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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서호곡남공신도비명(判書壺谷南公神道碑銘)
숙종(肅宗) 14년 무진년(戊辰年, 1688년)에 왕자(王子)가 태어났다.
다음 해 봄에 장차 원자(元子)로 삼는 명호(名號)를 정하려고 서둘러 공경(公卿) 제신(諸臣)들을 명소(命召)하여 의논할 제, 임금이 대단한 기색으로 굽어보며 이르기를,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으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가는 것이 좋겠다.” 하였는데, 이조 판서(吏曹判書) 대제학(大提學) 남용익(南龍翼)공은 홀로 그 불가(不可)함을 말하였다.
대체로 이르기를, “중궁(中宮)의 춘추 한창이신데, 왕자가 태어난 지 두어 달에 무어 서두를 거야 있겠습니까? 신은 물러날 뿐입니다.” 하였다. 여러 번 물었으나 말은 더욱 강직하여 듣는 자가 고개를 움츠렸다.
이때 경신(庚申)의 역당1)들은 은밀한 경로(經路)를 통하여 현재 세자(世子)를 미리 세우는 일을 기회로 삼으려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생사와 화복이 이 한마디 말에 달렸다고 하였으나, 공은 의연(毅然)히 정도(正道)를 지켜 비록 벼락이 닥친다 하더라도 능히 굽힐 수 없었으니, 옛사람이 ‘만대(萬代)를 두고 우러러볼 일이 이 한 가지 일에 달려있다.’고 이른 것은 이것이 공을 두고 한 말일진저. 세자(世子)의 명호가 정해지고 인현 왕후(仁顯王后)가 위(位)에서 물러나니, 공 역시 북쪽으로 유배(流配)되어 졸(卒)하였다.
공의 자(字)는 운경(雲卿)이요, 호는 호곡(壺谷)이며 의령인(宜寧人)이다. 태어날 때 붉은빛이 방에 가득하였고, 말을 배우게 되어서는 곧 글자를 알아보았으며, 하는 말이 혹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종조부(從祖父) 판서(判書) 남선(南銑)이 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 아이는 우리 가문(家門)의 기보(奇寶)이다.”라 하였다.
을유년(乙酉年, 1645년 인조 23년)에 초시 삼장(初試三場)에 합격하여 다음 해에 진사(進士), 또 다음 해의 인일시2)(人日試)에 장원하였고 또 다음 해의 정시(庭試, 대궐 뜰에서 보이는 과거)에 급제하니, 이때 나이 21세였다.
승문원(承文院)에 소속되었다가 추천되어 승정원(承政院)에 들어갔고 또 사국(史局)에 추천되었으나 흉당(凶黨)의 저지를 받았다.
시강원(侍講院)의 설서(說書)와 사서(司書), 성균관(成均館)의 전적(典籍), 사헌부(司憲府)의 감찰(監察)ㆍ지평(持平),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 병조(兵曹)ㆍ예조(禮曹)의 낭관(郎官), 홍문관(弘文館)의 부수찬(副修撰)ㆍ부교리(副校理)를 지냈으며, 자그마한 일로 경상 도사(慶尙都事)에 좌천(左遷)되었다가 또 영남(嶺南)의 어사(御史)가 되었다.
공은 효종(孝宗)의 융성한 시대를 맞아 삼사(三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에 오래 있으면서 보좌하는 바 매우 컸다.
조석윤(趟錫胤)공, 이경억(李慶億)공이 언사(言事)로 귀양 갔다가 곧 감등(減等)이 되니 대관(臺官)은 이어 석방을 청하였다.
엄한 비답(批答)을 받자 공은 인피(引避)하며 ‘희로(喜怒)가 정도에 지나쳐 의사 소통이 되지 않는 실책이 있다’고 강력히 아뢰니, 임금은 더욱 화를 내어 ‘강신(强臣)이 임금을 협박한다.’는 하교(下敎)가 있었다. 승정원에서 간(諫)하였으나 되지 않자 마침내 그 직에서 물러났다.
