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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로운글 ‥─‥ 스크랩 세계에서 평가하는 이순신 - 이순신의 생애와 업적
h영락 추천 0 조회 1,008 14.09.01 21:4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세계에서 평가하는 이순신
이순신의 생애와 업적
. 
 
 
 

<명량> 메인 예고편 이미지 : 다음 영화

<명량> 티저 예고편

 

 

 

이순신의 생에와 업적

 

 

조선시대 상류층 밥상

 

 

아래는 난중일기를 바탕으로 재현한 이순신 장군님 밥상

 


 

세계에서 평가하는 이순신 장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성격으로

가치지향적 인생을 살았던 이 순 신. 그는

임진왜란·정유재란이 벌어진 7년여 동안 40여 회의 해전에서

모두 승리한하늘이 보내준 민족의 영웅이다.

일러스트=김동준

 

명량 설민석 스페셜 인강 1탄

Click

 

이순신, 전설이 되다

Click

신병주의 조선을 뒤흔든 사건들 - 이순신, 전설이 되다

제27부 신병주의 조선을 뒤흔든 사건들

 

 


불멸의 이순신 - 명량해전

 

 해외에서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어떠헥 평가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막연하게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순신 장군..
외국에서는 이렇게 평가를 하고 있군요

세계에서 평가하는 이순신 장군.. 과연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위대한 장군을 평가할지...
아래 세계에서 평가하는 이순신 보시죠

 

요즘 명량으로 이순신 장군이 이슈죠..

 

간략하게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설명

1545년 (인종 원년) 4월 28일 ~ 1598년 (선조 31년) 12월 16일

세계에서 평가하는 이순신 조선 중기의 무관으로 임진왜란 당시,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한산대첩 등

수많은 해전에서 공을 세웠지만 원균의 모함
(+선조의 불신 : 할 말은 많지만..부들부들)으로 3

번 파직 + 옥중 생활 + 2번 백의종군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다시 복귀하여 명량에서 승리,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심 (공식기록)

 
이순신 장군님에 대한 외국인들의 평가
 
한민족은 항해술에 능했고 조선에는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탁월한 자질을 지닌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계 제작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 2차 대전 연합군 사령관 버나드 로 몽고메리
(Bernard Law Montgomery), [A History of Warfare]
 
"영국인들에게 그 공적에 있어 넬슨과 필적할 만한 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항상 힘들다.
하지만 만약 그런 영예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한 번도 패한 적이 없고 적군 속에서 싸우다 죽은
이 동방의 해군 사령관일 것이다."

- 영국 해전사 전문가이자 해군 중장
G. A. Ballad,
[Influence of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
 
"이순신은 불행히도 생을 조선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용명도 지명도
서양에 전하지 않고 있지만, 실로 훌륭한 해군 장군이다…
넬슨과 같은 사람은 그 인격에 있어서 도저히 어깨를 견줄 수 없다.
이순신 장군은 장갑함을 창조한 사람이며, 300년 이전에 이미
훌륭한 해군전술로써 싸운 전쟁 지휘관이었다.

- 일본해군준장 사토 데쓰타로, [제국 국방사론]
 
"이순신은 그 지휘 통솔력에서나 전술 능력에 있어서, 충성심과
용기에 있어서도, 실제로 기적과도 같은 이상적인 군인이었다.
세계 역사상 이순신만한 사람이 없으며,
이 인물의 존재는 조선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는데 도리어 일본사람의 편에서 그에 대한
존경심이 계승되었다…"

- 일본작가 시바 료타로, [언덕 위의 구름]
 
"사실 넬슨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은 아니다.
정말로 군신(軍神)의 이름에 어울리는 제독이 있다면
그것은 이순신이다.
이순신에 비교하면 나는 하사관만큼도 못한 존재이다." 
- 러시아 발틱 함대를 무찌른 도고 헤이치로 제독,

[일조중 삼국인민연대의 역사와 이론]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장수 정도
였을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일 몇날을 먹을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써 나의 직무를 다할수
있을련지 의문이 갔다 "
"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좋아하는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싶은 사람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하고싶은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

- 와카자키 야스하루 脇坂安治 [1554~1626 ]-
 
"황제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지략이 매우 튀어날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을 고르 지닌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명(明)국의 화근인 저 오랑케(훗날청國)를
견제할수 있을뿐 아니라, 저 오랑케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明)국으로
귀속시킬수 있을것이옵니다.
 
