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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성들의 배반 (역대하 10:16-19)
2000년 9월 6일, 수요일, 이근호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뇨 이새의 아들에게서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너희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 하고 온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 그러나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르호보암이 그 왕이 되었더라 르호보암 왕이 역군의 감독 하도람을 보내었더니 이스라엘 자손이 저를 돌로 쳐 죽인지라 르호보암 왕이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더라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역대하 10:16-19)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축복과 저주의 기준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의로 결정지은 기준이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이 결정 내린 기준에 대해서 우리가 반감을 갖는다든지 불만을 터뜨린다든지 그것을 저주한다든지 외면해 버릴 때, 그때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일을 진행시키십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우리 예수님의 제자 12명 가운데서 가롯유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걸로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9절에 봐도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까지 이르니라.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가롯유다 입장에서 봅시다. 가롯유다 입장이 되어 보면 결코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도리어 가롯유다 본인에 대해서 배신한 게 되는 겁니다.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따를 때부터 자기 기준을 자기가 확정해 놓았습니다. 자기의 마음이 곧 자기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의인이냐, 내가 악인이냐, 내가 하늘의 복을 받겠느냐, 저주를 받겠느냐, 라는 모든 기준은 자기 마음에 이미 확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롯유다 입장에서 볼 때에 내가 생각했던, 내가 꿈꾸던 그 예수님. 그 예수님의 나라 천국이 실지로 예수님이 이야기한 것하고 맞지를 않았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이 약속한 것을 추려보면 가롯유다가 은근히 예수님이 주시는 거기에 대해서 기대를 했습니다. 기대를 잔뜩 했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예수님이 아무 맥도 없이 초라하게 그냥 홀로 로마 군인들에게 잡히고 마니까 그 동안 친척과 집을 버리고 3년 동안 충성을 다하여 예수님을 따랐던 가롯유다 입장에는 무엇을 건지겠습니까? 건질게 뭐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가롯유다 혼자만 버린 게 아니라 12제자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롯유다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고 베드로부터 12제자 모두가 예수님에 대해서 나중에 가서는 납득을 할 수 없었고 예수님과 조용히 헤어지기로 다같이 마음을 먹은 겁니다. 심지어 베드로 같은 분은 예수님 잡힐 때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면서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 부인 할 때의 베드로의 심정과 가롯유다와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고기를 잡으러 갔을 때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3년 동안 따라 다녔는데 그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뭐가 있었습니까? 권력을 가졌습니까? 아니면 재산을 모았습니까? 사회적인 명예를 얻었습니까? 인기를 누렸습니까? 좋은 취직 자리를 허락 받았습니까? 예수 따라 다니고 얻은 것이 뭐가 있었습니까? 정말 아무 것도 얻은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예수를 따른다고 하니까 걱정이 됩니다. 무엇이 얻을 것이 있어서 교회에 나오는지...
예수님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목숨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좁은 길로 가는 것 그것뿐입니다. 주님 가신 그 길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기쁨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내가 있는 곳에 너도 있게 하리라." 이 축복 외에 다른 축복은 기대하지 맙시다.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이 안 갈려고 발버둥치는 우리를 끌고 가시는 겁니다. 그것도 가롯유다가 아니라 11제자에겐 특별히 선택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워서" 그들이 가기 싫어하는 좁은 길. 그들이 무서워하는 죽음의 길. 그들이 황당해 하는 막다른 골목. 그 막다른 골목도 주께서는 이게 생명의 길이라고 인도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데 이 다윗 집안의 중심으로 세워지는 나라가 유다라고 합니다. 다윗의 지파 이름을 따서 유다라고 합니다. 그 외 나머지 11지파가 뭉쳐서 된 북쪽 나라를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라 하면 야곱 아닙니까? 이스라엘이라 하면 12지파가 한나라를 만든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오고 유다 지파라면 유다 한 지파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라는 느낌이 들지요. 만약에 우리가 예를 들어 유다지파가 아니고 르우벤 지파나 또는 시므온 지파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때 유다지파가 우리만이 축복의 계통이다.
이렇게 이야기했을 때 우리가 얼마나 성질 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할 때는 12지파가 의논하고 협력해서 마음 맞춰 좋은 나라 만들려고 했는데, 뭐 다윗이 왕이라고 해서 유다 나라만 하나님의 택한 나라고 나머지는 아니라고? 우리가 언제 유다 가문하고 볼일 볼일이 있나 우리끼리 나라 만들면 될 거 아니야. 우리도 이스라엘 다같 은 자손이다 하고 삐쳐서 따로 나라 만든다고 할 때, 누구나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걸 가지고 오늘 본문에는 배반했다는 용어를 썼습니다. 듣는 이스라엘은 기분이 나쁘겠지요. 이렇게 성경에 나온 것은 누구 입장에서 봐서 그러냐 하면 유다 입장 다윗집안 입장에서 볼 때에 자기 유다 중심으로 뭉치지 않고 따로 떨어져 나간 게 배반으로 보이지 않지만, 유다 입장에서 볼 때는 배반이라는 말입니다.
또 우리가 본문을 보면서 다시 한번 우리가 뭘 생각해야 하면, 구원받는 사람과 구원받지 않는 사람의 어떤 기능의 외면적 차이는 별로 없습니다. 같이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도 같이 하는데,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열심히 예배드리고, 거룩하게 안식일을 지키고, 안식일에는 노동도 하지 않고, 주님 앞에 헌신하고 금식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외부적으로 기도를 열심히 한다든지, 사랑의 교제를 한다든지, 그런 것은 별 차이가 없는데 무엇이 문제냐 하며는 그 당시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의 마음이 예수님 마음과 일치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기도하니까 같은 성도가 아닌가? 하면 안됩니다. 당신의 마음이 지금 어디 가 있습니까? 를 묻고 있습니다.
자, 우리가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봅시다. 바리새인은 누구보다 철저히 율법을 준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계명과 율례를 지키려고 애를 썼던 사람들입니다. 오죽했으면 마태복음 5장에서 "너희의 의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같으면 인간이 해 낼 수 있는 최고 수준에 도달된 사람이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바리새인 보다 더 낫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하지요. 왜냐하면 하나님 하면 껌뻑 죽던 사람들, 여호와라면 그 앞에 엎드리고 경외하는, 그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종교적인 것에는 최고의 도사들입니다. 그 어느 누가 바리새인보다 더 법도와 율례를 지킬 사람이 있겠습니까? 심지어 바리새인 법에 이런 법이 있습니다. 남이 싫어하는 짓을 네가 남에게 하지 마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 했습니다. 그리고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라. 이것이 하나님 뜻이다. 라는 것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오셔도 눈 깜짝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야 당신 필요 없어. 우리 봐라 우리처럼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그러니까 예수님 하신 말씀이 다음입니다. "네가 오른손이 범죄 하거든 오른손을 찍어 버려라. 마음으로 음란을 품는 것도 음란죄다. 형제보고 마음속으로 욕하는 것도 살인죄다. 사람들 앞에서 외식하며 기도하는 것도 엉터리다. 금식할 때 찡그리면서 하는 것도 엉터리다. 구제할 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나오니까 인간의 능력을 총동원해서 지킨다고 자부했던 인간들이 오른손이 하는 일에 왼손이 모르게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같은 몸에 붙은 팔, 다리인데,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남의 눈에 티보다 너의 눈에 들보부터 빼라고 하신 말씀. 인간이 자기의 들보를 뺄 수 있습니까? 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들보인지를 모릅니다. 어떤 분이 전화 오기를 "목사님 저는 기복 신앙에서 벗어나 초월했습니다" 라고 하는데, 세상에 죽을 때까지 기복신앙에서 벗어날 사람이 없습니다. 기복 신앙이 인간에게 얼마나 수시로 생겨나는데, 없애고 나면 또 생겨나고. 죽을 때까지 생겨 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 설교를 마치시고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문둥병 환자를 만났습니다. 그 문둥병 환자는 어떻게 해서 깨끗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산상 수훈 다 지켰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문둥병 낮게 하고 그 다음에는 중풍병자를 자신의 죄 사하는 자신의 능력으로 죄를 사하고 걸어서 나가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인간의 힘으로 어느 성경말씀 하나 지킬 장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배반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뭐냐 하면 나의 죄가 어디까지 뻗어 있는가를 감을 잡지 못했습니다. 이건 우리가 한평생 두고 살면서 성경 말씀을 대조 해 보면서 내 죄가 이것이었구나 라고 생각해야 될 문제를 가지고 기껏 종교적으로 자기의 행위를 가지고 죄 짓지 않았다고 나서니까 하나님의 의가 의로 보이겠습니까?
완전히 교만과 자만과 자기의 오만으로 똘똘 뭉쳐 자기 죄를 감추는 방향으로 나서는 겁니다. 의인으로서 말입니다. 의인되고 안되고의 기준은 하나님의 용서받은 자와 용서받지 못한 자의 기준이 되는 것이지, 자기의 선행의 근거에 의해서 의인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써먹었던 것입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거부 할 수밖에 없고, 배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기 속에 여전히 불타고 있고 들끓고 있는 이 죄 라는 것에 대해서 너무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간통과 살인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시편51편에 하는 말이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죄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심령을 원하시니까 상한심령을 바칩니다. 주의 꺾으신 피로 말미암아 이 상한 심령을 은혜로 덮어서 주여 구원하소서. 이것이 주께서 원하는 참된 제사이옵니다."라고 말입니다.
우리 교인 중에 간통죄를 짓고도 교회 나올 사람 있습니까? 부끄러워서 교회 안 나올 겁니다. 그것이 바로 뭔가 나의 행위로 내세울 만 할 때 교회 나온다는 자체가 뭐냐 하면 그 마음속에 예수님의 용서가 들어 있어야 할 자리에 아직도 바리새인 같은 자기 잘남과 자기 훌륭함과 선할 수 있는 가능성. 그것 들고 주님 앞에 자랑삼아 나왔던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배반이라는 말을 사용 할 때 열 지파 기분 나쁠 겁니다. 우리가 뭐가 잘못 되었기에 유다지파, 다윗지파만 쳐다보며 살아야 되느냐 하고 말입니다. 유다지파는 하나님이 다윗과 약속하기를 모든 죄는 다윗으로 통해서 용서가 전달된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는 기준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선한 양심이 나의 의인됨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예요. 내가 의인되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가 따로 존재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앞장 세워야 되겠습니까? 누구를 자랑해야 됩니까? 결국 우리가 예수님을 거부하고 앞장세우지 않으면 예수를 배반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성경에는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기준이 나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22에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그 기준으로써 출발 해봅시다. 그러면 이 세상에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크게 목회 하는 사람 얼마나 많습니까? 서로 사랑으로 교제하는 교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 붙들고 구원되는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은혜 받았다고 하고 사랑으로 교제한다 해도 그것 붙들고 구원되는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교회,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구원의 기준이 되지 말고,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이미 끝나버린 사항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직 주, 예수님 만이냐 하면 주님 사랑보다는 우리가 속해 있는 그것을 사랑하는 그 순간, 우리는 주님을 배반한 순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뭘 건져야 되지 않습니까? 주님 제자들은 뭘 건졌습니까? 사도바울이 예수 믿고 뭘 얻었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고 재벌이 되었습니까?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야고보는 옥에 갇혀 죽었습니다. 그리고 사도요한은 밧모섬에 귀향 가서 죽었습니다. 그들이 과연 예수님을 믿고 무엇을 얻었습니까? 아름다운 교회를 얻었습니까? 그들이 얻은 것은 예수님 자신! 그걸 얻었습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지, 교회가 길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영생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면, 교회란 주님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자가 교회요 형제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문둥병 환자요 중풍병자입니다. 교회고 형제라면 그리스도만 증거하고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바리새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우리 스스로가 주님을 배반하는 그런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다고 욕할게 아니라, 유다의 입장이 되어서 볼 때 충분히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내용인 줄 압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무엇을 얻었으며 예수 믿고 난 뒤에 오히려 낭패 당한 가롯유다. 그러나 주님이 사랑했기에 11제자는 영생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이 온 성도에게 있기를 원하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 하나님의 전쟁 (역대하 11:1-4)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다와 베냐민 족속을 모으니 택한 용사가 십 팔만이라 이스라엘과 싸워 나라를 회복하여 르호보암에게 돌리려 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솔로몬의 아들 유다왕 르호보암과 유다와 베냐민의 이스라엘 무리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너희 형제와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 이 일이 내게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하셨다 하라 하신지라 저희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돌아가고 여로보암을 치러 가지 아니하였더라 (역대하 11:1-4)
지난 시간에 12지파 가운데 대다수의 지파가 유다 지파를 배신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 홀로 남았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자! 이럴 때 여로보암 유다 왕은 다윗의 직통 계통이니까 누가 뭐래도 자신은 하나님의 전통적인 언약의 왕인데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를 떠나니까 괘씸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동적으로 내 편이 되어 주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베냐민 지파와 자기지파의 용사를 모아 18만 명을 데리고 다른 지파를 공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스마야 라는 선지자를 통해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전했습니다. 르호보암 왕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분통하고 괘씸해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르호보암 왕이 이스라엘의 중심이라고 하셨는데, 왜 자기를 배신한 자들을 쳐부수어야 마땅하지 않느냐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신앙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 뜻이라고 단정 짓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은 자기의 분통, 어떤 복수심, 자존심 건드리는 것 총집합 해서 마치 겉으로는 하나님의 뜻 인양, 실수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인간들의 속성을 오늘 르호보암 왕이 대표적으로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인 것처럼 하나님의 일에 충실한 것처럼 행동하는 그 속에 개별적인 자존심이라든지 명예회복, 또는 수치심을 보상받고자 하는 보상심리,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오기 같은 것, 자기 존재의 이유를 찾아야겠다는 존재의 가치성을 찾고자 하는 그러한 자기 위주의 이기주의, 이런 것들을 복합적으로 섞여 가지고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 인양 선동하고 앞장서 나서는 이런 인간들의 본성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찾아봐야 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일인 것처럼 외부에 나타날 수 있는 경우가 우리 자신들 속에서 있어왔고, 현재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잠시 믿음이 없다고 했을 때, 우리는 교회에서 어떤 행동을 하겠습니까? 사회에 나가서 어떤 행동을 하겠습니까? 그런 경우를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것은, 믿음을 구태여 집어넣어도 행동에 별 차이가 안 난다는 것을 우리가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을 들먹이지 않아도 정의감과 양심만 고우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을 자기가 교회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믿음의 일인 것처럼 남에게 포장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 다니고 절에도 안 다니는 사람이 남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릴 수도 있고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정의감을 갖고 앞장서서 대모를 할 수도 있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얼마든지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을 뺀다 할지라도 기본 양심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을 구태여 믿음이라고 집어넣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이 믿음을 안 집어넣고 되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믿음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르호보암이 단순히 배신감과 자기의 전통적인 왕에 대해서 무시한다고 거기에 대한 분노 때문에 하나님 일을 빙자해서 18만 대군을 모아서 형제를 치고자 합니다. 그때에 아서라 그것은 하나님 일이 아니야 하고 말리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우리는 헤아릴 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을 좀더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서 사사기 20장의 내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사기 20장에 보면 베냐민 지파가 아주 더럽고 추악한 행동을 했습니다. 어떻게 했냐 하면 자기 동네에 온 손님을 가지고 그것도 레위지파 사람인데 그 아내를 강간해서 죽이는 아주 몹쓸 짓을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첩의 죽은 시체를 12토막을 내어서 한토막씩 소포로 보냈습니다. 베냐민 지파 땅에서 이러한 흉악 무도한 범죄가 일어났으니까 우리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이 경건 된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지파 형제들이여 이걸 가만히 보고 있어서는 안되잖아 다같이 나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징벌해야 마땅하지 않느냐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증거로 12토막 시체를 보낸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서 응답 받은 유다 지파가 베냐민 지파를 치러갔다가 오히려 유다지파 2만2천명이 죽었습니다. 처음기도 할 때 '어느 지파가 올라가서 치리이까?' 라고, 아예 기도의 응답으로 질문을 그렇게 했습니다. 유다 지파가 올라가라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유다지파가 2만2천명이나 죽고 돌아 왔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온 지파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울고불고 난리 났습니다. 하나님 과연 우리가 베냐민 지파를 쳐야 됩니까? 쳐라! 그래서 덤벼들었습니다. 그 때에 죽은 사람이 1만 8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연합군이 또 당했습니다. 2만8천7백명 밖에 안 되는 소수의 극악 무도한 족속에게 선하고 정의로운 일을 하고 있는 연합군이 4만명이나 나가 떨어졌습니다. 두 번째 기도합니다 과연 하나님 우리가 올라가서 치란 말입니까, 말이란 말입니까?
