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란스러운 그 시대에는 누가 진짜 선지자이고 누가 가짜 선지자인지, 누가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고 누가 흉내만 내는 가짜인지 구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구별법은 있었을 것 같다. 여호와의 말씀이 먼저 본인에게 임하고, 임한 말씀이 본인의 삶에 능력으로 나타나 자기가 먼저 영향을 받고, 그렇게 임한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는 사람은 진짜 선지자이다.
가짜 선지자들은 어떤가? 말씀을 사랑하지도 않고, 말씀이 임하지도 않으며, 말씀이 임하지 않았는데도 전혀 답답해하지도 않고, 그러면서 임하지도 않은 말씀이 임한 척 제멋대로 전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누가 진짜 목사이고 누가 가짜 목사인가? 말씀이 먼저 나에게 임하고, 그 임한 말씀에 내가 영향을 받아 주님 앞에 돌이키고 점검하고 교정함을 받아 그 말씀을 전하면 진짜 목사이다. 그런가 하면, 말씀이 임하지도 않았는데 임한 척하면서 전혀 말씀에 영향 받지 않은 채로 주석 보고 베껴서 대충 설교하면 그것은 미성숙한 목사, 가짜 목사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내가 노력하는 부분이 있다. 설교할 때, 가능하면 내가 한 주간 직접 겪었던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나 혹은 하나님 앞에 내가 실수했던 이야기들을 많이 인용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말씀이 먼저 설교자인 나 자신의 삶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그 설교는 살아 있는 설교라고 하기 어렵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실수하고 실패했던 이야기들을 오픈하는 것이 부끄럽기는 해도 그런 내용들도 가감 없이 나누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목회자에게만 적용되는 잣대가 아니다. 우리는 어떤가? 진짜 제대로 된 성숙한 크리스천인가? 말씀을 사모하는가? 그 말씀에 영향을 받고 있는가? 앞에서 소개한 그 장로님처럼 말씀이 임할 때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애쓰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은 성숙한 진짜 크리스천이다.
*“장로님, 제 후임 목사를 잘 세우셔야 합니다. 진짜 잘 세우셔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울은 그렇게 부탁하지 않는다. 이 부분을 새 번역성경으로 다시 보자.
“나는 이제 하나님과 그의 은혜로운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행 20:32
교회가 어려움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잘 준비된 후임 목사를 세울 것을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운 말씀에 성도들을 맡긴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 인상적이지 않은가? 그러면 바울은 왜 후임 목사에게 맡긴다고 하지 않고 말씀에 맡긴다고 하는가? 32절에 답이 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행 20:32
바울이 가진 확신이 무엇이었는가? 교회를 세우는 것은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것이다. 바울에게는 이 확신이 있었다.
그렇다! 그 사람이 전한 말씀. 그 말씀이 우리를 세운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내 인생의 중심에 든든히 서 있을 때, 그 말씀이 우리를 든든하게 세우는 줄 믿기 바란다.
*말씀을 주시는 것 자체가 계속 기회를 주고 계신다는 뜻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일시적으로 타락하고, 옆길로 가고, 잘못된 자리에 빠진다 해도 내게 여전히 말씀이 들려지는 한 절망은 없다.
호세아 선지자는 타락한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호소한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호 14:1
이어지는 2절은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호 14:2
호세아는 여호와께 돌아오되,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라고 호소한다.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결정적인 도구이다. 그래서 지금은 내가 비록 비참한 자리에 빠져 있지만 내 귀에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진다면, 그리고 그 말씀에 영향 받는다면 회복이 가능하다.
*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말씀을 주시는 것 자체가 계속 기회를 주신다는 뜻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기회가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역사를 보면 구약시대 말기 이후에 침묵기가 있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던 시대였다. 그래서 이것을 다른 말로 암
흑기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 침묵기가 언제 시작되었는가 하면, 그렇게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호소하던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고 난 이후였다. 정말 가슴 아픈 사실 아닌가? 기회 있을 때, 그렇게 하나님이 돌아오라고 말씀을 주실 때, 그때 돌이켰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서 우리 인생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죄 짓는 인생 죄 안 짓는 인생이 아니다. 이렇게 나뉠 수 없다. 우리는 모두가 다 죄인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다 죄를 짓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선용하는 인생과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놓치는 인생, 이렇게 두 갈래로 나뉜다.
그러고 보니, 이 두 부류에 각기 딱 들어맞는 성경의 인물이 있다. 하나는 사울 왕이고 다른 하나는 다윗 왕이다. 이 두 사람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지은 죄와 다윗이 지은 죄를 같은 죄질로 취급하셨다는 것이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삼상 15:26
이 말씀은 사무엘상 15장에 기록된 것으로 우리가 잘 아는 사울의 불순종 사건 때문에 주어진 말씀이지만, 이후에 타락한 사울의 전체적인 삶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성경은 타락한 사울을 지적하면서 "왕의 행위가 타락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다"라고 표현했다.
