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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통정대부 이조참의 이공 묘갈명 병서(贈通政大夫吏曹參議李公墓碣銘幷序)
공의 휘는 세관(世觀)이고 자는 대백(大伯)이다. 진성이씨(眞城李氏)는 생원(生員)으로 밀직사(密直使)에 추증된 석(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6세를 지나 문순공(文純公) 퇴계선생(退溪先生)이 있어 우리 동방 성리학의 조종(祖宗)이 되었다.
또 2세를 지나 영도(詠道)는 원주목사(原州牧使)를 지냈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니 호는 동암(東巖)이다. 동암공이 기(岐)를 낳으니 공릉참봉(恭陵參奉)을 지냈고 호는 수졸당(守拙堂)으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희철(希哲)로 장수도찰방(長水道察訪)을 지냈고 이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조고는 회(櫰)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수약(守約)으로 정릉참봉(靖陵參奉)을 지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모친은 진주강씨(晉州姜氏)로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된 자(鄑)의 딸이다. 공은 숙종 기사년(1689)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영특하여 대절(大節)이 많았다.
글을 읽음에 거침없이 통하여 막히거나 걸림이 없었으나 문구를 위한 공부는 달갑지 않게 여겼다. 8세 때, 안찰사(按察使)가 부내(府內)에 행차하였다가 도산(陶山)에 들어오자, 공이 부친 판서공을 배행하여 가서 뵈었는데, 안찰사가 귀함을 자처하는 기색이 있자 공이 질타하니, 안찰사가 부끄럽게 여기며 사과하고,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치하하였다.
정축년(1697) 정부인(貞夫人)의 상을 당하자, 밤낮으로 가슴을 치며 통곡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두 아우를 돌보면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고, 병이들면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마치 고통이 자신에게 있는 듯하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약관의 나이 때 우연히 누명을 쓰게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증언하여 그 일을 바로잡았다.
방백(方伯)이 판정을 내리며 말하기를 “계산(溪山)의 초목도 오히려 사랑스럽거늘 이씨문중의 훌륭한 손자를 어찌 차마 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문장에 뛰어났으나 과거 보러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산림에 의취를 붙여 당호(堂號)를 목우(牧牛)라 편액 하였다. 이따금 몸소 비천한 일을 하면서 말하기를 “내 힘으로 먹는 것이 바로 나의 본분이다.”라고 하였다.
예서(隷書)에 능하여 바야흐로 뜻이 맞으면, 무더운 날씨로 땀이 비 오듯 흘러도 피곤한 줄 몰랐고 경서와 사서, 잡문(雜文) 여러 수백권을 손수 베꼈다. 정유년(1717) 향음주례(鄕飮酒禮21)를 행할 때, 공이 의식을 행하는 자리에서 적절하게 주선하니 거동이 법도에 맞았다.
무신년(1728)에 의병이 일어났을 때 여러 일이 서툴고 두서가 없는 상황에서 공이 모든 일을 총괄하니, 풍채가 당당하고 호령이 분명하고 엄숙하여 감히 소란스럽게 하거나 대오를 이탈하는 자가 없었다. 판서공(判書公)이 일찍이 병이 들어 매우 위태롭게 되었을 때, 공은 손가락에 피를 내어 소생하게 하였다.
돌아가신 뒤에는 말이 선고의 일에 이르면 문득 오열하며 눈물을 흘렸고 생일에도 집사람들에게 술과 음식을 차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집안일을 처리함에 단정하고 엄숙하여 법도가 있었다. 안팎과 상하로 각각 분수와 직분을 지키게 하니 감히 어긋남이 없었다. 후진들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소학(小學)을 먼저 가르쳐 근본을 배양하게 하였다.