그래서 세 번째는 질문이 바뀝니다. 처음에는 어느 지파가 갈까요? 유다 지파를 보내라. 우리가 진짜 칠까요? 그래 쳐라. 세 번째는 진짜 우리가 쳐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여러분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이것은 당연히 내가 할 일이다' 라고 응답이 오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생각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아는 양, 자신의 미래도 모르며 오늘 밤 내 영혼 거두어 갈지도 모르면서 어리석은 인간이 마치 미래 일을 훤하게 꿰뚫는 것처럼 자기가 계획 잡아 놓고 하나님 이것대로 해달라고 건방을 떨면서 기도하는 경우,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고 나는 나쁜 짓을 안 했으니 선한 인간이니까 내가 저 사람 보다 더 잘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앞집에 사는 보살 집보다 교회 나가는 우리 집사 가정을 하나님께서 행복하게 해 주시고 저 집은 온 식구가 저주 받아 망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지레짐작 생각해서 기도하는 것, 여기에 무엇을 빠뜨렸겠습니까? 바로 자신도 앞집에 살고있는 보살과 똑 같다는 죄인임을 놓치고 있는 겁니다. 한 순간이라도 하루라도 하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사랑이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우리가 살 수 없다는 것을 그 사람은 건방 떨면서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성경을 다시 한번 봐야 됩니다. 신앙이란 것은 상식이 아닙니다. 신앙은 뭐냐? 천당 아니면 지옥입니다. 인생에는 이 둘 밖에 없습니다. 중립은 없습니다.
네가 천당 갈 사람이냐 지옥 갈 사람이냐 이것만 생각하면 되지 한평생 남한테 얼마나 이름 날리고 얼마나 유명인사 되고 얼마나 많은 재산을 끌어 모으고 얼마나 스타가 되어 남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지에는 관심 둘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밤 죽더라도 천당 갈까 아니면 지옥에 떨어질까 그것만 생각해야 됩니다.
이 연합군 4만 명이 날라 가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기가 치려는 베냐민 지파나 연합군이나 하나님 앞에 똑 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기도 제목을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 저 인간들이나 우리들이나 똑같은 죄인인데 올라가서 치리이까 말리이까? 쳐도 우리의 복수심이나 정의감이 아니라 주의 종으로 치고 안쳐도 주님의 뜻대로 안치겠나이다. 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평소에 이러한 텅텅 빈 마음을 유지하지 못합니까? 우리의 몸이 창고라면 아무 것도 적재되어 있는 것이 없는 텅텅 빈 마음으로, 하나님! 오늘은 무엇을 하리이까? 혹시 산다면 내일은 또 무엇을 하리이까?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지 말고, 그 나라 의를 구하라. 모든 염려는 내게 맡겨라. 그날의 염려는 그날에 족하니라. 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귀에 담기도록 들었지만, 자꾸만 우리는 수명연장과 생명연장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라는 여기에 우리는 신명을 걸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교만했던 베냐민 지파의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2만8천7백명 가운데 2만1천명이 죽었습니다 .
거의 지파 하나가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역시 우리의 정의가 저쪽의 불의를 이겼다 그렇게 이야기하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 모두를 쳤다 이렇게 이야기 할겁니다. 그게 나중에 사사기 20장 넘어가면 바로 저들이 그렇게 쳐부수고자 했던 베냐민 지파를 위해서 이제는 자기들이 걱정을 하게 됩니다. 왜? 모든 남자가 다 죽고 지파 하나가 사라져 버렸으니까 12지파가 유지가 안되잖아요. 지파를 살리기 위해서 보쌈이라도 해야 될 판이잖아요. 이게 사사기 마지막 대목입니다. 왕이 없으므로 인간들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그래놓고 자기 마음대로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29에 "우리가 어찌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리이까" 할 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일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하는 것보다도 날마다 주께서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고 일을 이끌어 내시고 나를 인도하시고 동행하시고 일을 시키시는 그분이 하나님인 것을 믿는 그 상태가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영광 돌리는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자신의 주제 파악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주제 파악이 아니라 이 하루를 통해서 내 주제 파악하는 것. 그것이 지금도 나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고 역사입니다. 너는 빈깡통이야! 너는 그것밖에 안돼! 라는 마음을 유지 시켜 주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입니다.
만약,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없고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길에 가면서도 저 사람보다는 내가 더 낫지! 하면서 자기와 비교하고 그러면서도 교회에 오면 하나님을 논하고 이런 이중 생활을 하게 됩니다. 다시 한번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정말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지금 깨달으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시는 성도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르호보암 왕이 경솔하게 하나님의 일을 결정했고 그것이 정의로운 일 인양, 신앙중의 신앙인양, 착각해서 함부로 일을 결행하려 했다가 스마야 선지자한테 책망을 받고 일을 중지 시켰습니다. 아니 중지 당했습니다. 하나님 저희들의 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친히 막아 주옵소서. 우리가 더욱더 교만해 지고 자만 할까봐 두려워합니다. 우리의 자만과 교만을 없애 주시고 날이 갈수록 주님 주신 은혜와 그 깊이와 높이를 더 깊이 알아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 강성한 르호보암 (역대하 11:13-17)
온 이스라엘의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 모든 지방에서부터 르호보암에게 돌아오되 레위 사람이 그 향리와 산업을 떠나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렀으니 이는 여로보암과 그 아들들이 저희를 폐하여 여호와께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고 여로보암이 여러 산당과 수염소 우상과 자기가 만든 송아지 우상을 위하여 스스로 제사장들을 세움이라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 마음을 오로지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이 레위 사람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고자 한지라 그러므로 삼년 동안 유다 나라를 도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강성하게 하였으니 이는 무리가 삼년을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였음이더라 (역대하 11:13-17)
오늘 본문에 보면 "유대나라가 강성하게 되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상당히 매력적으로 들려오게 됩니다. 그리고 강성하게 된 비법을 알고 싶어합니다. 여호수아 1장 6절에서 7절에 보면,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희 하나님과 함께 하실 때는 형통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증거는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묵상하여 그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는 것으로 증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제시한 책이 율법 책이죠. 율법 책의 내용을 다 지켜 행하면 네가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되고 너는 형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아주 쉽게 생각합니다. "이 까짓 것을 못 지켜?" 그런데 사람이 아무도 없이 혼자 조용히 있을 때는 율법 책을 펴며 기뻐할 수 있겠는데, 적들이 정면에서 무기와 화력과 발달된 기계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공격 해오고 있는데 어떻게 율법 책만 붙들고 하나님 믿는다고 일이 해결될 수 있겠습니까? 우선 나가서 잘못되었다고 고개를 숙이고 항복하고 싶은 것이 인간들의 마음이 아닐까요? 그래서 오히려 율법 책을 시시하게 여기면서 적들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겁을 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율법 책을 지키기 이전에 어떤 재물을 바치고 돈으로 해결하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 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들이닥치는 적들이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냐? 아니면 율법 책을 내 앞에 들이대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나의 관심이냐? 그걸 묻고 있습니다.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하라는 것은 앞에 눈에 보이는 환경과 난처한 처지보다도 오히려 하나님 말씀 듣기에 더 우선적인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아무 문제없는 조용한 가운데서 말씀이나 지켜볼까 하는 담대함이 아니라,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을 버리고 사람에게 굴복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상황에 있을 때, 네가 진짜 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해서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겠느냐? 그것을 다그치시는 겁니다.
민수기 14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말을 듣고 그를 쳐죽이려고 덤벼들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바라보는 모세의 말이 안 먹혀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 갈렙은 신기하고 놀랍게도 모세가 한 말을 수긍을 합니다. 우리는 메뚜기 같고 그들은 장대 같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은 겁니다.
여러분, 누가 정상이며 비정상입니까? 우리의 상식 선에서는 모세와 갈렙이 비정상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하나님은 다 아시고 그 난처하고 황당한 상황 속에 우리를 던져 내버려두십니다. 그리고는 네가 하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 지목하고 계십니다. 그러시면서 담대하고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신 만만하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말씀 안에 무엇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본문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13-14절에 레위지파가 나옵니다. 그리고 제사장 선출 문제가 나옵니다. 여기서 레위지파가 나오는데 레위지파는 어느 지파 할 것 없이 온 이스라엘 땅인 남쪽과 북쪽 나라, 갈라진 나라 할 것 없이 다 거처했던 지파입니다. 레위지파는 원래 따로 모여 사는 지파가 아니라 각 지파마다 제사장들이 다 상주해 있어야합니다. 하나의 파견근무를 해야하기 때문에 본부는 예루살렘이지만 지방마다 파견하기 때문에 흩어진 지파지요. 그런데 그 레위지파가 갑자기 북쪽을 버리고 남쪽으로 우르르 몰려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북쪽을 점거하고 있는 여로보암 이라는 북쪽 왕이 레위지파를 모두 쫓아 내 버렸습니다. 14절에 보면 북쪽 나라는 비록 종교적인 폼은 내지만 여로보암의 정권 유지차원으로 만든 종교를 유지하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송아지 우상을 여로보암 스스로가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깐 조직 사회지요. 조직사회에서는 교주 말을 반대할 때, 교주 말고 여호와를 쳐다볼 때는 그 조직 사회에서는 추방되게 되어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렇죠.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냉철하게 인간을 지적했는데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른 한쪽을 사랑하면 다른 한 쪽은 미워하게 되어있다고 했습니다. 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나 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 제자에 합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 보면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거든 자기를 미워하라. 자기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게 뭐냐하면 어른은 하나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를 3년 동안 강성케 했다고 했지요. 솔로몬의 아들 유다 나라를 강성케 했는데, 그것은 3년 동안 르호보암이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했다고 했습니다.
자 그러면, 다윗과 솔로몬의 길이 뭐냐 하면은 이게 제사장 때문에 나라가 강성했는데 제사장의 어떤 기능 때문에 나라가 강해진 겁니까? 여기 제사장의 특별한 기능이 뭐냐하면은 죄를 용서하는 기능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어느 나라가 강하냐 약하냐 하는 것은 어느 쪽이 죄 용서함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의 차이입니다. 실제로 살아 계신 우리 주님으로부터 용서가 나오잖아요. 우리가 용서받을 준비가 되어서 용서받은 게 아니고 준비 되어있음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용서 해주심으로 우리는 용서된 자가 되는 겁니다.
사람이 제대로 용서를 받게되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게 됩니다. 세상에 어떠한 어려움이 온다해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용서받은 자의 담대함을 그 누가 당할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강하고 담대하지 못합니까? 세상의 어떤 형편에서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미심쩍어하는 마음상태 때문입니다. 안심이 안 되는 거예요. 주님이 너를 용서했다. 너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 살아있는 성경말씀이 마음속에 다가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너 죄 용서함 받았느니라 하는 말씀이 파도처럼, 홍수처럼 밀려와 지나가 버린단 말입니다. 용서에 휩싸여서 남은 여생을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용서받은 자의 특징은 대체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기에 내가 이렇게 일방적으로 용서함을 얻었지? 하고 주님 하신 일의 장치를 살펴보게 됩니다. 그 안에 제사장이 존재했습니다. 그 제사장이 나의 죄를 대신 처리했기에 내가 이렇게 용서함을 받았구나. 그렇다면 앞으로 그 제사장만을 우리의 자랑거리로 삼겠지요. 우리의 제사장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 바로 제사장이 이처럼 중요함을 이스라엘 백성들도 잊어버렸습니다. 출애굽기 28장에 1절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주었던 율법, 곧 율법의 중심인 제사장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16장에 보면 드디어 반란이 일어납니다. 같은 레위지파에서 반란이 일어나는데, 반란이 일어난 이유는 어떻게 해서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인데 너희들만 제사장을 하느냐 그것 때문에 시비를 걸고 온 겁니다. 그러니깐 민수기 16장 7절에서 여호와께서 향로를 담아 놓으라고 하십니다. 이쪽 사람들 보기에는 하나님의 선택을 아무런 의미 없이 보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만 선택해서 예수님만을 통해서 우리에게 능력이 주어지게 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용서받았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선택된 구원의 장치에 대해서 용서받았다면 우리도 담대할 수밖에 없고 확신에 흔들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한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택 그 자체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향로를 250개 가져 왔습니다. 거기에서 불이 나왔습니다. 그들이 멸망을 당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선택되지 않는 사람이 선택의 흉내를 내는 겁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선택된 자는 따로 있는데, "너만 잘났어!" 하며 하나님의 고귀한 선택의 자리에 감히 도전하고 끼어 들다가 순식간에 향로에서 불이 나와 떨어져 죽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 모든 말을 마치는 순간에 그들의 밑에 땅이 갈라지면서 그들의 모든 가족과 모든 사람을 산채로 함몰시켜 버렸습니다. 남은 자는 모세와 아론만 남았습니다. 무서운 하나님입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의 선택 해 주심에 흔들림이 생길 때, 그 때는 엄청난 무서운 일이 벌어집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람들은 늘 레위지파가 곁에 있으니까 시시하게 본 겁니다. 북쪽나라 와 남쪽 나라의 제사 드리는 모습은 남들 보기에는 비슷합니다. 하나님 믿고 다같이 섬기는 건 똑 같습니다. 하지만 마음 적으로 정말 하나님의 약속하신 구원의 그 장치에 의해서 흔들림이 없이 담대한 사람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만 해당되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은 반대로 제사장과 더불어서 제사장의 존재의 가치에 대해서 높일 때, 하나님께서는 남쪽나라를 북쪽나라보다 3년 동안이나 강성케 했습니다. 강성케 해줬다는 것은 지금 하나님과 교제가 잘 되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으로는 하나님의 용서받음으로 오는 그 기쁨 때문에 모든 것에 행복을 느끼고, 하나님께 고마워하면서 두려움 없이 잘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다보면 갑자기 난처한 일 당하고 갑자기 적이 나타나고, 감당 못할 일이 일어나고, 나의 꿈꾸던 것이 모두 깨어질 때, 그 때부터는 하나님의 죄 용서고, 레위지파고, 제사장이고, 다 없어지고 그 다음부터는 인간에게 고개 숙이면서 인간적인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용서의 자리에서 이탈되며 저주의 자리이고 심판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용서, 아니면 심판. 이 둘 중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한 자리 밖에 없습니다. 밝은 빛과 어두움 둘 중에 하나에 머무를 수밖에 없지, 중간에 걸쳐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교회가 비록 초라하고 예배드리는 것이 비록 아무 것도 아니라 할지라도 마음 적으로 하늘나라에 그윽한 성전, 지금도 대제사장이 되셔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그 용서의 엄숙한 장치에 대해서 엄숙하게 반응하면서 마음으로 받아드리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늘 교회 오다 보니까 우리도 교회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주님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세상의 권력과 영광과, 영예의 환상에 빠진 적이 저희들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세리와 창기도 천국 간다는데, 용서받은 사람의 그 담대함과 행복에 대해서 우리가 벗어나지 않도록, 늘 주님의 용서하심에 다 이루었다는 기쁨을 맘껏 누리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4. 교만과 겸손 (역대하 12:1-8)
르호보암이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하매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 저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르호보암왕 오년에 애굽 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오니 저에게 병거가 일천 이백승이요 마병이 육만이며 애굽에서 좇아 나온 무리 곧 훕과 숩과 구스 사람이 불가승수라 시삭이 유다의 견고한 성읍을 취하고 예루살렘에 이르니때에 유다 방백들이 시삭을 인하여 예루살렘에 모였는지라 선지자 스마야가 르호보암과 방백들에게 나아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붙였노라 하셨다 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방백들과 왕이 스스로 겸비하여 가로되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하매 여호와께서 저희의 스스로 겸비함을 보신지라 여호와의 말씀이 스마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저희가 스스로 겸비하였으니 내가 멸하지 아니하고 대강 구원하여 나의 노를 시삭의 손으로 예루살렘에 쏟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저희가 시삭의 종이 되어 나를 섬기는 것과 열국을 섬기는 것이 어떠한지 알게 되리라 하셨더라 (역대하 12:1-8)
『하나님께서 옛날에 일어났던 일이지만 지금도 똑같은 법칙과 원리로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는 말씀을 대하게 됩니다. 이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 가를 알 수 있도록 저희들의 눈이 열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오늘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은 사람만 있고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그러한 사상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도 이러한 사상에 동감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현실이 그러니깐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하나님 없이 인간들만 우글거리는 그런 세상으로 생각하고 교인들도 제 멋대로 살아 갈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걸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오늘 8절에 보면 "시삭의 종이 되어"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 시삭은 그 당시 권력자입니다. 어떤 사람보다 힘으로써 더 남을 지배하는 사람입니다. 곧, 사람입니다. 쉽게 말해,서 네가 사람의 종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 어느 것이 힘이 드는지 내가 본때를 보이겠다 라는 것이 오늘 12장 8절의 결말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으레 사람의 종으로만 한평생 살 것을 맹세하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만약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들이 사람의 종 되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사람의 종이 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서 이 땅에 인생을 출발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의 종이 되겠습니까?