이것이 성적인 죄를 범한 다윗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삼하 12:9
성경은 성적인 죄를 지은 다윗에게 "너는 왜 그런-더러운 죄를 지었니?"라고 지석하지 않고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겼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과 다윗의 범죄를 모두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버린 같은 죄질로 보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최후는 어떤가? 한쪽은 망해버렸고 한쪽은 아직도 존경받는 왕으로 남아 있다. 미국에 다윗의 이름을 따서 데이비드라고 이름 짓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왜 자기 아들을 낳아서 성범죄자인 다윗의 이름을 붙이겠는가?
두 사람 모두 똑같은 죄를 지었지만 한 사람은 하나님의 기회를 놓쳐버렸고, 한 사람은 나단을 통해 말씀을 주실 때 철저하게 회개하고 돌이켜 그 기회를 선용했기 때문이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 6:6
나는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다른 여타 신들, 특히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을 빼앗겼던 바알 신과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생각한다. 바알 종교의 특징은, 종교 행위 안에 마음이 담기는 안 담기든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바알 종교는 행위가 중요하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행위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하느냐를 더 중요하게 보신다. 얼렁뚱땅 대충대충 건성으로 행위만 그럴듯하게 흉내 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신 분이기에 진심으로 대해주길 바라시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왜 그렇게 상처를 많이 받는가? 마음이 거기에 머물기 때문에, 그래서 그에 반응하기 때문에 상처받는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새삼 깨닫게 된 것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저지르는 치명적인 잘못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고 반응 안 해도 되는 세상일에는 온통 마음을 빼앗겨 잠도 못 이룬다는 것이다. 뒤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분노하심에 영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하지만 세상일에는 누가 차를 들이받든 말든 좀 무감각해져서 반응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부터 모든 것이 다공포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기도한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나머지 모든 공포로부터 자유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기를 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우리는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는가? 그저 눈에 보이는 사람들만 의식하고 살진 않는가?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들키는 것만 수치이고, 들키지 않는 죄는 괜찮다고 여기지는 않는가? 사람에게 들통나기 전에 스스로 돌이켜야 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 내 모습이 하나님의 엄청난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가 하면 또 한 가지,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분노하심을 인식하고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은 용서해주시고 용납해주시는 분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때리신 그 손으로 마음 아파하시며 어루만져주시고 위로해주신다.
*하나님은 이런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는 인생들을 향해 이렇게
호소하신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한번 생각해보라. 팔 자르고, 다리 자르고, 머리 자르고, 몸통 잘라서 하나님을 내 상식 수준에 맞춰 넣을 것 같으면 뭐 하러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가? 하나님은 내 머릿속에 쏙 들어오실 만큼 간단한 분이 아니시다. 작은 분이 아니시다. 내 상식과 머리로 이해되는 것만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한계를 뛰어넘으시는 분이시다.
지금 하나님이 하고 싶으신 말씀은 뒤에 있다.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그 여자 고멜을 네가 사랑해라!" 이 말씀을 하고 싶으신데, 이것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 이렇다.
"내가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기는 타락한 이스라엘백성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같이 너도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설득하시는가? 타락한 그 시대 백성들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심정에 호소하신다. 사람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하는 것보다 심정이 동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심정이 동하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사람 아닌가?
*호세아서 4장 6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탄식을 보라.
“내 백성이 자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호 4:6
여기 나오는 '지식'은 히브리어로 '야다'인데, '앎, 안다'는 뜻이다. '야다'는 기본적으로 부부가 부부관계를 포함하여 서로에 대한 깊은 터치와 친밀감을 통해 알게 된 지식을 뜻한다. 그래서 '야다'에는 '동침하다'라는 뜻도 있다. 즉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탄식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 시대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에 동하지 않는 백성들의 타락에 대해 탄식하는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탄식하고 계신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하게 생겼다. 내가 이 타락한 시대를 향해 어떤 탄식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내 백성들이 모르고 있다. 기계적으로 예배는 드리고 있지만 내 심정은 모른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심정에 공감하는 자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심정에 공감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탕자의 비유에서 큰아들의 결정적인 결함이 바로 이것 아닌가? 그가 무엇을 자랑하는가?
“나는 동생과 다르다. 내가 가출을 했나, 아버지의 돈을 낭비하기를 했나? 뼈 빠지게 아버지가 시키시는 일을 하며 아버지 곁에 있었으니 나는 효자다."
하지만 큰아들이 둘째아들 못지않은 탕자인 이유는 무엇인가? 큰아들은 기계적으로 아버지가 시키시는 일을 했지만 아버지의 심정은 몰랐다. 방탕하다 돌아온 둘째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심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그래서 큰 아들도 탕자라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는 것이다. 오늘날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 같은 크리스천이 많이 양산되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 성령께서 은혜를 주셔서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공감하는 믿음이 우리 모두에게 부어지를 간절히 바란다.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호 3:1
이것은 1장의 명령보다 더 어려운 명령이었는데, 호세아는 이번에도 순종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표현이 하나 있다. ‘나를 위하여'이다.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호 3:2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1장에서의 순종은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하시니까 기계적으로 행한 순종이었지만, 3장에서의 순종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행한 순종이었다는 것이다. 이 차이를 알겠는가?
