괴인아! 이거 기사단 아니지!”
난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기사 맞습니다아.”
반면 키스는 얄밉도록 태연했다. 곧 내 분노어린 목소리가 티끌하나 없이깔끔하고도 고풍스런 복도 한복판에 쩌렁쩌렁 울렸다.
“운전기사도 이것보단 기사답겠다!!”
분노대폭발! 장미 목욕과 야채팩과 미성년자 기사 소년을 보고도 이것이자랑스러운 베르스 왕국의 왕립 기사단이라는 걸 믿으라는 거냐! 차라리염소를 보여주면서 이것은 심해 뱀장어입니다, 라고 우겨대는 편이 더 설득력이 있겠다! 싸움질도 못하는 미남 미소년들 긁어모아 대체 어쩌자는거냐고! 입이 있으면 말해봐라 키스 세자르!
그러나 키스의 태도는 갑작스럽게 진지하게 변해 있었다. 그가 정색을 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미온 경. 그럼 말해보세요. 당신은 대체 기사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당신이 생각하는 기사란 무엇입니까.”
이 사람 정색을 하니까 좀 무섭다. 그의 빨간 눈동자가 내 보라색 두 눈을 삼켜버릴 듯 빛나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성스러운 작위식도 있고.”
“전투 중에 기사가 된 자는 작위식 없이 기사가 됩니다. 그럼 그는 기사가 아닌가요?”
“그, 그리고 기사도를 수호해야 하고!”
“우리 역시 우리의 방식으로 기사도를 수호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검을 쓰지도 못하고!”
“검을 쓰는 것이 기사의 조건입니까? 좋아요. 그러면 지금부터 모두 검을 차고 다니겠습니다. 그걸로 만족하십니까?”
“그, 그게 아니라!”
냉큼 냉큼 척척 대답하는 바람에 도리어 내가 설득당해 버렸다. 이 사람,외판원 했으면 대성공했을 게 분명해. 하지만 역시 이건 뭔가 허전하잖아!
백마 탄 기사의 꿈같은 건 우주 저 멀리로 사라져 버렸다고! 그때 키스가품속에서 세 번 접혀 있는 내 계약서를 꺼냈다.
“이거 받으세요.”
“얼레?”
난 엉겁결에 계약서를 받았다. 키스의 고혹적인 눈매에는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당신의 환상을 깨버려서 미안하군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다면그것을 찢고 우리가 왔던 길 그대로 되돌아가서 왕궁을 나가 당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다시는 나를 만날 일도 없고 스왈로우 나이츠가 당신의 인생에서 거론될 일도 없을 테니까요. 계약서로 당신을 묶어둘 수는있어도 당신의 마음까지 묶어 두지는 못하니 이곳을 원치 않는다면 잡지않겠습니다.”
“키스...... 경.”
“하지만 고향에 돌아가더라도 한 가지는 기억하세요. 과연 당신의 꿈이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꿈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세상 어디를 가셔도 자신의 꿈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낙원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과를 먹고 싶다는 욕심만으로는 평생 사과 맛을 볼 수가 없습니다. 어디를가셔도 꿈을 원한다면 그곳을 자신의 꿈에 맞게 바꾸셔야 해요. 그게 바로꿈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키스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럽고 청아했지만 뭔지 모르게 그의 모습 어딘가에서 기사의 흔적을 발견한 것 같았다. 결국 나도 기사가 되고 싶다는꿈을 원해 이곳까지 왔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후회 없는 노력을 했다고는 말할 수가 없지 않은가.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내가 완벽하게 만족할수 있는 낙원 같은 것을 멋대로 기대하고 또 멋대로 실망한 것인지도 모른다. 단지 추천장 한 장 외에는 나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 않은가.
“역시 이거..... 돌려드리겠습니다.”
난 나도 모르게 키스에게 다시 계약서를 건네주었다. 노력도 없이 단지내 기대와 다르다고 불평만 했다니, 뭔가 나 자신이 몹시 창피했다. 그런데 키스는 그걸 받지도 않고 다시 방긋 웃는 것이 아닌가.
“좋은 결정이에요. 스왈로우 나이츠의 일원이 된 것을 다시 한번 환영합니다아.”
“아?”
“그럼 이제 미온 경의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아.”
“잠깐. 이 계약서는 어쩌고!”
“응? 무슨 계약서 말입니까?”
“아뿔싸!”
난 황급히 그 '계약서'를 펼쳐 보았다. 그랬더니 거기에는.
“...... 어디로 갔나...... 나의 파랑새? 뭐야 이거 계약서가 아니잖아!”
속았다. 속았다. 속았다. 요가 인간이 또 날 속였다아아아!!
“아아아. 찢어버리기엔 너무도 예쁜 시죠? 제 자작시랍니다. 원하신다면액자에 넣어서 미온 경의 방에 장식해드릴 수도 있......”
부우우우우욱!
“너무해!!”
난 '우주최악의 시'를 아주 아주 잘게 찢어서 창밖으로 뿌려 버렸다. 결국 처음부터 날 놔줄 마음도 없었던 주제에 꿈이다 노력이다 낙원이다 멋대로 지껄였겠다! 아아악 창피해! 이런 저질 사기에 끝까지 놀아난 나 자신이 창피해 미치겠다!
-Blind Talk다른 분의 스타일을 받아들이고 안해 본 것을 시도해 보는 일은 항상 즐거운일이지만 무척 힘들기도 하군요. 원안을 제공해 주신 L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미안해요. 3년 걸렸습니다.)