기상은 엄정하였으나 남을 대할 때는 온화함이 넘쳐흘렀다. 친지(親知)의 상에도 음식은 소식을 하되 차등을 두었으며 종일토록 연회를 베풀어도 어지러운 데 이르지 않았다. 공세(公稅)를 실어낼 때는 반드시 가난한 집보다 먼저 하였다. 도산(陶山)에 별저(別儲)를 세우고 선조의 문집을 중간하였으며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까지 중간(重刊)하였다.
세 번이나 참봉에 의망(擬望2)되었지만 매번 두렵게 여기며 스스로 편안해 하지 않았다. 80세가 되었을 때 마침 나라의 경사가 있어 백성들에게 특별한 은전이 많았는데 전례에 따라 공을 보고하여 아뢰려하자, 문득 엄중히 사양하며 저지하였다.
경인년(1770,영조 46) 공의 나이 82세 때에 병세가 위독하자, 집안일은 젖혀두고 제례의 물품과 가지 수를 바로 하고 8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백운지(白雲池) 선영 아래에 장사를 지냈다가, 정조 기유년(1789,정조 13)에 건지산(搴芝山) 아래 불모동(不暮洞) 동쪽 기슭 남서쪽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헌종 무술년(1838,헌종 4)에 손자인 태순(泰淳)이 귀하게 됨으로써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배위 영해신씨(寧海申氏)는 학생 신한태(申漢泰)의 딸로, 을유년(1765,영조 41)에 돌아가니 묘소는 판서공의 묘 동쪽에 있다. 2녀를 두었는데 송권(宋權)․ 권사철(權思哲)에게 각각 시집갔다.
계배위(繼配位)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영양남씨(英陽南氏) 표형(標衡)의 딸로, 묘소는 공의 무덤 아래에 있다. 2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 귀원(龜元)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귀휴(龜烋)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딸은 권사직(權思職)․ 김택범(金宅範)․ 최흥옥(崔興玉)․ 박진악(朴鎭岳)에게 각각 시집갔다.
이조참판의 아들은 종순(宗淳)․ 택순(宅淳)․ 의순(宜淳)․ 유순(儒淳)․ 태순(泰淳)인데 태순은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판을 지냈다. 통덕랑의 아들은 주부(主簿) 야순(野淳)․ 정순(庭淳)․ 암순(巖淳이다. 송권의 아들은 성엽(星燁)․ 정엽(井燁)이고, 딸은 황수원(黃洙源)․ 생원 권사협(權思浹)에게 각각 시집갔다.
권사철의 아들은 윤도(胤度)이고 딸은 이창동(李昌東)․ 서명윤(徐明胤)에게 각각 시집갔다. 권사직의 아들은 현도(玄度)이고, 딸은 임구(任球)에게 시집갔다. 김택범의 아들은 준린(俊鄰)이고, 딸은 이덕소(李德卲)에게 시집갔다. 최흥옥의 아들은 진태(鎭泰)이다. 박진악의 아들은 상영(祥永)이며, 딸은 김관운(金觀運)․ 류한휴(柳翰休)에게 각각 시집갔다.
종순의 아들은 휘근(彙根)․ 휘승(彙昇)․ 휘모(彙謨)이고, 택순의 아들 휘양(彙陽)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출계하였고, 다른 아들은 휘성(彙成)이다. 의순의 아들은 휘규(彙奎)․ 학림(鶴林)․ 휘조(彙朝)이고, 유순의 아들은 휘정(彙鼎)․ 휘점(彙漸)과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휘제(彙濟)이며, 태순의 아들은 생원 휘원(彙遠)과 휘운(彙運)이다.
야순의 대를 이은 아들은 참봉 휘정(彙政)이고, 정순의 대를 이은 아들은 휘창(彙昌)이며, 암순의 아들은 휘인(彙仁)․ 휘정(彙政)인데 휘정은 출계하였다. 현손(玄孫)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았지만, 그 중에 과거로 환로에 오른 사람은 문과에 급제한 통정대부(通政大夫) 만송(晩松)․ 정언(正言) 만덕(晩德)․ 첨지중추부사 만우(晩佑)․ 감역(監役) 만각(晩愨)과 이조 참의 중두(中斗)․ 정언 중언(中彦) 등이다.