나는 이 대목에서 큰 은혜를 받았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은 매춘부 같은 여자를 아내로 맞았더니, 호세아에게 '예기치 못한 기쁨'이 찾아온 것이다. 기계적인 순종으로 시작된 가정생활이었지만, 가정생활을 꾸려가다 보니 호세아에게 기대하지 못했던 기쁨이 생겼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으면 아내를 찾으러 가는 일이 하나님이 시키셨기에 억지로 하는 절망이나 고통이 아니고 ’나를 위하여‘ 기쁘게 하는 순종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신비를 알겠는가? 우리의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의 결혼생활은 왜 그렇게 지지부진한가?
”내 남편이 이만큼의 사랑을 줬으니 나도 이만큼만 사랑해야지!"
"내가 왜 손해를 봐야 해? 그 여자가 해준게 뭐가 있다고!"
딱 내가 받은 만큼만 사랑하는 게 오늘 우리 가정의 근본적인 문제 아닌가? 이런 계산적인 사랑으로는 호세아가 경험했던 기쁨을 누릴 수 없다. 고멜처럼 사랑받을 자격을 잃은 배우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정이 부어지는 사랑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 혜택을 상대방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받는 것이다.
*이런 '바보 같은 순종'이 가장 잘 구현된 상징물이 십자가다. 성부 하나님께서 하신 말도 안 되는 요구에 맹목적으로 순종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죽했으면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겠는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그런 십자가를 묵상하며 쓴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라는 시를 읽다가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리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이 표현이 맞다. 괴롭다. 고멜 같은 여자, 정 안 가는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이 바보 같은 순종의 삶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길이 아닌가? 괴롭지만 행복한 그 길, 우리 모두가 십자가의 그 원리를 맛보면서 신앙생활 하게 되기를 바란다. 이 잣대로 아내를, 남편을, 자녀들을, 부모님을, 이웃들을, 교회를, 이 땅과 이 나라를 바라보게 되기를 바란다.
*사실 나는 젊은 신학생들이나 청년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신학교나 청년부 집회에서 말씀을 전해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망설여진다. 가서 말씀 전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를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 젊은이들의 앞길을 험난하게 만든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그들 앞에 서는 것이 부끄럽다. 그래서 간혹 신학교에 가서 말씀을 전하게 될 때면 이렇게 말하곤 한다.
"우리 기성세대를 마음껏 비판해라. 그것은 젊은이의 특권이다. 이찬수 목사가 그 기성세대 중 한 사람이니까 나를 마음껏 비판해라. 정말 미안한 마음으로 용서를 구한다."
그러고는 거기에 한 마디를 덧붙인다.
"그런데 한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기성세대를 마음껏 비판하되, 여러분의 시대를 준비하면서 비판하길 바란다. 여러분의 시대를 준비하지 않고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만 한다면 2,30년이 흘러 여러분의 다음세대에게 더 비참하게 비난받는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충고이다. 우리 기성세대의 잘못에 대해 청년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하고 또 용서를 구한다. 하지만 뿐만 아니라 청년들이 우리의 길을 답습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기에 나는 마음을 다해 기도한다. 우리의 다음세대들은 나와 같은 기성세대가 저지른 잘못들을 청산하고 개혁하는 세대가 되기를 그리고 그런 일이 가능하도록 나는 또 기도한다. 우리 기성 세대가 저질러놓은 부끄럽고 가슴 아픈 수많은 잘못들을 우리의 다음세대인 청년들이 답습하지 않기를.
'오므리 왕조의 잘못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며 멋지게 출발했던 예후 왕조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과 똑같은 부끄러운 자리에 빠졌다. 이것이 예후 왕조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은 이유이다. 이런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무서운 교훈을 주는지 모른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약 2:10.11
우리는 이 말씀을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야 한다. 예후 왕조는 바알을 멸한 개혁을 자랑하며 자부심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멸하면서 저것을 내버려둔 개혁이란 온전하지 못한 개혁이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실패를 예고하는 개혁일 뿐이었다.
‘나는 간음하는 죄를 짓지 않았다'며 간음한 사람들을 엄청나게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면서 자신은 또 다른 죄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 사람이나 이 사람이나 똑같다.
예전에 대형 교회 목사들을 위시하여 여러 목사님들의 타락 소식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줄줄이 터지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나는 신문을 펼치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그렇게 목회자의 성적 타락, 교회 재정 문제, 공금 횡령과 같은 일들이 연일 터질 때, 나도 그 목회자들을 많이 비난했다. 어떻게 목사가 저런 짓을 하느냐고 욕도 많이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욕을 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 받은 경고 때문이었다.
“그 다음은 네 차례야."
얼마나 무서운 경고인가 비록 그들과 같은 죄는 짓지 않았다 할지라도,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다른 영역에서 죄의 불씨를 키우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보라는 하나님의 경고였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은 내 차례가 될지도 모르는데, 다른 누군가를 비난할 엄두가 나
겠는가?