세상이 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인정하지만 그러나 세상의 지옥 갈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사람의 종이 된다고 해서 덩달아 하나님 믿는다 하는 우리들이 하나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종이 되기는커녕 자진해서 사람 종이 될 필요는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소위 교회라는 이름으로 교인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사람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종이 뭔지 또는 하나님의 종이 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한번이라도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종이다"라는 그런 느낌과 감정이 있었더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그 고마움과 안도감과 당당함을 쉽게 버리지 않을 거예요.
하나님의 종 되는 것이 사람의 종 되는 것보다 얼마나 좋고 영광스러우며 우리를 강하게 하는지 그 좋은 것만 생각하더라도 우리는 쉽게 사람의 종으로 전락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가 그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자녀로써 또는 종으로써 자신의 임무와 사명을 기쁘고 고맙게 감당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세상에 나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사람들에게 기죽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와 많은 사도들이 갔던 길이 그들의 생활환경이 좋았던 건 아닙니다만, 그들은 거기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을 즐겁고 고맙게 여기면서 받아 들였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숨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위의 은혜다"라고 자랑스럽게 말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니 이것은 하나님의 복이다" 이렇게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명은 맡아놓고 무엇 때문인지 그만 엉뚱하게 사람의 종, 옛날 빠져 나왔던 애굽나라의 시삭이라는 권력가의 종이 되었는지, 어떻게 그런 실수와 그런 잘못을 저지르는지 그 이유를 본문을 통해서 알아봐야 되겠습니다.
그 이유는 1절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거든요. "르호보암이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하매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아! 이상하지요 나라가 강하고 견고한 것이 누구 덕분입니까? 여호와 덕분입니다. 세력이 강한 것이 모두 하나님 덕이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강하게 만들어주고 힘있게 만들어주면 우리의 상식으로는 어떻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을 더 우대할 것 같지요? 더 섬겨야 되는 것이 정상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율법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린다는 것이 여러분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을 버린다는 것은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지도 않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거들떠보지 않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버렸다 고 하늘나라에서는 판정을 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그 마음에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보내신 그 편지를 뜯어 볼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계시를 버린 것은 곧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버린 거예요. 그런데 왜 이 르호보암이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했는데 하나님을 버립니까?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뭐냐하면 이 나라는 내 것이라는 거예요 내 것 말입니다.
우리가 소위 평소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언제 하나님과 멀어지던가요?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백발백중 맞는 이야기는 이겁니다. 뭐 하나 생기면 그것이 내 것 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목사가 목사 되고 난 뒤에 이 교회는 내 것이다. 목사직은 내가 딴 것이다 이럴 때, 그 목사는 하나님을 포기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이게 내 것이라는 말이죠. 여러분들의 가정에서 또는 사업장에서 일하시면서 저건 꼭 내 꺼야.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저걸 빼앗기게 되면 하나님을 싫어 할거야. 이런 생각이 감히 들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이고 하나님을 버린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이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면 누구의 것입니까? 우리의 모든 것은 주의 것이고 고린도전서 6장에 보니까, 산 우리 몸 자체도 값 주고 팔려간, 주님 앞에 팔려서 주님의 종이 된 신세인데, 어떻게 내가 내 것이 되는 겁니까? 내 것도 내 것이 아니고 주님 것인데 어떻게 내 것이 따로 장만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보면 '아! 내 것이 하나도 없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에 우리는 몽땅 하나님 것이라는 사실을 사전에 우리가 미리 본 적이 있고 들은 적이 있기에, 우리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의도적으로 성경을 안 보잖아요. 에이 봐 봤자 뭐, 또 그 소리야? "너는 내 거야" 라고 그럴 꺼 뭐. 기가 푹 죽어 가지고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라는 생각이 든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늘 우리가 듣던 잔소리가 되니까 우리가 안 들으려고 하잖아요. 안 듣고 다른 현실을 계획하잖아요. 그저 '이 가정과 이 모든 것은 내 꺼' 라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목사가 되고 난 뒤에 가장 큰 시험이 뭐냐하면, '목사직이 내 꺼 라는 것, 나는 목사' 라는 그 사실, 이것이 하나님과 멀어지기에 가장 큰 원인이 됩니다. 목사가 돈이 되거든요. 돈이 되는 직업이거든요. 교회가 내 꺼다. 이것도 마찬가지고요.
또 성경에 보면 "살든지 죽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너는 너를 구원해 낸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 했습니다. 이게 신약 로마서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구약에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에도 나오는 이야기예요. "이스라엘아 너는 내 자녀다, 이스라엘아 너는 내 땅에서 나의 품꾼이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 말입니다. 주인은 나다. 나에게 십일조를 바쳐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십일조의 관계는 그런 거예요. 구약에서는 내 주인은 따로 있다고 해서 바치는 것이 십일조예요.
신약에는 몽땅 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오늘날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이유는 교회 바깥에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이 없다는 거예요. 또 있은 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식의 풍조가 만연해 있는 것입니다. 마치 늙은 할아버지 모양 하나님을 연상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존재한 들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하는 식입니다.
그래서 젊은 우리가 모든 일을 처리해야지, 늙은 할아버지 같은 사람한테 기대어서 언제 일이 성사가 될 것이냐는 말이죠. 우리는 교회에 있는 시간보다 교회 밖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까 그러한 사상과 그러한 현실이 우리의 온 몸으로 스며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고개 끄덕이면서 그런가? 그럴 수 있겠네 하면서, 탁류에 휩쓸리듯이 같이 휩쓸려 그들의 말에 동의 한 적이 많지 않습니까 자주 반복되지 않습니까? 이제 뭔가 나라가 조금 강해지니깐 "야! 나 봐라 세지. 야! 이거 얼마나 기분 좋으냐, 나는 내 나라만 잘되면 하나님만 생각하면 나는 시큰둥해져. 모든 일이 만사형통 한데 하나님 뭐 하러 찾으려고."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때의 왕이나. 오늘날 우리나 어떻게 이렇게 똑 같은지, 자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 쪽에서 이일을 해결을 해야 될텐데, 어떻게 해결하시는지 한번 봅시다.
2절에 보면, 저희가 여호와께 범죄 하였으므로 르호보암 왕 오년에 애굽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오니, 3절에, 저희에게 병거가 일천이백 승이요 마병이 육만이며 애굽에서 쫓아나온 무리 곧 훕과 숩과 구스 사람이 불가승수라 셀 수도 없을 만큼 많다. 거기다가 5절 끝에 보면, 선지자 스마야가 르호보암과 방백들에게 나아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붙였노라.
자, 이 시삭이라는 사람은 제가 좀 전에 이야기했죠. 애굽의 왕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옛날 애굽에서 구원받아 나왔던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도로 이 이스라엘을 애굽사람 손에 이렇게 다시 묶이도록 조치를 하신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니깐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자녀니까 우리의 마음가짐이나 행동 하나 하나가 모두 하나님 앞에 합당하겠지 착각을 하는데 하나님의 원수가 여러분 별 겁니까? 하나님말씀 버리면 원수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스라엘백성이 지금 착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저 원수하고 우리는 다르지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을 버려놓고, 말씀을 버려놓고 하는 말이 "맨 날 우리는 저 애굽사람하고 다르지, 우리는 자녀고 저쪽은 마귀의 종인데" 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정작 하나님의 자녀 됨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라고 천 번을 외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어디서부터 구원받았는가를 마음속에 늘 품고 다니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 덕으로 자녀 되었으며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되기 전에는 어떠한 존재였던가를 늘 마음속에 깨닫고 있는 사람.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예요.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저희는 "하나님 편입니다"하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는 엉뚱하게 시삭을 들어 하나님의 종으로 사용하여 도리어 "시삭이 지금은 하나님 편에서 일하는 일꾼이다"고 하고 우리를 되레 공격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때 하나님의 진짜 자녀 된 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본문에 보면, 겸손하게 "하나님 우리는 진짜 죄가 많고 진짜 하나님의 모든 행동하심은 의롭습니다.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만 의롭고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에 불과하군요"라고 깨닫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다시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다시 자녀 만들어 주는 게 아니고.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써 그래 그것이 내가 원했던 마음가짐이었잖아. 내가 이스라엘에게 찾고자 했던 그 마음가짐이 바로 "나는 죄인이며 의로운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주의 의로 말미암아 저를 구원하십니다"라는 이런 겸비한 마음을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겸비한 마음을 조성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환경들을 동원시켜 주십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붙였노라 이렇게 이야기하니깐 7절에서 저희가 스스로 겸비하였으니 내가 멸하지 아니하고 대강 구원하였노라. 그러니깐 여러분 한번 구원받았다고 하나님 필요 없는 게 아닙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셔야되고, 내일도 하나님께서는 어제처럼 구원해 주셔야 되는 겁니다. "아이고 하나님! 저 이제 잘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 필요 없습니다"가 아닙니다 여러분, "아이고 하나님 재산이 한 150억 되어서 이제 교회 안 나가도 통장에 있는 이 돈만으로도 충분히 삽니다." 아닙니다. 여러분, 그것도 여러분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입니다. 항상 겸비한 마음을 유지해야 됩니다. 돈 있는 사람은 있는 돈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시련을 당하고, 돈 없는 사람은 없는 돈 때문에 또 남한테 시련을 당하는 거예요.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에게 어떤 변화가 온다 할지라도 주님의 십자가는 벌써 일어났다는 것. 이것 밖에 없습니다. 나에게 어떤 변화. 내가 돈 천억을 얻는 변화라든지, 아니면 내가 굶어 죽는 변화가 온다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 자녀 되는 것은 내가 돈 가지고 있고 없고 상관없이 주님의 터져 버린 십자가 사건! 그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러한 겸비한 마음을 유지해 달라는 말입니다. "목사님 그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라고 하겠지요.
그렇습니다. 여러분도 어렵고 저도 어려운 줄 알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가 교만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를 확 꺾어 놓으시는 예상치도 못한 고민거리를 가져다 주시네요. 예상치도 못한 환경으로 말입니다. 우리가 느긋하게 하나님도 안 믿고 하나님 필요 없이 "내 힘으로 살 거야"라고 휘파람 부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또 다른 환경을 주셔서 "아! 내 것 이라는 것은 없구나. 잘되든, 못되든 모두가 하나님 것이구나"라고 다시 한번 우리의 마음을 낮추게 하시고 더 낮추게 하시는 이것은 바로 하나님 자녀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입니다.
끝으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러면 매일 기가 푹 죽어 살아야 되느냐, 그걸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이토록 하나님의 특별 관리조치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께서 자녀라고 인정해 주시고 특별히 마음 낮추게 해 주신다는 이 자체가 조금전 기도할 때 내용처럼 시드니에서 금메달 10개를 따는 것과도 비교가 안됩니다. 금메달 10개를 딴다고 해서 하나님 아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매를 맞든 안 맞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런 식으로라도 남이 모르는 하나님을 알았다는 이 자체를 우리가 남에게 자랑스럽게 증거하면서, 그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몽땅 씻었기 때문에 나는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주님만 자랑한다. 이렇게 된 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되었다는 것, 이것을 우리는 고맙게 여기고 진짜 남에게 자랑할 만한 거리가 안되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다는 것을 이젠 우리가 알았습니다. 이 사명보다도 우리는 내 욕심 챙기기에 분주하다 보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명 감당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시련과 어려운 환경을 주신 줄로 압니다. 형편이 어떻게 되었든 하나님을 알았다는 그 사실 자체가 축복이고 남이 모르는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우리는 남에게 알릴 수 있는 사명자가 되었다는 것을 감사히 여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5. 아비야의 설교 (역대하 13:1-12)
여로보암 왕 제십팔년에 아비야가 유다 왕이 되고 예루살렘에서 삼 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미가야라 기브아 사람 우리엘의 딸이더라 아비야가 여로보암으로 더불어 싸울새 아비야는 택한 바 싸움에 용맹한 군사 사십만으로 싸움을 예비하였고 여로보암은 택한바 큰 용사 팔십만으로 대진한지라 아비야가 에브라임 산중 스마라임 산 위에 서서 가로되 여로보암과 이스라엘 무리들아 다 들으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이 아니냐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신복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일어나 그 주를 배반하고 난봉과 비류가 모여 좇으므로 스스로 강하게 하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대적하나 그 때에 르호보암이 어리고 마음이 연약하여 능히 막지 못하였었느니라 이제 너희가 또 다윗 자손의 손으로 다스리는 여호와의 나라를 대적하려 하는 도다 너희는 큰 무리요 또 여로보암이 너희를 위하여 신으로 만든 금송아지가 너희와 함께 있도다 너희가 아론 자손된 여호와의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쫓아내고 이방 백성의 풍속을 좇아 제사장을 삼지 아니하였느냐 무론 누구든지 수송아지 하나와 숫양 일곱을 끌고 와서 장립을 받고자 하는 자마다 허무한 신의 제사장이 될 수 있도다 우리에게는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이 되시니 그를 우리가 배반치 아니하였고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있으니 아론의 자손이요 또 레위 사람이 수종을 들어 조석으로 여호와 앞에 번제를 드리며 분향하며 또 깨끗한 상에 진설병을 놓고 또 금등대가 있어 그 등에 저녁마다 불을 켜나니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나 너희는 그를 배반하였느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그 제사장들도 우리와 함께 하여 경고의 나팔을 불어 너희를 공격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 너희가 형통치 못하리라 (역대하 13:1-12)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여 각가지 하나님 자신의 속마음을 나타냄을 감사합니다. 이 시간도 옛날 우리 신앙의 선배들을 통해서 어떤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는지 우리가 소상히 아는 시간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오늘 성경에는 남쪽과 북쪽이 싸움을 벌립니다. 그런데 남쪽에 있는 사람들이 먼저 전쟁을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그들이 공격해 왔기 때문입니다. 저 북쪽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어도 우리는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고, 남쪽의 이 아비야라는 왕은 하나님의 언약이 없으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않는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설교는 남쪽 왕인 아비야가 북쪽 사람들을 향하여 전쟁하기 전에 먼저 설교를 하는 그러한 장면입니다. 그 설교내용이 상당히 중요한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전쟁이란 하나님이 벌리시는 전쟁이 어떤 내용을 가지고 무엇 때문에 전쟁을 하시는가를 우리가 알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개인적인 감정과 사적인 어떤 원한 관계 때문에 싸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위한 전쟁, 언약을 위한 전쟁이라 하는 것은 어떻게 진행되며 우리 자신이 먼저 이 전쟁의 어느 편에 속해 있는지를 이 본문을 통해서 자신을 한번 살펴봐야 되는 것입니다. 이 남쪽 왕 아비야가 내세우는 그 언약이라는 것은 소금 언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4절과 5절에 보면,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지었다고 나옵니다. 이 소금 언약이란 것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냐 하면 소금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소금 언약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소금은 많을 거예요. 그러나 소금언약이 없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금언약을 주셨는데 그 소금언약이 있는 쪽이 소금언약이 없는 쪽을 향하여 전쟁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내려주신 소금언약이 있는 쪽이 하나님이 내려주신 소금언약이 없는 쪽을 치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면 소금언약이라는 것은, 레위기 2장13절에 보면, 소금을 치게 되어있는데 소금이라는 것은 영원한 것이거든요. 변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너희는 사람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북쪽 너희들은 변하는 것을 믿지만 우리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을 믿고 있다는 거죠.
자 그렇다면, 이이야기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여러분 속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소금언약이 들어 있습니까? 영원히 변하지 않는 맹세 같은 것, 하나님의 약속, 소금같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여러분 속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이 여러분 속에 들어있는 그 순간부터 여러분은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사람들과 살아가는 가운데서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여러분들은 대치되는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전쟁상태에 놓여지게 된다는 거죠.