혹여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신(臣)이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대신들 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하여 수없이 이간질과 모함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않고
국왕에게 충의 보였으니 이어찌 장수가 지녀야할 가장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수 있겠나이까.
조선국왕은 원균에게 조선통제사 지위권을 주었으나
 
그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여척만이 남았으메
당황한 조선국왕은 이순신을 다시불러 조선수군통제사에게 봉했으나,
이순신은 단 한번의 불평없이 충의를 보여
10여척의 함대로 수백척의 왜선을 통쾌하게도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이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그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것이 뻔하며, 조정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할것입니다.
 
황제폐하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해주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통제사이순신분명히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황제폐하게 충(忠)을 다할것이옵니다.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저 북쪽의 오랑케(훗날의청국)를 견제케 하소서 "

-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황제에게 올린 상소 중 -
 
 
국내에서의 이순신 장군의 평가

 

한산도에 진을 치매 적이 감히 엿보지 못하고
한 바다를 가로막으매 그대 힘만 믿었더니 지난해에

패전한 것 원통한 말 어이할꼬.
그대 그냥 두었던들 그럴 리가 있었으랴.
대장을 잘못 바꿈, 이 나의 허물이라
누구더러 도와 달란 들 기운 짐 어이하리.
두 번 다시 부임하여 무너진 뒤를 이어 혼란을 수습하고
군졸을 불러 모았도다 …
사랑홉다 그대여, 공로는 사직에 있고
빛나는 충성 절개 죽어도 영화롭다.
인생 한 세상에 한번 죽음 못 면하네.
죽을 데서 죽은 이로 그대 같은 이 드물도다.
     선조,《卒逝後賜祭文》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죽은 순신이 산 왜놈들을 격파하였다.
 
《人皆謂死舜臣破生倭 선조실록 사관(史官)》

“이순신은 백 번 싸운 장군으로서 한 손으로
친히 무너지는 하늘을 붙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재질을 가지고도 운수가 없어 백 가지 재능을
한 가지도 풀어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서애 유성룡》

 

무후(제갈량)가 죽은 것은 병 때문이었는데,
공(이순신)이 죽은 것은 전사였다.
그러나 무후(제갈량)가 죽은 뒤엔
한(漢) 나라(촉한)의 종실(宗室)이 위태롭게 되었지만,
공의 경우엔 비록 죽었지만 남은 공렬(功烈)의 은덕을 입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직(社稷)이 거기에 힘입고 있으니,
공은 여한(餘恨)이 없을 것이다.

관음포이충무공전몰유허(李忠武公戰歿遺墟) 《연천 홍석주》

 

■ 우리 역사상의 장수들로서 보통때에 조그만 적을 만나

공로를 세우고 이름을 날린 이는많았지만

공과 같은 이는 나라가 고작 쇠약해지고 전쟁을 꺼려하는

때를 당하여 천하에 더할 수 없이 강한 적을 만나서
크고 작은 수십 번 싸움에 모조리다 이겨내어 서해를가로막아
적들이 수륙으로 병진할 수 없도록 하여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근본을 삼은것이니, 저 한 때의 공을 세운

신하 들로서는 따를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그의 몸을 세우는 절개와 국란에 죽는 충성과 또 행군하고
용병하는 묘리며 복잡한 사무등을 처리하는 지혜는

이미 다 보고 아는 일이라
비록 옛날의 명장이나 어진 장수들로서

백년에 한 둘 밖에 나지 못하는
그런 인물로도 이 분을 넘어 설 이는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 인조때 대제학,이식>


 ■ 나는 그대를 버렸건만 그대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
일등공신으로 뽑았건만 포상이 오히려 부족하다.
<조선시대 제14대왕, 선조>


 ■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예부터 있지마는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 이분에게서 처음 보네.
<조선시대 제19대왕, 숙종>


 ■ 내 선조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에 기초가 된 것은 오직
충무공 한 분의 힘, 바로그것에 의함이라.
내 이제 충무공에게 특별한 비명을 짖지 않고 누구 비명을 쓴다 하랴.
당나라 사직을 안정시킨 이성과 한나라 왕실을 회복시킨
제갈량을 합한 분이 충무공이다.
<조선시대 제22대왕, 정조>


 ■ 공은 엄하고 진중하여 위풍이 있는 한편 남을 사랑하고
선비에게 겸손하며 은혜와 신의가 분명하고 식견과 도량이 깊어
기쁨과 노여움을 잘 나타내지 않았다.


