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에서의 화친(和親)과 회맹(會盟), 그리고 기미(羈 麻+실사변 )
‘개토귀류(改土歸流)’라는 정책이 있다. 원주민인 토사(土司)·토관(土官)을 없애고 유관(流官:조정에서 임명한 정식 관리)을 보내 변방지역을 다스리는 정책이다. 본래 화외(化外)의 무리로서 방치되어 있던 소수민족들은 원(元)나라 때부터 그 토착민을 토사·토관으로 임명하는 간접통치를 받아왔다. 명(明)·청(淸) 왕조는 이를 점차 폐지하고 중앙정부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본토와 똑같이 주현제(州縣制)에 따른 직접통치로 바꿔 나갔다. 청나라 말까지는 많은 개토귀류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청나라의 정치력이 변경지역까지 확대된 사실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중국화의 방침은 소수민족의 반발을 사게 되어 반란이 계속됐고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기미(羈?, 麻아래에 실사)정책’이 소극적 변방정책이었다면 개토귀류는 적극적인 침투정책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근 소수민족 정책을 보면 명·청대의 개토귀류에 보다 더 경도된 듯하다.
중국 영토의 변경에 대한 통치 정책이 이렇다면 중국의 외교는 어떨까?
1954년 신중국 성립 이후 첫 국제 외교 무대에 등장한 저우언라이 총리는 ‘평화공존 5원칙’을 들고 나왔다. ▶영토의 보전과 주권의 상호존중 ▶상호불가침 ▶내정불간섭 ▶평등호혜 ▶평화공존이 바로 그것.
전통시대 가장 큰 중국의 대외 관계술(術)은 화친과 회맹이었다.
중국에서 ‘화친’이란 한(漢) 고조와 흉노의 묵특선우(冒頓單于·BC209~174) 사이에 성립된 이후 당(唐)대까지 중국 국가들과 대등하고 독립적인 관계의 이웃 국가들 사이에 성립된 제도적 관계를 말한다. 사기(史記) 유경(劉敬)전에 보면 “종실 여자를 공주라고 속여서 흉노의 우두머리 선우(單于)의 처로 보내며 건국공신이었던 유경이 함께 가서 화친을 맺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한서(漢書)에는 ‘오랑캐와 화친하니 전쟁이 사라졌다’라는 구절도 같은 것이다. 이는 중국 물자의 정규적 공급과 불가침을 교환하는 것으로 중국 공주의 출가를 필수적 형식 요건으로 하는 독특한 국제관계였다.
맹(盟)의 전통은 춘추전국 시대 비교적 작은 나라의 제후국들이 모여 대국의 침략에 대항하여 연합작전을 펼칠 때 치르는 의식이었다. 또한 대국이 자기의 실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소국을 압박하야 자신의 진영에 가입시키는 것도 회맹(會盟)이었다. 특히 이는 서쪽 오랑캐인 강(西羌)족 사회에서도 오래된 관행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맹약의 의식에는 반드시 희생물이 등장한다. 희생물은 반드시 다리를 자르고 창자를 찢어 앞에 진열하고 무당으로 하여금 신에게 “맹(盟)을 어기는 자는 희생물과 같게 될 것임”을 고하게 했다. 즉 맹은 이를 어길 경우 상대방에게 가해질 저주의 요소가 핵심이다.
기미(羈 麻+실사변 )의 전략은 당대에 등장한다. 기(羈)는 군사적인 수단과 정치적 압력을 이용해 변방을 통제하는 기술이고 미( 麻+실사변 )는 경제와 물질적 이익을 주는 위무책이다. 중원의 왕조가 소수민족 지역이나 새로운 정복지역에 실시하는 특수 정책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현대 중국의 외교를 살펴보면 흥미있는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미국과의 관계는 한나라와 흉노의 ‘화친’관계와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과거 유고 대사관 오폭사건, 미군 정찰기 사건과 같은 물리적 갈등과 무역 흑자와 미국 국채구입 등의 경제적 관계를 보면 외적으로는 상호 윈윈의 관계를 내세우지만 근저를 살피면 아직까지는 ‘화친’의 단계로 볼 수 있을 듯싶다.
그렇다면 맹의 관계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중국은 외교적으로 동맹을 인정하지 않는다. 북한이 한국전을 통해 혈맹임을 이야기 하지만 공식적이지는 않다. 맹은 도리어 대국의 입장에서 소국에 압력을 가해 자신의 편으로 줄세우는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세안,
기미 정책은 인접국가를 대할 때 드러나고 있다. 특히 홍콩, 마카오, 대만의 ‘일국양제’, 소수민족 자치구 정책은 모두 기미정책의 현대적 변용이다. 또 아프리카와 중남미를 누비는 자원외교는 기미 정책 가운데 미( 麻+실사변 )의 위무책의 부활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