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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재물은 쓰기 나름>눅16 :1~13, 말씀:하용조 목사님
누가복음 16장 1절~3절을 보십시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 집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래서 주인이 청지기를 불러들였다. "자네에 대해 들리는 말이 있는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장부를 정리하게, 이제부터 자네는 내 청지기가 될수 없네". 청지기는 속으로 생각했다. 주인이 내 일자리를 빼앗으려 하는데 내가 무얼할 수 있을까?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 먹자니 창피하구나.(눅 16 : 1~3)
이 <비유>에서 먼저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비유 해석>의 원칙은 양면성이 아닙니다.
<비유>를 양면성으로 보면 이율 배반적이 됩니다.
<비유>는 한가지 목적으로 썼기 때문에, 그 한쪽 면으로 해석 해야만 합니다.
어떤 부자가 청지기 하나를 썼는데, 도덕적 윤리적으로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주인이 하는 말을 들으니까, 그는 멀지않아 일자리에서 쫓겨 날 것으로 생각 납니다.
그러니까 이 청지기는 <좋지않은 사람>입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들고, 빌어 먹자니 창피한 것이 이 청지기의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이 청지기는 성실한 사람이 아니고, 좋지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해고하려고 해요.
이 청지기 자신도 해고난 다음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4절~8절을 보십시오.
]"내가 무얼 할수 있는지 알겠다. 내가 청지기 자리를 잃을 때,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맞아 들이도록 해야겠다. 그래서 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들였다. 그가 첫번째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이 우리 주인에게 진 빚이 얼마요? 그 사람은 올리브기름 100 바투스를 꾸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청지기가 말했다. 당신의 빚 증서요. 어서 앉아서 50 바투스라 적으시오. 그러고 나서 청지기는다른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의 빚은 얼마요? "그 사람은 밀 100코루스 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청지기가 말했다.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서 80코루스라 적으시오.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의 약삭빠른 행동을 보고, 오히려 칭찬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들끼리 거래하는데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삭빠르다.(눅16: 4~8절)
여기를 보면, 불의한 청지기가 잔 꾀를 부려요.
주인한테 빚 진자들을 불러다가 100 바투스라면, 50으로 주인몰래 깍아주고,
후에 직장에서 쫓겨나면 "자기 것을 챙겨달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이것은 일종의 <사기>이고, <횡령>이지요
주인몰래 깍아주고, 자기가 쫓겨 나면 그 후에 자기것을 챙기는 것은 <사기사건>이고, <횡령>이지요.
여기를 보면 주인의 생각은 달라요.
이 청지기는 원래 <사기꾼>이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배울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청지기는 자기 <생존의 방법>으로 돈을 사용했지만, "예수님은 그에게서도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배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메세지는 <주인의 것을 훔치라>는 메세지가 아니고, <미래를 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혹자는 <미래의 기술>을 몰래 "중국으로 빼돌리는 사람도 있다"고 해요.
예수믿는 사람들은 너무나 순진하기 때문에, "세상의 어려움을 겪는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청지기가 "사기쳤다"는 것이 <잘된 일> 이 아니고, 약삭 빠르게 <자기 것으로 못 챙겼다>는말입니다.
예수님은 <뱀처럼 지혜롭게>, <비둘기처럼 온유하게 살자>고 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예수만 믿는 사람보다도 늘 뒤 떨어지지 말고, <당하지고 말고>,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이게 오늘의 <메세지> 입니다..
성도여러분,
사기당하지 말고, 도 사기치지도 말고, 지혜롭게 미리미리 챙기세요.
이 말씀을 잘못해석하면, 이율배반적 상황이 오게 됩니다.
9절을 보세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을 너희를 위해 친구를 만들라. 그래서 재물이 다 없어질 때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장막으로 환영하게 하라. (눅 16 : 9)
재물은 불의한 재물이지만, 잘 사용해야 합니다.
<재물>은 잘 쓰면 <선>이고, 잘 못쓰면 <악>이 되요.
<은사>도 잘 사용하면 방탕한데 쓰지 말고,
<불의한 재물>이라고 할지라도 친구 를 만들때 사용하라
10절~11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적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은 많은 일에도 충성할 것이요. 누구든지 적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많은 일에도 불의할 것이다. 그러나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데 충실하지 못했다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눅16 : 10~11)
이 말씀은 <불의하게 돈을 벌라>는 뜻이 아니고, "비록 불의한 재물이라고 해도, 좋은데 사용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사용하는데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일본에 가면, 한국 여자들이 술집에가서 어렵게 호스테스 생활을 하면서 참 비참하게 살아요.
그리고 일요일이 되면, 그 분들이 교회에 나오는데, 손가락질 하지 마세요.
그 분들을 보면 정말 진실해요.
"나는 비록 몸을 팔고 있지만, 내 마음은 안 그래요"
그래서 일본 교회에서 아주 신기한 일들이 벌어 진대요.
야꾸자의 부인들이 대체로 Konean(한국사람)이 많아요.
예쁜 여자만 골라서 야꾸자의 부인으로 삼았는데, 그 부인들이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을 붙들고 살면서, 남편인 야꾸자을 죽기 살기로 전도 한대요.
그렇게 전도해서 최근에는 야꾸자가 예수를 믿기 시작했어요.
제가 일본에 있을 때에 들은 얘기인데, 야꾸자가 예수믿고, 목사가 되어, 개척한 교회의 Open식이 있었는데, 과연 그들은 야꾸자 식으로 예수를 믿더라구요.
아주 까만 양복을 멋지게 차려 입고, 일렬로 나란히 서서 도열했어요.
벤츠 승용차를 일렬로 배치하고, 헌금도 의무적으로 내게 만들고, 한 말씀하는데도 들어 보니 무섭더라구요.
예배당도 나이트클럽 같이 생겨서 불이 빤짝빤짝 하게 만들고, 자기들 방식으로는 최고의 교회를 만들었어요.
그래도 <교회를 하겠다>고 조직이 인정했으니, 앞으로가 고민이지요?
일본에는 그러다가 "오야붕 예수"라는 영화도 만들었어요.
저는 그것을 보면서 "야꾸자식으로, 예수를 믿는구나" 라고 느꼈어요.
성도여러분!
한가지 예로 부모님이 나쁜 방법으로 돈을 벌었을 경우에 자식은 어떻게 하나요?
그걸 한강에 갖다 버리나요?*****그럴 수는 없지요.
그 대답은 <불의한 재물이라도 영광스런 재물로 바꿔 사용하라>는 말입니다.
불의한 재물도 잘못 다루는 사람은 좋은 재물도 다루지 못하는 법입니다.
12절~13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가 남의 재산을 다루는데 충실하지 못했다면, 누가 너희에게 재산을 주겠느냐?(눅16:12~13)
하나의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합니다.
이 <주인>은 미워하고, 저 <주인>은 사랑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저 <주인>에게 헌신하고, 이 <주인>에게는 무시할 수 있습니까?.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수 없다."고 했어요.
결론은 <하나님과 재물은 동시에 섬길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해야 합니다..
만약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을 섬겨야 해요.
