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의원 일행이 서울역에 내릴 때에 독립공고서(獨立控告書)를 제출하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려다가 다시 일경에게 붙잡혀 투옥되었으며, 이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어머니가 숨을 거두자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일시 방면된 기회를 이용하여 또 다시 만주로 탈출하였다. 1923년 10월 선생은 만주에서 편강렬(片康烈)․남정(南正) 등 동지들과 함께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중국 봉천(현재의 심양)의 일본군 전용 만철병원(滿鐵病院)을 습격하는 등 장춘선(長春線) 일대에서 크게 활약한 무장단체였다.
남·북만주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정의부(正義府) 창립
 1922년 오동진(吳東振)․김동삼(金東三) 선생 등 동지들과 함께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과 군정서(軍政署), 통군부(統軍府), 한교민단(韓僑民團) 등을 통합하여 통의부(統義府)를 창설하는데 기여하였으며, 1924년 11월 지청천(池靑天), 김동삼 등과 함께 통의부, 의성단, 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광정단(匡正團),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등 남․북만주에 산재한 수십의 무장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정의부(正義府)를 창립하고 의용군을 국내에 파견하여 일제기관 등을 공격케 하였다.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었을 시기에는 국민대표회남만촉성회(國民代表會南滿促成會)를 조직하여 모든 국립운동단체들이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대동단결할 것을 주장하고 남만 대표 김동삼 선생을 적극 후원하였다. 선생은 국민대표회의가 개조파와 창조파(創造派)의 대립으로 결렬되자 크게 실망하여 1926년 2월 임시정부로부터 국무령(國務領)으로 취임해 줄 것을 요청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고려혁명당 당수 취임, 무장활동
 1926년 4월 5일 정의부 대표로서 소련에서 돌아온 주진수(朱鎭洙), 천도교 혁신파인 고려혁명위원회의 김봉국(金鳳國), 형평사(衡平社)의 이동구(李東求) 등 다수의 동지들과 길림에서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하고 그 위원장(黨首)이 되어 정의부의 항일무장투쟁을 지원하였다.
1927년 4월 안창호 선생이 길림(吉林)에 오자 그와 함께 정의부 계통의 농민조직으로서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조직하고, 12월에는 조선독립운동자후원회(朝鮮獨立運動者後援會)를 결성하였다. 1928년 선생은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 운동을 적극 추진하여 정의부(正義府), 참의부(參議府), 신민부(新民府)의 3부를 통합하여 1929년 5월 국민부(國民府)를 결성하였다. 1930년에는 남경(南京)으로 가서 관내 한국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운동을 추진하여 1932년 10월 김규식(金奎植) 선생 등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한국대일전선통일연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는데 성공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