#007 제1화 :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
#007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화 :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
13.
“여기가 10년간........ 내가 있을 방인가?”
키스는 '잠옷은 지급해 주지 않습니다아.'라는 괴상한 작별인사와 함께밖으로 나갔고 난 그제야 이제야 숨이 조금 놓였다. 뭔가 굉장한 것이 폭풍처럼 내 앞을 지난 것 같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새로운 보금자리와함께였던 것이다. 내 룸메이트라는 지스킬이 '지명' 받아 여기 없는 지금,난 의외로 꽤 소박한 이 방에 홀로였다. 키스의 말대로 사용할 물품들은자신이 알아서 구입해야 한단다. 이곳에는 커다란 창문 두개와 책상과 의자, 옷장과 침대 그리고 의문만점의 화장대 정도가 설치되어 있었다.
“어. 저건 또 뭐야.”
다 큰 남자 둘을 한 침대에 던져줄 정도로 몰상식하지는 않았는지 당연히침대는 오른쪽 끝에 하나 왼쪽 끝에 하나. 왼쪽이 지스킬의 자리였다. 그리고 그 '지스킬의 영역'에는 노끈으로 만든 경계선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노끈에는 '침범하면 죽인다.'라고 쓰여 있는 쪽지가 걸려 있었다. 어린애냐!
“대단한 환영인사로군. 사교적이기도 하셔라. 쳇.”
뭐야 저 태도는. 역시 이런 건 일부러 위반해 줘야 제 맛이지! 네 놈의침대에 내 흙먼지 묻은 엉덩이를 잔뜩 비벼줄 테다! 응? 그러나 나는 지스킬의 노끈을 뛰어 넘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화장대 위에 수북이 놓여 있는 저 유리병들은 분명 지스킬의 것이다. 그런 을씨년스러운 것들은 딱 봐도 화장품은 아니었다.
“약?”
유리병 안에는 상당히 독해 보이는 가루며 알약 같은 것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이 정도 양을 밤낮 먹는다면 하루 종일 배가 부를 정도일 거다.
나이도 어려 보였는데 정말로 병약한가 보군. 성격은 표독스럽다지만 말이야.
“.....불쌍하군.”
결국 난 머쓱한 표정이 되어 다시 '지스킬의 국경'을 넘어왔고 내 자리로돌아가 여행가방을 풀기로 했다. 그때 문이 덜컥 열리며 큰 키의 남자가튀어 들어왔다.
“누, 누구!”
“지스 경의 룸메이트라니 너도 참 불쌍하구먼.”
“당신은 쇼넨베르트...... 경?”
“오 기쁜데? 이름을 다 기억해 주고.”
직업병이랄까. 난 한번 소개 받은 사람의 얼굴과 이름, 목소리, 취미까지잊어버리는 적이 없다. 쇼넨베르트는 이 왕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만큼 건들거리는데다가 피부도 어떻게 태웠는지 커피빛이고 얇고 검은 가죽옷에 악취미적인 액세서리까지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영락없는 건달 꼴이었지만 다행이도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가 갑자기 내 턱을확 잡아채는 것이 아닌가.
“캬아아. 정말 계집애처럼 생겼어. 요즘 취향인가?”
역시 나쁜 놈이다 이 녀석은!
“아무튼 앞으로 쇼탄이라고 불러. 그러는 넌?”
“엔디미온 키리안이라고 합니다. 미온이라고 부르셔도.”
“미온 경? 미온 경이라...... 발음 한번 이상하네.”
당신도 만만찮아. 입속에서 내 별명을 몇 번이나 이리저리 굴리며 괜히남의 별명가지고 생트집을 잡던 쇼탄은 내 침대에 멋대로 털썩 주저앉으며입을 열었다.
“아무튼 미온 너는 여기 왜 왔냐. 맞춰볼까? 너 팔려온 거지!”
“아닙니다!”
실례잖아! 팔려 와서 기사되는 사람이 어딨겠냐!
“아 그래? 그럼 끌려온 거냐?”
“절대.”
여기가 무슨 도살장인가. 끌려오게. 쇼탄은 놀란 얼굴로 내 얼굴을 뜯어보는 것이었다.
“뭐야. 너 그럼 돈 벌려고 온 거야?”
“네?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에요!”
돈 벌 생각이었다면 내가 뭣 하러 여기 오겠어. 고향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갈고리로 돈을 긁을 수 있었는데. 쇼탄은 굉장히 난해한 수수께끼라도들은 얼굴로 내게 되물었다.
“너 그럼 여기 왜 온 거냐?”
“그, 그거야...... 정의의 기사가 되기 위해서죠!”
“푸...... 푸하하하핫!”
그래 웃어라. 마음껏 비웃고 날 돌로 쳐라. 이제는 익숙해 졌으니까!
“아아 그랬구나. 기사? 큭큭. 이제 기사 되었으니까 만족하냐?”
얼마 전 내가 누군가에게 해준 말과 비슷하군. 왠지 벌 받은 것 같다.
“그보다...... 스왈로우 나이츠는 정확히 뭘 하는 곳인가요?”
“기사단이야. 왕국에서 창설한 왕실 직속의 기사단이지.”
“하지만 이런 모습은 전혀 기사단이 아니잖아요!”
“꼭 검을 휘둘러야만 기사는 아니잖아.”
“예?”
“기사 작위 있는 사람 중에서 검술의 달인이라든지 마상 시합의 프로 같은 자들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아?”