공은 장대한 체구에 헌걸찬 모습이었으며, 성품은 침착 강직하고 간중(簡重)하였다. 검소하고 조용히 지내는 것으로 몸을 단속하고, 효도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으로 행동을 다스렸다. 역량은 상대를 진압하고 무리를 포용하기에 충분했고, 재주와 슬기는 일을 처리하고 위급함을 구제하기에 충분했으니, 그로 하여금 뜻을 얻어 일할 수 있는 자리에 처하게 하여 온축된 식견을 펼 수 있게 하였다면, 반드시 우뚝하게 혁혁한 사업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강(東岡)을 굳게 지키며 명리와 권세에서 몸을 단속하여 피한 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자취를 감추며 생을 마쳤다. 비록 구학(溝壑의 뜻23)이 확고하여 돌리기 어려웠다 하더라도 요제행장(潦霽行藏24)의 의리가 흉중에 본디부터 정해짐이 없다는 것을 알겠는가.
아! 훌륭하도다. 공의 후손들이 묘도를 닦으면서, 종현손(從玄孫) 만도(晩燾)가 초안한 「유사(遺事)」를 나에게 보이면서 묘갈문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 늙어 병약하고 황폐하고 비루한 나를 돌아보건대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어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삼가 그 대략만을 취하여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치밀하고 굳셈이여 / 瑟兮僩兮。
곧은 절조 바꾸지 않았으니 / 抱貞莫渝。
공은 본분을 지킨 분이로다 / 公其能守身者歟。
손수 많은 경서 베껴 전하고 / 手傳羣經。
선조의 문집을 간행했으니 / 梓行先書。
아름다운 행실에 또 누가 미칠 수 있으리 / 又何其嘉惠及人也。
아!(於乎)
청산에서 한 포의25)였으나 / 靑山一布衣。
후대에 말이 있으니 / 有辭來世。
명성과 공적이 묻혔다 말하지 말라 / 莫曰聲績之沉淪也。
[주해]
01) 향음주례(鄕飮酒禮) : 온 고을의 유생(儒生)들이 모여 향약(鄕約)을 읽고 술을 마시며 잔치하던 일이다.
02) 의망(擬望) : 벼슬아치를 발탁할 때 공정한 인사 행정을 위하여 세 사람의 후보자를 임금에게 추천하던 일을 말한다.
03) 구학(溝壑)의 뜻.
고매한 뜻을 품은 지사(志士)는 쉽사리 지조를 바꾸지 않는다는 뜻이다. 맹자 『등문공하(滕文公下)』 “뜻을 가진 선비는 시신이 도랑
에 버려질 것을 잊지 않고, 용기 있는 선비는 자기 머리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 『志士 不忘在溝壑勇士 不忘喪其元』”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04) 요제행장(潦霽行藏)
도가 있고 없음에 따라 관직에 나아가 일을 수행하는 것과 집으로 들어와 조용히 지내는 것을 뜻한다. 요(潦)는 우기를, 제(霽)는 건기