여염(閭閻)집 여인이 입궁(入宮)한 일이 있었는데, 이를 말한 많은 사람들이 죄를 입었다. 공이 왕소3)(王素)의 말을 인용하여 아뢰고 또 경연(經筵)에서의 하교로 인하여 밖의 말이 안으로 들어가는 폐단을 강력히 논(論)하니, 임금이 크게 깨닫고 비답을 내리기를, “이러한 신하가 있는데, 내 무엇을 걱정할 것인가?”하였다.
또 겨울의 천둥 문제를 아뢰니, 임금이 “격언(格言)과 지론(至論)은 오늘의 약석(藥石)이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노강(露江)에서 열병(閱兵)을 함에 있어 세자가 따라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공이 상소(上疏)하여 간절히 간하며 이르기를, “민간에서는 모두 전하께서 밖에서 오래도록 노고(勞苦)를 하시므로 특히 궁중(宮中)에서의 정사(政事)를 감당하지 못하실까 걱정이라고 합니다.
신은, 말달리며 사냥하는 일이 이로부터 시작될까두려우니, 세자가 바른길로 교육되어야 할 때에 어찌 군사(軍士)의 일로 계도(啓導)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공은 이때 호서(湖西)로부터 고시(考試)를 관장하고 돌아왔는데, (청한 사람들이) 많이들 체포되거나 파직되었으나, 공에게는 끝내 죄가 주어지지 않았다.
을미년(乙未年, 1655년 효종 6년)에 일본(日本)의 관백(關白)이 새로이 위에 올랐으므로, 조정(朝廷)에서 통신사(通信使)를 보냄에 있어 공이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바다를 건너는 데 큰바람이 불어 배가 거의 엎어질 지경이었다. 배 안 사람들은 모두 죽을 상이었으나 공은 키가 있는 선실(船室)에 오뚝이 앉아 서신문(誓神文)을 외우며 비니, 좀 뒤 바람이 자며 파도가 가라앉았다.
다음 해 돌아오다가 마도(馬島, 대마도)에 배를 대니 도주(島主)가 강호(江戶)의 위조된 서장(書狀)을 들고 협박하며 관백의 원당(願堂)에 절을 하게 하였다. 공이 의(義)를 내세워 거절하니, 도주는 10여 일 동안 공급(供給)을 중단하고 위협하였다. 공이 배를 감추고 객관(客館)을 열지 않으며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것처럼 하니, 도주는 굽히지 않을 것을 알고 비로소 돌려보냈으며, 채 돌아오기 전에 호당(湖堂, 독서당(讀書堂))에 선발되었다.
공은 일찍이 문신(文臣)의 정시(庭試)에 입격(入格)하여 임금으로부터 말[馬]을 하사받은 바 있는데, 이해 가을에 또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형조(刑曹)ㆍ예조(禮曹)의 참의(參議), 승정원의 승지(承旨)를 지내고 외직(外職)을 청원해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되어서는 부정(不正)을 막고 궁한 자에게 혜택을 입혔는데, 마침 인산(因山, 국상(國喪))을 맞이하였으나 백성들은 큰 역사가 있는지를 몰랐다.
또 승정원으로 돌아와 장(長)의 자리에 오르니 최상의 선발(選拔)이었다. 이보다 앞서 윤선도(尹善道)가 예론(禮論)을 핑계하여 사림(士林)들에게 화를 빚었는데, 조경(趙絅)이 윤선도를 위하여 비호(庇護)함에 있어 말이 더욱 패망(悖妄)스러웠다.