그들이 믿는 것은 세상적이지만, 만약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언약이 있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최종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 그래서 이 소금언약에 의한 전쟁이란 영원한 것과 순간 순간 변하는 인간적인 것과의 싸움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소금은 어디에 치느냐하는 것이 중요한데, 민수기 18장 19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 라고 되어 있고요, 제사장이 먹는 음식에다가 소금을 뿌리는데 그것이 제물도 되고 음식도 되는데 그것이 소금을 뿌렸기 때문에 소금언약 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금을 뿌리면 맛이 오래 간다든지, 음식이 안 상한다든지 그래야 되는데 그게 어떻게 언약이냐? 의문이 가죠.
20절에는,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라고 합니다. 소금을 뿌린 하나님의 제물을 먹으라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 대신 네가 이 땅에서의 땅의 기업은 하나도 없느니라. 이 땅에서 네가 땀흘려서 네 손으로 얻을 수 있는 그런 근거는 전혀 내가 너에게 주지 않느니라. 이것이 바로 소금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먹고삽니까? 이렇게 나올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나 하나님 자체가 너희의 영원한 기업이니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 하나님의 소금 언약을 먹는, 하나님의 제물을 먹는 레위지파에게만은 이 하나님 자체가 영원한 너희들의 유산이고 상속이요 재산이다. 이제 만족하느냐?' 라고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사장들이 드리는 소금을 친 제물은 모두 제사장 음식이 되고 양식이 된다고 할 때에 다른 사람들은 "야! 제사장은 좋겠다. 신나겠다. 남이 바치는 것 먹고 " 이렇게 좋은 것 만 생각하다가, 제사장 레위지파는 이 땅에 자기 소유의 땅 한 평도 없다라고 해버리니깐 그만 "아이구~ 불쌍하다 제사장 가엾다 레위지파 아이고~ 무슨 낙으로 살까 세상에! 자기 재산 하나도 없는데 불안해서 어떻게 견딜까 뭐라도 있어야지 하나님이 주신다고 약속은 했지만 안 주시면 어떡하나 안 주시면 자기만 굶는데 아이구 안 됐다 제사장 "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이 변할게 아니겠습니까?
왜 이 소금 언약이 제사장에게만 해당이 되느냐 하면, 그들은 믿는 백성들을 대표해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이처럼 하나님만이 너의 영원한 재산이다. 너의 재산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재산이다 라고 하는 말씀이 나올 때면 사람들은 슬금슬금 꼬리를 뺍니다. 교회 나오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비겁한 구석이 발동합니다. 성경 가운데서 자기가 이해되는 것만 골라 믿고 이해 안 되는 것은 어물쩍 치워버리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기도하라는 말에는 '야 그건 내가 믿어진다 기도하면 될 거 아니냐' 라고 하는데, 요한복음 1장 12절을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 잘 이해가 됩니까? 이런 말씀은 이해가 잘 안되니까 어물쩍 치워버리는 거예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너는 이미 이 땅에서 죽었고 너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 땅의 일을 생각지 마라고 하면 또 어물쩍 치워버리면서, 전도해라 그러면 아 그건 잘하지 외판 경력이 얼만데 그걸 못할까봐 말입니다.
성경말씀 가운데서 자기가 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뻐하며 반기다가, 이미 너는 죽었고 라는 말이 나오면, '이게 무슨 말입니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 못 박혔나니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입니까? 도대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거죠. 그러다가 무엇을 하라 하면 "아! 그건 나 잘 하니까, 신자 맞지" 이렇게 나온다는 말입니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레위지파가 소금을 쳐서 소금 친 제물은 먹으라. 야! 그거 쉽다. 주는 걸 안 먹어 누구나 먹겠다. 그러다가 너는 너의 땅덩어리는 하나도 없고 네 재산은 오직 하나님 자체가 너의 재산이다라고 하면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됩니다. 재산이 없다니, 하나님이 재산이라니, 하나님이 보여야 재산이지 하나님이 돈을 대 주시려는가?
하나님 이름으로 된 부동산이 있는가? 하나님이 재산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해서 죽으라는 말입니다. 죽어서 하나님과 함께 살라는 말입니다. 살아 있어도 죽은 자로써 살라는 말입니다. 이미 죽어버린 자로써 말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살라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그 뜻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뭐 하라고 하면 잘하는데, 정작 중요한 복음의 핵심에 대해서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말이죠.
에베소서 2장 1, 2절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악한 신에 의해서 지배를 받았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말에 내가 언제 악한 신에 지배를 받았어 성경도 참 웃기는 이야기하네. 내가 언제 날 때부터 남한테 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데, 왜 악마의 지시를 받아.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이해가. 성경에서 이해 안 되는 것은 다 집어치우고 교회에서 심방을 하라는 그런 것은 이해가 잘 되니까 그런 것은 잘하지요. 그런 것 잘하면 신자 되는 줄 알고 말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도저히 불신자들이 흉내도 못 내고 믿고 싶어도 못 믿는 것이 믿어질 때 그것이 신자이며 확정된 것이지, 세상에, 세계 종교 단체들이 다 하는 것. 예배시간에 인간들의 몸 때움으로 다 할 수 있는 것. 그런 것 해 낸다고 신자 되는 것 아닙니다.
좀 전에 말씀드렸지만, 네가 육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혈통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우리가 그러면 천사란 말입니까? 천사보다 더하니라. 네가 교회 문제 있거든 세상 법정에 가져가지 마라. 천사를 심판하는 권리가 있다. 이게 무슨 뚱단지 같은 이야기입니까? 천사를 심판하는 권리가 있다니 우리가 말입니다.
그것보다 더 이상한 이야기는, 요한복음 6장 53절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느니라 그러니깐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어떻게 사람의 피를 먹고 살을 뜯어먹나 이 말이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런 소리 하지말고 기도 열심히 해. 금식하란 말이야. 그런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 좀 하시지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느니라 하니깐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화목제물이 너희의 의가 된다니까 화목제물이 어떻게 의가 되나 내가 어떻게든 의로운 일을 해야지. 그래서 목사가 되면 교인들에게 의로운 일 시킨다고 난리예요. 자기 눈으로 교인이 의인인지 아닌지를 행동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성경의 말씀에 의해서만 의인됨이 믿기지 않고 또한 자기 의가 없어 얼마나 허전했으면 내 나름대로 나의 의를 채우기 위해서 의 될 만한 것을 찾아서 하겠습니까. 그것도 남에게 강요하면서요. 본인이 믿음으로 의롭다는 것을 못 받아드리기 때문에 따로 믿을 만한 의로운 것을 주특기로 가지고 있으려고 하는 겁니다.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철이 없었으면, 아니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들어 있지 않는, 화목제물을 믿으면 의인이 되리라 이 말을 믿지 않기 때문에 말입니다. 내가 기도를 좀 해서 기도로써 의인이 되었다는 이런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잖아요.
바로 이번 전쟁의 결과로 80만 중에서 50만이 죽습니다. 결과적으로 봐서 남쪽 소금언약이 이기고 언약이 없는 쪽은 졌습니다. 우리는 결과만 보면 아! 하나님 편에서는 모든 것이 이기는구나 이렇게 쉽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아비야가 얼마나 큰 믿음을 가지고 제대로 된 믿음으로 싸웠는지 한번 상상해 보세요. 왜냐하면 소금언약 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이 무슨 전쟁을 합니까? 아무 것도 없는 쪽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 쪽을 승리했다는 말은 정말 대단한 믿음이 있다는 거죠.
거기에 비해서 북쪽은 어떻게 했습니까? 소금언약이 없습니다. 언약이 없다는 말은 있는데서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종교 방식이죠. 8절에 보면, 이제 너희가 또 다윗 자손의 손으로 다스리는 여호와의 나라를 대적하려 하는도다 너희는 큰 무리요 또 여로보암이 너희를 위하여 신으로 만든 금송아지가 너희와 함께 있도다. 9절에 보면, 너희가 아론 자손된 여호와의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쫓아내고 이방 백성의 풍속을 좇아 제사장을 삼지 아니하였느냐 무론 누구든지 수송아지 하나와 숫양 일곱을 끌고 와서 장립을 받고자 하는 자마다 허무한 신의 제사장이 될 수 있도다.
누구든지 나는 하나님만 있으면 족합니다 라는 마음은 그만 두고라도, 제사장만 되면 월급이 얼마지? 연봉은 얼마 될까? 사람들에게 존경받지? 이것을 얼른 연상하기 쉽습니다. 소금언약의 진정한 의의. 다시 말해서 하나님만 재산이면 전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라는 이런 믿음이 없더라도 북쪽은 누구든지 제사장으로 장립을 다 시켜줬다 이 말입니다.
'있는데서 있음을 믿는 제사장을 세웠고 저쪽 남쪽은 하나님만 있으면 족합니다' 라고 제사장이 그렇게 말하면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이겼다는 말입니까? 없는 쪽이 있는 쪽을 이겼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깐 이게 요한복음 1장12절하고 같은 차원 아닙니까?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입니다. 믿습니까?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무슨 증거가 있어야지 그걸 어떻게 믿어요. 하지만 그것이 그냥 믿어질 때, 바로 여호와 전쟁의 승리가 아니겠습니까? 그게 복음의 승리이거든요.
모세는 율법을 가지고 왔지만 "하나님의 독생자는 은혜 위의 은혜러라" 믿느냐? 은혜 위의 은혜러라를 어떻게 믿습니까? 눈에 무엇이 보여야지. 아니야 그냥 용서해주신 은혜야. 아니 용서하시는 것을 어떻게 믿나? 교회를 부흥시켜준다든지 무슨 증거를 보여 줘야지. 그러니깐 믿음이 없는 거죠. 그러니깐. 그러니깐 구원을 받지 못하죠.
♬돈으로도 못가요 하늘나라. 얼굴 잘생겨도 못 가요 하늘나라. 열심으로도 못 가요 하늘나라♬
무엇으로 간다고 했습니까? 하늘나라는 믿음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그 믿음이 돈이라는 증거도 아니고 세상적인 요소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냥 소금언약이다 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살아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살아있는 겁니다. "목사님! 글쎄 목사님 이야기는 납득은 되는데 그걸 아무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믿는다는 말입니까 그래도 뭐가 있어야지 오물 조물 뭐가 나올게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주님을 따라 다니다가 결국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깐 요한복음 10장에서 중대한 선포를 하십니다. 모두다 떠나라 그렇지만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알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양은 목자 음성만 들으면 족한 거예요.
더 이상 그 무엇이 필요 없는 거예요. 양에게는 목자만 있으면 전부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받는다는 것은 전부를 모두 받은 겁니다. 주님 주실 것을 다 받은 것이 십자가를 받는 거예요. 십자가 안에 주님의 영생이 있고 생명이 있고 십자가를 받는 것은 십자가 말고 다른 것을 받아야 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와 더불어서 모든 것을 받은 거예요.
인간들이 주님을 사랑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얼마나 귀하게 보시는지 우리도 똑같은 마음으로서 우리 예수님을 귀하게 볼 줄 아는 눈이 열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주님 빙자해서 자기 챙길 거만 챙기고 있다 이 말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무엇을 얻었지? 계산 한번 해보자고 하면서 자기 챙긴 것 가지고 기쁨을 얻으려고 하고 있으니 이걸 어떻게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귀한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내어 주었으면 자기 아들 내어준 아픈 심정을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죽일 때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겠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갖다 바치라고 하신 말씀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들 그 독생자를 바칠 때에 그 심정을 헤아려 보라는 말이죠. 그게 믿음이잖아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버릴 때의 그 심정과 같은 맥락의 심정을 가질 때 우리는 아들의 중요함, 대신 희생물의 중요함, 소금언약의 중요함, 이 땅에 아무 것도 없이 그저 주러 오신 예수님의 희생의 음식, 영생의 살과 영생의 피가 얼마나 귀한 줄 알게 되잖아요.
그게 바로 믿음이고 그걸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것은 혈육으로 난 것도 아니고 육으로 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로만 난 자 만이 여호와 전쟁에서 복음으로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소금언약 안에서 승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주님께서 의미 심장한 말씀을 남기시고 이 땅을 떠나셨습니다. 정말 믿음이라는 것이 내 챙길 것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버리시고 사랑하신 그 사랑에 우리가 뛰어 드는 것이 곧 잠기는 것이고 그 사랑 속에 사는 것 인줄 압니다. 나를 사랑하지 말고 주님 사랑에 정신없도록 저희들을 주님 앞에 늘 매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6. 여호와를 의지함 (역대하 13:13-22)
여로보암이 유다의 뒤를 둘러 복병하였으므로 그 앞에는 이스라엘 사람이 있고 그 뒤에는 복병이 있는지라 유다 사람이 돌이켜보고 자기 앞뒤의 적병을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제사장은 나팔을 부니라 유다 사람이 소리 지르매 유다 사람의 소리 지를 때에 하나님이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을 아비야와 유다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 이스라엘 자손이 유다 앞에서 도망하는지라 하나님이 그 손에 붙이신 고로 아비야와 그 백성이 크게 도륙하니 이스라엘의 택한 병정이 죽임을 입고 엎드러진 자가 오십만이었더라 그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항복하고 유다자손이 이기었으니 이는 저희가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음이라 아비야가 여로보암을 쫓아가서 그 성읍들을 빼앗았으니 곧 벧엘과 그 동네와 여사나와 그 동네와 에브론과 그 동네라 아비야 때에 여로보암이 다시 강성하지 못하고 여호와의 치심을 입어 죽었고 아비야는 점점 강성하며 아내 열넷을 취하여 아들 스물둘과 딸 열여섯을 낳았더라 아비야의 남은 사적과 그 행위와 그 말은 선지자 잇도의 주석책에 기록되니라 (역대하 13:13-22)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그 원리와 원칙이 있는데, 우리가 그 원리와 원칙을 모르고 그냥 하나님만 외친다고 되어질 일이 아닌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 하시는지 이 시간 소상히 아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지난 시간에 남쪽나라와 북쪽나라가 싸운다고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누가 좋은 편입니까? 즉, 남쪽나라 유다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나라고 북쪽나라 사람들은 자기의 힘을 의지했던 사람들입니다. 자... 이 두 나라가 이제 싸움을 벌입니다. 누가 이기겠습니까? 우리는 소위 교회 한번이라도 다닌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나라가 이긴다고 백이면 백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실지로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불신자와 부딪칠 때는 이상하게도 이 생각을 염두에 두지 아니하는 그런 희한한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분명히 우리가 성경을 볼 때는 여호와를 의지하면 이긴다라는 공식을 잘 알고있지만, 막상 세상에 나갔을 때는 여호와는 맥을 못 추더라. 역시 힘있는 사람, 돈 되는 사람이 낫더라는 그런 생각을 가진 많은 경험들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한다고 위험천만한 종교 아이디어를 실시하곤 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세상 사람 너희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지만, 나는 하나님을 의지해서 승리해 보리라 세상 사람들이 힘과 돈을 의지하지만 나는 그래도 신앙이 좋기 때문에 하나님 의지해서 한번 승리해 보리라 이렇게 다짐을 하고 세상과 맞닥뜨린 사람들, 백이면 백 아마 모두 떡이 되어 가지고 아주 엉망진창이 되었던 경우가 제가 보기에도 한, 두 명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에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했는데 믿음으로 버티다가 아주 완전히 박살 나버린 사람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목사님이 교회 건축을 하면서 여러분들은 믿음, 신앙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됩니다, 신앙의 선배들은 신앙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어린아이를 통해서 바쳤더니만 5천명이나 먹고도 남은 게 있었는데 여러분들이 비록 작은 돈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바치면 백 배, 천 배로 축복해줍니다.
