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大乘起身論疏
일심(一心)을 믿고 一心의 根源에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는 경론(經論)이다. 대승기신(大乘起信)이란 큰 수레, 즉 우리가 타고 가야 할 큰 수레(大乘)인 일심은 무엇이며 어떻게 설명되는 것이며, 무슨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인가, 를 완전히 납득하게 한 후 그러한 엄연한 사실들을 확신하고 그 一心의 根源을 향해 착실히 되돌아가는 결심과 행위를 말한다
기신론은 유식사상(唯識思想)을 바탕으로 삼고 있으므로 八識의 이론을 채택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의 가장 전면(前面)에 드러나는 감각적 기능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의 다섯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현대용어로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촉각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항례(恒例)대로 전오식(전오식)이라고 총괄적으로 불린다.
그리고 이 전 五식은 의식(意識)에 의해 통할(統轄)되며 이 의식(意識)을 제 六식이라고 부른다. 앞의 五식과 意識을 합하여 이 여섯 가지의 식(識)은 다른 곳에서 전六식이라고 부른다, 이 전六식은 보다 심층에서 <나>라는 의식(意識)을 내용으로 하는 보다 뿌리깊은 의식에 의해서 지배된다. 이(識)은 다른 곳에서는 <자아의식>이라고도 불리는 것으로 사람들이 누구나 태어나 자라는 과정에서 잠시도 버리지 못하는 고질적인 의식이다. 이것을 제七식 이라고 한다
이 제七식은 보다 심층의 제八식에 연결되어 있다. 제八식은 사람의 마음속 깊숙이 감춰진 모든 심리활동의 원천으로 생각된다. 범부들은 이 제八식이 순수히 맑고 깨끗한 참되고 한결같은 본연의 상태만을 유지하지 못하고 그것을 깊숙이 간직한 채 오랜 옛날부터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좋지 못한 버릇의 힘, 즉 습기(習氣) 때문에 더럽혀 있다고 본다.
그 더렵혀진 상태를 무명(無明)에 물들어 있다고 한다.
제八식은 본래 맑고 깨끗하며 고요한 마음을 그 본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無明의 습기 때문에 그 본 바탕이 고스란히 드러나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마음이다. 맑고 깨끗하며 고요한 마음의 본 바탕을 진여(眞如)라고 형용하고 또 그것은 각(覺)이라고도 불린다. 본래부터 있는 것이라 그 覺은 본각(本覺)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또 그것은 無明의 습기 때문에 가려 있어 나타나지 않을 때는 불각(不覺)이라고 불리지만 일 단 어느 계기에 그 본바탕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경우에 시각(始覺)이라고도 불린다. 사실은 이 本覺의 眞如한 마음이야 말로 <부처>라고하는 마음, 깨끗한 이의 근본이요 씨요 태(胎)이다.
그래서<부처>를 <여래>라고 달리 불렀을 때 이 진여한 마음을 여래장(如來藏), 여래가 간직됨,<여래> 의 씨 또는 태 라고 부른다. 제 팔식을 아뢰아식(Alaya)이라고 하고 그것을 장식(藏識)이라고 한다. 장식이라고 한역(漢譯)하는 까닭은 이렇듯 깨끗한 마음이 간직되어 있는 식이란 뜻에서다. 진짜 부처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의 마음의 맑고 깨끗한 근본 바탕인 진여한 측면을 진여문(眞如門) 그반대의 측면을 생멸문(生滅門)이라 한다. 즉 법신(法身)이란 다름 아닌 이러한 마음 바탕 즉, 일심의 근원을 두고 한 말이다. 이러한 진여한 모습은 많은 말로서 설명할 것이 아니라 직접 直觀으로 체험을 통해 깨달아야 할 성격의 것이므로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여기서 우리의 마음이 각(각)이 되는 경우와 <불각>이 되는 두 가지가 있음을 밝히며<불각>은 대대로 내려오는 근본 무명(根本無明)과 태어난 후 살아가는 과정에서 후천적으로 생기는 무명 때문에 생긴다. 전자는 근본불각(根本不覺)이라하고 후자를 지말불각(枝末不覺)이라 한다. 그런데 마음의 생멸에는 반드시 좋지않은 생멸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명에 물들지 않은 맑고 밝은 생멸도 있다.