공은 조경의 현혹(眩惑)하려는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뒤에 동춘(同春) 송 선생(宋先生, 송준길(宋浚吉))이 윤선도를 귀양길에서 풀어주기를 청하니 공이 나아가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허봉(許篈)의 석방을 청하였으나 선조(宣祖)는 이를 윤허(允許)하지 않았는데, 이는 오늘날 본을 떠야 할 바입니다.”하니, 사론(士論)이 옳게 여겼다.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여 대사간(大司諫)ㆍ대사성(大司成), 예조ㆍ병조ㆍ형조ㆍ공조의 참판(參判), 한성부(漢城府)의 좌윤(左尹)ㆍ우윤(右尹)을 거쳐 부사(副使)로 차출되어 연경(燕京, 북경(北京))에 갔었으며, 경상(慶尙)ㆍ경기(京畿)의 감사(監司)가 되었다.
영남에 있을 때에 맨 먼저 일에 힘쓰지 않는 수령(守令)을 적발하여 파직시킨 바 있었는데, 그 사람이 다른 일로 대관(臺官)을 사주하여 공을 논하게 하였으나 그 사실이 드러나서 죄가 주어졌고, 공 역시 인혐(引嫌, 혐의를 들어 사임함)하여 면직이 되었다.
신해년(辛亥年, 1671년 현종 12년)에 크게 기근(饑饉)이 들었을 때에 공은 사간원에 있었는데, 각 영문(營門)으로 하여금 마축(馬畜)을 모두 들에 방목(放牧)시키기를 건의(建議)하여 그 먹이 5천 석을 덜어내어 굶주린 백성들을 살렸다.
곧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거쳐 특별히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제수되었는데, 궁가(宮家)를 빙자하여 백성과 전토(田土)를 다투는 간사한 자가 있으므로, 공은 사실을 들어 바루었으나, 이 사건이 궁중(宮中)에서 정체되면서 오래도록 내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공은 좀 뒤 다른 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공은 관직에 임하여 청렴하고 근면하면서 밝게 살펴 법을 지키고 형(刑)을 단정함에 더욱 신중을 기하며 이르기를, “사람의 생사(生死)가 붓끝에 달려 있다. 살려야 할 사람을 죽게 해서는 반드시 재앙이 따른다.” 하였다.
공이 일찍이 만해(蠻海)로부터 돌아오자 임금이 맨 먼저 늙은 어버이의 안부를 묻고서 과일을 내리므로, 곧 돌아가 어버이에게 드릴 것을 청하며 근친(覲親, 어버이를 찾아 뵘)을 청원하자 또 역마(驛馬)를 내주었으니, 이는 모두 양조(兩朝)의 특별한 은전(恩典)이었다.
이때 공의 지위는 판서(判書)였고 부모가 모두 무양(無恙)하시며 생일(生日)의 경하에 말과 교자(轎子)가 문 앞에 가득하니, 사람들은 그 효성을 부러워하였다. 지중추(知中樞), 공조 판서(工曹判書), 홍문 제학(弘文提學),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정헌 대부(正憲大夫)로 승진하였고, 외직으로 나가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되었다가 돌아와 판윤(判尹)이 되었다.
경신년(庚申年, 1680년 숙종 6년)에 숭정 대부(崇政大夫)ㆍ숭록 대부(崇祿大夫)로 승진하여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예문 제학(藝文提學)이 되었다가 계해년(癸亥年, 1683년 숙종 9년)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올라 예조 판서를 겸하였다.
정묘년(丁卯年, 1687년 숙종 13년)에 대제학(大提學)의 자리가 비자 임금은 지난날의 추천을 끌어 써 특별히 양관(兩館, 홍문관ㆍ예문관) 대제학에 공을 임명하였다. 하루는 금근(禁近, 문학으로 시종(侍從)하는 신하)의 여러 신하를 불러 여체(儷體)로 부(賦)를 짓고 또 십운시(十韻詩)를 명하여 공으로 하여금 고과(考課)해서 올리라 하였다.