그리고 돈은 쓰세요.
돈은 섬기지 말고, 좋은 곳에 아낌없이 써야 해요.
그래서 돈은 돌고, 또 돌아야 한대요. 그렇게 돈이 돌면서 활용되어야 경제에 보탬이 되지요.
성도 여러분, 오늘의 말씀을 정리합니다.
<재물>은 그 자체가 [가치 중심]입니다.
<재물>이 [악인]의 손에 쥐어지면 <악인의 도구>로 사용되지만, [의인]의 손에 들어가면
<선행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여기서 <불의한 재물>이란 청지기 맘대로 사용한 주인의 재산을 말합니다.
청지기는 실직한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서,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청지기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만든 것입니다.
성도는 <부>를 통해서 많은 영적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재물을 사용해서 <선한 열매>를 거둔다면, 하나님은 [더 큰 것]을 맡길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온누리에 가득하길 바랍니다.
<앰마오 길에서 만난 예수>눅24:15~38, 말씀:하용조 목사님
오늘의 말씀은 <엠마오 도상의 사건>으로,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사건>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들의 <눈이 감겼다가, 눈을 뜬 사건> 입니다.
그들의 옆에 예수님이 함께 계셨는데, 그들의 눈이 감겨서 예수를 알아 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어떤 계기로 그들의 눈이 떠져서, 예수님을 알아 보았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를 만나 보기 전에는 <그들이 변하지 않았는데>, 어떤 계기로 <변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고, 안 믿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얘기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옆에 있는데도 몰라보지만, 어떤 순간에 그걸 느끼게 됩니다.
<사도바울>도 예전에는 예수믿는 사람을 죽이려 했던 사람이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직업도 바꾸고, 자기 인생관도 바뀐 사람입니다.
그동안 우리들도 예수를 열심히 믿었는데도, 예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런 분들은 마치 눈이 먼, 장님과 같아요.
이런 분들도 어떤 계기가 오면, 그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에 가슴이 뜨거워 집니다.
예수님을 내가 느끼는 순간에, 갑자기 내가 변해 버리는 거예요.
이것은 뱀이 비늘을 벗는 것처럼, 내가 순식간에 변하게 되는 거예요.
이것을 가리켜 기독교에서는 <십자가의 체험>이라고 말해요.
[십자가]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마음으로 <체험해야> 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다가 40년 전에 <내가 예수를 만났을 때>를 기억했습니다.
저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서 예배와 구역예배등 익숙하였지만,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 때는 회의에 빠졌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너무나 잘 알고, 경험적으로는 예수를 믿지만, 내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어서,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어요.
"진짜 하나님이 계실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었다"고 하나?
그런 의문이 생긴것은 내가 만나 본 적이 없고, 직접 확인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다가 재수하면서 여름에 마음이 어려울 때, 3박4일로 집회
마지막 날 기도 속에서, 환상 속에서, 예수님을 만난 거예요.
내가 그날 밤에 만난 예수님은 흰옷을 입고, 내기도 속에 나타나, "내가 너를 위해 죽었노라"
"내가 너를 지금까지 기다려 왔는데, 너는 왜 나를 영접하지 않았니?"
"나를 문밖에 세워두고, 그냥 놔두겠느냐? 나를 영접해 주지 않겠니?"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날 예수님을 만났고, 너무도 놀래서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20대 청년시절에 그런 일이 있고부터, 저는 지금까지 <그때 그시간>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목사가 된 계기가 되었고, 저를 완전히 달라지게 만든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때 그 사건>이 제게 "눈을 뜨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여러분들도 저와 같이 이렇게 눈이 떠지기를 바랍니다.
그럼,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눈이 감겼고> <어떻게 눈이 떳는가?>를 살펴 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눈을 감을 때도 계시고, 눈을 떳을 때도 언제든지 나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늘 함께 계십니다.
누가복음 24장 1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면서 이야기 하고 토론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걸어 가셨습니다"(눅24:15)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님이 처형되고, 처형된 그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 약 11Km 의 거리를 두사람이 걸어 갔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처형된 사건이 너무나 충격적이므로, 그 얘기를하면서 가는 길에 "예수님이 같이 동행했다" 는 거예요.
그러나 그들은 영적인 눈이 멀어서 <그 사실>을 모르고 있어요.
자!, 이 이야기에서 얘기의 욧점이 뭐예요?
예수님이 옆에서 같이 걷고 있었는데, 눈이 먼 두사람은 "그걸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같이 걷고 있다"는 사실을 두사람이 모르고, 예수님은 거기 같이 걷고 있었어요.
우리들도 평소에 생활하면서 내가 못 알아 본것이지, 예수님은 언제나 나와 같이 계셔요.
16~1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옆에 있는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이 걸어가면서 서로 주고 받는 이 말이 무슨얘기요? 그들은 슬픈기색으로 가던 길을 멈추어 섰습니다"(눅 24:16~17)
여기서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예수를 몰라볼 때에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순간순간에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지난번 내가 겪은 교통사고가 혹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건 아닌지?"라고 자문 자답할 때가 많습니다.
18절~20절을 보십시오.
"그중 글로 바라는 사람이 그분께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오?"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 말입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능력이 있는 <예언자>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주어 사형선고를 받게했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눅24:18~20)
동화도 좋고, 영화도 좋고, 소설도 좋습니다.
예수에 관한 것은 무조건 보십시오. 그럼, 뭔가를 느끼게 됩니다.
그 분은 능력있는 <예언자>인데, 로마 군인들은 그 분을 죽게 했어요.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아는 객관적인 사건인데, "거기 <혼자만> 몰랐다"는 얘기입니까?
두 사람은 예수님에게 "왜, 당신만 모르느냐?" 고 야단을 쳤습니다.
여기서 <혼자만>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그분이 예수님 입니다.
소문은 다른 사람은 다 알고 있는데, 정작 소문의 당사자는 모르는 법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을 구속해 주실 분이 바로 <그분>이라고 바라고 있습니다. 그뿐아니라 그런 일이 있은지 3일째 됐는데, 우리 중 몇몇 여인들이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들이 아침 일찍 무덤에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천사들이 <예수께서 살아 계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동료 몇 사람이 무덤으로 가 보았더니, 그 여인들이 말한대로 <그분을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눅24: 21~24)
21절에 나오는 소문을 들어 보세요.
첫 번째 소문은 나는 몰랐는데, "그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분"이라는 거예요.
두 번째 소문은 "벌써 3일이 돼었는데, 그 사람은 무덤에서 없어지고, 천사의 환상을 보았다"는 거예요.
세 번째 소문은 "예수님은 죽었는데, 다시 살아났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더 특이한 사실은 여기에 나오는 문맥을 자세히 읽어 보세요.
이런 사실들은 자기가 본 것이 아니고, 그냥 그런 <소문을 들었다>는 전달이예요.
천사를 본 것이 아니고, <보았다고 하더라> 입니다.
소문을 직접 자기가 본 것이 아니고, <그랬다고 하더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여인이 무덤에 갔다"는 사실을 <소문으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여인이 무덤에 간 것을 직접 본 것이 아니고, "소문만 들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본 것은 하나도 없고, "소문만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눈을 뜨지 못한 상태>를 우회적으로 설명하는 말입니다.