즉 眞如한 마음 자체가 지닌 불가사의한 힘 때문에 본각(本覺)의 마음이 어떤 계기에 크게 또는 작게 번득이듯이 빛을 발할 수 있다. 그 때 그 覺을 始覺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始覺과 本覺이 별개의 것이 아니다. 같은 각인데 하나는 본래 근본으로 있는 상태를 말하고 다른 하나는 즉<始覺>은 그 本覺이 어떤 좋은 인연을 만나 발현되기 시작한 것을 포착하여 하는 말이다.
기신론에서는 이 시각에는 네 개의 단계가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 그것을 始覺의 四位라고 한다. 첯째 단계의 이름은 불각위(不覺位)이다. 아직 멀었다는 뜻이다. 둘째 단계는 상사각(相似覺)위라고 했는데 각은 각(覺)인데 그 정도가 아직 멀었다. 셋째는 수분위각(隨分位覺)이라고 한다. 조금씩 조금씩 되어간다는 뜻이다. 이 단계에 오르기도 그리 쉽지 않다.
마지막 단계의 구경각위(究竟覺位)에 오르면 이미 본래의 그 자리 본각(本覺)에 재하는 맹목적인 힘 정도라고 하면 좋을 것이다. 중생의 마음에는 이것이 있다. 그러나 중생(衆生)이 사는 것이 이 힘에 의해서만 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본래 우리 삶의 근본모습은 저 진여한 마음 그 자체의 덕택이지만 이 마음이 맹목적인 힘이 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 것이 이를 태면 우리 중생이 대대로 이어오는 업보(業報)의 탓이다. 개인에게는 개인의 업보가 따로 있을 것이지만 어떤 개인도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혼자 뚝 떨어진 고립무원의 존재가 아닌 까닭에 혼자만의 업보로 끝나지 않는다.
따라서 한 민족에게는 민족 나름의 업보가 축생에게는 축생의 업보가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한 민족에게는 민족 나름의 업보가 있을 수밖에 없고 인류에게는 인류의 업보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중생에게든지 이 무명의 업이 물려준 맹목적인 의지가 있다.
군자(君子)도 한거(閑居)하면 좋지 않는 일(不善)을 행한다고 하는 말은 군자도 닦고 갈지 않으면 별 수 없이 무명의 業力 때문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 하는 추태를 부린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 경계 때문에 생기는 삼세육추는 다음과 같은 이름으로 나열된다.
삼세(三細)는
1)무명업상(無明業相) 2)능견상(能見相) 3)경계상(境界相) 이며
육추(六추)는
1) 지상(智相) 2) 상속상(相續相) 3)집취상(執取相) 4)계명자상(計名字相) 5)기업상(起業 相) 6)업계고상(業繫苦相)으로 나눈다
여기서 상(相)이라고 하는 것은 생멸 이라는 現狀의 구조와 形相을 의미한다.
무명업상은 생멸의 근본원인을 말한 것이고 나머지 둘은 그 근본원인 때문에 동시에 나타나는 주관(主觀)과 객관(客觀)의 분열 현상을 말한다. 能見이란 主觀을 말한 것이요 경계란 객관적인 대상이다. 能見이란 적극적, 주동적, 능동적으로 무슨 대상을 인식하는 행위요 境界란 그렇게 할 때 눈앞에 나타나는 것들이 경계이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할 때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은 能見이요 생각되어진 그 무엇은 경계이다.
이러한 주객의 분열이 <生>의 메카니즘인 것이다. 이것이 기신론에서 第八식 아뢰아식에서 이뤄진 것이다. 그리하여 주객이 대치 분열됨과 아울러 자아의식인 第七식이 발동하게끔 되는데 이 자아의식과 제 六식 및 제五식과 함께 작동하면서 나머지 여섯 가지의 생멸의 거칠은 상, 육추가 나타난다.