공이 또 임금의 명에 의하여 시문를 지어 올리자, 친히 고과해서 수석으로 정하였는데, 임금의 포함함이 매우 융성하였다. 공은 상으로 내린 것을 받자 곧 팔아 음식을 갖추게 해서 친한 벗들과 즐겁게 마시며 임금이 내려줌을 보람 있게 하였다. 병으로 말미를 고하니 내의(內醫)를 보내 보살피게 하였으며, 이윽고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공은 나이 20에 과거에 수석(首席)으로 발탁되어 조정(朝廷)을 출입함에 있어 문학(文學)의 명망은 일세를 탄복케 하였으나 전혀 이로 해서 기뻐하지 않았고 몸가짐이 처자(處子)와 같아 남과 경쟁을 하거나 말씨름을 하는 일이 없었으며, 조정에 나아간 지 40년에 일찍이 한번도 권요(權要, 권세 있는 중요한 자리)를 담당한 일이 없었다.
그리고 공무(公務) 외의 한가한 시간에는 늘 문을 닫고 고요히 앉아서 가세(家勢)의 유무는 묻지 않았으며, 감흥(感興)을 맞이해서는 혹 술잔을 들며 시(詩)를 읊조릴 뿐이었다. 만년(晩年)에 특별히 연이어 발탁이 되고 밝은 시대를 만났으나 마침 세도(世道)가 평탄치 못한 때를 당하여 공의 마음은 특히 즐겁지 못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세태(世態)가 한번 변하자 공은 특명으로 북사(北使)를 맞이하러 나가게 되어 있었는데, 도중에 전직(銓職)으로 체임되었다. 처음에 흉인(凶人) 유위한(柳緯漢)이 투서(投書)하여 이르기를, “세자(世子)를 세우는 문제를 논의할 때에 여러 신하들은 딴 뜻이 있었다.”고 하였으므로, 임금은 그 간사함을 알고 물리쳤는데, 이때에 이르러 뭇 흉인들은 ‘경연(經筵)에서의 공의 대답에 분기(忿氣)가 있었다’고 말하였고, 또 공이 대신 지은 교문(敎文)에 ‘몽란(夢蘭)’ 두 글자가 있었다고 지적하여 죄로 삼으니, 공은 드디어 삭출(削黜)을 당하였다.
신미년(辛未年, 1691년 숙종 17년)에 명천(明川)으로 귀양 갔었는데, 명천은 영해(嶺海) 2천 리 밖에 있었는데도 떠남에 있어 얼굴빛에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으며, 현지에 도착해서는 깊이 들어앉아 독서만 하였고 시사(時事)는 입밖에 내지 않았다.
다음 해 봄에 아들을 보내 서울로 돌아가게 하였고, 술 마시다가는 이 백사(李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철령 운가(鐵嶺雲歌)를 외웠는데, 음절이 처량하여 한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2월 2일 붕사(鵬舍)에서 졸(卒)하니, 수(壽)는 65세이다.
그해 5월에 양주(楊州)의 동해곡(東海谷) 곤향(坤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2년 뒤 갑술년(甲戌年, 1694년 숙종 20년)에 인현 왕후(仁顯王后)가 복위(復位)되자 공의 관작(官爵)을 되돌려 주라 명하고, 또 각별히 “지난날의 일이 후회스럽다.”고 하교(下敎)하니, 공의 충절(忠節)은 더욱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된 것이다.
금상(今上, 영조(英祖)) 을사년(乙巳年, 1725년 영조 원년)에 문헌(文憲)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공의 선조(先祖)에 영의정(領議政) 충경공(忠景公) 남재(南在)는 국초(國初)의 명상(名相)이요, 현감(縣監) 증(贈) 찬성(贊成) 휘(諱) 복시(復始), 도사(都事) 휘 진(鎭), 부사(府使) 휘 득붕(得朋)은 곧 공의 3대인데, 양대(兩代)에 걸친 증직(贈職)은 모두 공의 직질(職秩)에 견준 것이다.