이말 듣고 적금 해약해서 낸 사람 나중에 그 집안 엉망진창이 되어 오십 배, 백 배는 고사하고 빚더미에 올라 가지고 회사까지 날린 사람 한, 두 명이 아닙니다. 결국 하도 믿음이 없으니 나름대로 자기 신앙 기적을 경험해 본 것으로 나도 믿음 있음을 확정해 보려는 도박을 걸어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이것 챙겨주면 그때야 비록 하나님을 의지하겠다 라고 나온다면 그 사람은 악마의 꾀임에 빠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있어야 축복이고 승리라는 그런 공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짜 신앙이 좋은 사람은 없는 그 자체도 이미 승리이고 있고 없고 상관없이 이미 승리라는 이런 뜻의 승리를 이야기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도들이 마지막 때에 신앙의 승리를 했는데 그 승리한 대목에 그들은 믿음에 이기었으니 자기 목숨도 죽기까지 복종했다고 되어있습니다. 믿음으로 이기고 결과는 죽기까지 복종했다고 그랬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죽음직전에 갔다가 드디어 살아나야 승리로 알고 있는데 그냥 죽음에서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것을 승리로 보더라 이 말입니다. 아니 우리 보통 상식으로는 자기 죽어버리면 죽고 난 뒤에 하나님이 무슨 소용 있으며 축복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상식이잖아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오늘 본문의 싸움에서 12절에 보면 남쪽에 있는 왕이 북쪽에 있는 왕에게 "너희들은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 너희가 형통치 못할 것이라" 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 이게 북쪽나라 사람한테는 말이 안 되는 것이 자기들의 지금 싸움은 남쪽나라 사람들 하고 싸우는 것이지 하나님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은 너희들만 믿는 게 아니고 우리도 믿는다는 이 말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두 패로 갈라졌다고 합시다. 한쪽 편은 위층에서 예배드리고 또 다른 편은 아래층에서 예배드리고 그런 것 있잖아요. 위층, 아래층에서 예배드리면서 각자 하는 말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은 형통치 못한다"고 똑같은 소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처음 온 사람은 어리둥절한 겁니다. 위층에 가도 너희가 사람을 대적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복음을 대적하니까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찬송하며 울부짖고 난리고, 아래층에 내려가니까 위층에 있는 사람들이 도리어 이렇게 하나님을 잘 믿는 우리를 공격하고 있으니깐 그들이 형통치 못할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하니까 제3자가 들어볼 때 어느 말이 맞는지, 그러니까 둘 다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걸 내포하고 있는 겁니다. 둘 다 틀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집사님이 환경이 어려워서 죄를 지었습니다. 죄를 지으니깐 평소에 신앙이 철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집사님을 향하여 흉을 봅니다. 흉을 볼 때에 그 당한 집사님은 성경구절인 마태복음 7장을 찾죠. "남을 비판하지 말라 비판받는 그대로 너희가 비판받느니라 어떻게 네 눈 속에 들보를 깨닫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를 보느냐" 라는 이런 성경구절을 뽑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반대로 완전하게, 자기 나름대로 완벽하게 한다는 사람은 좀 실수하고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보고 뭐라 하겠습니까? "네가 받은 성령을 다 잊어버리고 이제는 육체로 돌아선다. 한번 타락한 뒤에 다시 회개치 못한다" 라는, 이런 본문 가지고 공박할 수 있다는 이 말입니다. 다 같은 성경구절인데 그걸 자기입장을 옹호하고 자기의 의를 변명하기 위해서 성경은 무차별적으로 이렇게 인용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전체를 봐야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 그런 현상이 일어나니까 이 본문을 한번 봅시다. 여로보암이 유다의 뒤를 둘러 복병을 하였음으로, 즉, 북쪽나라가 남쪽과 전쟁을 하는데 북쪽나라가 어떤 전략을 꾸미느냐 하면 매복작전을 벌렸습니다. 그런데 이 매복작전은 앞서 성경에 여러 군데 나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여호수아 8장에 나오는데 여호수아가 아이성을 칠 때에 매복작전을 해 가지고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어떻게 했느냐하면 상대방의 교만함을 이용하는데 거꾸로 상대방이 한껏 교만하여 그 교만의 도가 넘칠 때, 그 때 그 허점을 공격해서 함락시키는 작전이 매복작전입니다. 여호수아가 아이성 이라는 조그만 성을 칠 때에 매복을 해놓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패하는 척 해 가지고 도망을 칩니다. 도망을 치니깐 아이성에 있는 사람들이 기가 살아 가지고 "야! 저놈들이 도망을 친다. 야! 승리는 우리 것이다"하면서 마음의 교만이 가득해 가지고 '이 판에 완전히 치자' 그러면서 쭉 따라나와 가지고 자기의 성과 마을을 모두 놓고 도망치는 적군들 치기에 바빴거든요. 따라나올 때에 매복된 다른 사람들이 그 본 성에다가 불을 질러 가지고 전쟁을 형편없이 끝내 버렸습니다.
이것이 매복작전인데, 두 번째 유명한 매복작전이 사사기 20장에 보면 나오는데 거기에는 베냐민 지파와 나머지 12지파가 연합해서 전쟁을 벌리는 겁니다. 그것도 역시 상대방의 교만을 이용하는 거예요. 세 번씩이나 연합군들이 베냐민 지파를 공격하는데 가자마자 왕창 깨어지고, 죽어 오더란 말이죠. 그러니깐 이 베냐민 지파가 얼마나 기가 살았겠습니까? 역시 하나님은 우리편이다 이렇게 자신만만했는데 또 세 번째 공격을 하지요. 역시 이번에도 매복작전을 했어요. 처음에 한 서른 여섯 명쯤 죽으니깐 그들이 기가 살아서 "야! 하나님 또 우리를 도와주신다 또 치자" 그럴 때에 그 틈을 이용해서 베냐민 지파 매복된 사람들이 그들의 강력한 집단에서 유인해서 그들을 고립시켜 놓고 쳐버리니깐 베냐민 지파는 거의 씨를 말리듯 다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는 전쟁에서 상대방의 교만성을 한껏 이용해서 겸손하게 승리하는 방법, 이 방법이 여호와전쟁의 방법으로 등장했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의 머리 속에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매복작전 쓰면 항상 우리가 이긴다 라는 의식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재미있는 것은 그 매복작전을 누가 쓰느냐 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남쪽나라가 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북쪽나라 여로보암이 이 매복작전을 사용합니다. 이건 결국 뭐냐하면, 하나님이 전에 가르쳐주셨던 그 모든 비법을 비법만 챙기고 이제 더 이상 하나님 자체를 의지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깐 13절에 봅시다. "북쪽나라 여로보암이 남쪽 유다의 뒤를 둘러 복병하였으므로 그 앞에는 이스라엘 사람이 있고 뒤에도 복병이 있는지라"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졌습니다. 남쪽나라 사람이. 매복작전에 걸려들었습니다. 그때 중요한 사실은 14절에 유다 사람이 돌이켜보고 자기 앞뒤의 적병을 인하여, 그 다음에 여호와께 부르짖고 라고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눈감고 두 손 모으고 꿇어앉아서 기도하니까 또는 40일 연속으로 하니까 응답되더라 하는 식의 어떤 기도의 방법만 채용한다면 그것은 북쪽나라 사람들과 똑 같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현재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이 전에 가르쳐줬다고 생각했던, 전에 응답 받았다는 그 방법론만 전수해 가지고 소유하는 거예요. 그 방법만 계속 되풀이 사용하면 어떤 난관도 해결되겠다고 보는 겁니다. 언약궤 가지고 요단강 건너니깐 홉니와 비느하스는 그 언약궤만 쥐면 무조건 승리하는 줄 알고 언약궤 쥐고 블레셋과 전쟁하다가 거기서 둘 다 죽었습니다. 악마의 시험, 곧 자기 욕망의 시험에 자신도 못 빠져 나와서 허우적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는 것은, 진실로 겸손하게 "나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할 수 없습니다. 할 줄도 모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뭘 하겠습니까" 라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소위 기도회로 모인다든지, 철야 기도를 정기적으로 한다는 것은 참으로 미신적으로 주술적입니다. 물론 악마가 도와주어서 어떤 실효가 일어났다고 한다면 그러한 미신의 골은 더욱더 깊어지기 마련입니다.
미신이란, 딴것이 아니라 내 행위로 말미암아 없는 일도 새로 추가해야만 한다는 마땅하다는 교만이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세상의 주도권을 자기가 쥐고 있어야 당연하다는 교만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복 줄 거야 이런 얍삽한 머리 굴리기 이런 이중적인 태도는 사람은 속아 넘어 가지만 하나님은 안 속아 넘어 갑니다. 그야말로 "야! 세상 살아가는 것이 내가 해서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그러한 위치에 놓여있지 않구나. 나는 내 힘으로 살 수 있는 그런 인생이 처음부터 아니구나.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주시고 복 주시지 아니하면 한 발자국도 내 힘으로 걸음도 걸을 수 없는 그런 자구나" 라는 것을 알고 쉬지 말고 부르짖는 것. 이걸 바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기도는 어떻게 합니까? 40일을 할까요 꿇어앉아 할까요. 이렇게 기도방법의 문제가 아니고 속마음이 "아휴 나 같은 인간도 산다고 내가 무슨 힘으로 나를 살리지? 주식도 폭락했고 나는 이제 죽는 것 밖에 없다. 주여! 오늘밤에 어떻게 천당 안되겠습니까?" 이러한 낮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게 바로 부르짖는 겁니다. 이게 바로 진정한 기도예요. 그런 기도를 할 때는 어떻게 자기영광, 자기이름 뽐내는 식으로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아, 겸손히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는구나?"라는 교만한 마음이 과연 들겠습니까?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보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제일 처음 나오는 것이 뭡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시며..." 라는, 이런 말이 말로만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천 번을 이야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듣기에는 그 속마음을 보시거든요. 진짜 내 영광 취하지 않고 아버지 영광만 있으면 어떻게 살아도 저는 족합니다. 그런 솔직한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아니 귀를 지으신 자가 모르시겠습니까.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못하겠습니까. 다 아시는 거예요.
여기에 아주 놀라운 전략, 복병을 사용하는 이 아주 발달한 전략을 누가 쓰느냐 하면 재미있게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북쪽나라에서 사용한 게 아니겠습니까? 북쪽나라에서 사용했더니만 어리석게 남쪽에서 걸려든 것입니다. 걸려든 그 순간이 위기의 순간인 동시에 하나님께 제대로 복을 받을 수 있는 순간입니다. 부르짖었더니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14절에 "부르짖고 제사장이 나팔을 불 때, 하나님이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을 아비야와 유다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 즉, 하나님께서 패하게 하셨습니다. 유다가 부르짖을 때 자기들의 용기가 백 배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패하게 하시고 적들을 도망케 하시고 하나님이 그 손에 붙이신 고로 그때 죽은 자가 80만 대군에서 무려 5/8인, 50만 대군이 모두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면 누가 승리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승리하신 거죠.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의 승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승리가 되신다는 말은 내 인생에서 내가 한 몫은 손톱만큼도 없다는 것을 인정 해줘야됩니다. 그것이 하나님 의지하는 것이고 믿음이고 이것이 기도입니다. 우리 기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탄식하시면서 기도하시는 그 기도 덕분에 살아났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한다면, 그 인생 전체가 거지처럼 살더라도 그건 축복된 삶이고 여호와전쟁에서 승리한 삶입니다. 고급전략, 멋 떨어진 전략, 옛날에 이렇게 써먹었더니 먹혀들어 가더라는 결과, 옛날에 차 타기 전에 딱2분 동안 기도하니까 순경도 봐 주더라. 그러니까 차 탈 때마다 기도를 2분하면 앞으로 딱지 안 떼일 거야. 이러한 방법론만을 채택해 가지고 그걸 신앙의 주특기로 삼아서 사용하면 무조건 목회성공, 교회성공이고 내 신앙생활 성공이다. 이게 바로 교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날마다 자기의 가진 것도 부인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목사가 되었으면 내 교인 몇 명되나 헤아리지 말고 날마다 교회는 없다 한 명도 없다 내 사람은 한 명도 없어도 된다는 그런 마음으로 자기를 비우고 부인할 때, 그 사람의 전부가 다 하나님의 종이 되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써먹었던 매복작전, 정말 훌륭한 작전, 거기에 꼼짝달싹 없이 말려든 유다 나라, 그러나 승리의 비결은 매복작전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내 힘으로 승리하지 못하고 오직 주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라고 고백하며 주님 앞에 부르짖은 이것이 승리의 비결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방금 이것이 승리의 비결이라고 하니까 어떤 사람은 그럼 부르짖으면 되겠네요 주여 3창하고 부르짖으면 됩니까? 백날 부르짖어 보세요 목만 아프지. 이 시간 마치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우리가 과거에만 되새기지 말고, 지난날에 한번 되새기지 말고, 매일같이 되새기면서 우리의 모든 인생이 오직 우리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로 나타나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7. 제거하는 신앙 (역대하 14:1-8)
(대하 14:1) 아비야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 그 시대에 그 땅이 십 년을 평안하니라
(대하 14:2) 아사가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대하 14:3)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이하고 주상을 훼파하며 아세라상을 찍고
(대하 14:4) 유다 사람을 명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하며 그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대하 14:5)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이하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얻으니라
(대하 14:6) 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 그 땅이 평안하여 여러해 싸움이 없은지라 저가 견고한 성읍들을 유다에 건축하니라
(대하 14:7) 아사가 일찌기 유다 사람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이 땅이 아직 우리 앞에 있나니 우리가 이 성읍들을 건축하고 그 주위에 성곽과 망대와 문과 빗장을 만들자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에게 사방의 평안을 주셨느니라 하고 이에 저희가 성읍을 형통하게 건축하였더라
(대하 14:8) 아사의 군대는 유다 중에서 큰 방패와 창을 잡는 자가 삼십만이요 베냐민 중에서 작은 방패를 잡으며 활을 당기는 자가 이십팔만이라 다 큰 용사더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일반에게 일반적으로 일하시는 것을 압니다. 말씀의 원리 원칙대로 지금도 역사 하시는 주님을 우리가 영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아사라는 왕이 새로운 왕으로 남쪽 유다 나라에 등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옛날에 다윗에게 이 이스라엘 유다 나라의 왕은 어디까지나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라는 언약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안보이잖아요. 모세 당시에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끔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와 더불어 나타났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감히 하나님의 영광 가까이에 가지 못하고 모세만 그 무서운 환경 속에서 하나님과 독대 했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고 대신 주의 종을 앞장 세워서 일을 하셨습니다.
모세 당시에 주의 종은 모세였습니다. 자기 나라를 사 십년 동안 인도했던 모세였고, 여호수아 당시에는 여호수아였습니다. 그러면 다윗 시대에는 누구였겠습니까? 다윗이었죠. 그러면 그 다윗이 죽고 난 다음에는 누구였습니까? 바로 다윗이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았던 왕이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을 따라줘야 그 나라가 평안한 그러한 언약, 약속 속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셔서 예수님의 행하신 그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그 의로운 행위에 근거한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떨어져서 주님의 영생으로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한 고백을 하는 사람들, 옛날에는 모세였고, 다윗이었지만 지금은 남녀노소, 계층의 위, 아래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성경은 호칭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백성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은 옛날에는 어떤 특정계층의 혈족에 속해서 특정 일을 하는 자가 제사장이었는데 신약에 와서는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이 사회에서 거룩한 제사장 역할을 할 수 있어야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항상 믿는 자의 입장에서는 실상도 되고 증거도 되지만 안 믿는 자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허상이 되겠지요. 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약속의 실상이라고 못 받아들이겠다는 사람들입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시지만 그 주체되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안 계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을 때, 그게 바로 믿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한 유다 나라의 왕으로써 옛날 선대왕들이 이렇게 잘했을 때 이런 복을 받고, 실패했을 때에는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그 후대 왕들이 많이 교육받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 왕직을 인수받아서 그 자리에 앉으니 왕의 눈에는 그 나라 경계선 철조망 주변에서 호시탐탐 유다 나라를 침범할려고 노리고 있는 아주 악마적인 인간들의 모습만 보일 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믿음이 없는 인간에게 실상의 하나님으로 수용되겠습니까?
