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퍼런 녹색 풍관 눈 시리고 계곡물 발 시린 '무주구천동'
월하탄·사자담·백련사 6km 코스 완만한 경사…비경 감상하며 산책 [ 서울경제 글ㆍ사진 맹준호 기자]
무주구천동 계곡에 드디어 물이 넉넉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그 동안 이곳에 비가 적게 와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물이 적었지만, ‘호랑이 장가 가는 날’ 식으로 오는 비가 몇 주 내린 뒤부터 물줄기가 굵어지더니 이제는 시원하게 흐르는 소리마저 장쾌해 졌다.
덕유산 자락의 무주구천동은 예부터 함경도의 삼수갑산과 더불어 심산유곡이나 산골 오지의 대명사처럼 인식되던 곳이다. 예부터 이 지역 사람들은 무주와 진안 장수를 묶어 ‘무진장’이라고 불렀다. 세 곳 모두 덕유산을 둘러싼 산골 오지라는 공통점 때문에 ‘무진장’이라는 말이 생겼다. ‘무진장’이라는 표현은 아직도 유효해서, 지금도 무주 지역에 가면 ‘살기 좋은 무진장’같은 표어나 ‘무진장 소방서’같은 관청을 찾아볼 수 있다.
아무튼 무주구천동은 남한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심산유곡이요, 으뜸가는 계곡이다. 그렇다면 구천동은 무슨 뜻을 담은 이름일까.
이곳이 계곡으로 유명한 곳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구천동의 ‘천’은 내천(川)이나 샘천(泉)자가 맞을 것 같지만 구천동은 의외로 아홉구(九)에 일천천(千)을 쓴다.
구천동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대략 세 가지가 전해진다. 과거 이 깊은 산골에 9,000명의 수도자들이 들어와 공부한 뒤 구천동으로 불렸다는 게 하나요, 옛날 이곳에 구 씨와 천 씨가 모여 살았다는 설과 계곡이 9,000번 굽이졌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둘째와 셋째다.
세 가지 설 중 아무래도 좀 더 맛갈진 얘기는 첫번째다. 9,000명의 수도승이 모여 살다 보니 한 번 밥을 지으려고 쌀을 씻으면 계곡 물이 눈처럼 하얗게 변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이 곳의 지명이 설천(雪川)면이 됐다는 얘기는 꽤나 설득력이 있다. 또한 당시 한 수도자의 아내는 남편과 약속한 3년이 지나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구천동에 남편을 찾으러 들어갔지만 워낙 심산유곡인 탓에 길을 잃어 결국 불귀의 객이 됐다는 전설도 있다.
구천동은 덕유산국립공원의 북쪽 계곡이다. 구천동은 경관이 수려한 33경이 가장 잘 알려져 있는데 제1경인 나제통문(羅濟通門ㆍ옛날 백제와 신라가 통하던 관문)에서 계곡 구경을 시작해 산 정상이자 제33경인 향적봉(1,614m)까지 올라갈 수 있다. 한 나절이 걸리는 길이다.
하지만 요즘 같은 여름철에는 덕유산국립공원 매표소에서 시작해 월하탄ㆍ인월담ㆍ사자담ㆍ비파담 등을 지나 백련사까지 가는 6㎞ 길을 걸어보는 게 좋다. 구천동 계곡을 끼고 난 산길인데 길 폭도 넉넉하고 경사가 완만해 누구나 힘들이지 않고 산책할 수 있으며 워낙 심산유곡인지라 확실하게 시원해서 걷기가 편하다.
등산을 온 사람에게는 완만한 6㎞ 산책길이 지루할 수도 있지만, 백련사를 지난 뒤 향적봉까지 가는 길은 만만치 않다. 등산 깨나 다닌다는 사람들도 힘들게 올라가야 하는 코스다. 향적봉의 절경을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방법은 인근 무주리조트의 관광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는 방법. 곤돌라를 내려 약 20분만 걸어가면 정상에 다다를 수 있다.
구천동 계곡의 규모는 금강산 내금강의 그것에 비해 결코 밀리지 않지만 크게 다른 것이 하나 있다. 구천동에는 폭포가 구천폭포 하나밖에 없다. 이나마도 폭포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고 아담하다. 금강산은 ‘폭포 아니면 못이요, 못이 아니면 소’라고 할 정도로 폭포가 많지만 구천동 계곡은 경사가 워낙 완만해 폭포가 귀하다.
산책길의 종점 격인 백련사는 구경한 번 해볼 만 한 절이다. 신라 때 창건한 절로 아직도 아름다운 정취를 품고 있다. 전성기 때는 14개의 부속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9,000명이 수도했던 게 사실이라면 아마 이 절을 도량으로 삼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엔 시원하게 계곡물에 발 한 번 담가보자. ‘한 여름에도 얼음같이 차다’는 흔한 표현이 과연 어떤 걸 말하는 지 곧바로 느낄 수 있다. 단, 물 속에서는 이곳이 국립공원 관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수하고 손 발을 씻는 정도는 괜찮지만 웃통을 벗거나 수영을 하면 제지를 당한다. 야박한 듯도 하지만 얼굴 및 팔꿈치와 무릎 아래만 씻는 게 국립공원관리공단의 ‘허용 범위’다. 취사와 낚시가 안 되는 것은 물론이다.
덕유산과 구천동은 사철 아름답지만 다른 곳에 비해 시원하고 물이 시원하게 흐르는 여름철에 가는 게 가장 좋다. 숙박할 곳은 인근 무주리조트를 비롯해 펜션이나 모텔도 많은 편이다. 구천동 계곡 입구 오토캠핑장에서 야영을 하는 것도 좋은데 예약 경쟁이 워낙 치열해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다.
구천동에 갔다면 밤 시간을 내 무주IC로 가는 도로를 드라이브 해보자. 자신의 차에서 나오는 라이트 불빛 말고는 아무 빛도 없는 절대 고요와 적막을 느낄 수 있다. 이 때 하늘을 보면 별이 마치 우수수 쏟아질 것만 같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