내용은 다 사실이지만,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고, 소문만 들었기 때문에 <눈이 떠지지 않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 자신은 확신이 없고, <누가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라고 전달한 것입니다.
내 이성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니까, 내 감정은 동의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바로 옆에 예수님이 있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합니다>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 경우에 내가 예수님이라고 해도, <나다*****나>라고 말하려고 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허구성> 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눈을 뜰수 있습니까? <눈뜨는 비결>은 25절에 나와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고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것을 마음에 더디믿는 사람들이여! 그리스도께서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 나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24:25)
영적으로 <눈을 뜨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첫번째 비결은, "어리석은 자"라고 야단을 맞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눈 앞에 있는 자기를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정말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라고 질타하십니다. "왜 믿지 않느냐?"는 것은 자기가 안 믿는 것이지 "예수가 구원자가 아니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안 보인다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눈이 가리워져서 안 보이는 것이지, 사실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너는 네 의지와 판단력만 믿으니까 안 보이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확실히 보이는 것입니다.
두번째 비결은, 구약성경을 열심히 읽으세요.
27절을 보세요.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해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해 언급된 것을 그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눅24:27)
예수님에 관해 알려고 하면, 구약을 읽으세요. 예수님은 모두 다 성경에 얘기해 주었는데, 사람들은 성경은 읽지 않고, "모른다고만 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결국은 모두 다 예수님 한테로 연결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구약 종교만 보고 있지, <선지자들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눈이 떠지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모르는 거예요.
결국 성경은 창세기에서 요한 계시록까지 계속해서 성경을 읽다가 보면,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들은 설교를 많이 들었지만, 내용을 모르는 것은 계속해서 같은 내용을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모세의 글이나 예언자의 말씀이 결국은 신약의 예수에게로 모두 다 연결돼요. 예수님도 27절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그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고 했어요.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그냥 읽고 지나가지 말고, 깊히 묵상하세요. 그러면 진리를 발견하게 돼요.
세번째 비결은, 성경을 자세히 읽고, 깊이 묵상하세요!
일반 교회의 목사님들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성경구절을 뽑아서 설교하므로, 전체의 흐름을 모를 수 있어요. 성경을 <이쪽, 저쪽>으로 <왔다, 갔다>하면서 부분 부분을 들으면, <전체의 맥>을 이해하기 어려워요.
온누리교회는 성경을 같은 내용으로 매 주일 쭉 같은 주제로 성경공부하듯 설교해요. 저는 마태복음을 5년, 창세기를 3년, 이사야서를 2년간 계속해서 같은 주제로 설교했어요.
여호와의 증인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내용만 성경에서 뽑아서 읽어요. 그래서 이상하게 되어 <이단>이라고 하는 거예요.
네번째 비결은, 눈을 뜨는 비결은 <성만찬>에 참여해야 합니다.
<성만찬>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고, 예수님의 몸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행위입니다. <성만찬>은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살인 떡이 내 몸에 들어가고, 예수님의 피인 포도주가 내 몸속에 들어가서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사라지고, 영으로 오신 예수님은 내 몸속에 남아있는 것이 <성만찬>이예요.
예수님이 내 몸 속으로 들어오니까,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몸에 들어오니까, 내 몸 속에 있던 마귀가 난리치며 나가서 <내가 변하는> 거예요.
마귀의 몸부림으로 인해 내가 아프고, 결국은 내가 <성령의 마음>으로 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몸 속에 마귀가 나가거나, 성령이 나가거나, 둘중에 하나가 내 마음을 지배하게 돼요.
이제, 그들은 엠마오 마을까지 걸어 오면서, 수많은 얘기를 나눴어요. 그리고 쉬었다 가려고, 어떤 집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었어요. 여기에 나오는 저녁식사가 <성만찬>입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가려던 엠마오 마을에 다다르자, 예수께서는 더 가시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를 한시코 말렸습니다. 저녁이 다 됐으니, 여기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요. 날이 저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묵으려고 집에 들어 가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상에 기대어 앉아 빵을 들고, 감사기도를 드린후, 떼어 그들에게 나눠 주셨습니다." (눅24:28~30)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순서상 그들이 예수님에게 떡을 떼어 주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떡을 떼어 주십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성만찬>과 어떤 의미입니까? <성만찬>에 참여해서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서 "예수님이 내몸에 있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의 떡과 피를 마시면, 내가 예수님을 먹어서 살과 피가 되어, <내 삶의 한부분으로 된다>는 거예요.
그때서야 영적인 <눈이 떠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 몸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내가 변하여> 내몸에 난리가 나는 거예요.
그래 내 몸 속에 성령이 자리잡고 있어야 해요. 이제 31절을 먼저 본 것과 같이 <그제야!> 그들이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 보았습니다.
그런다음 32절에서는 간증이 시작됩니다.
누가복음 24장 31절을 먼저 보십시오. "그제야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곧 예수께서 그들의 눈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눅 24:31)
여기에 나오는 <그제야>라는 단어를 주목하세요. 그들은 <그제야> 영적인 눈이 열린 것이지요.
빵을 먹을 때에도 몰랐는데, 갑자기 <그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알아 본 순간에 예수님은 떠나고 사라졌어요. 이것은 예수님은 죽어서 부활한 몸이기 때문에 육신이 아니 보이고, <영>이므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이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와서, 내게 남아 있으므로 나를 사로 잡는거예요. 그래서 32절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으니까 마음이 뜨거워 지는 거예요.
32절을 보세요. "그들이 서로 물었습니다. 길에서 그 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주실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 지지 않았느냐?(눅24:32)
그들이 즉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몸안으로 들어온 다음 밥을 먹다 말고 즉시 일어나 엠마로 가는 길을 방향을 바꿔서 예루살렘으로 향했어요. 이것은 십자가를 경험하면서 인생의 방향이 바뀐거예요.
마음이 뜨거워 지면, 우리의 현실은 아무리 어려워도 져도 문제가 되지 않아요. 내가 최악의 상황에 빠져도 두렵지 않는 이유는 그래서 내가 담대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내 마음 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려워도 예수님의 <영>이 내 마음속에서 역사하니까 나는 <능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성도님들이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이런 예수님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저는 오늘 엠마오의 두사람처럼 <눈이 감겼다 눈이 떳다>하는 것을 설명하였습니다. 두사람은 눈이 가려져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못 알아 보고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의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왜 저렇게 잔인하게 죽었을까? 그는 능력있는 분인데, 왜 저항하지 않고 그냥 죽었을까? 그는 죽지 않고, 그 상황을 벗어날수 있었는데 왜 죽었을까? 죄 있는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죄없는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경험하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중요하지 않게 생각돼요. 그래서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이분들이 선교사들이예요.
