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용산고 제자들 사이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올라 왔다. "임성재를 아시나요? 3학년 3반의 똘똘하고 총명한 성재가 2005년 말경 몹쓸병(위암)으로 고생하다가 이제 비로서 완치 판정을 받아 부산에서 씩씩하게 훌륭하게 즐겁게 무엇보다 건강하게 돌아와 일하고 있습니다. 남쪽끝 동기들이 모여 간단하게 운동도 하고 재미있게 지내려고 합니다. 성재를 잊었던 혹은 소식이 뜸했던 동기들의 환영과 격려를 부탁합니다."
임성재, 그는 2005년 어느 날 "사랑하는 윤길수 선생님"이란 글을 이 사이트에 올렸던 사람이다. "수년전 조금 큰집으로 옮기면서 저도 제법 서재라는 것을 같고 싶어 큰 아이하고 책을 정리하던 중..... 빛바랜 노트 표지에 <용고, 윤길수>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 맞다! 그때 그 선생님......> 20년이 훨씬넘은 노트를 펼쳐 들고 잠시 상념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그노트를 책상 위에 두었지요. 어느 날...큰애가 저를 부르기에 곁에 갔는데 마침 화학 공부를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제가 필기한 노트를 뒤척거리며 <기억이 나시면 설명을 좀.....> 약간은 당황 했지만 열정적으로 저희를 가르치시던 선생님을 생각하며 비록 더듬거리긴 했지만....그래도 잊지 않고 설명을 했습니다. 등에는 식은땀이 났지만 아들놈한테 처음으로 칭찬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그 때 그 시절을 시간 가는줄 모르고 떠들었지요. 다른 것은 머리가 별로라서 다 까먹어도 화학 만큼은 아직도 자신 있습니다.
큰애는 지금 진주에 있는 국립경상대학교, 의과대학 본과3학년입니다. 다른 과목은 저처럼 비실비실해도 아버지의 설명 덕인지 2년간 배워야 하는 <생화학> 만큼은 매번 A+ 입니다. 제가 큰애한테 <넌왜 화학만 잘하냐?> 큰놈왈 <윤길수 선생님 덕분입니다!!!!>" 저는 졸업 후 계속 부산에 살고 있습니다. 정열적으로 가르치시던 그 모습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용고를 거처 온 저로서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기억 못해도 비록 50고개를 넘는 제 가슴에 영원히 각인되어 있는 저의 은사이십니다. 사랑합니다."
그 임성재가 한 동안 소식이 뜸 하더니 암 투병을 했고 거기서 벗어나 건강을 되 찾았다니 너무 반가워서 나는 이런 댓 글을 썼다. "임성재, 2005년 '사랑하는 윤길수 선생님'이란 글을 올렸던 그대를 나는 잘 기억하고 있지. 그 동안 위암 투병 생활로 고생했다고 하니 가슴이 아프군. 하지만 건강하고 씩식하게 돌아 왔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부디 건강하고 씩씩하게 성공적인 사회 생활과 가장의 역할을 다해 주기를 기원하네"
그 다음에 올라온 임성재의 글 "윤길수 선생님,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변영종(창원 전문대학교 총장)이가 뜻밖에 글을 올리는 바람에...... 이 곳 남쪽에서 조용히 살려 했었는데...... 싸이월드에 실로 5년만에 들어왔습니다. 영종이의 글에 선생님의 리플이 있다해서 정말 깜짝 놀랬습니다. 그리고 눈물도 울컥 나고......... 3기말의 위암 수술 후 금년 1월 중순 완쾌 판정을 받았습니다. 새로운 삶에 감사하고 또한 최근에 다시 만난 우리 26회 영종이, 용범이 곧 만날 광택이 광희........그저 감사할 일들 뿐입니다. 참! 생화학 언제나 A+이었던 큰놈은 지금 국립경상대학교병원 안과 전공의로 있습니다. 선생님.... 언제나처럼 건강하시고 저희 곁에 있어 주십시요." 임 성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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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의 최대 보람은 노후 제자들과의 교감이라고 들었는데 역시 길수는 보람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군그래,그러나 그것이 우연이 아니고 교편을 잡고 있을때의 열정의 열매임을 현직의 무사안일 선생 전교조 선생들에게 전달이 될수 있었으면.
강태용, 항상 격려 고마워, 나는 감동 받았다며 가끔 전해 오는 제자들의 추억들이 너무나 사소한 것들이어서 놀랄 때가 있다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념들은 조그만 정성과 애정을 보여도 큰 감동으로 받아 드린다는 사실, 그리고 교사를 노동자라고 주장하는 전교조 교사들에게 교직을 스스로 모독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