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복수 시리즈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친절한 금자씨’는 ‘속죄’라는 주제와 연관되어 있다. 언 듯 생각하면 ‘속죄’와 ‘복수’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 하지만, 이 둘을 하나로 담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속죄를 위한 복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필자의 판단에는 박 감독은 이 일에 일단은 성공했다고 보인다.
박 감독이 ‘속죄를 위한 복수’를 위해서 먼저 넘어서려고 한 것은 속죄의 문제에 기득권을 주장할 기독교다. 박 감독은 아주 쉽고, 쿨하게 기독교에 한방 날린다.
“너나 잘하세요”
자신이 속죄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따라 회개를 하면 죄를 다 용서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해서 금자씨는 열심히 몰입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느낀 그녀는 매몰차게 냉대해 버린다. 그래서 자신이 속죄를 위한 복수를 위하여 혈안(빨간눈)이 되어서 나선다.
그런데도 끈질기게 따라붙는 전도사를 짐승(개나 소)으로 취급하고, 자신이 기독교를 완전히 버렸다는 것을 물증을 들어서 확인시킨다.
이런 금자씨의 선택이 옳다는 것이 전도사가 살인마에게 머리를 숙이고 돈을 받는 장면을 통해서 입증된다. 박 감독은 “이 돈을 주님의 일을 위해서 유용하게 쓰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전도사의 입을 통해서 오늘날 한국기독교가 이 수준 이상 보여주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는 조롱을 한다.
한국 기독교는 역사 속에서 군사 독재정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 대해서 변변한 저항은커녕 그들의 머리 위에 복을 빌어왔다. 그 이유는 물질적인 축복과 안정을 보장하는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자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논리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섬기기 보다 돈을 섬겨 왔으며, 이것이 오늘날은 기득권을 흔드는 세력에게 저항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가슴 아픈 일이지만, 박 감독의 지적이 분명히 맞다.
박 감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끈질기게 따라오는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참옥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극 중 금자를 담당했던 형사는 문제의 비디오 테이프를 보면서 찬송가를 흥얼거린다. 기독교인으로서 현실을 직시하면서 박 감독이 던지는 문제에 직면하겠다는 태도인 것이다. 박 감독은 어쩌면 이들과 대화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형사임을 자인하면서 아직도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이 참혹한 현실에 대해서 답을 낼 수 있느냐? 아니 여과없이 보면서도 너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느냐?’고 묻는다.
형사는 그 참옥함을 견디기 위해서 찬송가를 부르면서 신앙의 힘을 빌려오려고 애를 쓴다. 그렇지만, 역부족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찬송가는 멈춰지고, 구역질을 하게 된다. 즉, 기독교인들이 현실을 똑바로 본다면 결코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 뿐 아니다. 형사는 이제 적극적으로 복수를 돕는다. 살인을 가르치고, 뒷 수습을 돕는다. 더 이상 형사의 자리, 속죄를 가르칠 자리에 서 있지 못한 것이다. 박 감독은 진실한 기도교인이라 하더라도 현실의 참옥함 때문에 오히려 속죄를 가르치기 보다는 복수를 돕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박 감독의 주장에 대해서 내가 목사이지만 변명하기 어렵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입을 완벽히 막아 놓고, 복수의 칼 춤은 시작된다. 어울어져서 한바탕 살풀이를 하듯이, 갖가지 방법들이 동원되어서 피의 복수가 벌어진다.
그러나 복수는 전혀 즐겁지 않다. 한바탕 소동이 있었으나,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친절한 금자씨는 이루었으나, 다시 저주 받은 현실로 돌아갈 일이 막막할 뿐이다.
그리고 다시 구원을 소망한다. 누가 구원을 줄 것인가? 잘 모른다. 신의 구원을 말하던 자들의 입을 막아 놓고, 박 감독은 신에게 직접 묻고 있는 것이다.
이미 박 감독에 의해서 입이 막혀 버린 기독교인으로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금자씨가 비록 백선생이 살인마일지라도 그가 가진 기능적인 능력으로 구원자와 소통하였듯이 어쩌면 박 감독은 아직 기독교를 통한 신과의 교통을 완전히 막아 놓은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