비(妣)는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이며, 사인(士人) 신복일(申復一)이 그 고(考)이다.
공은 지평(持平) 벼슬을 한 평강(平康) 채성구(蔡聖龜,1605~1647)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남정중(南正重,1653~1704)을 두니 관찰사(觀察使)요,
관찰사의 아들 남한기(南漢紀)는 부사(府使)이고, 6녀는 군수(郡守) 이정엽(李廷燁), 사인(士人) 이창조(李昌朝), 현령(縣令) 홍우집(洪禹集), 지평 이도겸(李道謙), 진사(進士) 정석명(鄭錫命), 목사(牧使) 민익수(閔翼洙)에게 출가하였다.
부사는 3남을 두었는데, 남유상(南有常)은 문행(文行)이 있었으나 일찍이 죽었고 증(贈) 수찬(修撰)이며, 다음 남유용(南有容)은 시직(侍直)이요 다음은 남유정(南有定)이다. 남유상의 아들은 남공필(南公弼)이요, 남유용의 아들은 남공보(南公輔)이다. 그리고 남명중(南命重)ㆍ남성중(南聖重)ㆍ남경중(南景重)은 공의 측실(側室) 소생이다. 시문(詩文) 몇 권이 있고 편찬한 ≪기아(箕雅)≫가 세상에 전하고 있다.
공은 사람됨이 질박하고 신실하여 후하고 민첩하며 장엄(莊嚴)하면서도 화합(和合)하며, 낮추고 겸손함으로써 스스로를 수양하여 남과 경쟁하는 일은 없었으나 중심(中心)은 확고하게 지키는 바가 있었고 여러 사람과 크게 다르게 하려 하지 않았다.
입은 옷이 아주 검소하고 사는 곳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였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재상(宰相)인지 모를 정도였다. 문장(文章)을 지음에 있어 신기하게 빨라서 정광(精光)이 번쩍였고 풍류(風流)의 표출(表出)은 온 나라를 경동(傾動)시켰는데도, 그 얼굴을 보면 무능한 것처럼 겸손하였으며 더듬거리는 그 말을 들으면 입에서 나오는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적에 공의 얼굴빛을 한번 우러러보고 이러하다는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공은 가정에 있어 두 누이를 지극히 아꼈고 고아(孤兒)가 된 생질을 길렀다. 조선(祖先)을 독실히 받들었고 인척(姻戚)과의 화목이 두터웠다.
집안에서의 아름다운 몸가짐이 또 이러하니, 지금의 이익만을 일삼고 근본을 망각하는 자들이 볼 때에 과연 어떠하겠는가? 이러므로 마침내는 저와 같이 뛰어나고 우뚝하게 성취(成就)한 것이다. 처음에 공이 문장이나 하는 선비로 안 자는 사실 깊이를 모르는 처지였지만, 사람들이 공의 짤막한 문자를 얻더라도 구슬을 간직하듯 보배로이 여기고, 미개(未開)한 나라에서도 나라를 빛낼 인재임을 알았으니, 그 문장은 성대(盛大)하다 하겠다.
그러나 뒤의 공을 귀히 여기는 자는 문장에 있는 것이 아니요, 늦게까지 지킨 절의(節義)에 있었으니, 그 경중(輕重)은 본래부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사람들도 선택할 바를 알 것이다. 명(銘)하여 이르기를,
아! 호옹(壺翁)은 크고 또 너그러웠네.
말을 어눌하게 하면서도 민첩하였고 천성(天性)과 덕(德)이 온전하였네.
문장(文章)으로 드러나 명성이 별처럼 빛이 났으며,
그 속마음을 헤아려 보면 철석(鐵石)과 같은 간장(肝腸)이라네.
약관(弱冠)에 과거(科擧)에 올라 예문관(藝文館)에서 근무하였네.