선배 왕들이 모두 넘어가고 실족한 것은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소년 다윗은 키가 3미터나 되는 골리앗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소년 다윗은 여태 벌벌 떠는 사람들과는 뭔가 다른 게 있었습니다. 물론 만군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사울 왕 쪽도 알고 있었고, 소년 다윗도 그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 쪽과 소년 다윗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상으로 수용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나온다고 하루 두끼만 먹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밥 안 먹어도 사는 게 아니잖아요. 교회 나오든, 안나오든 하루 세끼 먹어야 되고, 옷 입어야 되고, 돈 없이는 못 살고, 집 없이는 못살잖아요. 그런데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바로 소년 다윗과 그리고 옆에 있는 사울 왕과의 차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그 지시와 명령과 하나님이 알려 주시는 그 계획이, 현실로, 장래에 실제 일어날 말씀의 능력으로 곧이곧대로 그대로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이건 서울대학교 나온 천재라고 해서 쉽게 받아드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초등학교도 못 나왔다고 해서 못 받아 드리는 것도 아니에요. 몸이 아프다고 해서 못 받아드리는 것도 아니고 건강하다고 해서 잘 받아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성령의 은사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도 모르게 그냥 주어졌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이러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굉장히 사랑스런 사람이지만, 세상에 나와서는 상당히 서러움과 곡해와 오해와 박해를 받는 서글픈 인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본문에서 이 아사라는 왕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었는데, 아사 왕은 자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나는 하나의 집배원이고 남들 눈에 안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시하고 계시다는 것을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서 훌륭하다는 말을 듣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이것이 자기에게 가장 중 차대한 문제였습니다. 그런 마음이었기에 선배 왕들이 감히 못했던 일을 했습니다. 그것은 제거하고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2절에 보니까 아사 왕이 이방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주상을 훼파하며 아세라상을 찍고, 태양상을 없이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편한 생각에는 나라도 왕만 시켜준다면 얼마든지 없애겠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정치를 해보면 자기 편들어 주는 사람이 하나라도 아쉬운 마당에 무엇인가 있는 것도 없앤다는 것은 모험을 하는 행위입니다. 있었던 것은 다 이유와 백성들의 요구가 있어서 있었던 게 아니겠습니까. 글쎄요. 아예 정치인생을 끝장내려면 몰라도 백성들이 지금 선호하고 있는 바를 정치하는 자가 일부로 나서서 없앤다는 것은 무모한 짓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상을 누가 섬깁니까? 우상이 우상을 섬깁니까? 백성들이 우상을 원하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까?
우상을 친다는 것은 자기 백성을 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자기백성을 친다는 것은 지금 자기가 왕으로써 힘이 될 수 있는 자기편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친다는 것입니다. 자기 옹호해 줄 사람이 하나라도 아쉬운 이때에 가만히 있어서 여기 저기 표를 끌어 모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것을 친다는 것은 백성들 보기에 아사라는 사람이 분명 자기 나라 왕인 줄로 알고 있는데 아사 왕은 백성들의 견해와는 달리 이 나라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주님이고 하나님이시지, 이 아사라는 왕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겨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인간이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까? 그 누가, 그 어떤 인간이 십자가 졌습니까? 인간이 성령을 줄 수 있습니까? 어느 인간이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어떤 인간이 유다 나라의 임금님이 될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임금님이 되시지요. 그런 소리하면 백성들이 "아이고 임금님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보여야지요" 그렇게 이야기하겠지요.
그런데 여기 우상을 제거한다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이유는, 출애굽기32장8절에 보면 나오는데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에 산 아래에 있던 백성들이 하는 행위가 나옵니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만들고 그것을 숭배하고, 여기 우상이라는 것은 반드시 앞에"자기를 위하여"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알려 줄 때,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하시면서 두 번째 바로 나오는 것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너를 위하여"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너 자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씀드리면, 너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너 자신을 부인하지 않은 채 여호와를 믿는 것은 여호와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찾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을 우상처럼 나 좋아라고 찾지 않습니까? 나 좋아라고 하나님 찾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찾으면서 자신 생각 하지말고 하나님만 생각하면서 하나님 찾는 것을 하나님은 요구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제가 집에서 책을 읽으면서, 종교와 하나님의 복음, 즉 언약이 어떻게 다른가를 정리해 놓은 게 있습니다. 첫 번째 종교라는 것은 하늘의 시민권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이고, 복음 즉, 하나님의 언약이란 하늘의 시민권이 그냥 공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 종교인이란 대가성 있는 행위에 눈독들이는 사람이고,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이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숨쉬는 것, 발자국 한 걸음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아는 것이며, 고린도전서 15장10절에 나오죠. 나의 나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종교인이란 나는 꼭 천당가야 된다는 구원 욕심에 꽉 차 있는 사람이고, 언약 속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불쌍히 여기심이 마음속에 가득 차 있는 사람입니다. 네 번째 종교인이라는 것은 인간이 자기가 해야할 몫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언약 속에 있는 사람은 오늘도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시키실까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이 담겨있는 사람입니다. 시키시는 일은 능력으로 하게 되어있죠. 그러니까 한쪽은 행함이고 한쪽은 자유죠.
바로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어떤 접촉점으로 출발해서 시도하려는 이 모든 것이 우상이라는 점을 아사 왕은 분명히 하기 위해서 백성들이 그토록 붙들고 있는 그것을 가차없이 부셔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깐 백성들이 "아이고 왕이시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안 믿는 것이 아니고, 믿기는 믿는데 어떤 수단과 방법이 있어야 하늘나라 올라 갈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반발이나 도전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나마 이렇게 복을 비니까 적들이 쳐들어오지 않았잖아요 이러한 반대의견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분명히 다 부숴 버렸는데 이상스럽게도 적들은 꿀 먹은 벙어리모양 쳐들어올 생각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겁니다. 참 신기하죠. 이걸 봐서 이 유다 나라, 이스라엘 약속의 땅은 사람들이 자기노력 여하에 따라서 지켜지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께서 친히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친히 인도해 주시는 그런 정말 놀라운 세계가 이 약속의 땅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여기 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 그 땅이 평안하여 여러 해 싸움이 없은지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싸움이 없었습니다. 자 그러면, 아사 왕이 산당을 없이하고 우상을 때려부술 때에 "하나님 제가 저 우상을 때려부수면 복을 주실 겁니까?"라는 마음이었겠습니까 아니면 처음 때려부수기 전부터 마음이 평안하기 때문에 평안한 마음으로 때려부쉈겠습니까. 여러분 이 차이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아사 왕은 평안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우상을 겁없이 당당하고 대담하게 부순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하면 우리교회는 그런 교인이 없어 다행인데 도시교회에는 이런 교인들이 있습니다. 마음의 정서가 안정이 안되어서 불안해 가지고 철야하면서 광신도처럼 매달리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은 성령이 주신 기쁨이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도 빼앗기는 기쁨이 아닙니다. 환경이 뺏아가는 기쁨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깐 무엇이든지 평안한 마음으로, 천사의 말을 해도, 순교를 해도, 구제를 해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나와도, 기도를, 헌금, 구제, 봉사, 전도를 해도 사랑하는 마음, 평안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사의 마음이지,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모든 것은 결국 나를 위한 하나님, 불신앙인 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뭔가 우상을 제거한다는 것,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세상적인 부귀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엄청난 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연발생적으로 그걸 무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하늘나라 시민이 되었기 때문에 세상에서의 부귀영화, 마귀의 유혹, 거기엔 별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안정된 정서, 평안한 마음. 정돈된 마음상태, 이것이 바로 성령이 주신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입니다. 아사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든든하게 믿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시험을 칠 때 엄마가 애한테 뭐라고 합니까 "얘야 밥 든든하게 먹고 가라"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든든하게 입으시고 하나님의 생명을 많이 먹고 계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험악한 세상을 살면서도 평안한 마음으로 오직 주 앞에 봉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사람들은 무엇이 그리 불안하고 초조한지, 살려고 바둥대며 애를 씁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그림자가 올 때 그들은 발악을 합니다. 주여 저희들은 발악하지 않게 하옵소서. 초조하지 않게 하옵소서, 겁내며 떨지 않게 하옵소서. 든든하게 주님의 값없이 주시는 생명수, 긍휼 하심을 가슴속에 든든하게 채우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8. 아사 왕의 전쟁 (역대하 14:9-15)
(대하 14:9) 구스 사람 세라가 저희를 치려하여 군사 백만과 병거 삼백 승을 거느리고 마레사에 이르매
(대하 14:10) 아사가 마주 나아가서 마레사의 스바다 골짜기에 진 치고
(대하 14:11)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대하 14:12) 여호와께서 구스사람을 아사와 유다 사람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 구스사람이 도망하는지라
(대하 14:13) 아사와 그 좇는 자가 구스 사람을 쫓아 그랄까지 이르매 이에 구스 사람이 엎드러지고 살아 남은 자가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 앞에서와 그 군대 앞에서 패망하였음이라 노략한 물건이 심히 많았더라
(대하 14:14) 여호와께서 그랄 사면 모든 성읍 백성을 두렵게 하시니 무리가 그 모든 성읍을 치고 그 가운데 있는 많은 물건을 노략하고
(대하 14:15) 또 짐승 지키는 천막을 치고 양과 약대를 많이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이 시간도 말씀을 통해서 발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지난 시간에는 아사라는 신앙이 있는 훌륭한 왕이 등장했다는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신앙이 있다는 아사 왕의 행동은, 백성들의 우상을 치는 동시에 백성들을 치는 것이 되고 이것 또한 왕 자신이 의지할 만한 힘을 스스로 치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우상을 좋아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백성보다는 하나님 말씀 편을 선택한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밉상을 받는 그런 각오를 하고서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우상이라는 것은 각자에게 재수 좋아라고 비는 거잖아요. 사람이 연약하기 때문에 뭔가 힘이 될만하고 행운이 될만한 것을 소지하고 싶어하는데 그 복의 제공 처를 가차없이 부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우리의 욕망대로 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면 주는 대로 먹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지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하면 내 욕망을 이룰 수 있다고 까불대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정상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상을 없앤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아무 것도 끼워 놓지를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 이 모습 이대로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고백하며 투명하고 깔끔하게 모든 것을 날마다 드리는 삶입니다. 이게 바로 신앙입니다. 고린도전서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값 주고 사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우리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성경구절 하나만 한평생 쥐고 있어도 우리는 신자입니다. 나는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 분명하게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어도 우리는 이 세상에 겁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사 왕이 바로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가리지 않고, 투명하게 자신을 노출시키며, 이 나라는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이며, 하나님이 이 나라의 왕 되심을 다시 한번 돌려드린다는 식으로 모든 우상들을 철폐했는데 그 결과, 그 땅이 평안하고 여러 해 싸움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갑자기 큰 전쟁이 밀려옵니다. 무려 백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오는데 정말 너무나 엄청난 대군이나 전쟁의 결과에 대해서 논의를 하나 마나한 상황입니다. 너무나도 강한 자와 거기에 너무도 약한 자. 자 여러분 이 싸움 자체가 성립이 될까요? 그런데 이러한 엄청난 상황 앞에서 평소에 신앙 좋다고 소문난 아사 왕이 어떻게 대처하는 지를 같이 지켜봅시다.
아사 왕이 과연 백만 대군을 앞두고서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를 성경을 통해서 한번 살펴봅시다. 아사 왕은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라고 부르짖습니다. 저쪽 군대가 백만 대군이니까 강한 자라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그런데 그 백만 대군 앞에서 우리는 수십만 밖에 안되니 우리가 약한 자 라는 것도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압니다. 이 두 상황은 신자이든. 신자아니든. 다 마찬가지로 알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신자와 아닌 자가 어디에서 판가름 갈라지느냐 하면 그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과 믿지 않음에서 확연히 갈라집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강한 자 백만 대군, 약한 자 이스라엘 사이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은 그럼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강한 자의 편도, 그렇다고 약한 자의 편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자의 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부자편도 아니고 가난한 자를 두둔하는 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의 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약하다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이 우리편에 설 거라고 생각하면 이것도 엄청난 착각이고 잘못된 생각입니다. 또한 우리가 약한 자이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도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오로지 자기 뜻만 펼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가난함이 결코 우리의 의나 정당함의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가난하기 때문에 천당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어떻든 하나님은 사람의 편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늘 나라라고 펼칠 때 그 펼치는데 있어 원리원칙이 있습니다. 그 원리원칙을 누가 수용하느냐에 따라서 전쟁의 승패는 판가름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12절에 보면 구스 사람을 패하게 해서 도망하게 했다고 나와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로서만 "하나님이여 저쪽은 강하고 우리는 약합니다. 하나님!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 하나님 외에는 누가 있습니까?" 라고, 이렇게 흉내만을 내놓고는 아사 왕과 같은 고백을 했으니까 하나님은 우리편일 거라고 생각한다면 이것도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어떤 목사는 주기도문 3천 번 외우면 방언의 은사를 받는다고 주장하는 목사도 있는데, 주기도문을 3천 번 해봐도 그것은 방언도 아니요 계시도 아니요 은사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3천 번 행위에 마음 약해질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뜻 펼치다가 순간적으로 인간 편을 들어주는 그런 하나님이시지 않다는 말입니다. 어떤 특정한 기능이나 문장을 반복적으로 외운다고 해서 하나님의 정신에 혼선이나 혼란을 야기시켜 무의식적으로 축복주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 드렸다고 복 받고 구원받았습니까? 아닙니다.
미가 6:7에 보면, 하나님은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아들 이삭 바쳤다고 우리도 아들 바치면 구원받습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됩니다.
여기 11절 끝에 보면 "하나님이여 이 싸움은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이 싸우니까 절대로 사람에게 지지 않게 하시고 사람이 하나님을 이기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더니만 이겼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를 드리자면 우선 아사 왕의 이야기를 잠시 놔두고 이스라엘의 전쟁은 어떻게 승리를 가져오는가 그 원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원리는 우선 출애굽 당시부터 표면화되는데요, 하나님께서 애굽나라와 전쟁을 할 때에 애굽군사가 교만했고 강팍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하고 강팍한 자를 제일 싫어하십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이 원리원칙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사람은 일이 잘 풀려나갈 때 자칫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래놓고서 하는 말이 하나님은 우리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애굽이 패배한 것은 이스라엘보다 나쁜 짓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교만해서입니다. 광야에서 애굽은 떨어지고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만 남았지요. 둘이 동행하지요.
동행하면서부터 새로운 전쟁이 시작됩니다. 바깥에 있는 이방민족과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신 자기 이스라엘 백성과의 전쟁에 나섭니다. 무슨 전쟁입니까? 교만과의 전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도 모르고 가는 곳마다 원망입니다. 모세 원망과 하나님 원망과 모든 것에 불평합니다. 그래서 민수기에 보니까 불평을 열 번이나 했습니다. 불평 열 번하고 그들은 잘립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갑니다.
옛날 애굽의 바로 왕이 열 번 강퍅했습니다. 그래서 홍해바다에 모두 빠져 죽은 것처럼 광야에서 그 모양이 된 것입니다. 옛날 애굽사람들이 하나님께 대들다가 혼줄난 이 일들을 이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혼줄나는 거예요.
신명기 8장에, 내가 너에게 만나를 준 것은 제발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에는 마음을 좀 낮추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원하는 양식을 일부러 주지 않으시고 만나를 준다는 것입니다. 듣도 보도 못한 양식을 주시므로 말미암아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 일방적인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져 감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앞에 마음을 낮추며 동행했어야 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꾸만 과거 추억을 되돌아봅니다. 과거의 추억으로. 아름다웠던 시절, 애굽에서 고기 먹었고 갖가지 맛있는 것을 먹었는데 지금은 맛도 없는 만나를 매일 같이 먹게 되니까, "하나님 싫습니다. 밉습니다" 이러한 원망이 열 번씩이나 하나님께 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치르는 전쟁에서 외부와의 전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짜 전쟁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전쟁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불교신자나 비교하고 안 믿는 불신자 핑계되지만 정작 싸움은 하나님이 내 인생을 몰고 가는데 대해서 우리가 불평을 하고 불만을 터트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해놓고는 "주여 내 말로만 그런 것 아시죠." "푸른 초장으로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해놓고는 "하나님 나의 인생 완전히 버려놓으신 것 아시고 계시지요?." 우리는 이렇게 이중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성경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구절만 달달 외우고 있단 말입니다. 그것 외우면 하나님께서 우리편이 되어준다고 믿고 미신처럼 싶어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사실은 마음은 하나님하고 전쟁하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됩니다. 그 마음은 민수기 21장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또 원망하죠. 5절에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정말 이렇게 나쁜 음식, 맛없는 음식 나는 싫습니다"라고 원망합니다. 이걸 보면서 저도 혼자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도 그때 광야에 있었다면 내가 아무리 목사고 신학교 나와도 나 역시 하나님 앞에 원망을 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물이 변변히 있습니까, 연탄보일러가 있습니까, 음식물이 풍성합니까, 뭐가 있습니까? 저라도 원망하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이렇게 그냥 기초적인 생존에 가장 필요한 것 때문에 할 수 없어 원망했는데 6절에 보니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셨습니다. 자, 여기서 불뱀에게 안 물릴 자신 있는 사람 나와 보라고 하세요. 어느 인간이 어느 정도 마음이 낮아져야 그러한 환경에서 원망 안 하겠습니까. 너무나도 척박한 환경에서 너도 짜증, 나도 짜증, 짜증, 짜증 안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보낸 불 뱀에게 물려 죽어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상식선에서 생각합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선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나 완벽한 것을 요구하시는가를 우리는 상상을 하지 않습니다. 자꾸만 대충 상식적으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완벽하게 원망하지 않고 완벽하게 겸손한 사람을 찾는데 우리는 대충 겸손하면 넘어갑시다. "인간이 그럴 수도 있지 뭐. 아니 그걸 못 받아드리는가 그렇게 속이 좁은 분이 우리 하나님이신가?" 자꾸 이런 식으로 핑계를 대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김없이 불 뱀을 보냈습니다 이것은 아직도 하나님 마음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마음을 모르고 마음이 낮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불뱀을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불 뱀에 물려 죽게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해 놓고 모두 죽여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8, 9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여러분 불뱀에 물려 죽기 직전인데 모세가 높은 장대에다가 놋뱀을 달아 가지고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모두 산다"고 할 때에 여러분은 쳐다보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목사님 다 쳐다봅니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하실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천만의 말씀, 왜 쳐다보겠습니까? 우리가 뭔가 잘못한 짓을 해놓고 하나님께 벌받으면 우리는 하나님 쳐다보면서 죄 지은 우리를 구원받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겠는데 분명히 내가 하나님한테 원망할 만 해서 원망했습니다. 물 없으니까 물 달라고 했고, 양식이 없어서 양식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냈습니다.
