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 신문에서 전 이런 글귀를 보았습니다. "내 삶을 위해 사는 날만 난 진정한 행복을 느껴" 전 당연히 공감을 했습니다. 전 소위 아주 이타적인 사람들의 많은 행위조차도 궁극적으론 그의 이기적 취향이라고 매도할 때가 있으니까요. 제가 한 작은 일들에 대한 다른 이들의 칭찬이나 비난에 일희일비 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걸 하는 게 제가 더 행복하기 때문이잖아요? 그러나 다른 이들의 선행을 흑백논리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매도할 생각은 없어요. 누군가의 이기적인 취향이 자신에게만 도움이 되지 않고 세상의 평화에 이바지 할 수 있다면 그 당사자에게도 수혜자에게도 도움이 되고, 결국은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자신의 달란트를 되돌리는 거니까요.
세상엔 충분한 재물이 있다, 단지 그걸 나누지 않는 개인주의자 때문에 배고픈 이웃이 있는 것이라는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에 나오는 교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내가 너보다 더 능력이 있어서 더 잘사는 거라고. 그런데 그 능력은 하느님께서 주신겁니다. 내가 노력했다고? 그 노력할 수 있는 자질조차도 그분이 배려하지 않았다면 어림없는 일이지요. 아주 유능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침대에서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화장실 출입조차 불가능해 지는 걸 늘 지켜보는 저로선 아침에 별일 없이 눈뜨고 일어날 때마다 감사의 기도를 합니다. 제가 하는 감사의 기도는 언제나 '살아있음'에 관한 겁니다.
성당에서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분이긴 하지만 늘 명언을 하시는 분이 계시죠. 그분은 아주 솔직한 성품을 가졌어요. 그래서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하는 남에게 상처되는 일도 정의라는 이름으로 쉽게 합니다. 그게 그분의 달란트입니다. 그분이 어느 날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하셨대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은 사람이라는 사람도 내게 잘못하면 나쁜 사람이요, 세상 사람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 하는 이도 내게 잘하면 좋은 사람이다."라고요. 마땅하고 옳은 얘기죠?
사실 누구나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자신의 기준이 세상의 잣대인 줄 알고 그래서 나쁜 걸 나쁘다하고 좋은 걸 좋다한다고 믿어요. 그러나 그 기준은 결국 제게 있는 거잖아요. 남을 단죄하는 것이죠. 자꾸 누군가를 생긴대로 인정하고 또 나도 그들로부터 그렇게 이해되기를 바라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건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거죠. 날 오해하는 사람과 이해하는 사람!
전 어제도 어떤 분과 만나 얘길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요, 제가
" 참 정이 많으시군요. 아주 따뜻한 분인 것 같아요."
했더니
" 아니, 난 차갑고 냉정해."
하시더라구요, 전 정정을 했습니다.
"아, 늘 제게 따뜻하게 대해주시나 봐요."
라고요. 제가 그분을 뵐 때는 언제나 좋아 보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를 대할 땐 그분 말씀대로 냉정하고 차가울 수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제가 아주 너그러운 척 하고 살아도 때론 차갑고 냉정할 때도 있거든요. 상처를 주고 받아야만 상황정리가 될 때도 있어요. 물론 후회를 듬뿍하면서도 억지를 부릴 때도 있는 거니까요.
결국 우린 누구나 자신의 잣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어서 내 안에 있는 잣대가 가급적 보편적이 되도록 늘 자신을 경계하며 사는 방법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체험이다"라고 말합니다.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 신부님이 우리 성당에서 눈 오는 날 눈밭에 앉아 묵주 기도를 하던 평신도보다 더 많이 주님의 사랑을 체험했다고는 결단코 믿지 않습니다. 아니 설령 그분이 가르치시는 만큼 영성적이라 하더라도 그게 우리 각자에게 무슨 소용이 있나요? 강의를 들으며 이해를 하는 것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학문적으로 알아들을 순 있겠지만 결국은 제가 느끼는 아침의 생명에 대한 예찬이 제겐 더 절절한 것을요.
제 신앙을 위해 주님의 사랑을 늘 체험하고 감사하려고 애쓰면서 제 마음에 자리잡은 세상에 대한 잣대가 비록 지금은 옹졸할지라도 어느 날 교회의 보편적 가치에 닿아있도록 노력해야 할 따름이지요. 그게 나를 위한 삶이며 진정한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믿어요. 가급적 나를 위한 삶이 아무쪼록 내게는 행복이요, 요행히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기를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