선교사님들은 예수를 만나고 나서 자기가 하던 모든 일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요. 내가 가려던 길이 아니고, 예수때문에 예수의 길로 방향을 바꾸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절 새벽, 첫날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의미있는 일들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
빈방 있습니까?/눅2:1~7, 말씀:안광복 목사님
오늘은 [예수탄생]의 말씀을 아주 평범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1~4절을 먼저 보십시오.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로마 전역에 호적을 등록하게 했습니다. 이런 인구조사는 구레뇨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 처음으로 실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적지에 등록하려고 모두 고향으로 돌아 갔습니다. 요셉도 갈리리 나사렛을 떠나 다윗 마을인 베들레헴으로 올라 갔습니다(눅2:1~4)
당시는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지배를 받는 모든 사람들은 "호적을 등록하라"고 칙령이 내려져서, 모두 자기의 고향으로 몰려가고 있었습니다.
<호적에 등록하라>고 하는 목적은 첫째로, 징집을 위해서 였지만, 후에는 세금을 걷어들이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명령을 내린 구레뇨는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으로 스스로 [신과 같은 존재]라는 이름으로 <가이샤의 아들>이라고 불렀으며, 자기 이름에 <아우구스투스>를 갖다 붙인 사람입니다.
4~7절을 보십시오.
"요셉은 다윗 가문의 직계 혈통이므로 호적을 등록하러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그 때 마리아는 임신중이었으나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해산할 때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마리아는 첫아들을 낳아 천으로 싸서 구유에 눞혔습니다."(눅2:4~7)
여기에 나오는 여관은 2인 1실로 사용하는 요즘같은 개념이 아니고, 대청봉 정상에 있는 <합숙소>와 같은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따로 수용 되는 인원이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여관의 주인은 "빈 방이 없다"고 말하며, 그들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경에 자세한 얘기는 없지만 우리가 추측해 보면, 마리아의 모습이 출산을 앞둔 산모였기 때문에 거절한 것 같습니다.
그럼, 왜 거절했을까요?
그것은 주인의 입장에서 아이를 낳으면 돌봐주어야 하기 때문에 귀찮게 생각했을 것이고,
아니면 혹시 해산을 한다면 수발들어 주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겠죠.
어찌되었건 주인의 입장에서는 <출산한다>는 것이 귀찮을 것이고,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요셉과 마리아가 찾아간 곳이 [마굿간]입니다.
요한복음 1장 11절을 보면,
"그분이 자기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들이 그분을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요1:11)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집주인 입장에서 [메시아가 탄생]되는 순간에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절]하였습니다.
[죄]는 [거절]로 부터 시작됩니다.
나중에 아는 사실이었겠지만, 집주인은 그날 [메시아의 탄생]을 외면함으로 역사적인 주인공에서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이땅에 오시는 순간에도 소외당했고, 그분은 이땅에 살면서도 어렵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찾아 다니면서 생활을 했어요.
그리고 그가 돌아가실 때에도 가장 잔인한 [십자형]으로 죽었어요.
그가 죽었던 골고다 언덕은 예루살렘 성 밖에서도 <해골의 언덕>이라고 불리는 아주 후미진 곳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태어났고, 또 그렇게 어려운 자들을 위해 살다가, 결국은 가장 참혹한 모습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그는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무덤이 없어서 남의 무덤을 빌려서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구유에서 무덤]에 이르기 까지 자신을 위한 것은 한가지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누릴 수 있었던 분이지만, 정작 그 분이 갖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 분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오직 [사랑하는마음]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첫째,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둘째, 죄인과 원수들을 [용서하는 마음]과,
셋째,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과,
넷째,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열정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낮아짐]의 원리를 실천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는[종]의 원리와 [섬김]의 원리에서 시작되고,
그것을 고리로 서로 서로를 연결해주는 [다리]가 되어야 하고, [뿌리]가 되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히 예수님처럼 자기가 [희생]되어야 해요.
우리들은 성탄절이 되면 <아기예수>와 동방박사들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아기 예수는 구유에 누워서 환하게 웃고있는 모습이지만, 2000년 전의 탄생순간을 우리가 상상해 보면, 말할수 없는 <비참한 모습>이 깔려 있어요.
여러분! 그 때의 마굿간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거기에는 동물의 먹이와 배설물로 냄새가 뒤범벅이 되어서 좋지 못한 냄새가 났을테고, 주변 환경은 너무도 열악하여 구역질이 났을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요셉과 마리아는 갈곳이 없었으니까, 그 곳에서 아기을 낳으려 했어요.
그러나 그 곳이 객지이므로 모든 준비가 없는 것은 당연하고, 산모는 어쩔줄 몰라서 쩔쩔매고, 산고의 고통으로 배를 움켜 쥐면서 소리를 질렀을 꺼예요.
하나님은 가장 낮고 비참한 모습으로 아기 <예수탄생>을 미리 알고 계셨지만, 처음 당한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예수의 탄생순간을 가장 어렵고 힘들게 맞이 했을 꺼예요.
물론 독생자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지만, 이를 받아 들이는 아버지와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너무도 어둡고, 비참한 순간이었을 꺼예요.
여기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빈방 있습니까?" 이므로, 여관집 [주인의 입장]에서 한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찾아 온 고객이 "빈방 있습니까?" 라고 묻는데, 흘깃 쳐다보니 그 옆의 배가 남산만큼 부른 산모를 보면서 그 순간에 "빈 방이 없는데요"라고 매몰차게 거절하였습니다.
이 말을 하고, 주인도 무척 괴로웠을 꺼예요.
그러나 그가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에 그는 이미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손님을 영접하지 못한 결과>를 얻은 거예요.
교우 여러분!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여관 주인의 실수가 오늘의 우리에게도 <혹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도 세상에 살면서 평범한 일상생활에 몰입하다 보면, "그분을 잠시 잊어버리고, 외면하지는 않으십니까?"
혹시나 "바쁘다는 이유로 자신의 쾌락만 추구하고, 주님 영접하기를 거부하지는 않으신지요?"
교회안에서도 종종 이런 일들이 있어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지만, "지금까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성도가 있습니까?"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어찌보면 여관주인처럼 [빈방]을 내 드리지 못한 성도들이 있습니까?
현대인들은 성탄절을 맞아 <의미없는 선물>을 주고 받지만, 진정한 <성탄절의 의미>를 모르면서 축하 파티에만 열을 올리고 있지 않으십니까?
엉뚱한 산타크로스를 앞세워 영업적인 상술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크리스마스]는 무슨 날입니까?
본래 [크리스마스]라는 뜻은 그리스도(christ)와 "예배한다"는 Mas의 합성어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고, 예배드린다>는 뜻입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온 백성들이 예수님의 <아기탄생>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좋은 날>이 [성탄절]입니다.
이날은 한마디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날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이 되실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야만>했기 때문입니다.
그 대답은 빌립보서 2장 6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모든 특권을 버리시고, 종의 형체를 빌려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빌2:6~7)
"그리고 그 분은 자신을 낮춰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빌2:8)
그분은 본체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왔지만, 예수님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입니다.
교우여러분!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는 "빈방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그 분이 들어갈 방은 준비되어 있습니까?"
"그 방은 이 추운계절에 따뜻하게 데펴 놓았습니까?
교우 여러분!