육추의 첮째 상(相)은 지상(智相)이다. 객관적인 대상, 즉 경계에 대한 분별(分別)이 생기는 모습이다. 분별을 통해 사람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가린다. 이 분별하는 마음이 계속오래도록 이어지는 것을 상속상(相續相) 이라고 한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공정하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내려진 올바른 판단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을 중심으로 하는 불공정하고 편협한 판단이 문제이다.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으로 잘못 내려진 분별(分別)의 태도가 오래 지속되다 보면 좋은 것에 대해서나 싫은 것에 대해서나 집착하는 마음이 더욱 강해지고 마침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기어코 이를 점유하고 말겠다는 생각이 생기고 싫은 것에 대해서는 철저히 제거하고 말겠다는 식의 강한 집념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것을 執取相(집취상)이라고 한다. 이러는 과정에 자기스스로 반성하고 자기 마음을 바로 잡아 그 마음의 잘못을 고치는 노력 없이 그대로 방임하거나 또 한편 나아가 더 고약한 무명의 충동이 부채질하게 되면 일은 더욱 심각해지게 마련이다. 계명자상(計名字相)이란 실제와 다른 어떤 허황한 망상을 그리며 그것을 실재인양 착각하는 잘못된 마음가짐의 모습을 말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일을 저지르고 만다. 그것이 기업상(起業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무슨 일을 저지르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저지른 일에 얽매여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없는 판국에 빠져 들어간다. 이것을 업계고상(業繫苦相)이라고 한다
이 삼세육추란 생멸의 상(相)은 사람의 생각이 타락의 길을 가는 유전(流轉)의 과정을 인과관계로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초기불교에서 십이연기(十二緣起)라고 해서 무명(無明)에서부터 행(行). 식(識).명색(名色). 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에 이르는 流轉緣起(유전연기)의 과정을 설명했던 것과 유사한 연기(緣起)의 설명이다. 기신론은 십이연기 사상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다 일반적인 용어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러한 생멸과정을 이번에는 생(生), 주(住), 이(異), 멸(滅)이라는 네 가지 상(相)으로 구분하여 분석한 생멸의 四相에 대하여 말한다. 사람이 무명(無明)의 업력 때문에 살생(殺生)이다. 도둑질이다, 간음이다. 거짓말이다 하는 나쁜 일들을 하기에까지 이 생멸(生滅)의 四相을 표기하면 다음과 같다.
1)생상(生相) 업(業)
↓
전(轉)
↓
현(現)
↓
2)주상(住相) 아(我)
↓
애 치 만 견
(愛) (痴) (慢) (見)
↓ ↓ ↓ ↓
3)이상(異相) 탐 진 치 만 의 견
(貪) (䐜) (痴) (慢) (疑) (見)
↓
4)멸상(滅相) 살 도 음 망어 악구 양설 기어
(殺) (盜) (淫) (妄語) (惡口) (兩舌) (綺語)
1) 생상(生相)이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한 생각이 생기는 기본적인 메카니즘 이다. 이 메 카니즘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다. 부처의 생각에는 이런 구분이 있을 리 없지만 적어도 보살(菩薩)의 생각도 이 메카니즘 만은 아직도 거친다. 보통사람들의 생각은 다소간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다 무명업력의 영향이 있으므로 그 무명의 정도에 따라 그 이후의 생각과 행동의 오염도(汚染度)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세 가지중 첫째는 업상이니 무명의 불각(不覺)으로 인하여 망념이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비록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있지만 견상(見相)은 분화되지 않은 상태여서 아직 오지 않은 생상(生相)이 장차 올바르게 작용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다.
둘째는 전상(轉相)이니 망념의 움직임에 의해 망념을 전전시키어 주관적인 견해를 형성한다. 생상(生相)이 장차 올바르게 작용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다.
세 번째는 현상(現象)이니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대상에 나타나게되는 것을 말한다 오지 않은 생상(生相)이 지금 나타나는 때와 같다 무명과 이 세상이 화합하여 일심(一心)의 본체를 움직여 그 전전함을 따라 나타나게 된다. 마치 소승에 있어 미래의 여래장의 마음이 그 생상(生相)을 따라 전개되어 현재에 이르는 것과 같다. 이들은 모두 아뢰아식의 단계로 차별이 있음을 나타낸다.
2) 주상(住相)의 주란 상당히 뿌리깊이 박혀 있어서 거의 불치의 고질(姑姪)처럼 된 것을 두 고 하 는 말이다. 그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결국 아집(我執)인 것이다. 달리 말하여 이를 자아의식(自我意識)이라고 한 바 있다. 막연히 자아의식이라고 한 이 에고이즘에는 네 가지 경향이 있다. 하나는 자기 아닌 자기대한 애착(愛着)이다. 즉 아애(我愛)가 그것이다. 둘째는 진정한 자기 의 참모습을 모르는 어리섞음이 있다. 이것을 아치(我痴)라고 한다.
셋째는 아만(我慢) 인데 자기 자신을 모르면서 거짓 자기에 애착을 느끼면서 한 술 드떠서 만심(慢 心)을 품고 있는 것이다. 네 째는 아견(我見)인데 견(見)이란 주의, 주장, 관점 등을 뜻하는 말로서 자기에 대한 그릇된 주장을 갖고 그것을 내세우는 것이다.