손가락만한 구멍이 견고해 보이는 둑을 무너뜨리고, 작은 불씨가 큰 불을 일으킨다. 젊은이들을 비롯하여 기성세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 내 안에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죄의 작은 불씨가 없는지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란다.
*호세아의 세 자녀와 믿는 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 공통점은, 처음에는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사실 호세아의 세 자녀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의 이야기다. 오죽했으면 다윗이 죄성에 물든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을까?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5
여기에 예외가 있을까? "나는 아니야, 나는 날 때부터 의인으로 태어났어"라고 선포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우리는 너나없이 죄로 말미암아 태어날 때부터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청소년 사역을 할 때 보니, 아무런 개념 없던 초등학교 시절을 지나고 나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자의식이 싹트는 시기를 맞는다. 이때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이 열등감이다. 청소년 사역 10년 동안 내가 했던 주 사역은 이런 열등감에 빠진 아이들을 만져주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다들 자기가 왕자요 공주인 줄 알고 산다. 그렇게 자기가 세상의 주인공인 줄 알고 살다가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부터 진짜 인생이 시작된다.
‘나는 불행해. 우리 가정은 불행해. 나는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
자의식이 생긴다는 것은 한편으로 죄책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늘 괴롭다. 이것이 '로루하마' 아닌가?
그렇다면 '로암미는 어떤가?
나는 긍휼을 받을 수 없는 인생이다.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인
생이다. 나는 하나님 백성의 자격을 상실했어. 나같은걸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해주시겠어?
이것이 로암미의 비관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흩으신다'라는 저주의 의미에서의 이스르엘이란 꼬리표를 달고 살았던 첫째도 있다.
호세아의 세 자녀가 가졌던 절망적인 인생에 대한 비관들, 이것이 우리의 모습 아니었는가?
*세 자녀와 믿는 우리와의 두 번째 공통점은 그 이름을 바꾸어주시는 은혜를 경험했다는 것이다. 호세아서 1장에 보면 저주와 복의 분기점이 되는 말씀이 나온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호 1:10
여기에 나오는 ‘그러나’는 우리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대반전의 ‘그러나’이다.
앞에서 시편 3편 3절에 담긴 대 반전의 '그러나'에 대해 살펴보았다. 한글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나는 이 그러나'가 시편 3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시편 3편 12절에서 다윗은 절망적인 현실 앞에 무너져 있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시 3:1,2
… 하나님의 '그러나'가 개입하자 저주스러운 이름이 어떻게 바뀌었는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흩으신다'라는 차원에서의 이스르엘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씨 뿌리신다'라는 차원에서의 이스르엘이다. 이 사실을 확신하기 바란다.
또한 우리는 더 이상 '로루하마'가 아니다. 긍휼을 받지 못하는 인생이 아니다. 사랑받을 수 없는 인생이 아니다. 하나님의 ‘그러나’가 가입함으로 '로' 자가 떨어져 나갔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호 3:1
이 구절에는 타락의 두 가지 양상이 묘사되고 있다. 나는 여기에
서 회의 본성의 두 기둥을 발견했다. 하나는 건포도 과자를 즐기는 것으로 표현된 물질 추구이다. 이는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을 상징적으로 압축해서 설명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여자라고 표현되는 쾌락 추구가 죄의 본성의 또 다른 기둥이다. 구약에 나오는 이러한 양상의 싸움들, 즉 죄의 본성과의 싸움들은 바로 이 두 가지 축을 가진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진입한 이후 바알 신에게 빠지게 된 것도 결국은 바알이 비를 주관하는 신이라는 것에 혹했기 때문이다. 농사를 잘 지어서 물질적으로 잘 살아 보겠다는 욕망 때문에 하나님을 저버리고 바알 신을 섬기게 된 것이다. 물질 추구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한국 교회가 타락했다고 말한다. 이 말 뒤에는 꼭 '교회가 물질 만능주의에 빠졌다. 크리스천들이 많은 신을 섬긴다'. '돈 돈 돈 한다'라는 말들이 붙는다.
이렇게 부연설명이 붙는 이유는 무엇인가? '타락'이라는 것은 결국 물질 추구와 쾌락 추구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이 주로 성적인 문제나 돈 문제로 넘어지는 것 역시 그것이 바로 죄의 본성의 대표적인 모양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게 주어진 큰 숙제 중 하나가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성도들을 행복하게 해드렸다 해도 가장 가까이 있는 아내가 나 때문에 행복하지 못하다면 나는 실패한 목회자이다. 내 안에서 샘솟는 사랑이 아내에게 흘러가길 원한다. 우리 세 아이에게 이 행복이 흘러가길 원한다.
나는 알고 있다. 행복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영역 안에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고멜처럼 호세아를 떠나 외간 남자랑 살면 행복할 것 같아도 그렇지가 않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는 그 순간부터 싸구려 인생으로 전락하게 된다. 만일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등에 업고 있지 않다면, 나 같은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새벽부터 교회에 오는 사람은 없을 거다. 나의 나 된 것은 나 자신으로 인함이 아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내가 존귀한 존재가 된 것이다.