물론 따뜻한 방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부엌시설이 좀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분 좋은 햇살이 들어 오는 창문이 없어도 좋아요.
그냥 주님이 편히 쉴 공간만 확보되어 있으면 좋습니다.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분을 향한 [준비된 마음]입니다.
저는 이번 성탄절에 우리들이 선물을 준비하는 것 보다도, 그 분을 위해 [마음의 빈방]을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그 [빈방]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마음을 갖는 있다면,
그곳이 아무래도 좋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빈방]을 만들어, 거기서 예수님을 받아드리고, 그 분을 만나는 [축복]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시기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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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3/예수는 <메시아>이시다/눅4:14~22/말씀:하용조 목사님
현대인들에게는<메시아>라고하면 헨델이 작곡한 <할렐루야>가 나오는 <메시아>만 기억하지,
구약에서 예언한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에서 끊임없이 예언하고 있는 [구약의 사상]인 <메시아>는 잘 모르고 지냅니다.
성경은 "그가 세상에 와서, 사람들을 구원하고, 또다시 재림 주로 다시 오실 것이다"라는
<구약의 메세지>는 깊이있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메시아>의 뜻은 무엇입니까?
<메시아>라는 단어는 <기름 부음을 받은자>라는 뜻으로 신약 성경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일반적으로는 "구분된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세상의 것과 다르다"는 뜻
으로 <거룩>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기름부으심>을 받는데, 아무나 기름붓지 않고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에게 사용되는 말입니다.
두 번째 의미로 구약의 <메시아>는 현재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고, <앞으로 오실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시키기 위해 오시는 <구원자>라는 뜻이 있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구약에서 최초로 기름 부은 사람은 <사울 왕>입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실패한 왕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사울 왕 다음으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인 다윗을 다시 기름부으셨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무슨 말입니까?
<기름을 부었다>는 말은 여호와의 신이 감동하여, 하나님의 일을 <섬기는 종>이라는 뜻으로,
<섬기는 사람>을 뜻합니다.
<메시아>라는 단어는 성경에 자주 나온 단어는 아닙니다. 성경에 90번 정도 나옵니다.
"메시아가 탄생할 것이다"라는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예수가 탄생하기 전에 기록된 이사야서 7장 14절에 이미 기록되어 있었어요.
"여호와께서 직접 너희에게 표적을 주실 것이다.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다(사7:14)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에 대해 잘 모르지만,
"메시아는 1) 선지자이며, 충실한 제사장이고, 그는 왕일 것이다.
2) 메시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줄 것이다.
3) 메시아가 이땅에 오면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다."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전체를 보더라도 곳곳에 메시아의 이름과 그 이름이 주는 의미와 역할등을 발견할 수 있어요.
<모세오경>에도 1) 메시아가 <씨>가 될 것이다.
2) 메시아는 아브라함을 통해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3) 노아를 통해 무지개를 보여 주었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것이다.
예수믿는 사람은 주님의 재림과 <예언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려움 속에서도 <새 예루살렘>을 기다리며, 희망을 품고 삽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비전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만 주는 말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전 자손들에게 주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너는 너희 본토 천적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1~2)
구약 사람들은<메시아>를 기다렸지만, 그가 누군지를 몰랐어요.
시편에는 <메시아> 얘기가 더 많이 나와요.
그는 정복 자일 것이고, 그는 소리의 왕이고, 배반당한 메시아일 것이다.
성경을 읽다보면 이런 <메시아 사상> 때문에 은혜를 받는 거예요.
그래서 희망과 용기와 은혜를 받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무엇을 했을까요?
첫 번째로 한 일을 <마귀의 시험>을 이겨야 했고,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했어요.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이 오듯이, 우리의 마음속에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믿는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합니다.그래서 크리스찬의 얼굴은 찡그릴 시간이 없어요.
그러므로 "항상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예수안에서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5:16~18)
선지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기를 당할 때마다 <메시아>가 나타납니다.
그들이 고난이 깊을 수록 <메시아>의 기대감은 더 커집니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메시아의 이름은 <여화와의 싹>입니다.
메시아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고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그는 "코너 스톤=기초석"이다. 열방의 백성들이 그에게 몰려올 것이다.
이런 <메시아 사상>은 너무도 중요하니까 제가 설교하는 것 보다, 성경을 읽는 것이 더 은혜롭습니다.
이사야서 11장 1~4절을 보십시요.
"잎새의 줄기에서 새순이 돋아나고, 뿌리에서 새 가지가 나오듯이 다윗의 후손가운데서, 한 새로운 왕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머물 것이다.
그는 여호와를 즐겨 경외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귀에 들리는대로 결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약한 사람들을 공의로 판결하고, 세상에서 학대받는 사람들을 위해
정직하게 결정을 내릴 것이다.(사11:1~4)
이렇게 읽기만해도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 져요.
예수가 <하나님>이니까, 못할 일이 없어요.
<그가 하나님>인데, 무엇인들 못하겠어요.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믿지 않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지, 메시아에게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말씀은 누가복음 4:16~18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성령님의 능력을 받아 갈릴리로 돌아오시자, 이 소문이 사방에 퍼졌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영광를 받으셨다.
예수님은 자라나신 고향 나사렛으로 가셔서 , 전에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셩경을 읽으려고 일어나서 이사야의 예언서를 받아 이렇게 쓰인곳을 찾아 읽으셨다.
주께서 나의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으니,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소식을 전하게 하시려고
나를 택하여 보내셨다. 그가 나를 보내신 것은 마음이 상한자를 고치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표하며, 눈먼 사람을 다시 보게하고 억눌린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셨다.(눅4:16~18)
이 말씀을 요약하면, 성령이 임하면 <기름부으심>을 받고, <기름부으심>이 나타나면
1) 마음이 상한 자는 고치시고
2) 못 보는 사람에게는 보게 하는 치유를
3) 억눌린 사람에게는 해방을 주기 위해서 <메시아를 이땅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21절의 결론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너희가 듣는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눅4:21)
그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제 읽은 성경 말씀이 오늘날 너희에게 이루어 졌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여러분!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구약에서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셨다"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탄>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설교하는 것은 <이것이 이루어 졌다>고 확실히 믿고 설교해야 하고,
듣고 있는 성도님들은 <그 말씀이 이루어졌다>라고 생각하면서 들어야 하고,
그 말씀이 성도님들의 마음에 꽂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메시아>입니다.
구약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가 예수님으로 탄생한 것이
<성탄절>입니다.
이런 <성탄>이 여러분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성탄4/영광과 평화/눅 2:14/말씀:하용조 목사님
[성탄]은 하나님께는 <영광>이고, 이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나타나야 하고, 땅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에게 <평화>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어렵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평화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기쁜 소식인 <복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성탄절>에 등장하는 크리스마스 트리나 성탄 카드와 산타클로스는 성탄의 내용(알맹이)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탄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는 모르고, <장식품>만 좋아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어렵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오늘은 성탄을 맞으면서 [성탄]에 관한 <상징적인 단어>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성탄의 첫 번째 코드는 별(Star) 이지요,
성경에서는 이 [별]을 <예수님의 별>이라고 표현해요.