“글쎄요.”
“작위는 누구한테라도 부여하면 끝이지만 검술이나 마술(馬術), 지도력같은 건 누가 하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지진아 같은 귀족 공자들 상당수가 무늬뿐인 명예 기사 작위를 면허처럼 소유하곤 있다지만, 그 녀석들...... 여자 후릴 때 외엔 그 작위 써먹는 일이 없을 걸?”
쇼탄 경은 의외로 달변이었다. 하긴 왕실이 생색내는데 작위만큼 편한 게또 있을까. 영지를 줘야하는 것도 아니고 금은보화를 써야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당신은 이제부터 기사'라고 인정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뭐강단에 한번도 서지 않은 정치인에게 명예 교수 자리를 준다든지 돈을 많이 기부한 상인이 명예 관리가 된다든지...... 피차 별 노력도 하지 않고생색내기 쉬운 일인 거다.
“그럼 스왈로우 나이츠도 결국 명예직이라는 말인가요?”
“절대로 아님! 우린 왕실에서 써먹기 위해 만들어진 직업인들이지.”
“어, 어디다 써먹는데요?”
“잡일.”
“아?”
“그럼 뭘 기대한 거냐?”
그런 건 당당하게 대답하지 마세요, 쇼탄 경!
“그렇게 서운한 얼굴 하지 마. 우리 밖에 못하는 일도 있어.”
“우리 밖에...... 못하는 일?”
쇼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댕겼다. 하얀 연기와 함께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를테면 '지명'같은 것?”
결국 모든 의문의 끝에는 꼭 '지명'이라는 단서가 존재하는군.
“그런데 지명이란 뭐죠?”
“그거야 말로 스왈로우 나이츠가 존재하는 진짜 이유지.”
“지, 진짜 이유?”
“곧 알게 돼. 견디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만큼 편한일도 또 없어.”
“아아?”
쇼탄은 벌떡 일어나더니만 '여기서 담배 피웠다는 말, 지스킬한텐 말하지마. 그 놈 정말 죽일 듯이 화를 내거든.'이라고 당부하며 기지개를 폈다.
확실히 늘씬한 몸매다. 상당히 몸 관리를 잘한 것 같은데, 검술을 배운다면 금방 실력이 늘 것 같은 체형이로군.
“그런데 쇼탄 경?”
“왜 미온 경?”
역시 어색해 이런 칭호!
“키스 경은 어떤 분이죠?”
솔직히 상당히 궁금했다. 조금도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는 요가 생명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갑자기 확 풍겨나는 존재감이랄까, 속을 알 수가 없는자였다.
“키스 세자르 씨 말이로군.”
쇼탄 역시 그의 이름이 나오자 긴장한 얼굴로 내게 당부하듯 말했다.
“그를 화나게 만들지 않는 편이 좋아.”
“예?”
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쇼탄은 예전의 경험이 떠오르는 듯이 두려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키스 경은 화가 나면......”
역시 키스 경은 겉으로만 '무방비 인간'인 척하는 왕궁의 실력자가 아닐까! 어쨌든 젊은 나이에 기사단의 리더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보통 인간은아니라는 의미잖아. 쇼탄은 그의 진짜 모습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내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울어버리거든.”
14.
뭔가 상당히 맥이 빠져버렸다. 이층 복도의 베란다에 멍하니 걸터앉아 있던 나는 저택 리더구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왕궁에 출입하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하나 같이 찬란하기 그지없는 의상에수행원들도 너덧 명씩이나 따라다니고 있었다. 틀어 올린 머리가 이층 창문인 이곳까지 닿을 정도로 높다란 어떤 귀부인은 엄청나게 긴 치마 끝을잡아주는 시녀만 둘이나 붙어 다니는 '움직이는 인간 타워'였고 대제후의손자 정도로 보이는 한 꼬마는 말처럼 몸을 숙인 몸종의 등에 올라탄 채채찍까지 들고 본격적으로 행차중이셨다. 아주 훌륭한 악덕 영주가 될 재목이로군. 이런 ‘'궁 괴물'들을 보고 있자니까 차라리 스왈로우 나이츠는꽤 정상적으로 보인다. 뭐 생각해 보면 기사답지 않다 뿐이지 말투도 옷입은 것도 정상적이고 몸매도 얼굴도 수준급의 미남자들이 아닌가. 잠깐!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어째서 하나 같이 각양각색의 미남들로 구성되어 있는 거지? 그리고 보니 나를 포함해서 스왈로우 나이츠 단원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그것뿐이잖아. 그 외엔 특기도 없고. 혹시 여기에 뭔가 흑막이......
“다녀왔습니닷!!”
두다다다다닷!! 복도 끝에서부터 맹렬한 발소리와 함께 밝고 높은 톤의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 자기 몸만큼이나 커다란가죽 가방을 든 목소리의 주인공이 내 앞을 쓔웅 지나가 버렸다. 우아!
나보다도 머리가 길다. 저 정도면 무릎까지 닿는 거 아냐? 게다가 저 몸에저 얼굴에 저 치마는 분명 여자? 그런데 여긴 금녀구역이라고 했잖아! 정신없이 달려가던 그 '소녀'는 물어볼 새도 없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대체저건 또 뭐냐는 녀석이냐고!
“설마..... 저 여자아이마저 기사라고 하지는 않겠지?”
나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Blind Talk이 글에 나오는 스왈로우 나이츠 본부 리더구트는 본래 리터구트(Rittergut)로 중세에 있었던 기사령(騎士領)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가져왔습니다.