*이것은 자녀들의 신앙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의 신앙적 가치관을 빼앗으려는 세상 문화는 일주일 내내 폭풍처럼 밀려들지만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드리는 시간은 일주일에 딱 한 시간이다. 이러니 아이들의 가치관이 세상적이고 세속화 되어가는 현실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 아닌가?
이런 가슴 아픈 현실을 목도하는 우리이기에, 지금 호세아가 제시하는 대안을 기억해야 한다. 이 악한 세상의 유혹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우리가 세상 유혹으로부터 이기기 위해서는 주중에도 말씀을 읽어야 한다. 주중에 살아 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지속해야 한다. 예배를 드리지 않을 때라도, 길을 걸을 때나 운전할 때도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과 계속 교제해야 한다.
말씀을 암송해야 한다.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신앙적인 행위에 어린 자녀들을 동참시켜야 한다. 함께 말씀 읽고 함께 기도하며 자녀들이 하나님을 더 많이 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것이 호세아가 제안하는 첫 번째 대안이다.
*두 번째 대안은 무엇인가? 호세아는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라고 말한다. 이는 이미 내게 형성된 습관적인 죄, 즉 습관적으로 행하던 음란한 생활 태도와 단절하라는 말씀이다. 옛 생활과 단절하는 것이다.
이런 단절을 결단할 수 있는 힘은 말씀을 들을 때 생긴다. 예배에 참석할 때 생긴다. 기도할 때 생긴다.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감정적으로 얼마나 뜨겁고 자극되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뜨거운 것을 경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앞에 회개하며 자신의 오래된 습관적인 죄를 버리겠다는 결단이 중요하다.
‘옛 생활과 단절해야겠다. 청산해야겠다.’
하나님은 이런 결단을 기뻐하신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영적으로 회복되고 갱신될 수 있는 길이다.
더 늦기 전에 결단하자. 기회 주실 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옛 습관과 단절하는 결단이 있기 바란다.
*세 번째 대안은 세 가지 중 가장 중요한 대안이기도 하다. 호세아는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라고 말한다. 새번역 성경에는 이 부분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를 기다리시오. 그동안 나도 당신을 기다리겠소.”
이 말은 "당신을 사랑하고 기다릴 테니,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포기하지 말라"라는 말 아닌가? 정말 눈물겨운 이야기이다. 그 음란한 아내 고멜을 향한 남편 호세아의 이 따뜻한 격려가 마음을 뜨겁게 한다. 그런데 나는 음란한 아내 고멜에게 던지는 호세아의 이 따뜻한 격려의 말이야말로 유혹 많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그래서 때로는 넘어지고 자빠지는 초라한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다 유혹이 찾아올 때, “나를 기다려라. 나도 너를 기다리겠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이 눈물겨운 주님의 마음이 읽혀지는 사람은 은밀히 찾아오는 죄의 유혹에 단호히 대처하는 힘을 얻으리라 믿는다.
목회를 하다 보면 나도 이런저런 유혹을 받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은 내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를 기다려라. 나도 너를 기다리겠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순결한 영적 신부로 서게 될 그날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마음에 품고 살아갈 때 유혹을 이길 힘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내 곡식을 그것이 익을 계절에 도로 찾으며 내가 내새포도주를 그것이 맛 들 시기에 도로 찾으며 또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릴 내 양털과 내 삶을 빼앗으리라” 호 29
여기에 두 번에 걸친 '도로 찾으며'라는 단어와 ‘빼앗으리라’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물질의 축복을 우상을 섬기는 데 사용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도로 찾으신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물질의 넉넉함에 감사할 것이 아니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이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귀한 물질을 엉뚱한 곳에 사용한다면, 하나님은 주신 것을 빼앗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그분의 자녀가 엉뚱한 길로 가는 것을 막으신다.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 호세아서 2장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엉뚱한 길, 잘못된 길, 우상 숭배의 길로 나아갈 때 그것을 방치하지 않고 개입하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우상 숭배라는 영적 음행의 길을 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하심을 단계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는 구절이 바로 호세아서 2장 14,15절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개입하심의 첫 번째 단계는 무엇인가?
여기 나오는 거친 들은 광야를 말한다. 광야는 좋은 곳이 아니다. 광야를 거치면서 ‘성숙해진다’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사실 누가 자원해서 거친 광야 길을 걷기 원하겠는가? 그리고 실패와 고난의 광야를 통과하는 모든 사람이 다 성숙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황폐해지는 일이 더 많다.
평야가 아름다운 길이 되는 것은 그 길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일 때에 가능하다.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광야가 되어야 그 고난의 광야, 실패의 광야가 상처가 아닌 인생의 보약이 된다.
그러므로 지금 쓰라리고 아프고 억장이 무너지는 광야 길을 걷고 있다면 스스로 점검해보아야 한다.
‘나는 지금 이 아프고 힘든 고난의 광야를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는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광야가 복된 이유는 무엇인가?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호 2:14
광야는 모든 인간적인 관계들이 다 차단되는 대신 하나님의 위하심이 있는 곳이다.