마태복음 2장 1~2절을 보십시오. “헤롯왕 때에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예수께서 태어 나시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수살렘에 찾아와 물었습니다. 유대 사람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예수의 별>을 보고, 경배드리려고 왔습니다.”(마2:1~2)
[별] 중에는 여러 가지 [별]이 있는데, 예수님에게 빛을 비추는 “<예수의 별>이 있었다.”는 거예요.
별들을 연구하는 동방이 있는 천문학 박사가 유대 땅까지 그 별을 추적하여 “베들레헴까지 찾아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별]이 일종의 “<안내자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지요.
우리들도 모두 그런 <별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희망합시다.
마태복음 2장 10절을 보십시오. “박사들이 별을 보고 뛸 듯이 기뻤습니다.”(마2:10)
동방박사를 안내하던 [별]은 헤롯왕을 만나면서 잠깐동안 없어졌다가, 또 다시 나타났어요.
이것은 헤롯왕이 그 별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찾고있는 순간에 나타 난 현상이고,
별을 따라 오던 동방박사들은 “다시 나타난 별을 보고, 다시 찾게 되어 뛸듯이 기뻣다.”고 했어요..
이 말씀은 우리들의 신앙 생활에도 이와 같은 <기쁨>이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를 생각하면서 콧노래가 저절로 나오고, 춤추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소리 지르고 싶은
<즐거운 충동>을 한번 쯤은 경험해야 하고, 매번 예배드릴 때마다 이런 <감격>이 자신에게 새롭게 나타나야 합니다.
그럼, 이런 <즐거움>은 언제 나타 납니까?
그것은 내가 손해를 볼 때 나타 납니다.
내가 감동하여 내 자신을 버릴 때 나타 납니다.
즉, 내가 남에게 헌신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를 즐겁게 하면 나만 만족을 시키지만,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면, <감동>이 오지요.
일본에는 <무목교회>가 많아요. <무목교회>란 목사님 없이 예배드리는 교회를 말합니다.
목사님 없이 예배드리고, 성경을 가르치고, 자기네끼리 성경공부를 하는 모습이 안쓰러워요.
이런 교인들과 같이 내가 참고, 내가 희생하고, 내가 손해를 봐야, 누군가 은혜를 받고 남들이 감동을 하게 되요.
저는 여러분의 친구가 여러분의 전화를 받으면, 뛸 듯이 기뻐하는 친구가 있으시기 바랍니다.
혹시 지금 없으시다면, 그런 친구를 만드세요.
그러나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먼저 <내가 나한테> 감동이 와야 해요.
그리고 <내가 손해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나한테 감동이 되어, 내 자신을 버릴 때” 나타 납니다.
“그래! 그래! 잘했어!”
“지sks 번에 그런 결정은 너무 멋졌어! 그건 너만 할 수 있는 거야.”라는 감동을 느껴보세요.
2. 성탄의 두 번째 코드는 <동방박사>와 <양떼>와 <양을 지키는 목자>입니다.
마태복음 2장 11절을 보십시오.
“집으로 들어가 보니, 아기가 그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엎드려 아기에게 경배하고 보물 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마 2:11)
동방박사들은 <지성인>인데도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의미있는 행동입니다.
동방박사가 드린 예물이 뜻하는 것은 “①황금은 <예수님의 순결>을 상징하고, ②유향은 <예수님의 향기>를 의미하고, ③몰약은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한다“고 말하기도 해요.
그래서 3가지 선물의 의미는 <예수님의 일생>을 의미하기도 해요.
결국 동방박사와 목자들은 인류를 대표하여 <예수탄생>을 기뻐했고, 그 사실을 목격했던 거예요.
우리들의 주변에도 예수님을 의미하는 일들이 많은데 우리들은 그것을 찾고, 그 의미를 알아야 해요.
그러므로 주변에 있는 헐벗고 가난하고 소외당한 이웃들을 예수님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세요.
그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예수와 같이 느껴졌다면 <그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들의 주변에는 그런 예수와 같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요.
3. 세 번째로 성탄을 의미하는 상징어는 <말 구유>입니다.
[말 구유]는 <말의 먹이 통>입니다.
누가복음 2장 7절을 보십시오. “마리아는 첫 아들을 낳고는 천으로 싸서 구유에 눕혔습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빈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눅2:7)
하나님이신 예수가 세상에 왔을 때, 예수를 환영할 만한 빈방이 없었어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예수님은 <말 구유>에 태어 났습니다.
짐승들의 먹이 통인 <말구유>는 낮고 천한 곳인데, 왜 이런 곳에 예수가 태어 났습니까?
그것은 그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헤롯이 예수님을 질투하여 두 살 이하의 어린이를 다 죽이는 비참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출생부터 십자가를 질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만 되면 생각나는 연극이 하나 있어요.
그것은 <빈방 없습니까?>라는 연극입니다.
이 연극의 메시지는 예수가 탄생하면서 “환영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4. 네 번째로 성탄이 상징하는 언어는 <천사들>입니다.
요셉도 정혼한 아내가 임신한 것을 보고 처음에는 놀랐다가, 오히려 더 신중해 집니다.
그 때 천사들이 꿈에 나타나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0~21절을 보십시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 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라. 마리아가 가진 아기는 성령으로 임신된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가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할 것이다(마1:20~21)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태어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성탄을 논할 <자격>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임신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까요?
그것이 <성탄>이요,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또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가 있습니다. 그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죄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여러분, 죄인은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죄가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에 우리를 구원할 자격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8~11절을 보십시오. “한편 목자들은 바로 그 지역의 들판에서 살면서 밤에는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주의 천사들이 그들 앞에 나타났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환하게 둘러 비춰서 그들은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천사가 말했습니다. ”두려워 말라, 보아라, 내가 모든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알려 준다. 오늘 구주이신 주 그리스도가 다윗의 동네에서 태어 나셨다.(눅2:8~11)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세상에 왔지만 태어날 장소도 없었고, 아무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먼 나라에서 찾아온 <동방박사들>과 밤에 짐승을 지키는 <목동>과 하늘의 <천사들>뿐이었습니다.
인류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이들 몇몇 사람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5. 마지막으로 성탄의 상징어는 <영광과 평화>입니다.
누가복음 2장 14절을 보십시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는 사람들에게 <평화>입니다.”(눅2:14)
우리들 끼리 아무리 원수사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중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가운데서 화해시키는 <화해자>가 되어야 합니다.
“니가(당신이) 먼저 화해를 원한다면, 나도 화해에 응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자기가 먼저 화해를 시도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어요.
그러나 <내가 먼저 화해하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갈등에 내가 먼저 <화해자>가 되어, 성탄의 기쁨을 받아드리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성탄절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날>입니다.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선물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과 생각을 닮기 원하고, 비전을 품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기득권을 포기하는 날>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탄>은 성육신, 즉 “하나님이 인간이 된 사건”입니다.
그분은 본래 하나님이셨는데, 기득권을 포기하시고,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원칙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가 아니라, <저 낮은 곳을 향하여>입니다.