큰 의미로는 '기사들이 소유한 영지'지만 작은 의미로는 '기사들의 본거지'(그러니까 몰타 섬... 같은 곳인가?)라고 하더군요.
뭐 굉장히 역사적으로 복잡한 의미를 지니던데, 특별히 그런 고증을 살리고싶진 않았고, 그냥 단어만 가져온 정도입니다. 혹시 그 뜻을 아시던 분이읽다가 '뭐야. 이 단어를 왜 여기서 써?'하실까봐 사족처럼 알려드립니다.
내일은 하루종일 집밖에 있어야 할 것 같아 오늘 저녁 무렵에 내일 분량까지올리겠습니다. 당장은 노동하러 사라져야 겠군요.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 중 공주는 잠 못 이루고, 를 들으며(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부른 것이라네요. 이번 국내에서 하는 장예모 연출의투란도트는 꼭 보고 싶었지만... 티켓값이 물경 50만원이라는 말을 듣고포기, 그냥 방바닥에 누워 음악이나 들으려고 합니다.)
#008 제1화 :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
#008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화 :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
15.
난 그녀의 발자취를 따라 응접실로 다시 돌아갔다.
“엔디미온 경? 전 랑시랍니다! 잘 부탁합니다!”
“아, 안녕. 랑시...... 경.”
하아. 전개 한번 빨라서 좋군.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의 씬14에서 미친 듯이 내 앞을 지나간 '발랄한 소녀'는 소녀가 아니고 아가씨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다면 보는 사람 헷갈리게 치마 입지 말란 말이야! 랑시가 내 눈치를 파악하고는 자신의 치마를 들쳐 보였다.
“아? 이거요?”
“헉!”
랑시는 의외로 대담한 성격이었는지 사람들 앞에서 드레스를 훌러덩 벗어던졌다. 흡! 역시 가슴이 없다! 자기 입으로 남자라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 얼굴인지라 난 나도 모르게 '여자가 아니잖아!'라는 사실에 또 다시 놀라고 말았다. 제발 정상인을 만나고 싶다는 소박하고도 간절한 심정에 가슴이 아려온다. '소녀 기사' 랑시는 머쓱한 표정으로 그 작은 얼굴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건 단지 지명자의 취향이니까요. 특별히 여장을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지명자의...... 취향?”
얼레? 사람들의 표정이 왜 이래!? '지명자의 취향'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스왈로우 기사님들의 표정에 불안감이 내려앉았다. 이봐요들! 누구라도말 좀 해보라고! 지명자의 취향이라는게 대체 뭐야! 다행이도 랑시는 성격이 밝은 소녀기사 아니 소년기사라서 팔을 번쩍 들어올리며 이런 우중충한분위기를 단번에 부셔 버렸다.
“다녀오면서 맛있는 훈제고기 사왔어요! 오늘은 제가 요리할 테니 기대하시라!”
이봐. 정성 고맙긴 한데 그런 말은 옷 좀 걸치고 해줘.
“엣취!”
스왈로우 나이츠도 어쨌든 왕궁식구인지라 전담 요리사들 저택 리더구트지하에 포진하고는 있지만(가본 적 없다.) 멤버들이 원한다면 직접 요리를할 수도 있단다. 랑시가 끙끙거리며 들고 온 거대한 가방 안에는 훈제양고기가 가득 들어 있었나 보다. 자기 몸집만한 고깃덩이와 몇 시간이나 씨름하던 랑시는 오늘 저녁의 메인 디쉬 '맛자랑 양고기스튜'를 완성시켰고 어린애 같은 미각인지 꽤 달긴 했지만 그래도 수도 아스말에 와서 최초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16.
다음날 꿈속을 헤매던 나를 깨운 것은 정확한 표준어를 구사하는 시종의목소리였다.
“기상시간입니다. 일어나십시오. 엔디미온 키리안 님.”
왕궁 사냥터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노크 소리, 문밖의 미성에 부스스 일어서며 '역시 여긴 기숙사 맞아.'라며 중얼거렸다. 아직까지도 내 전직의버릇이 남아 있는지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기엔 몸이 무겁다. 좀 더 자볼까?
생각하다가 기사단 생활 첫날부터 늦잠이라는 것도 무성의한 태도다 싶어서 침대 위에서 긴 기지개를 펴고는 목을 조르는 내 긴 금발을 풀었다. 정말이지 내가 생각해도 위험한 잠버릇이라니깐. 예전에 동거하던 그녀도 항상 말했지. '대체 이게 뭐야. 교수형 당하는 꿈이라도 꿨어? 머리를 자르던지 잠버릇을 고치던지 결정해!'라고. 한번은 이 놈의 머리칼이 그녀의목마저 휘감아 버리는 바람에 그녀가 기겁을 하며 가위를 들고 날 쫓아왔던 적도 있었지. 그때는 그녀가 사정없이 뒤엉킨 내 머리칼을 빗어 줬는데이제 그녀는 없고 여전한 잠버릇만 남았다. 발전한 것은 혼자서 머리 빗는기술 뿐...... 인가. 하아. 난 발전이 없는 놈인가 보다.
싫다! 아침부터 이런 지지리 궁상은!
“에이잇! 아침부터 이게 무슨 궁상! 우아악!”
기운을 내보려는 심산에 억지로 몸부림을 치다가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져 버렸다. 아침부터 마룻바닥에 추락해 버린 이 꼬락서니, 무지하게 울적하군. 하루치 기운이 한번에 빠져 버렸다. 게다가!