*“그들의 어머니는 음행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삶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 호 2:5
그들에게 무슨 고상한 이유가 있어서 우상을 숭배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새로운 신이라며 섬긴 바알이 하나님보다 믿을 가치가 있거나 우아하거나 고상하거나 진짜 능력 있는 신이라고 믿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 신이 비를 주관한다더라, 농사를 잘 지어서 돈을 좀 벌어야 자식들도 잘 키우고 우리도 좀 잘 먹고 잘 살지 않겠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우상 숭배하는 그들의 동기는 탐심이었고, 이것은 아골 골짜기의 아간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엉뚱한 길로 나아가는 것을 방치하지 않으신다. 그
정신차리도록 고독하고 외로운 고난의 광야 길로 인도하심으로 그들에게 경고하시고, 또한 그들을 위로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개입하심이다.
특별새벽기도회 때가 되면 새벽 3시부터 교회로 달려와서 부르짖는 분들이 있다. 참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렇지만 그 부르짖음의 동기가 아간과 같은 탐심이라면, 결국은 아간에게 부르짖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두려운 이야기 아닌가?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을 설득해서 이 땅에서 한 번 잘 먹고 잘살아보겠다는 것은 바알 신을 섬기는 자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바알 종교를 믿는 것과 같다. 청년들이 쓰는 말에 빗대자면 "여호와라 적고 바알이라 부른다", "신앙의 성숙이라 적고 탐심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이런 부분들을 점검해보면 좋겠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주겠다고 말씀하신다. 세속주의와 탐욕에 찌들어 바알을 섬기는 우매한 자녀를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광야로 인도하시고 그들을 위로하신다. 그리고 경고하신다
"너, 지금 진짜 위험하다. 네가 걸어가는 그 길이 네 조상 아간이 망했던 그 길이야. 아골 골짜기는 아간과 그 가족의 무덤이야!"
"왜 하나님은 광야 길에서 끔찍하고 섬뜩한 아들 골짜기를 언급하시는가? 그저 잘살아 보겠다고 선택한 우상 숭배의 길은 삶의 여러 길 중에 하나가 아니라 패망의 길, 죽음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 경고를 듣고 돌아서길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은밀한 탐심의 길에서 돌아서게 되길. 그래서 참된 소망의 문으로 들어가게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아간처럼 아골 골짜기, 죽음의 길을 향해 가고 있는가. 아니면 아골 골짜기를 벗어나 하나님이 제시해주시는 소망의 문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아골 골짜기의 아간과 같은 사람은 앞날의 소망보다 지금 잘 되는 것에 집중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이고 뭐고 필요 없고, 그저 오늘 사용할 수 있는 돈을 달라고 할 뿐이다. 오늘 기도하고나면 통장에 돈이 늘어나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관심이 이런 쪽으로만 흐르게 되면 위험하다. 그런가 하면 지금은 어렵고 힘들고 연단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소망으로 견뎌내고, 그 소망으로 인해 물질적으로 부요한 어떤 사람보다 더 물댄 동산 같은 평안을 누리며 살아간다면, 그런 사람은 아골 골짜기를 벗어나 소망의 문으로 접어든 줄로 믿는다.
마음의 평안이 사라졌는가? 어디에서 평안을 잃어버렸는가? 무엇엔가 속았기 때문은 아닌가? 잠시라도 분주한 세속 사회를 떠나 주님이 인도하시는 광야로 들어서길 바란다.
바알을 좇는 사람들의 풍요를 부러워하지 말자.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위장된 평화이다.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의 목표는 하나이다. 그저 잘 먹고 잘사는 것. 얼마나 달콤한 종교인가? 하지만 지금 너무나 풍요롭게 사는 것 같은 그들의 삶 끝에 아골 골짜기가 있다. 탐욕에 찌든 아간과 그 가족들의 절망적인 무덤이 있다. 내 안에 복음이 없는데, 내 안에 십자가의 흔적이 사라졌는데 진정한 기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골 골짜기의 끝은 절망일 뿐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경고이다.
*이제 진정한 회복의 차원에서 ‘돌아옴’이 갖는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눠보자.
첫째,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회복이다.
“그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호 3:5
이것이 원인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떤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호 3.5
이것이 결과이다. 즉, '돌아와서와 경외함으로'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면 그 자각의 물꼬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회복으로 돌려야 한다. ‘경외’는 공경하면서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렇게 어렵게 된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잃어버렸기 때문 아닌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지니 눈치 보는 곳 없이 막 살게 된 것이다.
*최근에 나온 책 중에 폴 트립의 <경외>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부제가 이렇다.
‘뒤틀린 삶을 바로잡는 힘'
나는 이 책의 부제가 참 마음에 와 닿았다. 그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물질에 대한 집착, 일 중독, 폭식과 비만 간음 등 작고 사소한 문제에서 도덕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삶에서 부딪치는 모든 문제의 근원은 하나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겪고 있는 혼란과 혼미, 끔찍한 도덕적 타락의 근원적인 출발이 하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 바로 여기서부터 이런 뒤틀림이 시작됐다. 그렇기 때문에 경외의 회복이 뒤틀린 삶을 바로 잡는 힘이라는 것이다.