그러면 누가 잘못된 것입니까. 하나님께 원망할 만해서 원망한 내가 잘못된 것입니까? 아니, 약간 원망했다고 해서 그 무서운 지옥의 불 뱀을 보내 가지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하나님이 잘못되었습니까. 이거 길가는 누구라도 막고 서서 물어봐도 하나님이 잘못된 거잖아요. 하나님이 잘못 되었다면 잘못이 없는 내가 왜 놋뱀을 쳐다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 잘못을 알아야 어느 정도 마음을 낮추고 "잘못되었습니다. 정말 잘못되었습니다. 앞으로 물 없어도, 양식없어도 원망하지 않을게요. 이 자리에서 죽어도 할말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며 놋뱀을 쳐다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형편이 나빠서 그 나쁜 형편 때문에 하나님에게 항변한 그것도 하나님 앞에 죄가 됩니까 라고 대드는 자는 결코 그 구원의 놋뱀을 쳐다 볼 리가 없지요. 쳐다본다는 것은 잘못이 자기에게 있지 결코 불뱀을 보내고 지옥을 만드신 하나님에게 있다고 마음먹지 않는 자입니다. 바로 이 고백을 하는 자만이 구원을 얻습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복음의 핵심입니까. 우리는 교회 와서 놋뱀같은 예수 쳐다보면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쳐다봅니까. 쳐다보면서 원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인데 실컷 예수님 쳐다보면서도 원망하는데 그게 쳐다보는 것입니까 아니면 따지고 드는 것입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과의 동행은 지금 백만 대군이 문제가 아니고 천만대군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아 백만 명의 적들이 쳐들어 왔다고 적들 이야기 하지 말고 너는 내편이냐를 묻습니다. "하나님 편 맞는데요." "내편 맞으면 마음을 낮추어야 될 거 아니야." "낮추었는데요." "마음을 낮췄는데 왜 물 없다, 양식없다고 나에게 원망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놋뱀을 쳐다보고 나은 사람들만 그 후에 동행을 하게되고 만나는 숱한 이방 군대를 이기게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죽여버립니다. 그러면 놋뱀 쳐다보고 산 사람들이 다음에 원망하겠습니까. 제대로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으면서 원망하겠습니까.
이제 오늘 본문에 들어가면 아사 왕이 우상을 부수었지요. 그건 자기 자신을 쳐부순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주여 나는 왕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목사 안되어도 좋습니다. 내 교회 없어도 좋습니다. 아내가 도망가도 좋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영생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우상을 부순거예요. 그런데 아무런 자기마음, 자기욕심도 없는데 덜렁 백만 대군이 쳐들어 온거예요. 그러면 뭐하겠습니까? "하나님! 개척 교회인데 교인들이 거의 없네요. 아, 아, 아니지 하나님! 나 아무것도 없는 줄 아시지요."이런 자세로서 말입니다.
아사 왕은 겸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쪽은 강한 것 아시지요. 강한 자와 아무 것도 없이 연약한 우리 사이에 나는 그저 하나님만 믿습니다. 나 원래 가진 것 없기에 저놈들이 나를 치는 것은 나를 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치는 것입니다"고 하니깐 백만 대군이 무슨 힘을 발휘하겠습니까. 백만이라는 대군이 아무런 소용없었습니다. 12절에 여호와께서 패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사 왕이 승리했습니까, 하나님이 승리했습니까. 하나님이 패하게 만들어 주었으니 그놈들이 패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신약성경에서는 마귀가 너를 지배하고 악마가 너를 지배할지라도 여호와께서 우리를 구원케 하시니 우리가 구원되었다는 원리와 같은 거예요.
내 행함이나 주특기의 선행으로 구원된 것이 아니고 우리는 원망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께 짜증낼 필요도 없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닌데 놋뱀만을 쳐다보면 된다고 여기는 사람에 한해서 다른 사람이 묻기를 "야, 너 어떻게 구원되었지, 백만 대군으로 구원되었나? 그러면 백만 가지 선행을 해서 구원되었나? 아니 그럼 뭐야?"라고 묻을 때 우리는 뭐라고 답변해 주어야 합니까? 저 사람과 우리사이에 여호와께서 계시니 여호와께서 악마를 물리치시고 나를 건져주시니 구원은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 이렇게 신약성경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여러분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말은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장 현실적으로 역대하 14장에 보니까 백만 대군 앞두고도 그런 소리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알아서 해 주십시오" 라는 고백, 이것이 진정 신앙이 아닐까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예수님을 쳐다보면 구원 얻는 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쳐다보면서 한편으로는 우리의 욕심을 쳐다보는 우리의 이중성. 그것이 바로 주님을 제대로 쳐다보는 것이 아님을 이제 알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만이고 우리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 했사오니 이제부터 우리 속에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고 놋뱀 쳐다보는 심정으로 주님의 십자가 능력만, 영생의 선물만 쳐다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9. 하나님을 찾으라 (역대하 15:1-7)
(대하 15:1) 하나님의 신이 오뎃의 아들 아사랴에게 임하시매
(대하 15:2) 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대하 15:3) 이스라엘에는 참신이 없고 가르치는 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은 지가 이제 오래였으나
(대하 15:4) 그 환난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가서 찾으매 저가 그들의 만난 바가 되셨나니
(대하 15:5) 그 때에 열국에 거한 모든 백성이 크게 요란하여 사람의 출입이 평안치 못하며
(대하 15:6) 이 나라가 저 나라와 서로 치고 이 성읍이 저 성읍과 또한 그러하여 피차 상한바 되었나니 이는 하나님이 모든 고난으로 요란케 하셨음이니라
(대하 15:7)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
『하나님! 저희에게 당부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속마음에 어떤 마음을 품고 계시는지, 이 시간 충분히 깨닫고 알아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구약 이스라엘을 보면 하나님의 일을 우리 사람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천사도 일을 하지요. 성신도 일을 하지요. 하나님의 일에 한해서 하나님은 온 힘을 다하여 자기 일을 차질 없이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32장에 야곱이 길을 가는데 어떤 한 무리가 자기 앞에 마중을 나왔습니다. 그들은 야곱의 사닥다리를 통해서 오르락 내리락 했던 천사들, 바로 하나님의 군대였습니다. 그 많은 천사들이 왜 왔겠습니까? 천사들이 이 지상을 방문한 것은 인간이 어떠한 방해를 하더라도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하나님에 의해서 성취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잡혀 귀양살이하는 그 외딴 섬에도 하나님께서는 잊지 아니하시고 천사를 보내시고 또한 성령을 보내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계시를 보도록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여호수아에도 보면 여호수아가 자기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을 공격하기 위해서 가는데 뭔가가 나타났습니다. 적 인줄로 알았는데 적이 아니라 천사장이었습니다. 천사장, 즉, 군대장관이 나서서 하는 말이 "여호수아야 신발 벗어. 너는 이제부터 내 종이야"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군말 없이 신발 벗고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번 전쟁은 네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마는 사도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천사가 와서 감옥 문을 열도록 조치 하셨잖아요. 또한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사도 바울의 남은 여생을 로마 쪽으로 돌리게 했습니다. 세상사람들의 견해에 의하면 이 세상 모든 일이 눈에 보이는 사람들끼리 의논해서 모든 것이 다 되는 줄 알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님과 천사가 배후에서 이토록 결정적인 활동을 해주고 계십니다. 타이완에 비행기 떨어진 것이 누구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천사가 작용하지 않았다고 보장 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성경을 보게되면, 하나님이 사람을 붙들고 일을 시키면서도 그 사람에게 어떤 기대를 거는 것이 아니고 천사를 통해서 일하고, 또 성령께서 일하게 하신 것과 어떤 큰 차이가 나느냐를 보여주기 위해 그 사람을 들어 사용하십니다. 성신이 임하게 되면 갑자기 변하여 선지자처럼 예언도 하게됩니다. 갑자기 그 사람이 신학교육을 받았겠습니까 아니면 교양교육을 받았겠습니까?
로마서 8장에 보면, 너희들이 기도 할 줄도 모르는데 그런 너희들을 위해서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른 생각하면 내가 교회 와서 열심히 기도한 덕인가 싶지만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성령께서 기도해 주시고 뿐만 아니라 로마서 8장에 보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서 친히 우리를 위해서 간구 하시는 분이라고 했으니 예수님께서 기도해주시고, 성령께서 기도해 주신 덕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모저모로 우리로 하여금 신앙생활 잘 하라고 기도해 주시는 분이 한, 두 분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20장에는 베드로가 예수님 잡히시기 직전에 눈에 보이는 예수님과 이야기하면서 목숨을 걸고라도 예수님 잡히시는 것을 막겠다고 했습니다. 절대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죽더라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장담하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이 즉, 지금 마귀가 너의 믿음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역사하고 있는 것을 네가 모르지. 마귀가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공격하지만 그래도 너의 믿음을 빼앗아 가지 못한 것은 내가 너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너를 위해서 기도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로 통해서 구원되는 것인 줄 알고 우리가 교회 나온 것 때문에 구원된 줄로 알고 오해를 하고 있지만, 지금도 이 어리석은 우리를 위해서 배후에서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고 믿음을 포기하지 않도록 기도 해주시는 분이 따로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장 1절에 "하나님의 신이 오뎃의 아들 아사랴에게 임하시매" 라고 나옵니다. 벌써 하나님의 신이라고 나올 때는 여러분들은 "아하... 인간들에게 나라를 맡겨놓으니 나라가 뒤죽박죽 엉망이 되었구나"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한 시점은 꼭 인간들이 이래저래 저질러 놓아서 수습이 안 되는 뭔가 일이 터진 시점입니다. 우리가 사사기를 보게되면 똑같은 과정이 반복됩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평안히 해주면 백성들의 마음이 돛대같이 높아져 이제 하나님 없이도 자기들끼리 살 수 있다고 교만해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적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아주 괴롭게 만듭니다. 일제36년보다 더 긴 세월을 압박을 하지요.
사람은 압박을 당하면 누군가를 찾습니다. 여호와를 찾게 됩니다. "하나님이여 구세주 좀 보내주소서"하고 부르짖으니까 구세주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그들 백성가운데 보통사람, 방앗간 주인이라든지 어떤 때는 깡패두목도 생길 수 있고 요즈음 같으면 짜장면 배달하는 사람이라든지 와촌면에 동서기하든지 보건소장하든지 아무나 보통사람, 진짜 하나님하고 아무 연고도 없는 그런 보통사람을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덜컥 등록을 시키는데 바로 하나님의 신이 임할 때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것을 여자나, 남자나, 종이나, 자유자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성령을 받으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받았거든 제발 계급싸움 하지 말고 누가 높으냐 싸움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기분이 좋아서 성령 받은 것이 아니고, 성질이 좋아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고, 기도 많이 해서 성령 받은 것이 아니고, 예배 잘 드려서 성령 받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대통령이든, 국무총리든 교도소에 들어가든 안 들어가든 모든 인간은 주님 보시기에 다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불러서 의인되게 하시는데 그 의인되게 하는 근거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성령이 오셔야됩니다. 성령은 지상에 살았던 예수님의 마음이거든요. 예수님의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그 마음이 나에게 그대로 떨어질 때 우리는 성령 받은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나의 사랑이 되고, 예수님의 소망이 나의 소망이 되고, 예수님의 믿음이 나의 믿음이 되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조치할 때, 그 사람이 종이 되었든, 파출부가 되었든, 머슴이 되었든 간에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칭함을 받는 것이 신약성경의 복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의 신이 오뎃의 아들 아사랴에게 임했다 할 때는 여러분 선입감에 아사랴는 믿음이 좋거나 훌륭한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시고 아사랴도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러니까 성신이 임한 이유는, "방앗간에 일하는 사람도 성신이 임하니까 훌륭하게 하나님 일을 하잖아. 그런데 왜 평소에 내가 너희에게 준 말씀을 그렇게 믿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성신은 아주 위급한 상황에 임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인간들에게 잔소리하고 교육을 하고 선지자가 와서 말씀을 가르칩니다마는 도저히 순종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훌륭한 인물이 없어서 순종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인간들이 하나님만 찾으면 인간들 선에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알아서 일을 완성시키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믿음이 없어서 자신들의 믿음을 가지고 일하려고 하니까 엉터리며 일이 잘 안 되는 거예요. 왜 사람은 하나님을 그렇게 못 믿어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내세우시는 목표가 인간이 내세우는 목표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영광을 취하려고 하는 사고가 같을 리가 있습니까. 인간은 자기가 내세운 식대로 미래가 열리기를 기도하고 하나님은 하나님 나름대로 다 생각해 놓으신 바가 따로 있으니 여기에 갈등과 충돌이 일어납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이야기는, 사사는 모두다 엉망진창인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삼손 같은 사람들은 바람둥이입니다. 바람둥이에게도 성신이 임하니까 삼손이 나라를 구원했잖아요. 거기다가 왼손잡이, 깡패두목 같이 변변치 못한 인간들, 평소에 사람취급을 받지 못한 인간들에게도 하나님의 신이 임하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더란 말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자질이라든지, 인간 됨됨이와 전혀 무관하게, 그리고 아무리 못난 인간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사명 받들어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신이 임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10장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거기에 염소 치는 어떤 목동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그만 염소를 잃어버렸습니다. 염소를 찾기 위해 사흘동안 헤맸습니다. 헤매다가 어느 선지자가 있는 곳까지 와버렸습니다. 그때 갑자기 성신이 임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사울이라는 사람입니다. 성신이 임하니까 아주 허드렛일을 하는 염소 치는 목동이 졸지에 선지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소문나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한 명이라고 나옵니다. 그만큼 사울이라는 작자는 선지가가 될 위인이 평소에 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장에 와서는 사울이 이스라엘 왕으로 뽑혔습니다. 사울이 왕으로 뽑히니까 왕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그러면 나라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못 지킵니다. 사울이 왕이 되었다 할지라도 사울이 전쟁에 나가서 승리를 하는 것은, 사울의 자질이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울에게 성신이 임할 때, 그때 사울은 놀랍게도 수 십만 대군을 이겼습니다. 사울 왕이 똑똑한 것이 아니고 누구나 성신이 임하면 모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울이 몇 번 승리하고 나니까, 슬그머니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성신이 소년 다윗에게 임합니다. 성경은 이처럼 묘하게 진전됩니다. 성신이 다윗에게 임하니까, 이번에는 그렇게 겸손하고 성령의 일을 하든 그 사울에게 악신이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소년 다윗이 몸이 노래 부르니깐 다윗을 향하여 창을 던져서 두 번씩이나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악신이 임하면 그렇게 변합니다. 얼마 전까지 성신이 임해서 수십만의 대군을 쳐부수고 나라를 구해 내면서, "이 모든 영광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영광"이라며 그렇게 겸손했던 사울이었습니다. 성경에서 교만은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사사기, 사무엘상을 어느 교회에 있을 때에 강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이런 노골적인 예를 들어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가 설교 좀 잘하고 겸손하다는 소문이 주위에 퍼졌습니다. 그래서 여기 저기서 그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그 목사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자신이 설교 잘하고 겸손해서 목회가 잘된 줄로 아는 교만에 빠진 것입니다.