일찍이 하는 말이“대장부 세상에 나서 쓰이면 죽을 힘을 다해서
충성할 것이요. 쓰이지 못하면 농사짓고 살면또한 족한 것이니
권세있는 자에게 아첨하여 뜬 영화를 탐내는 것은
나의 부끄러워 하는바라” 하였다.
<조선시대 인조때의 승지, 최유해>


 ■ 이순신은 수근 한 선비와 같았으며 말과 웃음이 적었다.
재주는 있으되 명이 없어 그 가진재주의 백에 하나도

미처 펼치지 못했다.
<이순신의 벗이며 영의정,유성룡>


 

다시보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평가 위주로)
 

 

세계 4대 해신

살리미스 해전 -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테미스토클레스'
칼레 해전 - 신흥 해양국가 영국의 해군제독 '찰스 하워드'
트라팔카 해전 - 영국 해군 총사령관 '허레이쇼 넬슨'

 

그리고,

한산 해전 - 조선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
5대 해상전투로 늘려도 그 전투는 바로 '명량해전'
즉, 세계5대 해전에 이순신 장군님의 업적이 무려 2개..

 

옥포해전

1592년 5월 7일 거제시 옥포
조선 : 군사 - 판옥선 29척 / 피해 - 1명 부상
왜 : 군사 - 50척 / 피해 - 전선 26척 격침, 4080명 사망


합포해전

1592년 5월 7일 창원 마산 합포구

조선 : 군사 - 판옥선 29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8척 / 피해 - 전멸


적진포해전

1592년 5월 8일 고성 적진포 앞바다

조선 : 군사 - 판옥선 29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13척 / 피해 - 전선 11척 격침, 2840명 사망


사천해전

1592년 5월 29일 경상도, 사천 앞바다

조선 : 군사 - 거북선 2척, 판옥선 26척 / 피해 - 이순신,
나대용 피격(사상자 기록없음)
왜 : 군사 - 13척, 병력모름 / 피해 - 13척 모두격침, 2600명 사망


당포해전

1592년 6월 2일 토영 당포 앞바다

조선 : 군사 - 거북선(귀선) 포함 26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21척 / 피해 - 전선 21척 모두 격침, 2820명 사망


1차 당항포 해전

1592년 6월 5일 고성 당항포

조선 : 군사 - 전선 51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전산 26척 / 피해 - 구루시마 미치유키 사망,
전선 26척 모두격침, 2720명 사망


율포해전

1592년 6월 7일 거제도 율포만 앞바다

조선 : 군사 - 전선 51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전선 7척 / 피해 - 대선 2척·소선 1척 격침,
대선 3척·소선1척 나포

 

한산도 대첩

1592년 7월 8일 견내량, 한산도 앞바다

조선 : 군사 - 전선 56척 / 피해 - 3명 전사, 10여명 부상
왜 : 군사 - 전선 73척, 수군 1만 명 / 피해 - 47척 침몰,
12척 나포, 8980명 사망, 마나베 사마노조 할복자살


안골포 해전

1592년 7월 10일 경상도 진해 안골포

조선 : 군사 - 전선 56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전선 42척 / 피해 - 전선 42척 모두 격침, 3960명 사망


장림포해전

1592년 8월 29일 경상도 장림포

조선 : 군사 - 전선 166척, 판옥선 74척 / 피해 - 불명
왜 : 군사 - 전선 6척, 병력 30명 / 피해 -6척 모두 격침, 30명 도주


화준구미 해전

1592년 9월 1일 부산 사하구 몰운대 인근

조선 : 군사 - 전선 166척, 판옥선 74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5척 / 피해 - 전멸


다대포 해전

1592년 9월 1일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조선 : 군사 - 전선 166척, 판옥선 74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8척 / 피해 - 전멸


서평포 해전

1592년 9월 1일 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감천항

조선 : 군사 - 전선 166척, 판옥선 74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9척 / 피해 - 전멸


절영도 해전

1592년 9월 1일 부산시 영도구

조선 : 군사 - 전선 166척, 판옥선 74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2척 / 피해 - 전멸


초량목 해전

1592년 9월 1일 부산시 동구 초량동

조선 : 군사 - 전선 166척, 판옥선 74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4척 / 피해 - 전멸


부산포 해전

1592년 9월 1일 부산시 동구 좌천동

조선 : 군사 - 전선 166척, 판옥선 74척 / 피해 - 정운 등
6명 전사, 25명 부상
왜 : 군사 - 전선 470척, 벙력 7만명 / 피해 - 전선 128척 격침,
5000여 명 사상


웅포 해전

1593년 2월 10일 경남 진해시 웅천동

조선 : 군사 - 전선 89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40여 척 / 피해 - 100여 명 사망