끔찍한 도덕적 윤리적 타락이 극성을 부렸던 사사 시대를 성경은 어떻게 진단하는가?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21:25
이 표현은 잘못된 표현 아닌가? 왕이 없긴 왜 없는가? 엄연히 왕 되신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그때, 그 사사 시대 때도 하나님이
아가셨던 것이 아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 왕으로 계셨다. 하지만 경외가 사라지니까 왕이 없는 것처럼 행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사시대를 타락으로 이끈 것이다.
우리 삶에는 내 마음 중심에 하나님께서 왕으로 살아 계시는가? 속에서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말씀과 기도를 통해 내 마음 안에 영적인 자각이 일어나고 회개가 있었다면, 이를 만들고 잃어버린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회복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경외가 무엇인가? 아무도 보는 이들이 없을 때 하는 그 행동이 경외이다. 사람이 있을 때는 우아하기 짝이 없는데, 아무도 보는 이가 없으면 엉망진창이라면 그것은 경외가 아니다.
목사인 나부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회복하는 것. 강단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쳐다볼 때만 거룩한 목사로 서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보는 이 없는 골방으로 들어갔을 때 그곳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목사로 서는 것, 이것이 회복되어야 한다.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교회에서 손 들고 찬양할 때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예배 마치고 나갈 때에, 가정에서, 골방에서 진정한 경외가 회복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주변 사람들 가족들, 자녀들에게 진정으로 인정받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바란다. 이 경외가 회복되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이것을 깨달은 뒤로는 강아지가 나를 물려고 사납게 굴어도 내가 더 사랑해줘야 하는 거구나'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상처를 주려고 모진 말을 내뱉는 사람을 향해서도 '지금 두려워하고 있구나. 마음으로 더 품어주어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 호 14:4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다 약하다. 약해도 너무 약한 게 우리다. 이런 약하다 약한 인간들끼리 모여 있는 곳이 교회이기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경험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긍휼하심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이웃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남편이나 아내 중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더 많이 경험한 쪽이 더 많이 용서하고 용납해야 한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시 103:13
이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구하고 또 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 일이 가능하기 위해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을 창조주의 자리로 다시 모셔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같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신다.
긍휼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게 되기를, 그래서 우리의 삶에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하시며 끝끝내 붙들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 은혜를 누려야 우리가 살 수 있다!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노래 가사를 쭉 읽어 보니 노래 제목을 이렇게 잡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왜 이 노랫말에서 말하는 사람이 쓸쓸함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가 가사에 담겨 있었다.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고
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그 빛을 잃어버려
남녀 간에 사랑을 나누다 헤어지는 아픔 가운데 드러나는 이 한마디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이 한 마디를 보는 순간 왜 이 사랑이 이렇게 쓸쓸하게 끝날 수밖에 없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사랑의 출발이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온 우주가 자기를 위해 돌아가는 형국이다.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고, 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그 빛을 잃게 된다고 할 정도로 철저히 나 중심적인 사랑을 했기 때문에 그 사랑은 씁쓸함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애할 때 '저 남자는 오로지 날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이다', '이 여자는 날 기쁘게 해주는 존재이다'라고 생각했기에 사랑이 끝나고 나면 그 세상도 끝나버린다. 이렇듯 철저히 나 중심적이고 축소지향적인 사랑으로는 절대 행복할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우리 인생은 두 방식의 사랑 싸움이 계속되는 것 같다. 세상은 이런 식의 나 중심적인 사랑을 하라고 한다. 이 남편을 만난 것은 내 행복을 위해, 이 아내를 만난 것도 내 행복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당연히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여자 혹은 이 남자를 만남으로써 내가 행복해지면 동시에 나로 말미암아 그 여자 혹은 그 남자도 행복해져야 하는 것 아닌가?
집요하게 나 중심적인 사랑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세상의 메시지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의 모습은 호세아에게 요구하신 사랑이다.
"용납하라, 용서하라. 네 상식을 뛰어넘어서까지 사랑하라. 네 머리로 이해가 안 될 때까지 사랑하라. 십자가가 그런 사랑을 보여주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아가페 사랑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이 두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인 것 같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성령에 이끌리시어 40일 동안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실 때, 마귀가 다가와서 했던 유혹도 바로 이것이었다. 마귀의 첫 번째 유혹이 무엇이었는가?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 43
성경은 마귀의 첫 번째 유혹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마 4:12
예수님이 굶주려 계신 그 상황에서 마귀는 인류 구원이고 뭐고 네 배부터 채워라라고 유혹한다. 네 필요를 채우라는 이야기이다.