말이 재미있지요? "겸손이라는 이름의 교만" 말입니다" 그 때부터 그 목사는 누구든지 자기 교회에서 자기보다 더 겸손하고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고 잘 가르치는 사람이 들어오면 집사가 되었든 장로가 되었던 전도사나 목사가 되었든 어쨌든 못 쫓아내어서 안달이예요.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이며 동시에 얼마나 흔하게 일어나는 일입니까! 성신이 임했다는 이 말은 이근호 잘났다가 아니고, 여러분 잘 났다도 아닙니다. 못난 사람 하나님이 들어서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왜 그걸 자꾸 잊어버립니까. 하나님이 들어 사용하니까 내가 잘나서 나를 사용하는 것으로 우리는 자꾸 착각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들어 쓸 때도 여전히 본인은 못난 존재라는 사실을 놓치면 큰일납니다. 우리는 성신이 임할 때는 겸손하다가 조금만 뭐가 잘되면 교만해져서 남과 비교하면서 상대평가를 하게됩니다. 이때가 바로 신앙의 위기입니다.
민수기 11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에게 굉장히 원망합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재미있었는데 이제는 고기도 먹지 못하고 이게 뭐냐고 데모를 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12지파 대표자에게 성신이 임합니다. 성신이 임하니까 조금 전까지 애굽에서 노예였지만 맛있는 것도 많았고 재미있었다고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원망하고 있던 그들이 하나님이 좋아 가지고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일이란 그런 사람에 의해서만 사용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처음 교회에 나올 때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고 하다가, 한 10년 다녀서 집사 되고 나면 어느새 남과 비교해서 자신을 더 알아주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이 생겨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되지요. 성령이 떠난 증거입니다. 바로 자기 힘으로 버티겠다는 교만이죠. 하나님 필요 없이 나의 잘남으로 나의 신앙을 지탱해 보겠다는 베드로 같은 오기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마차가지입니다. 3절에 보면, 말로만 하나님 믿는 사람이지, 이제 하나님 믿는 사람이 아니죠. 그럴 때, 하나님의 성신이 선지자에게 임해서 "너희들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은 하나님을 찾지 않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찾기 때문이다" 라며 하나님을 찾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 부귀영화가 어떻게 우리의 허무를 만족시켜줍니까? 육신의 것이 어떻게 우리의 모든 욕망을 달성시켜줍니까? 하늘의 영광, 구원받은 기쁨, 밧모 섬에 갇혀있던 사도요한은 아무 것도 없이도 성령이 임하고 천사가 오니까 그걸로 족하면서 하나님과 이야기하기가 바빴던 그 상태, 바로 그것이 성령이 충만한 상태잖아요.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님이 성령이 충만했는데, 그 당시 돌이 날아와 그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분명히 돌에 맞아 죽어가고 있지만,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 집사님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마중 나와 서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본 스데반 집사는 "저들은 저들의 행동이 얼마나 나쁜지를 미처 알지 못하고 있으니 자기를 죽이는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십자가에서 주님이 하신 그 이야기를 하면서, 주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모든 일이 잘 안되어 괴롭다고 교회에 나오는데,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찾을 생각은 안하고 지나간 잘못된 일들, 실패, 손해본 것, 지나간 추억 보상해 놓으라고 하나님 앞에 땡깡 부리면서 데모하려고 교회에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의 성신이 임해서 성령께서 날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깨닫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제가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내 인생 이렇게 망치게 하십니까. 옛날 내 인생 도로 내놓으세요. 내가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 다녔는데, 하나님 이렇게 나에게 시련을 주시나이까. 하나님 괘씸합니다. 옛날 행복을 돌려주소서. 남들처럼 살게 해주소서."라며 따지러 오는 거예요. 하나님을 찾을 생각은 안하고 과거의 아름다웠던 자신의 과거의 꿈과 그 모습을 찾아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찾는 자세가 꼭 이러해야겠습니까?
그러니까 처음 초신자 때의 첫사랑을 어디서 잃어버렸는가를 생각해봐야 되겠습니다. 신혼부부가 처음사랑을 할 때는 부부싸움을 할 리가 없겠죠. 하꼬 방에서 둘이 살아도 감사하듯이, 왜 우리가 예수님만으로 기뻐했고 죄 씻어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눈물 흘렸던 그 사랑을 찾을 생각은 않고, 엉뚱하게 세상 것을 찾으려고 교회 나오느냐 말입니다. 이게 전부 성령 놓쳐버리고 하나님 떼어 내버린 그런 결과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었습니다. 열두 제자 모두 순교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거지 나사로도 거지로 인생을 끝냈지만 하늘나라 갔습니다. 진정한 신앙이라는 것은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어떤 세상의 유혹에도 끔쩍 않고 하늘의 것을 더 고귀하게 여기며, 범사에 감사하는 그 마음, 그게 진정한 승리자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바로 이런 자세로 선지자는 왕에게 독촉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들에게도 이 시간 그런 신앙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계심 그 자체가 좋아 어쩔 수 없이 기뻐서 찾으라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앙이 있다고 자부했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고 기도 잘했다고 뽐내기도 하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령이 임한 사람은 세상의 천지개벽이 와도, 옥에 갇혀도 조금도 겁내지 아니하며 주님을 감사하고 기뻐하고 영광 돌렸는데, 우리는 세상 것이 내게 없다고 하나님 앞에 대들 수밖에 없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면서도 회개할 줄 모르는 저희들 아닙니까. 이 시간을 통해서 하늘의 것이 세상 것 보다 더 좋다는 것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10. 하나님이 함께 하심 (역대하 15:8-19)
아사가 이 말 곧 선지자 오뎃의 예언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가증한 물건을 유다와 베냐민 온 땅에서 제하고 또 에브라임 산지에서 빼앗은 성읍들에서 제하고 또 여호와의 낭실 앞 여호와의 단을 중수하고 또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를 모으고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시므온 가운데서 나와서 저희 중에 우거하는 자를 모았으니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고 아사에게로 돌아오는 자가 많았음이더라 아사 왕 십오 년 삼 월에 저희가 예루살렘에 모이고 그날에 노략하여 온 물건 중에서 소 칠백과 양 칠천으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무리가 큰 소리로 부르며 피리와 나팔을 불어 여호와께 맹세하매 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 바가 되시고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 아사 왕의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을 만들었으므로 아사가 그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고 빻아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니 산당은 이스라엘 중에서 제하지 아니하였으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더라 저가 또 그 부친의 구별한 물건과 자기의 구별한 물건 곧 은과 금과 기명들을 하나님의 전에 드렸더니 이때부터 아사 왕 삼십오 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 (역대하 15:8-19)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실현되고 어떻게 진리로 받아들이는지, 그 진리의 뜻을 이 시간도 저희들이 주의 뜻으로 알아 그 토대 위에 살아갈 수 있도록 힘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함께 하면 일이 잘 풀리고, 하나님을 어긋나게 살면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괴롭게 하기에 너희는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해당된다는 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선지자가 아사에게 임하는 것이 다른 나라, 이방나라 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점을 유념해 주셔야됩니다. 흔히 말하기를 예수 믿게 되어서 도리어 귀찮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 자기자녀에게 징계를 하지, 남의 자녀는 아예 사생아이기 때문에 징계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보면 불신자에게는 그냥 내어버려두사, 내어버려두사, 내어버려두사의 연속입니다. 그냥 내어버려 두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 기뻐해야 될 것은, 저들이 아무리 예수 믿지 않고, 교회 다니지 않고, 세상적으로 나가더라도 결국에는 주님 심판대 앞에 다시 나타난다는 거예요. 아무리 도망친들 다시 주님의 심판대 앞에 모이게 되어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교회 안 나오는 것이 우리 보기에 편해 보이고 굉장히 자유롭게 보이겠지만,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죽는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의 무덤까지 찾아가서 죽은 자도 도로 부활시키시고 기꺼이 심판대 앞에 세우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절도 있고 변함없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5장29절에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나와 있습니다. 결국은 주님 앞에 다시 나와서 구원받은 사람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생명에, 그렇지 못한 자는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들과의 차이점은, 우리는 그 사실을 미리 앞당겨서 알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무슨 뜻인지 압니다. 그것은 나중에 지옥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미리 앞당겨서 저주받으시고, 우리한테는 저주가 돌아오지 않도록 대신 십자가 죽으심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달린 것을 보고 우리는 지옥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오른손이 범죄 하거든 찍어버려라, 네 오른 눈이 범죄 하거든 빼 버려라, 네가 만약 죄 된 몸을 가지고 온 몸이 다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눈 하나, 팔 하나 없이 천국 가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본문말씀을 보면서 우린 도대체 사는 게 뭔지 기초를 다시 한번 닦아봅시다. 도대체 인생은 무엇이며, 인간은 무엇이며, 산다는 게 뭐냐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 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니... 하나님 안 믿는다고 죽입니까? 어떻게 이것이 인권이며, 민주주의며, 이웃 사랑 이겠습니까? 그것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냥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니, 이런 폭군적인 나라가 이 세상에 또 있겠습니까?
하나님 믿고, 안 믿고는 자기 자유이지, 하나님 안 믿는다고 사람 때려 죽여 버리고는 이것이 성경의 진리고, 하나님 앞에 합당하다는 원리가 통하는 나라에서 우리는 뭘 생각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이여 그러면 인간이란 도대체 뭐며, 인생이란 도대체 뭡니까? 하나님 안 찾는다고, 하나님 안 믿는다고 해서 맞아 죽어버릴 놈이 되어 버린다면 처음부터 인간이라는 것이 도대체 뭐냐 이 말입니다. 이래 가지고서 도무지 살아갈 용기가 나겠느냐는 말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나름대로의 포부와 자유스러움과 자기의 하고 싶은 소망도 있지 않습니까? 단지 하나님 찾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소망도 접어두고 희망도 무차별 깨어지며, 자기의 살고자하는 기본적인 인간성의 본능마저도 하나님 앞에서 무참하게 죽임을 당한다면 근본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이냐 말입니다.
우리가 이방나라,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맞아 죽지 않는 그런 나라에서의 인간과, 오늘 본문 13절 말씀처럼 하나님 안 찾는다고 맞아죽는 그런 나라 속에서의 인간은 달라도 보통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 우선 생각해 볼 문제는, 과연 우리 자신은 어느 나라를 좋아합니까. 하나님 안 찾는다고 맞아죽는 그 나라가 좋아집니까? 아니면 하나님 안 찾더라도 누구하나 시비 거는 사람 없는 평화롭고 아주 화목스러운, 그저 사람과 사람끼리 사이만 좋으면 아무 탈이 없이 그냥 한평생 무사고로 지낼 수 있는 그런 나라를 우리가 좋아합니까? 우리는 어느 쪽입니까?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왜곡된 엉터리 같은 인간사와 나 자신에 대한 규정에 젖어 있었습니까? 안일하게 그저 안 믿는 사람과 동일한 그런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우리를 일깨워주는 본문이 바로 오늘13절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시키던 그 지시, 그 근거를 위해서 출애굽기 19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13절에 보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만나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늘나라에 계셔서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에는 제 멋대로 하나님 없는 세상인 것처럼 활개치면서 막되게 살아가지만, 막상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 밑에 좌정을 하니까, 우리가 함부로 입술을 놀리고 혀를 놀리면서 내뱉는 그 하나님이라는 분이 실제 시내 산에서는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분인지 상상이 안 갈 정도로 무섭고 두려운 분으로 다가오시는 겁니다. 누구든지 이 산을 더럽히는 자는 내가 가만히 놔두지 않고 죽인다고 선포하시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가까이 가기만 하면 남녀노소 모두 죽였는데, 그 무서운 하나님 세계 속에 모세가 벌벌 떨면서 사십일 동안 하나님과 함께 있다가 내려왔습니다. 그런 모세에게 사람이 무섭겠습니까, 인생사가 무섭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나 가지고 눈이 완전히 가 버렸잖아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 사도 바울이 사람을 겁냈겠습니까, 대통령을 겁냈겠습니까, 안기부, 이단이라는 소리, 교회 세력자 총회장, 누굴 겁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산다는 게 뭔지를 알았습니다. 인간이 뭔가를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정말 한 마디로 말해서 겁 없이 이야기했습니다. 눈에 아무 것도 뵈는 것도 없고 사람이 감당치 못할 정도로 이야기했습니다.
요한복음19장에 보니까 제자12명이 벌벌 떨면서, 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이 한가운데 나타났습니다. 그러고는 "내니 두려워 말라 평안 하라 나 살아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는 나중에 와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했다는 소리를 듣고 거짓말이라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부활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도마 앞에 갑자기 주님이 나타났습니다. 만져보니 못 자국, 창 자국이었습니다. 그때서야 부활하신 주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책이 아니고 문자가 아니라, 실제로 닫힌 문안에서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부활하신 그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겁없이 살았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이며 사람 사는 게 무엇인가를 이제 마음속에 제대로 정리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다 하나님께로 온 것이 아니고 세상으로 왔다는 이 말을 사도 요한은 마음 푸근하게 이야기 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는 이미 그것을 초월했기 때문에. 한마디로 세상사는 것이 겁이 없었습니다. 이 상태를 본문9절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하심"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오늘본문 16절에 보면 "아사 왕의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을 만들었으므로 아사가 그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고 빻아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니" 자 여러분 이것이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현대적 사고에서는 아들이 믿는 종교는 아들 마음대로 믿고, 엄마 종교는 엄마 기분 좋으라고 믿는 것이고, 네 종교 내 종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우리 민주주의 사회에서 합당 한 거잖아요. 그런데 지금 아들의 왕 입장에서 봤을 때는 이방나라가 아닌, 지금 이스라엘 땅,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주신 땅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아니하면 곧 죽음을 의미한다 이 말입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사람만이 하나님 안에서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엄마가 믿는 아세라 상을 엄마의 위신과 자존심과 정신적인 안식처임을 알면서도 가차없이 부수어 아예 가루를 만들어 버리고, 태후의 위를 폐해버리는 철저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사 왕의 행동이 대단하다는 말이 아니고, 아사 왕에게는 이런 눈으로 열리게 하신 하나님이 대단했습니다. 그 차이를 아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 믿는 믿음이 대단한 것이 아니고, 사도 바울을 쥐고 흔드시는 살아 계신 우리 주님이 정말 대단한 분이십니다. 그 잘난 체하고 완전한 자, 교만하고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부하는 그 사도 바울을 완전히 구렁텅이에 박아서 철저하게 자기 종으로 부리시는 그 주님이 여러분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 대단한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우습게 본다 말입니다. 흔히 행동이 올바르고 행동이 정숙하다는 것을 가지고 믿음이 좋다고 하는데, 그것이 믿음 좋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는 그 사람이 대단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여튼 하나님의 뜻이라면 끔뻑 죽도록 만들 정도로 강력하게 압박을 하고 통제를 하고 통치를 한다 이 말입니다.
바로 오늘 8절에 "선지자 오뎃의 예언을 듣고"라고 되어 있는데, 누가 그 말을 하나님말씀이라고 곧이곧대로 받아 드리는 사람은 참으로 드뭅니다. 같은 말을 들어도 아사 왕이 이렇게 진리로 받아드릴 수 있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 믿지 않는다고 광야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출애굽기33장 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모세가 혼자 못 가겠으니까 같이 좀 동행해 주면 안 되느냐고 하니까, 하나님은 내가 직접 너희들에게 뛰어들 것이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민수기 25장에 보니까 이스라엘 사람 두 사람이 우상을 섬겼어요. 우상을 섬겨서 몇 명 죽었느냐하면 무려 2만4천명이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방나라에서는 그런 현상이 안 일어납니다. 이상스럽게 꼭 하나님이 함께 있는 사람에게만 이런 엄청난 재앙과 형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결론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 그저 공포로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아사왕처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가, 세상이 어떻게 짜여져서 진행된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그것이 보약을 먹은 것처럼 든든하다는 것, 이걸 아는 사람한테는 그야말로 겁낼 것이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너무 두려워서, 세상을 향하여서는 더 이상 겁날 게 없다는 거예요. 실패해도 겁나지 않고, 망해도 겁나지 않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겁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이 무엇이며 산다는 게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가를 아는 사람한테는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나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생이고 이것이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진짜 정상적인 사람이 이렇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성경을 볼 때는 우리가 발견되는데, 이상스럽게 교회 문만 열고 나가버리면 남을 쳐다보며 부러워하고 원망하며 이상하게 마음이 약해지고 짜증을 내며 불평 불만이 나오는 거예요. 이상스럽지요. 그러나 아사 왕은 성전 안에서나 바깥에 나가서나,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그 하나님과 진짜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든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런 사람이 정상적인 인간을 아는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이 무엇이며 인생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알았습니다. 정말 알고있는 대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을 나도 알고 남이 알 수 있도록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