를 말한다. 행장은 논어 『술이(述而)』에 “써 주면 도를 행하고 버리면 은둔하는 것을 오직 나와 너만이 이것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用之則行 舍之則藏 惟我與爾有是夫]”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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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贈通政大夫吏曹參議李公墓碣銘 幷序
公諱世觀字大伯。李之氏眞城。自生員贈密直使碩始。六世而有文純公退溪先生。爲東方理學之宗。又二世諱詠道原州牧使。贈吏曹參判。號東巖生諱岐恭陵參奉。號守拙堂。於公爲高祖。曾祖諱希哲長水道察訪。贈吏曹參議。祖諱櫰贈吏曹參判。考諱守約靖陵參奉。贈吏曹判書。妣晉州姜氏。贈司僕正鄑之女。公以肅廟己巳生。自幼卓犖多大節。讀書沛然無室礙。而不屑爲句讀學。八歲時。按使行部入陶山。公陪判書公往見。按使有挾貴色。公叱之。按使慚謝。因賀以偉器。丁丑遭貞天人喪。晝宵哭擗 。幾滅性。視護兩弟。不暫離。疾病。爲之涕泣。若痛在身。鄕里咸異之。弱冠。偶陷縲絏。鄕人證直之。方伯判曰。溪山草木尙可愛。李氏芳孫豈忍刑。富於文詞。而不樂就公車。托趣山林。扁其堂曰牧牛。往往親執卑賤事。曰食力是吾本分。善隷書。方其意會。盛暑流汗如漿。而不知疲。手寫經史雜文累百卷。丁酉行鄕飮禮。公折旋罇俎之間。動中儀節。戊甲倡義旅。庶事草昧。公爲都摠。風彩英特。號令明肅。無敢喧譁失伍者。判書公嘗遘沴極殆。公灌指血以甦。孤露後語及先故。輒嗚咽流涕。生日不許家人設酒食。處家整肅有法度。內外上下。各守分職。無敢乖戾。敎後進。必先小學。培養根本。氣象凝重而接人。盎然而和。親知之喪。食素有差。燕飮終日。不及亂。輸公稅。必先下戶。陶山爲立別儲。重刊先集。以及朱節。三擬齋郞。每蹙然不自安。及躋大耋。値邦慶。士庶多別恩典。有欲循例報聞。輒嚴辭止之。庚寅公年八十二。疾革。處置家事。正祭禮品數。八月二十日終。始葬白雲池先兆下。正廟己酉。移奉于搴芝山下不暮洞東麓未向之原。憲廟戊戌。以孫泰淳貴。贈吏曹參議。配寧海申氏。學生漢泰女。卒乙酉。墓判書公兆東。有二女宋權,權思哲。繼配英陽南氏。通德郞標衡女。墓在公兆下。有二男四女 。男龜元僉樞。贈吏曹參判。龜烋通德郞。女權思職,金宅範,崔興玉,朴鎭岳。吏參子宗淳,宅淳,宜淳,儒淳,泰淳文科兵曹參判。通德郞子野淳主簿,庭淳,巖淳。宋權子星燁,井燁。女黃洙源,權思浹生員。權思哲子胤度。女李昌東,徐明胤。權思職子玄度。女任球。金宅範子俊鄰。女李德卲。崔興玉子鎭泰。朴鎭岳子祥永。女金觀運,柳翰休。宗淳子彙根,彙昇,彙謨 。宅淳子彙陽僉樞出。彙成。宜淳子彙奎,鶴林,彙朝。儒淳子彙鼎,彙漸,彙濟僉樞。泰淳子彙遠生員,彙運。野淳嗣子彙政參奉。庭淳嗣子彙昌。巖淳子彙仁,彙政出。玄孫以下不盡載。其有科宦者。晩松文通政,晩德正言,晩佑僉樞,晩愨監役,中斗吏議,中彦正言。公魁梧傑特。沈毅簡重。律身以儉約恬靜。制行以孝友敦睦。力量足以鎭物容衆。才諝足以綜事濟劇。使其處於得爲之地。展布其所蘊。則必有事業之巍赫矣。而乃固守東岡。斂避名勢。沈晦以終。雖其溝壑之志。確乎難回。而潦霽行藏之義。安知無素定於胷中者耶。於乎偉矣。公之諸孫。治公墓道。以公從玄孫晩燾所草遺事示興洛。責以牲石之詞。顧老病荒陋。無以堪是役。而辭之不獲命。謹最其大者。而爲之銘曰。
瑟兮僴兮。抱貞莫渝。公其能守身者歟。手傳羣經。梓行先書。又何其嘉惠及人也。於乎靑山一布衣。有辭來世。莫曰聲績之沉淪也。<끝>
西山先生文集卷之十八 / 墓碣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