선실(船室)에서 소리 높여 읊조리매 만해(蠻海)의 거센 파도 가라앉았네.
맑은 재량(裁量)과 통달한 식견(識見) 자연히 대관(大官)에 이르렀네.
임금이 그 문장을 마음에 두었다가 늘그막에 사단(詞壇)의 장(대제학(大提學)의 일컬음)에 임명했네.
지위는 높았으나 마음은 낮추었고 아름다움을 속에 지니고 한가로움을 지켰다네.
무진년(戊辰年, 1688년 숙종 14년)ㆍ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에 그 대절(大節)은 곧 볼만하였네.
화복(禍福)을 어찌 말할 것인가? 신하의 도리에 있어 마음 편한 것을.
철령(鐵嶺)은 하늘을 가로질렀는데 눈에는 구름과 추위뿐이었다네.
오직 이 한 마음은 아홉 번 죽을지라도 붉기만 하였다네.
사람이 말하기 어려운 바는 아비와 자식 사이라네.
무고(誣告)가 쉽사리 들어가니 성고(聖考, 숙종을 지칭함)가 탄식한 바라네.
공의 충성은 더욱 돋보였고 천리(天理)는 다시 돌아왔다네.
사람들은 끝까지 절의를 지키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가을 국화(菊花)는 향기로워 저녁 식사(食事)에 알맞다네.
누가 감히 공을 평(評)할 것인가?
연국공(燕國公)과 허국공4)(許國公) 및 반고5)(班固)라네.
크나큰 이 빗돌 양주(楊州)의 산에 있는데, 내 명시(銘詩)를 지으니
백세(百世)토록 깎이지 않을 것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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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경신(庚申)의 역당(逆黨) :
숙종 6년(1680)에 당시의 영의정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이 종실 복창군(福昌君)의 3형제와 역모(逆謀)를 꾀하였다는 옥사(獄
事)가 일어났는데, 이에 연루(連累)된 자들을 일컬음.
2) 인일시(人日試) :
인일 곧 음력 정월 초7일이 가절(佳節)이라 하여 성균관(成均館) 유생들을 대상으로 하여 보이는 시험. 인일제(人日製).
3) 왕소(王素) : 송 인종(宋仁宗) 때에 간원(諫院)의 지사(知事)로서 일을 맞이할 때마다 용감히 간(諫)하였던 인물.
4) 연국공(燕國公)과 허국공(許國公) : 당 현종(唐玄宗) 때 문장에 뛰어났던 장열(張說)과 소정(蘇頲)에게 각각 붙여진 봉호(封號).
5) 반고(班固) : 동한(東漢) 때 사람. 9세에 이미 글에 능했고 그 아버지가 저술하던 ≪한서(漢書)≫를 이어받아 완성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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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判書壺谷南公神道碑。