 

2차 당항포 해전

1594년 3월 4일 경상도 고성 당항포

조선 : 군사 - 연합함대 124척/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31척 / 피해 - 전멸


장문포 해전

1594년 11월 15일 거제 장목면 장목리

조선 : 군사 - 판옥선 50여척(거북선포함)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불명 / 피해 - 도주


어란포 해전

1597년 8월 27일 어란포 앞바다

조선 : 군사 - 전선 13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전선 8척 / 피해 - 도주


벽파진 해전

1597년 9월 7일 진도군 벽파진

조선 : 군사 - 전선 13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전선 13척 / 피해 - 도주


명량 대첩

1597년 9월 16일 명량 해협

조선 : 군사 - 판옥선 13척, 2400여 명 / 피해 - 2명 전사 및
3명 부상(총 사상자 불명)
왜 : 군사 - 세키부네 133척, 아타케부네 200여 척,
그 외 500여 척, 27420여 명 / 피해 - 전선 31척 격침,
92척 전투력 상실, 도도 다카토라 부상, 구루시미 미치후사 전사,
총 18466 사망


절이도 해전

1598년 7월 19일 전라남도 고흥군 금사면 신촌리 고라금해수욕장

조선 : 군사 - 판옥선 85척, 병력 1만 7000명, 명나라 사선 25척,
명 호선 77척, 명 병력 2만 6000명 / 피해 - 불명
왜 : 군사 - 아타케부네 100여 척,
병력 1만 6600명 / 피해 - 아타케부네 50척 격침


장도해전 : 순천왜고성전투

1598년 9월 20일~10월 7일 순천 왜성

조선 : 군사 - 수군 1만 5000여 명 / 피해 - 조선 130명 사상,
명나라 전선 30여척 격침 및 파손, 명나라 수군 2000명 전사
왜 : 군사 - 1만 4천여명/ 피해 - 전선 30척 격칙 및 파손,
11척 나포, 3천명 사상


노량 해전

1598년 11월 19일 어란포 앞바다

조선 : 군사 - 조선 전선 83척, 명 전선 63척 / 피해 - 이순신 장군 및
조선군 300명 사상, 명군 500여명 사상
왜 : 군사 - 전선 500여 척 / 피해 - 전선 200여 척 격침,
150여 척 파손, 100여 척 연합수군에 나포

 

총 45전 전승


 
 
<Source: cafe 리니지를 사랑하는 ([오웬]아쟁이) 님>
 
 
 
한산도 해전
한산도 해전은 1592년부터 1598년에 걸쳐 일어난
임진왜란 기간 중에 벌이진 해전 중에
규모가 크고 중대한 해전이었다.
임진왜란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지휘아래
내전으로
단련된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해 온 것이었다.
 

▲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전라좌수영 거북선도

 

 

 

 

 

지휘실 - '장대'라고도 하는데 거북선의 선장(장군)이
머물며 작전을 지시하는 공간

부관실 - 거북선에 승선한 장교들의 공간
식수, 방화수 - 나무배의 특성을 고려한 화재 대비 및 식수용 물통

의료실, 취침실 - 일반 병사들의 휴식 공간인 동시에
전함의 특성을 고려하여 부상자를 위한 치료 공간으로도 활용

도깨비머리 - 당파와 주술적인 의미 등 여러가지 주장이 있으나
보통 물길을 갈라 배의 전진에 도움을 주는 장치로 활용

누수칸 - 배에 스며든 물을 퍼내는 시설
병사 취침실 - 일반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

대창고 - 배의 중심과 복원력을 감안하여

무거운 무기들을 보관하던 장소

무기고 - 화살과 총통 방사체 등 2층과 3층 갑판에서
주로 사용하는 무기들을 보관하는 시설

 조리실 - 배안에서 기본적인 취사가 가능하도록 구성한 시설

화장실 - 바다에 곧바로 배설물이 떨어질 수 있도록 설계

총통 점화 화로 - 총통의 심지에 불을 쉽게 붙일 수 있도록
화포 주변에 설치

돛줄 지지대 - 거북선 돛줄의 경우 방패연과 같이 여러 줄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들을 한꺼번에 고정하는 시설이 필요

돛 지지대 - 돛 지지 기둥과 더불어 돛대를 고정하는 장치

돛 지지 기둥 - 돛을 세울 경우 돛대를 지지하는 장치

 

 

▲ 거북선과 학인진의 해전술, 지리적 활용, 일사불란한 함대운용으로

거의 완벽한 승리를 가져온 임진왜란 최고의 해전 한산도대첩.