“흐으으읍!”
마, 망할! 미처 다 풀지 못한 내 긴 금발이 굴러 떨어질 때 몸에 엉켜버려 내 목을 죽일 듯이 조르기 시작했다. 사념(邪念) 머리칼이냐! 그래도자신의 본체를 죽이려는 짓은 그만두란 말이다 이 놈의 못된 머리칼! 난자승자박이라는 사자성어를 몸소 실천하는 기염을 토했다.(주 - 自繩自縛,자신의 밧줄에 스스로 묶임. 스스로 초래한 나쁜 결과. 한심하고 어리석음을 비꼬는 말. 유사어 : 자기 손으로 무덤파기. 삽질 etc). 우아악! 그런창피한 거 일일이 설명하지 마! 어, 어쨌든 이대로는 숨이!
“아아. 미온 경.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이곳이 싫었나요오.”
문을 열고 들어온 키스가 무척이나 슬픈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키, 키스 씨. 동정은 필요 없으니까 내 목을 조르는 황금빛 뱀이나 어서풀어 주세요. 어? 그런데 그 가위는 뭡니까!
“잠깐 기다리세요. 주인도 몰라보는 그런 배은망덕한 금발 따위는 단번에 잘라드리겠습니다아.”
“자르지 마!!!”
17.
“으잉? 아침부터 뭐요 그 얼굴들은?”
스왈로우 나이츠의 아침 식사는 비가오지 않을 때는 일층의 테라스를 이용한다. 정원의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이 우아한 테라스는랑시가 무척이나 아끼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침 일찍부터 그곳에서비스킷과 차를 즐기고 있던 쇼탄은 나와 키스가 나타나자 눈살을 좁히며고개를 기울였다. 하긴...... 교수형이라도 당한 듯 목이 붉게 달아올라있고 머리칼도 산지사방으로 삐죽거리는데다가 온 몸이 식은땀에 젖어 있는 채 인상을 쓰고 있는 내 모습과 눈가에 멍이 난 채로 가위를 들고 난감하게 웃고 있는 키스의 모습은 누가 봐도 의아하겠지. 이건 순전히 평생기른 남의 머리칼을 덥석 자르려고 했던 키스의 잘못이야!
“자자. 식사하면서 들어주세요. 오늘의 일입니다아.”
호오. 이것이 아침 브리핑이라는 건가. 테라스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간키스는 자신의 자랑스런 기사단원들을 훑어보며 '오늘의 노동 할당량'을읊기 시작했다. 물론 멤버의 상당수가 의문의 '지명'을 받아 출장을 나가있는 관계로 테라스에 모인 자들은 어제의 그 멤버 여섯명이지만 말이다.
뭐냐! 이게 갑자기 무슨 사채업자 분위기지? 왕실로부터의 독촉장이라니그건 또 대체 뭐냐고!
“그리고 랑시 경. 오늘은 일이 없군요. 푹 쉬세요.”
“신난닷!”
랑시가 여장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아무리 봐도 새빨간 거짓말 같다.
놀아도 좋다는 지시를 받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가는 그녀 아니 그는 분명히스트라이프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헷갈리니까 남자든 여자든 하나로 통일해 줬으면 좋겠다.
“저, 저는요? 지명 받은 것 없나요?”
크리스티앙은 불안한 표정으로 키스에게 되물었다. 키스의 안색이 금세안타깝게 바꿨다.
“미안해요. 크리스 경. 이번에도 지명은 없습니다.”
“......예.”
왜 저렇게 풀이 죽은 거지? 지스킬은 분명 지명 받아 기분 나쁜 얼굴로나가버렸는데 어째서 크리스는 지명 받지 못해서 쓸쓸해하냐고.
“그리고 미온 경!”
앗! 나다! 두근두근, 과연 무슨 명령이 내려질까. 키스는 나에 일격을 맞아 부어있는 얼굴에 한껏 웃음을 담으며 내게 명령을 내렸다.
“첫날이니까 가벼운 일을 시키도록 하죠. 두 시간 후에 왕실 수렵대회가시작됩니다. 그곳에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 자격으로 참석하도록 하세요!”
와, 왕실 수렵대회? 그건 분명히 왕족들이 모여서 사슴이나 노루 같은 것을 사냥하는 그런 우아한 경기가 아닌가! 그런 것에 기사 자격으로 참여한다는 것은 분명 왕족 경호? 이런 건 잡일이 아니라고. 이거야 말로 왕실직속 기사에 어울리는 일이지! 난 감개무량한 목소리로 키스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임무 완수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랄라라. 아이 좋아라. 가서 내 명검을 가지고 올까나. 갑옷도 입고 망토도 둘러야지. 그런데 키스가 좋아 죽으려고 하는 내 모습을 보며 의아한표정으로 뺨을 긁적거리는 것이 아닌가. 왜 또 그런 표정이십니까?
“지금 어디가시는 거에요? 미온 경?”
“아. 검과 갑옷을 준비하려고 하는데...... 요.”
“아?”
순간 쇼탄을 비롯한 다른 멤버들이 웃음을 참으며 날 바라봤다. 아, 목석같은 레녹 마저 실웃음을 보인다! 내, 내가 지금 뭘 잘못한 거야?
“아하하. 그런 건 필요 없습니다아.”
“예? 그럼 경호를 어떻게.......”
“경호를 맡는 것이 아닙니다.”
“그, 그럼 뭘 하는 거죠?”