肅宗十四年戊辰, 王子生。 翌年春, 將定號爲元子, 亟召公卿諸臣議, 上盛氣以胥之曰 “敢有貳者, 納官退去可也。” 吏曹判書、大提學南公龍翼獨力言其不可, 蓋曰 “中宮春秋鼎盛, 王子生數月, 何汲汲爲? 臣則有退而已。” 屢問, 言益勁直, 聞者縮頸。 時庚申逆黨由陰逕鑽進, 方以預建爲機括, 人皆謂死生禍福判於一言, 而公乃毅然守正, 雖臨之以雷霆, 而不能屈。 古人謂萬代瞻仰在此一擧, 斯公之謂歟! 儲號旣定, 仁顯王后遜位, 公亦北竄以卒。
公字雲卿, 號壺谷, 宜寧人。 方生赤光滿室, 學語便識字, 語或驚人。 叔祖判書銑常撫頂曰: “此吾家奇寶也。” 乙酉, 發解三場, 明年進士。 又明年, 魁人日試, 又明年, 庭試及第, 時年二十一。 隷槐院, 薦入堂后, 又被史薦, 爲凶黨所尼。 侍講院說書・司書、成均館典籍、司憲府監察・持平、司諫院正言、兵・禮二曹郞、弘文館副修撰・副校理, 以微事斥補慶尙都事, 又爲御史嶺南。 公當孝廟盛際, 在三司久, 補益弘多。 趙公錫胤、李公慶億言事被謫, 旋減等, 臺臣仍請全釋, 承嚴批。 公引避盛陳喜怒過中、情志相阻之失, 上益怒, 有强臣脅君之敎。 喉司爭之, 不得, 竟免其職。 有閭家女入宮, 言者多被罪, 公引王素言進戒。 又因事論外言入內之弊。 上批 “有臣如此, 予何憂焉” 又以冬雷陳戒, 則曰 “格言至論爲今藥石。” 上將閱武露江, 世子從之, 公上疏切諫以爲 “閭巷皆謂殿下久勞於外, 殊不堪端拱九重。 臣恐馳騁畋獵之擧從此而始, 元良蒙養之時, 又豈可導以軍旅之事也” 公時自湖西掌試還, 仍以沿途飢疫民死之數聞, 上怒甚, 令公勿隨駕。 救公者多被逮罷, 而於公終不之罪。
乙未, 日本關白新立, 朝廷遣信使, 公爲從事。 方涉海, 颶風作, 舟幾覆, 舟中人無人色。 公危坐柁樓, 口呼誓神文以祝之, 已而風定浪息。 明年, 回泊馬島, 島主持江戶僞狀, 迫令行拜于關白願堂。 公以義折之, 島主絶日供旬餘以脅之。 公藏舟閉館, 若不欲歸, 島主知不可屈, 始遣歸。 未還, 被湖堂選。 公嘗於文臣庭試入格, 賜馬。 是秋, 又魁重試, 陞通政, 刑・禮二曹參議、承政院承旨。 乞外得楊州, 戢猾惠窮, 會値因山, 而民不知有大役。 又還喉院, 陞長席, 極選也。 先是, 尹善道假托禮論, 搆禍士林, 而趙絅爲善道伸救, 語益悖。 公陳啓請治絅熒惑之罪。 後同春宋先生請放善道之謫, 公進曰 “先正臣李珥請釋許篈, 而宣廟不許, 此今日所當法也。” 士論韙之。 進嘉善、大司諫、大司成、禮・兵・刑・工參判、漢城左尹・右尹, 充副价之燕, 爲慶尙、京畿監司, 在嶺首按守宰不事事者罷之。 其人嗾臺官, 以他事論公, 事覺抵罪, 公亦引免。 辛亥, 大饑, 公在諫院, 建請令各營門馬畜悉放於野, 省其食五千石以活民。 尋由戶參, 特授刑曹判書, 有奸細藉宮家與民爭田者, 公擧實而直之, 久留中不下。 俄因他事罷。 公當官淸勤, 斤斤守法, 尤愼於斷刑, 曰 “人之生死懸於筆端, 使可生而死, 殃必至矣。” 公嘗自蠻海還, 上首問老親安未, 得賜果輒請歸遺, 乞覲又給馹, 皆兩朝異恩也。 及是公位躋八座, 二尊人俱無𧏮, 時節慶賀, 軒駟溢門, 國人艶其孝。 