 

hansando 

 

 한산도 해전도
 
장군의 명언 / 시
 
♣ "망령되게 움직이지 말고 조용하고 무겁기를 산과 같이 하라"
옥포 앞 바다에서 첫 해전을 앞둔 조선 수군 장수들에게 신중하고
침착하게 전투에 임할 것을 당부하며 이른 말.
옥포해전은 임진왜란 시 조선 수군의 첫 승리이자,
조선군이 거둔 첫 승리였다.
(옥포파왜병장, 5월 10일 기록)
 
♣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사옵니다"
원균 휘하의 조선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거의 전멸하자, 선조는
“수군을 파하고 육전에 힘쓰라”는 교서를 내린다.
그러나 이순신은 수군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터,
수군이 존속해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 후 장군은 명량해전에서 1척의 배를 더 추가하여,
13척의 배로 수백 척의 적군과 맞서 싸워 승리한다.
(이충무공행록 기록)
 
♣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절대적인 수적 열세 속에서 큰 해전을 치러야 하는
수군의 장수들에게
굳은 정신력을 가지고 싸움에 임할 것을 당부하며 이른 말.
다음 날 명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은 위와 같은
결사의 정신으로 전투에 임하여, 13대 133이라는 엄청난
전투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한다.
(난중일기 1597. 9.15 기록)
 
♣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마라!"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유언.
1598년 11월 19일 퇴각하는 적과 노량 앞바다에서
대전을 치르는 선상에서 장군은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다.
죽음의 순간에도 아군의 동요를 염려하며 곁에 있던
맏아들 회와 조카 완에게
위와 같은 말을 유언으로 남긴다.
(이충무공행록 기록)
 
♣ 한산도가(閑山島歌) (난중일기)
閑山島月明夜 上戍樓: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憮大刀 深愁時: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何處一聲羌笛 更添愁: 어디서 들려오는 피리소리는
남의 애를 끓나니
 
♣ 한산도 야음(閑山島夜吟)
水國秋光暮(수국추광모) : 넓은 바다에 가을 햇빛 저무는데
驚寒雁陣高(경한안진고) : 추위에 놀란 기러기 떼
하늘 높이 날아간다
憂心輾轉夜(우심전전야) : 근심스런 마음에 잠 못 자는 밤
殘月照弓刀(잔월조궁도) : 새벽달은 무심코 활과 칼을 비추네
 
 
난중일기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난중일기》가《새마을운동기록물》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되었음이
지난 6월 18일 확인되었다.

이순신이 남긴 불후의 명작《난중일기》는 국보 제76호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2년 1월부터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하기 전인 1598년 11월까지의 기록이다.
모두 7책 205장 분량이고 초서체로 쓰였다.
 
매일 처리한 공무와 꼼꼼하고 엄격하게 운영한 진영에 대한
기록은 물론이고 그날그날의 날씨,
격렬하던 전란의 양상까지 세세하게 기록돼 있다.
 
이미 그 역사적 사실과 학술연구 자료로서 국내에서 높은
기록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난중일기>는
전쟁 중 지휘관이 직접 기록한 사례로서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희귀성을 인정 받았고, 임진왜란 당시의 동아시아
열강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역사적 중요성으로도 높이 평가된 것이다.
 
이순신은 누구인가?
이를 계기로 그의 파란많은 생애과 강직한 인품,
위대한 리더십 등을 다시 짚어보는 아래 임원빈 님의 글이다.
 

 

《난중일기》가《새마을운동기록물》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되었음이

지난 6월 18일 확인되었다.

 

이순신이 남긴 불후의 명작《난중일기》는 국보 제76호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2년 1월부터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하기 전인 1598년 11월까지의 기록이다.

 

모두 7책 205장 분량이고 초서체로 쓰였다.

매일 처리한 공무와 꼼꼼하고 엄격하게

운영한 진영에 대한 기록은 물론이고

그날그날의 날씨, 격렬하던 전란의 양상까지 세세하게 기록돼 있다.

 

이미 그 역사적 사실과 학술연구 자료로서 국내에서 높은

기록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난중일기》는 전쟁 중 지휘관이

직접 기록한 사례로서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희귀성을 인정 받았고, 임진왜란 당시의 동아시아 열강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역사적 중요성으로도 높이 평가된 것이다.

 

한중일의 이순신 장군 초상화 (펌)

 

 

일본이 본 이순신 장군

 얼마나 무서웠으면

 

 

 

중국이 본 이순신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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