#009 제1화 :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
#009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화 :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
18.
“........왕자님. 나이스으으으으”
내 힘없는 응원소리가 사냥터에 애처롭게 울렸다. 결국 이거였군. 확실히키스의 말마따나 난 왕실 수렵대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내 꼴을 좀 보라!
멋진 판금 갑옷은커녕 하늘하늘 거리는 백색의 토가(toga)에다가 왕족들의고상한 취향 덕분에 두 다리가 다 보이도록 개량되어 있다. 게다가 은빛의장검은 고사하고 내 두 손에는 백화(白花)가 맺혀 있는 나뭇가지가 꼬옥들려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 키스가 '미온 경이야말로 수렵대회의 꽃입니다아!'라고 말하긴 했지만 이런 의미의 꽃인 줄은 몰랐단 말이야! 요컨대나는 기쁨조였다.
“너! 목소리가 너무 작아! 기쁨조면 기쁨조 답게 왕자님 앞에서 최선을다하란 말이야!”
큭, 옆에 다가온 거구의 기사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윽박질렀다. 그가바로 왕족들의 경호 기사. 카론 샤펜투스 경이 부기사단장으로 있는 헬스트 나이츠의 멤버였다. 어쨌거나 어쩌라고? 머리에 꽃을 꼽고 봉산탈춤이라도 추란 말이더냐!
그때 온 몸에 '저는 간신배입니다.'라는 푯말을 걸고 다니는 것 같은 한귀족이 잽싸게 어린 왕자에게 달려와 손바닥에 불이 나게 비벼대기 시작했다.
“이야아아아!! 페르난데스 왕자님! 역시 단번에 멧돼지를 즉사시켰사옵니다! 전설의 명궁 헤브너마저 부러워할 명궁이시옵니다!”
이봐. 그럼 방금 왕자님의 화살을 엉덩이에 맞고 숲 속으로 도망친 멧돼지는 뭐냐. 엉덩이에 활 맞고 즉사하는 생명체 같은 건 없다고! 그러나 아부에는 역시 뻔뻔하게 밀어 붙이는 저력이 필요하다. 이에 뒤질세라 다른귀족들 역시 너나 할 것이 어린 왕자에게 몰려들어 세계정복이라도 성공한냥 게거품을 물며 칭송하기 시작했고 정작 기쁨조인 나는 그들의 등살에떠밀려 밀려나 버렸다.
“멋집니다 왕자님!”
“훌륭하십니다 왕자님!”
“우주최강이십니다 왕자님!”
“즉위 하신 뒤에도 저의 충성을 잊지 말아 주세요 왕자님!”
이것은 이미 광기였다. 그러나 열 두 살 쯤 되어 보이는 곱슬머리의 페르난데스 왕자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백마 위에서 아무 말도 없었다. 즉사시키지 못한 것쯤은 자신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좀 더 머리가 좋은 왕자라면 진정으로 자신을 칭송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즉위 일순위의 첫째 왕자인 페르난데스에게는 밤마다 비공식적으로 십여명 이상의 십대 여성들이 '배달'된다고 키스가 말했었다. 말하자면 귀족들의 향응제공(饗應提供) 같은 것이리라. 침샘에서 기름이라도 나오는 인간처럼 아부를 입에 바르고 사는 그들로서는 어떻게든 왕자의 씨앗을 받아두고 싶을 테니까. 하지만 적당히 하라고! 짐승이냐? 왕자님은 아직 열두 살이야!
“이봐! 뭘 멍하니 서 있는 거야!”
귀족들의 왕자찬양이 거의 광란의 무대가 되어가고 있을 때 예의 헬스트나이츠의 기사가 내 머리를 툭하고 내리쳤다. 그것도 투박한 쇠장갑을 낀손으로! 아파 이 자식아!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평생 추억으로남을 구타를 당할 것 같아서 참아야 했다.
“왜 그러세요?”
“어서 가서 즉사한 멧돼지를 끌고 와!”
“예? 그걸 왜 제가!”
“당연하잖아. 이런 잡일은 스왈로우 나이츠가 해야 할 일이다.”
나보다 머리 두개는 더 큰 털북숭이 기사 놈의 얼굴에 거만한 비웃음이번졌다. 그랬군. 크리스가 말한 '수치스럽고 힘들더라도'의 의미를 이제조금 알 것 같다. 기사라도 다 같은 기사가 아니라는 건가. 하지만 걱정말라고. 그 무시무시한 호스트 생활도 너끈하게 견뎌온 내게 이 정도 쯤은 치욕도 수치도 모욕도 아니니까 말이지. 배알도 없는 것이 자랑은 아니지만 사냥개 흉내를 내면서 멧돼지 끌고 오는 일쯤은 얼마든지 참고 해줄 수 있어.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잖아!
“저 그런데... 그 멧돼지 안 죽었걸랑요?”
“이 놈! 어르신들께서 분명 즉사했다고 말씀하셨는데 항명할 작정이냐!”
야 이 못생긴 털기사야! 아무리 임금님이 우겨도 안 죽은 건 안 죽은 거잖아! 그게 죽었다면 어째서 숲 속으로 도망친 거야! 좀비 멧돼지냐! 그러나 관료주의라는 아편에 찌든 이 기사 놈에겐 인간의 말이 통하지 않았다.
“가.져.오.라.면.가.져.와.”
그래그래. 자기 일 아니라 이거지. 훌륭한 기사정신이다 정말. 그럼 이제스마일 작전이다.