죄의 본능을 가진 인간은 더 높아지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섬기기보다는 지배하려고 하고, 지배당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이것이 <죄의 본능>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죽기까지 순종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성탄>이 되시기 축원합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 눅 5:1-11/ 말씀: 하용조 목사님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부하면서 <부름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혼자서 일하지 않고, 제자들을 불러서 제자들과 함께 일했어요.
이것은 “함께 동역한다” = “함께 일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의 3위가 존재하면서 <하나님>이 되듯이, “함께 동역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모여서 하나의 위대한 <공동체>를 만들고 같이 생활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팀웍>을 만들어서 생활할 때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고기 잡는 일>보다 <죽은 영혼을 살리는 일>이 더 급했던 것입니다.
고기 잡는 일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선택 하는 일>이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내용도 모르고, 고기 잡는 일에 전념하고 있었을 때, 예수님이 나타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어요.
먼저 누가복음 5장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셨습니다.”(눅 5;1)
여기서 우리는 2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첫째,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여러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말씀에 맛을 본 사람은 포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세상에 만족하지 못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집에 가지 못하고, “예수님을 따라 다녔다”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수많은 사람들이 요구가 있을 때에 예수님은 “갈리리에 서 계셨다”고 했어요.
저는 여기서 예수님은 무엇을 보고 서 있었을까요?
바다를 바라보고 계셨을까요? 군중들을 바라보고 계셨을까요?
우리는 가끔 사람들의 <필요>를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들을 가족의 문제를 생각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무엇을 바라보고 계셨을까?“라는 의구심이 생겨서 나는 혼자서 상상해 보았어요.
그때 예수님은 <이런 사역은 내가 혼자서 할 일이 아니라, 제자들을 모아서 같이 협력해서 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거예요.
실제로 누가 이런 일을 해야 합니까?
장로님들이 팔을 걷어 부치고, 심방을 가고, 전도를 해야 합니다.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고,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성전을 깨끗이 청소하고,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함께 일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동역하는 방법>을 찾아서 서로 협력하는 방법을 찾게 됩니다.
[리더십]은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영향력>을 주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영향력>은 많은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바다를 바라보며 제자들에게 <미션>을 주고, 그 <미션>을 수행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 주실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보시니, 배 두 척이 호숫가에 대어 있고, 어부들은 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눅5:2)
예수님은 어부들을 보면서, 1. 첫째, <목마른 영혼>을 생각하면서 불쌍히 여기고 계셨고,
2. 둘째,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바다를 향하고 있었으니까 배 두 척을 보고 있었어요.
거기에 요한과 안드레를 불러서 <같이 일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명>이고, <부름>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고, 우리의 <인생>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서 계신 예수님은 “이런 두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그들 중 시몬의 배에 올라타 그에게 <배를 뭍에서 조금 떼어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배 위에 앉아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눅 5:3)
여기에서 저는 <교회>가 생각나요.
예수님은 바닷가에서 배로 옮겨서, 배 위에서 군중들을 향해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강대상을 <배>라고 생각하면서, 물가에 있는 청중들에게 설교를 했어요.
4절을 보십시오. “말씀을 마친 후 예수께서 시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물이 깊은 곳으로 나가 그물을 내리고 고기를 잡으라.” (눅 5:4)
예수님의 의도는 <제자들을 부르는데> 있습니다.
밤이 맞도록 고기 한 마리를 잡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황당한 명령을 했어요.
이 말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 말씀 속에 1. 첫 번째 의미는 <과거의 사고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창조적인 생각을 하라>는 말입니다.
과거의 생각과 습관을 버리고 “과거에 고기 잡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법으로 고기를 잡으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 막히면 새로운 방향으로 방법을 바꿔서 새롭게 시도해야 합니다.
<한쪽> 문이 닫히면, “<또 다른 쪽>의 문이 열러 있다”는 말씀입니다.
2. 두 번째 의미는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이 말은 <사고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한번 시도해 보고, 부딪치면, <또 다른 방법으로 시도해 보라>고 알려 줍니다.
베드로는 그 순간 망설였어요. 예수님은 목수이고 베드로는 어부인데, 목수가 어부의 자존심을 건드렸어요.
예수님은 베드로의 심기를 건드렸지만, 베드로는 5절에서 긍정적으로 말했어요.
5절을 보십시오. “시몬이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아무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려 보겠습니다.” (눅 5:5)
베드로는 그곳에서 그물을 내려 보겠습니다“라고 <의지적인 결단>을 말했어요.
크리스천에게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그렇다면 [순종]은 무엇입니까?
① 첫째, [순종]은 합리성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순종입니다.
예수님이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니까, “제가 그물을 내려 보겠습니다.”라고 즉시 순종했어요. 이것이 <순종>입니다.
② 두 번째로, [순종]은 감정이 아니고 <의지적인 결단>입니다.
결론은 내가 사랑하기로 <내 스스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의지적인 <자기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누가 결혼하라”고 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사랑하기로 결정하는 것>이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미우나 고우나 내가 결심하는 것이기에, 그 결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③ [순종]이란 우연이 아니고, <선택>입니다.
[순종]이란 내가 선택한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선택했어요. 나도 내 인생을 선택해야 합니다.
선택을 해야 방황하지 않고 시간을 아낄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결혼이란 뭐예요.
내가 당신을 선택하는 순간에 “다른 모든 여자는 포기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④ [순종]이란 기다림이 아니고, 눈치를 보지 않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⑤ [순종]은 과거의 실패의 경험이 아니고, 순종은 미래의 <새로운 도전>입니다.
이렇게 순종하면 <기적>이 옵니다.
여러분이 왜 순종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기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내 이성과 상식을 가지고 판단하면 그 이상이 없지요.
오로지 그 이하일 뿐이지요.
[믿음]은 상식을 넘어서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야 해요.
[믿음]은 이성의 세계를 넘어서야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렇게 들어가야 <영적 세계>를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렇게 들어가야 우리가 볼 수 없는 초자연적인 세계를 볼 수 있고, 눈이 떠지는 거예요.
그렇게 도전해야 보이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눈동자가 달라요.
그들은 <마음의 결심>이 다르기 때문에, 눈동자가 다른 거예요.
세상에 월급 받고, 매일 똑같은 일을 <다람쥐 쳇 바퀴 돌듯이>하는 사람은 “동물이 먹이를 받아먹고 사는 것”과 같아요.
사람은 내일에 보람을 느끼고 살아야지, 주는 것만 먹고 자라면, 너무나 지루해요.
그래서 <창의성>을 강조하며, <매일 매일 변화하자>고 몸부림치는 거예요.
사람처럼 살려면,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의 사명>을 알아야 해요.
6-7절을 보세요, 기적이 일어났어요. “어부들이 그 말씀대로 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들이 잡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와서 도와 달라고 손짓했습니다. 그들이 와서 두 배에 고기를 가득 채우자,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었습니다.” (눅 5:6-7)
여기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어요.
밤새도록 한 마리도 못 잡던 어부들에게 기적이 일어났어요. 베드로는 아직까지 <영적인 눈>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고기가 많이 잡히도록 만들어 줌으로써, 베드로를 놀라게 만든 거예요.