주상은 무명과 생상이 화합하여 마음은 고유한 성격이 없고 그 마음이 보는 개관적인 사물도 고유성이 없다고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여 네 가지 종류의 주상을 일으킨다. 곧 나를 모르는 어라석음, 나를 주장하는 고집, 나에 대한 교만함이 이다. 이 네 가지는 모두 第七식인 말나식의 단계에 잇다
3) 이상(異相)은 이 아집(我執)이 그릇된 자아의식이 무명의 바람을 타고 한 층 더 무명스 러워진 모습이다. 즉 무명과 주상이 화합하는 것을 말하니 내가 공하고 나 이외의 객관적인 사물도 공함을 깨닫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릇된<나>에 대한 애(愛)와 치(痴)와 만(慢)과 견(見)이 한층 더 썩어서 탐(貪). 진(瞋). 치(痴). 만(慢). 의(疑). 견(見)의 타락한 마음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현대적인 용어로는 탐욕, 질투 및 시기, 어리석음, 교만함, 의심, 자기고집을 말한다. 신론(新論)에서는 번뇌의 고유한 성격으로 오직 이 여섯 가지를 들고 있으며 생기식(生起識)의 지위에 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급기야 무명과 이상(異相)이 화합하여 4)의 멸상(滅相)을 만들어내고 만다. 즉 몸과 입으로 짓는 일곱까지 악한 일이 그것이며 이와 같은 악한 일은 악취에 떨어지게 한다. 4)는 이미 생각에서 행동으로 바뀌고 만 상태이다. 이를 태면 진여(眞如)한 마음은 이미 사라져 버린 듯 무시당하고 만 상태이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이 어떻게 마음 하나를 잘못 다스림으로서 말미암아 사람답지 않은 죄악적 존재가 되는가를 잘 알게 된다. 그러나 사람은 이렇게 타락의 길만을 가며 구제 불능한 존재가 되도록 숙명 지워져 있기만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기신론은 잘 말해 주고 있다.
사람은 온전히 숙명적으로 구제 불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근거는 사람의 마음속 깊숙이 간직된 진여한 마음 때문이다. 그것이 곧 본각(本覺)이요 여래장 (如來藏)이요 불성이라고 불리는 것이지만 이 마음 때문에 사람은 다른 중생들과 같이 사는 가운데 그 진여한 마음, 본각의 영향을 받으며 환멸(還滅)의 길을 걸을 수가 있다. 이것이 이른바 시각(始覺)의 四位로 설명되는 부분이요 또 정법훈습(淨法熏習)의 설명이요 또 나중에 언급할 진여의 체(體), 상(相), 용(用)의 도리이다.
시각(始覺)의 四位는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우리들 마음의 본각(本覺)의 계발을 통해 진정한 자기에로 복귀 하는 단계를 말한 것이다. 시각의 제 一位인 불각의 단계에서는 생멸의 사상중 제 四 멸상 의 잘못을 깨닫고 그것을 극복하는 단계이다. 제 二位인 상사각(相似覺)은 생멸의 사상중 第三位인 이상(異相)을, 그리고 시각의 第二位인 주상(住相)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각의 第四位인 구경각은 생멸사상중 제 一位인 생상(生相)을 각각 극복해 가는 과정이다.
사람의 생각은 좋은 방향으로 건 나쁜 방향으로 건 안에서나 밖에서나 흔습(薰習)을 통해 그 진행이 촉발(促發)되거나 촉진된다. 좋은 방향의 영향이 가해지는 일을 정법훈습(淨法 薰習)이라 하고 나쁜 방향의 영향이 가해지는 일을 망법훈습(妄法薰習)이라고 한다.
진여의 체(體), 상(相), 용(用)
기신론에서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부처님의 몸, 즉 불신(佛身)에 관한 사상은 대승 불교에 와서 삼신(三身)사상으로 발전했는데 그것은 부처님의 몸을 법신(法身), 보신(報身), 응신(應身)의 세 측면에서 보는 사상이다. 응신(應身)은 다른 경(經)에서는 화신 (化身)이라고 불려진 경우도 있지만 기신론에서는 응신(應身)이라고 번역되고 있다.