“하지만 전 꽃인데요. 그러니까 아시다시피 꽃은 움직일 수가......
가, 가면 되잖아요.”
안 통하는군. 내 얼굴만 한 강철 주먹이 내 앞에서 부르르 떨자 반사적으로 숲 속으로 뛰어가 버리는 이런 솔직한 다리라니. 가져오면 되잖아요.
그렇게 눈 부라리지 말라고요 털기사님.
19.
“어디로 갔니...... 멧돼지야아아.”
씨잉. 아무리 그래도 단검 정도는 줘야 할 것 아냐. 그나저나 사냥터의숲 속이 이렇게 음산한지 전에는 몰랐다. 아직 오후도 안 되었건만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게 낮도깨비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난 절대로 즉사했을리가 없을 멧돼지의 핏자국을 따라 점점 더 숲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위험한 일이 '잡일'일 리가 없잖아 쇼탄 경 이 나쁜 놈아!
‘아무리 그래도, 내가 비명을 지르면 달려와 주겠지?’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무슨 격투의 달인도 아니고 집체만한 멧돼지와맨손으로 싸우는 일이 가능할 턱이 없잖아. 제발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기를 강렬하게 희망했다. 아니면 찾지 못했다고 핀잔을 듣는 한이 있더라도돌아가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내 첫 임무인데 포기해 버리는 것도 좀 그렇잖아. 푹푹 꺼지는 부엽토를 밟으며 계속 핏자국을 따라가던 중 쭉 이어져 있던 혈선이 끊어진 것을 보았다.
“응? 이 놈, 어디로 갔지?”
난 순간 살기어린 시선을 느끼며 옆을 바라보았다. 풀숲 속에서 들려오는거친 숨소리. 오 신이시여! 그 어둠 속에서 시뻘건 두 눈동자가 날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굳이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방금 그 거대한 것이 나를 향해 뛰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우아악! 즉사는커녕 광분하고 있잖아!
“망하아아알!!!”
수많은 소설의 주인공들은 많은 종류의 적들과 싸운다. 머리가 아홉 개달린 용과 싸우는 영웅도 있고 세계를 지배하려는 마왕에게 당당히 맞서는용사도 있고 악덕 귀족의 사병들을 홀로 물리치는 검객도 있다. 그리고 난지금 엉덩이에 화살 박힌 멧돼지와의 처절한 사투가 그 막을 열었다. 실망스러워 보였다면 미안하지만 이쪽은 절박하다고!
“우아아앗! 떨어져라! 제발 좀 떨어져! 이 축생!”
돌덩이 같은 멧돼지의 몸에 바디 프레싱을 당한 나는 이 세상을 불살라버릴 것처럼 이글거리는 이 놈의 증오를 온몸으로 전달받을 수밖에 없었다.
총살의 위기, 정조의 위기, 그리고 지금 인간을 증오하는 짐승의 노리개가된 이 인생의 대위기가 어째서 하루에 한번씩 찾아오는 거냐고! 기사단 첫날 멧돼지에게 압사당하는 어이없는 죽음으로는 하늘나라 가도 부모님을 뵐수가 없었다. 난 어떻게든 이 난데없는 위기에서 벗어나야 했다.
일단은 설득.
“들어봐 친구. 엉덩이에 구멍 뚫린 네 기분을 모르는 건 아니야. 하지만나도 피해자라고! 그러니까 제발 좀...... 우와와악 깨물지 마!”
역시 안 통한다. 말이 통할 리가 없지. 내 간절한 설득에 멧돼지는 내 옷을 찢어발기는 것으로 대답해 주었고 덕분에 내 어깨에 진한 혈선이 그어졌다. 수컷 주제에 남의 살갗에 이빨자국 남기지 마!
크르르르릉!
내 얼굴에 탁한 타액이 툭툭 떨어진다. 자, 장난이 아니다. 이대로라면사냥대회에서 사냥감에게 물려 죽은 전대미문의 얼간이가 되어 버린다. 난두 손으로 강철 같은 멧돼지의 송곳니를 쥐고 힘겹게 밀어내며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절박하고도 서글픈 목소리로 소리쳤다.
“사람 살려요! 누구라도 좀 와주세요! 당신들의 꽃이 지금 죽어가고 있단 말이야!!”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꽃이 죽어가고 있단 말이야아아아아아아아.’라는 공허한 메아리 뿐. 순간 머릿속엔 지금까지의 20년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기 시작했다. 아아 떠올려 보니까 내겐 정말 행복했던 일들도 많았....... 잠깐! 너무 일러! 멋대로........ 멋대로 최후의 장면을 연출하지 말아 달라고!
“우어어어어!! 이 놈!! 만물의 영장인 인간님을 우습게보지 마라!”
난 그 놈의 목을 부여잡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물러설 곳없는 영장류의 의지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려 주겠다 이 축생!
-Blind Talk난리부르스... 하지만 조만간 드러나겠지만 지금까지 만들어 본 주인공 중에서 미온만큼 어이없이 강한 인간이 없는 것 같군요.
긁적... 긁적 긁적... 아아 어째서 최근에는 돼지고기만 먹었다하면 두드러기가.
그럼 예정대로 일요일 분량까지 올리고 돌아갑니다. 일요일에는 연재가 없을 듯 합니다. 운이 좋아 빨리 돌아온다면 올릴 수 있겠지만..
My bloody valentine의 Loveless를 들으며
#010 제1화 :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
#010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화 :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
20.