歷知樞、工書、弘文提學、大司憲, 陞正憲, 出爲開城留守, 還判尹。 庚申, 崇政、崇祿、議政府參贊、藝文提學。 癸亥, 輔國、兼判禮曹。 丁卯, 文衡缺, 上用宿薦, 特拜公兩館大提學。 一日, 召禁近諸臣賦儷體, 又命十韻詩, 使公考進。 公又應製, 上親批居首, 衮褒甚隆。 公得賞賚, 趣賣令供具, 與親朋樂飮, 以侈上賜焉。 以病告, 遣內醫診視。 尋判吏曹。 公弱歲擢高第, 出入金閨, 文望伏一世, 而絶不以是自喜, 持己如處子, 不與人馳逐、頡頏言論。 立朝四十年, 未嘗一當權要。 每公餘, 閉戶淸坐, 不問家有無, 遇興或引白哦詩而已。 晩年, 連被特簡, 際遇昭融, 而適丁世道平陂之會, 公意殊不樂也。 未幾, 時象一變, 公以特命儐接北使, 在道遞銓職。 始兇人柳緯漢投匭謂 “議儲時, 諸臣有異意”, 上燭其奸而斥之。 至是, 群凶謂公筵對有忿氣, 又抉摘公代撰敎文 “夢蘭” 二字爲罪, 公遂被削黜。
辛未, 配明川, 明在嶺海二千里外, 將行無幾微見色, 至則深居讀書, 口不道時事。 翌年春, 送子還京, 酒中誦李白沙《鐵嶺雲歌》, 音節悽惋, 座中皆泣下。 以二月二日, 卒于鵩舍, 壽六十五。 其年五月, 葬于楊州東海谷向坤之原。 後二年甲戌, 坤儀復正, 命還公爵, 又下敎痛示旣往之悔。 公之危忠大節, 益可以有辭於後世矣。 今上乙巳, 賜諡文憲。 公先有領議政忠景公在, 爲國初名相。 縣監・贈贊成諱復始、都事諱鎭、府使諱得朋, 是公三世, 兩世之贈皆視公秩。 妣平山申氏, 壯節公崇謙之後, 士人復一其考也。
公娶持平平康蔡聖龜之女, 有子曰正重, 觀察使。 觀察男漢紀, 府使。 六女 歸郡守李廷燁、士人李昌朝、縣令洪禹集、持平李道謙、進士鄭錫命、牧使閔翼洙。 府使三男 有常, 有文行, 蚤死, 贈修撰 有容, 侍直 有定。 有常男公弼, 有容男公輔。 命重、聖重、景重, 公側出也。 有詩文幾卷, 所編《箕雅》行于世。 公爲人質實, 厚而敏, 莊而和, 卑謙自牧, 與物無競, 中則確乎有守, 而不欲甚異於衆。 被服寒素, 屋不蔽風雨, 見者不知爲宰相也。 詞翰神速, 燁燁有精光, 風流標致, 傾動一國。 而視其貌, 退然若無能; 聽其言, 吶吶若不出諸口。 縡於幼時, 一瞻公顔色, 尙能識其如此。 公居家, 遇二妹甚至, 畜甥侄之孤者, 篤於奉先, 厚於睦姻。 內行之美又如此, 其視今之事末忘源者, 果何如也 是以畢竟成就若彼其卓卓。 始之知公以文章之士者固淺矣, 然人得公隻字, 寶之若拱璧, 以至蠻貊之邦亦知有華國之材, 其文章可謂盛矣。 顧後之貴公者, 不在於文章而在於晩節, 則其輕重固有在焉, 世之人其亦知所擇哉! 銘曰。
猗嗟壺翁 旣碩且寬。 訥而克敏, 天與德完。 發爲文章, 華若星爛。 而測其內, 鐵石爲肝。 弱冠大鳴, 翔于金鑾。 柁樓高詠, 蠻海息瀾。
淸裁達識, 自致大官。 上懷其文, 老長詞壇。 位崇心庳, 含章葆閑。 龍、蛇之歲, 大節乃觀。 禍福奚說 臣義則安。 鐵嶺橫天, 目窮雲寒。 惟此一心, 九死如丹。 人所難言, 父子之間。 讒構易入, 聖考攸嘆。 公忠益白, 天理好還。 人亦有言, 晩節保難。 秋菊馨香, 宜爾夕餐。
疇敢評公燕、許與班。 有穹斯石, 維楊之山。 我作銘詩, 百世不刊。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