모든 사물에는 체, 상, 용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상(相)이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그 속성, 외형, 상태 등 어떤 실체의 양상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용(用)은 실체의 기능 또는 작용면을 말한다. 이 둘은 다 체(體)를 토대로 체에서 나오는 것이다. 부처님이란 존재를 두고 볼 때 부처님이란 지혜롭고 자비로운 존재가 될 수 있는 까닭은 어디에 있느냐, 부처님의 핵심이 무엇이냐, 한다면 우리는 서슴지 않고 그것이 진여한 마음 그 자체에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진여한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 하는데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바 와 같다.
바로 진여한 마음이 부처님의 모태요 씨요 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마음을 기신론은 법신(法身)이라고 이름 붙여 체(體)로 삼는 것이다.
원래 체(體)는 보이지 않는 초험적(初驗的)인 것, 선험적(先驗的)인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물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진여 그 자체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마음을 통해서 실현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인간은 그 인간적 조건을 초극(超克)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온전히 실현시킬 수 가 없다. 인간의 마음 안의 각(覺), 불각(不 覺) 에 대해서는 말하자면 본각(本覺) 그것이 바로 체(體)이며 법신(法身)이다.
체,상,용은 분리 불가한 하나의 마음(一心)의 세 가지 의미이다. 그런데 체가 보이지 않는 것 초험적인 것 선험적인 것이라면 상과용은 보이는 것 경험적인 것이다. 체를 궁극적인 의 미로 본다면 상, 용은 세속적인 의미인 것이다 보신과 응신(應身)은 각각 체(體)인 법신의 상(相)이요 용(用)이다 보신은 진여한 마음이 간직한 영원하고 절대적인 능력이 시간과 공 간 속에서 하나의 과보(果報)로 드러난 모습이다. 따라서 이 보신(報身)은 어느 모로 보나 훌륭하고 탁월한 공덕이 풍부하게 나타나 있다. 사람으로 친다면 가장 참되고 온전한 사람 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한 풍부한 공덕을 향유하는 몸이라 하여 이는 또 수 용신(受用身)이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 응신(應身)은 종종 화신(化身)으로도 불리며 응화신(應化身) 이라고도 한다 그 뜻은 그 몸을 변화하여 다른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응신(應身)의 본질은 뜻 있는 사람 또는 그렇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어느 기회에 진여한 마음 자체인 법신의 불가사의 한 능력이 가 닿아 그 마음 깊숙한 곳을 두드려 심금(心琴)을 울리고 그 사람의 지혜의 눈, 자비(慈悲)의 눈을 뜨게 하는 작용을 한다. 응신(應身)은 반드시 아름답고 거룩한 모습을 갖출 필요는 없다. 가슴이 열린 사람의 눈에는 도처에서 이 응신(應身)이 보이며 그 감화(感化)와 가호(加護)가 그와 함께 있다.
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본래부터 일체의 염법(染法: 물든법)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체법의 차별의 상을 떠나 있는 것이니 허망한 마음의 잘못된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진여(眞如)의 자성(自性)은 유상(有相 :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비(非)유상도 아니며, 무상(無相 :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비(非)유상도 비(非)무상도 아니며 유무(有無)상이 함께 있는 것도 아니며 일상(一相)도 아니며 이상(異相)도 아니며 비일상(非一相)도 아니며 비이상(非異相)도 아니며 一,異相이 함께 있는 것도 아니다. 총체적으로 말하면 일체중생이 망령된 마음이 있어 念念이 분별하여 모두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공(空)이라고 말한다.
삼계의 모든 법은 모두 마음이 짓는 것이다. 일체의 분별은 곧 자기 마음의 분별인 것이다.
마음은 두 가지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칼이 칼 자신을 자를 수 없고 손가락이 손가락 자신을 가리킬 수 없는 이치이다.
일체의 법(法)은 모두 마음을 따라 빚어진 헛된 마음에 의하여 쌓이고 지속된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은 마치 거울속에 비친 그림자와 같아 얻을 만한 본체가 없다 그것은 오직 마음일 뿐이며 허망한 것이다 마음의 생김으로 갖가지 법들도 생겨나고 마음이 없어지게 되면 곧 갖가지 법은 따라 없어지게 된다.
- 원효스님의 대승기신론소 -
첫댓글 마명보살의 대승기시론을 좀더 깊게 보려면 유튜브에 올라온 지운스님의 강의가 잘 되어 있다. 송광사 강주를 역임한 지운스님은 교학에 밝을 뿐 아니라 자비선을 널리 보급하고 있다. 꽤 긴 내용이라 몇 십강으로 올라와 있으니 보면 큰 공부가 될 것이다. 一心 二門!!!
마명보살의 대승기신론을 소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법기器의 만남도 커다란 인연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