인간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긴 뒤엔 성격이 바뀐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논리대로라면 난 삼일동안 세 번 성격이 바꿔야 했다. 내가 끌고 온 멧돼지를 보자마자 귀족들은 왕자님 앞에서 알랑방귀를 재방송하며 광란의 제2막을 열었다.
“이야아아! 역시 즉사였군요! 명궁이시옵시다 왕자님!”
눈을 엉덩이에 붙이고 사냐! 이게 즉사일 리가 없잖아 멍청이들! 즉사는내가 당할 뻔 했다고! 즉사였다면 난 지금까지 도플갱어와 싸우고 왔단 말이냐! 이게 진지한 소설이었다면 난 벌써 죽었단 말이야! 그러나 너덜너덜해진 옷에다가 온 몸에 상처까지 입은 내 불쌍한 모습에는 아무도 관심이없는 것 같았다. 곱슬머리 왕자님만 제외하면 말이다. 백마 위에 올라탄작은 체구의 페르난데스 왕자는 못된 멧돼지들에게 둘러싸여 윤간이라도당한 것 같은 내 불쌍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앳된 목소리가 신의 은총처럼 들려왔다.
“넌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인가.”
“예?”
이런. 순간 깜짝 놀라서 얼빠진 대답을 해버렸다. 황공하옵게도 왕족이직접 내게 말을 걸 줄은 몰랐다.
“경의 이름이 뭔가.”
“미온...... 아, 아니 엔디미온 키리안입니다.”
난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아흑! 쑤시지만 참자.
“기억해 두겠다. 엔디미온 경.”
아아 역시 왕자는 다르다. 고귀한 눈빛과 고결한 목소리, 왕자다운 근엄함이 서려 있는 저 모습을 보라! 필시 하늘에서 내려온 어린 왕자가 아니던가! 아니 뭐 꼭 내게 관심을 줘서 이런 말 하는 건 아니고....
“보기 흉하다. 물러나 있거라.”
순간 멸시의 시선을 가득 담은 중년의 귀족 놈이 나와 왕자님의 러블리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며 날 멀리 밀쳐냈다. 지금 내 새 옷이 찢겨지고 어깨며 다리에 짐승의 이빨자국이 나 버린 이 민망한 꼴은 모조리 네 놈들덕분이란 말이다! 왕궁의 꽃을 넝마로 만드니까 이제 속이 시원하냐!
이 못생긴 것들! 배만 산처럼 나와서 넘어지면 일어나지도 못하는 인생 낙오자들아! ......라는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마음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내 몸은 내 자리로 돌아와 후들거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꽃가지를 집어 들었다. 피투성이와 하얀 꽃의 조화라니 참으로 악취미로다. 이대로는 출혈과다로 쓰러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야! 이 꼴이 대체 뭐야!”
예의 털기사가 또 다시 내 옆에 나타나선 으르렁거리는 거였다. 당신 소원대로 처절한 사투 끝에 멧돼지 잡아왔더니 이제는 내 분골쇄신한 모습을가지고 시비다. 어쩌라고! 허공답보(虛空踏步)라도 펼치면서 잡아오길 바란 거냐!
“이런 꼴로 서 있다간 왕자님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도 모르나!
썩 사라져!”
울컥! 교토사양구팽(狡兎死良狗烹)에도 정도가 있다고! 순간 아무리 성격좋은 나라도 기사고 뭐고 안다리 후리기로 이 놈을 매다 꽂은 뒤에 온 몸의 털을 하나하나 뽑아 버리고 싶다는 기분이 솟구쳐 올랐지만...... 생각해 보니까 또 다시 사냥감이 도망쳐 버렸을 때, 이 녀석들은 또 즉사라고박박 우겨댈 테고 그걸 찾아오는 사냥개 역할은 나라는 것을 깨달고 순순히 털기사의 말대로 퇴장하기로 했다. 페르난데스 왕자님은 더없이 멋지지만 활 실력만은 믿을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세기의 대결은 하루에 한번으로 족하다고. 난 결국 기사단 첫 임무에서 중상을 입고 절룩거리는 몸으로리더구트에 돌아왔다.
21.
“......돌아왔습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아! 미온 경! 꼭 멧돼지의 습격을 받은것 같군요!”
“바로 그겁니다.”
테라스에서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팔자 좋게 낮잠을 즐기던 키스는 걸어 다니는 시체 같은 내 꼴을 보고는 걱정스런 위로를 쏟아냈다. 그리고는다시 폭 쓰러져 잠들었다.
“자지 마!!!”
“아아 오늘은 날씨가 너무도 좋아서 깨어있기 송구스럽군요.”
“말 돌리지 마!!!”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분명히 즉사했다는 괴물 멧돼지가 좀비처럼 부활해서 날 덮쳤고 난 필살의 조르기로 그 놈을 기절시켜 극적인 승리를 거둔뒤에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왕자님께 치하를 받았습니다. 이상입니다.”
“......”
“......”
“어머나. 미온 경이 간 곳은 사냥대회가 아니라 격투대회였나요?”
“놀리지 마!!!”
아윽! 계속 소리를 쳤더니 머리가 깨질 것 같...... 그러나 이대로 죽더라도 그 전에 이 말만은 들어야겠다.
“말해 봐요. 대체 이 스왈로우 나이츠가 뭐하는 집단이고 앞으로 내게닥쳐올 대위기는 또 어떤 것인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요! 사기 계약으로날 10년 동안 부려먹는 주제에 그 정도쯤은 알려줘야 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