그래야 그 기적을 보면서, <영적인 눈>이 떠지게 만드는 거예요.
여러분? 자녀들을 쫓아다니다 보면, 한이 없고 끝이 없어요.
자녀가 나한테로 돌아오게 만들어야지, 자녀를 따라 다니다 보면, 한도 끝도 없어요.
저는 온누리교회 25년간 목회하면서, 춤을 추며 신나게 목회했어요.
저는 원래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러다 보니까 이렇게 대형교회가 되었어요.
한 영혼, 한 영혼을 보고 기도하다 보니까, 그 영혼이 <살아나는 모습>을 보고, 저도 놀랐어요.
그렇게 신나게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까, 어느덧 교회가 성장한 거예요.
베드로가 기적을 보는 순간에 “와! 할렐루야!” 하며 좋아했을까요?
아닙니다. 베드로는 기적을 보면서 <두려움>을 가졌어요.
여기서 우리는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참 모습>입니다.
제자들의 <참 모습>은 어떤 단계를 거쳤을까요?
1. 첫 단계는, 단순히 <말씀을 듣는 단계>이고,
2. 두 번째 단계는, <순종하는 단계>이고
3. 세 번째 단계는, <기적을 보는 단계>입니다.
4. 마지막 단계에서, 드디어 <내가 죽는 경험을 하는 단계>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죽는 경험>을 해야 하지요.
베드로는 기적을 보았기에, 그런 걸 경험했어요.
9~10절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그의 동료는 자기들이 잡은 고기를 보고 놀랐습니다. 세베데의 아들이며 시몬의 동료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눅 5:9-10)
베드로 뿐만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놀랬어요. 바다에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는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많이 잡혔어요.
여기에서 예수님이 <보여준 기적>은 무엇입니까?
1. 첫째는, <두려움>을 주었고
2. 둘째는,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기적을 보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이 떠지고, 귀머거리가 들리는 기적을 맛보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들은 하나님에 대한 것을 모르니까 귀머거리고,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니까 귀가 열리고, 눈이 떠져서 볼 수 있었던 거예요.
이것은 에스겔서에 나오는 “마른 뼈가 서로 붙어서, 살이 생기고, 근육이 붙어서, 생명체로 변하는 것을 에스겔에게 보여준 <부활의 환상>이예요.
여러분? 부활은 반드시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도 확신이 옵니다.
<이 때>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비전을 제시할 때가 된 거예요.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비전을 설명하면 아무것도 못 알아들어요.
이것은 마치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것과 같아요.
비전은 <잉태>되는 것과 같아요.
때가 되고, 눈이 열려야, 비전이 눈이 들어오고, 그것이 눈에 보이는 거예요.
비전은 여인이 <임신하는 것>과 같아요.
왜냐하면 때가 되고, 눈이 열려야 비전이 보이듯이, 비전을 모르는 사람에게 [비전]은 전혀 의미가 없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비전]은 어린 아이를 잉태하는 것과 같이 어머니의 배속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게 됩니다.
[비전]도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점점 자라게 됩니다.
이것이 <교회>와 같은 거예요.
예수님이 마태복음 16장에서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얘기했지만, 제자들은 [그 때]에 교회에 관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래서 잘 믿어지지 않았어요.
애를 낳으면 소중하게 키워야 해요.
어린 아이는 잘 돌보아 주어야지, 돌보지 않으면 혼자 일어날 수 없어요.
혹자는 가끔 “교회가 어찌 그런 수가 있나요?” 라고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지만, 교회는 그럴 수가 있어요.
<죄인>이 오는 곳이 교회이니까, 그런 죄인이 갑자기 <의인>같이 행동할 수 있나요?
어린 아이를 돌보듯이, 잘 양육해야 성장하는 것이 <교회>예요.
자신이 부족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열심히 믿음을 쌓아서 계속해서 성장하도록, 잘 돌봐주어야 해요.
부모는 끝까지 그 아이를 위해서 계속해서 뒤를 돌보아 주어야 해요.
이게 <교육>이고, 이게 <교회>예요.
10절의 말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까지 내 인생은 고기 잡는 일에 만족했지만, 내가 진짜로 해야 할 일은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것이 내 <사명>이고, 내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물고기 잡는 일은 그만 두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조심하십시오.
물고기 잡는 일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직업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럼, 여기서 예수님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베드로에게 물고기 잡는 일, <비지니스>를 통해서 예수님이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은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다”는 기적을 보여 줌으로써, 베드로를 놀라게 하여, 예수님을 따르도록 만들고 싶었을 거예요.
그리고 나서, 이제는 그 다음 단계로 <생명>의 중요성을 알게 한 거예요.
네가 진짜로 해야 할 일은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라>는 명령입니다.
요한복음 6장 33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의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우선순위가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의 <우선순위>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이 말씀이 되어야 하고, 예수를 모르는 영혼을 구원해 주어야 해요.
먹고 마시는 것이 <우선순위>인 것 같지만, 그게 우선순위가 되면 안 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그 다음에 오는 축복에 불과한 것입니다.
빵을 안 먹으면, 굶어 죽어요.
빵도 먹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의 양식이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이고,
우리의 우선순위는 <말씀>이고,
우리의 우선순위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예요.
그런데 요즘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아니고, <건강>이 화두예요.
운동을 열심히 해도, 인간은 죽어요.
우리는 동물이 아니예요. 동물원에서 동물은 먹을 것을 가지고 훈련을 시키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명을 가진 인간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주인이므로, <미션>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2가지를 배웁니다.
1. 첫째는, <선교사로 가라>는 말이 아니고 “목표를 잊지 말라”는 거예요.
모두 다 선교사로 떠나면, 우리를 믿고 떠난 선교사는 누가 후원해요.
가정을 지킬 사람은 가정을 지키고, 직장에서 돈 버는 사람은 돈을 벌어야 해요.
그러나 무슨 일을 하던지, <목표는 잊지 말라>는 거예요.
가끔 우리 주변에 있는 남자들 중에서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의 목표는 분명히 해야 해요.
사람이 장성하여 결혼을 하고 나면, <어머니와 아내> 중에서 분명히 선택해야 해요.
결혼을 했으면 어머니를 포기하고 아내를 선택하세요. 어머니는 우리가 존경해야 할 대상이지, “그 어머니의 품에서 그대로 있으라”는 얘기가 아니예요.
네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듯이, 이제는 어머니 품에서 떠나세요.
2. 두 번째로, 우리의 목표는 분명해야 해요. 그래서 목표는 <하나>가 되어야 해요.
그러니까 말씀을 위해 선명하게 선택하세요.
마태복음의 끝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에게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고,
마가복음의 끝은 “너희는 모든 민족에게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고,
누가복음의 끝은 “내가 이 일의 증인”이라고 했고,
요한복음의 끝은 “내 양을 먹이라”고 했고,
사도행전의 시작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고 했어요
이제는 우리는 혼돈에서 벗어나, 우리의 방향을 분명히 설정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인생을 후회하지 않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우리의 길>을 달려가야 합니다.
그런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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