두 번째 유혹도 마찬가지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안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 45.6
여기서 내 눈에 확 띈 것이 '너를 위하여'이다. 인류 구원이고 뭐
고 간에 일단 너부터 살아야 하지 않겠니? 너를 위하여 뛰어내려라
라는 것이 마귀의 두 번째 유혹이었다. 세 번째 유혹도 똑같은 원리이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내게 주리라”
마귀가 세 번에 걸쳐 집요하게 들이대는 공격의 원리는 딱 하나이다. 나를 위하여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라는 노래에 담긴 것과 같은 맥락이다.
태양이 날 위해 돌아가고, 우주도 날 위해 움직이고, 그 여자도 그 남자도 내 만족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끝나는 순간
절망이 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허무하게 외칠 수밖
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끝나긴 뭐가 다 끝났는가? 태양은 여전히 아름답게 빛을 비추고 있고, 우주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도 없는 ‘십자가’라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펼치시려고 하고 있다. 그때 마귀가 노린 것은 그것을
잊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엄청난 사람 말고 그저 네 배나 채우고 모든 것을 누리면서잘 먹고 잘 살면 안되겠니?”
바로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마귀가 여전히 던지는 공격의 핵심인 것을 알아야 한다.
*호세아 선지자 당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인 바알 신을 섬기게 된 핵심적인 이유도 여기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구약학자 김필희 교수님은 <호세아 주석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 신을 좋았던 이유로 두 가지를 꼽는다.
첫째, 바알 종교는 제의적 의무만 잘 행하면 다른 윤리를 요구하지 않는 종교라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그저 예배만 잘 드리면 어떤 부담도 질 필요가 없었다.
둘째, 바알 종교는 기본적으로 풍요 제의에 속하는 종교라는 것이다. 제사 한 번 잘 지내고 나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즉 풍요와 번성과 안정을 충족시켜주는 종교가 바알종교였다.
그래서 호세아서 2장 5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들의 어머니는 음행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삶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 호 2:5
완전히 대박 아닌가? 예배 한 번 잘 드리고 나면 어마어마한 물질적 풍요가 찾아온다고 한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렇게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 신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겉으로 보이는 간판에는 ‘바알 교회’라고안 써 있어서 그렇지, 얼마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바알 신을 섬기던 자들과 비슷한 욕구 가운데 살고 있는가?
'내가 예배 한 번 드려줄 테니 더 이상은 요구하지 마세요.'
'내가 지난주에 분명히 시간 들여서 예배드리고 헌금까지 했는데, 왜 나에게 돌아오는 게 없는 겁니까?"
이런 우리 내면의 욕구를 방치했기 때문에 지금 한국 교회가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기독교가 어떤 종교보다 탐욕과 탐심으로 가득한 저질 종교라는 비아냥거림을 당하게 된 출발이 여기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온 우추가 날 위해서 돌아간다는 철저히 나 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져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만약에 그런 이기적인 세계관으로 행복할 수만 있다면 나중에 하나님께 잠깐 꾸지람을 듣더라도
눈 질끈 감고 그렇게 하겠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 행복의 원리가 절대 그렇지가 않다
왜 그런가?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그렇게 지음 받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본능, 하나님이 추구하시는 것들은 이
런 끝 간 데 없는 이기적인 태도가 아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속성이 끝 간 데 없는 이기심과 같아서 온 우주가 하나님만을 위해 돌아가게 하셨다면 우리가 아직까지 남아 있겠는가? 벌써 지옥 불에 들어가도 몇 번은 더 들어가지 않았겠는가?
하나님의 속성은 아가게 사랑 이타적인 사랑, 십자가의 사랑이다. 우리 같은 세속적인 사람의 상식으로는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 할 수 없고 와 닿지 않는 그런 사랑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가 세속적인 사랑을 흉내 내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세속적인 사랑의 끝은 '쓸쓸함을 노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 12장에 이런 말씀이 있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히 12-24
이 구절은 조금 난해하지만, 주석을 찾아보니 이런 설명이 있었다.
예수님의 구원의 피가 아벨의 피보다 낫다고 한 것은 아벨의 피는 단지 자기 원수를 갚아 달라는 호소의 역할을 했으나 예수의 피는 예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와 사죄와 영적 능력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에게 너무 큰 도전이 되었다. 성경은 아벨의 피와 예수님의 피를 어떻게 대조하고 있는가? 아벨의 피는 그저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고발’의 피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절망적인 마음과 울분을 뛰어넘는 용서와 용납과 사죄의 은총이 담겨 있는 피라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벨의 피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보여주시는 분이다. 아벨 가정의 비극도 좁은 자기 세계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 아닌가?
아벨의 형 가인이 조금만 더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보았다면, 자기를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동생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넓은 시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만 하면 됐다"는 생각을 했더라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넓은 시야가 없었기 때문에 자기 동생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자라는 오명을 쓰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시야를 갖기 원하시는가? 우리 교회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든. 옆의 교회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든 어느 교회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수만 있다면 그 큰 그림을 그리며 함께 신앙 생활하기 원하시지 않겠는가?
우리는 '자기 세계'라는 좁은 시선으로 그저 눈이 가는 대로 아래로만, 아래로만 흐르는 인생을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보다 크고 넓은 시야’를 통해 삶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눈을 들어산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