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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에 올라 낙락장송과 몽필생화를 보며 이태백과 두보를 생각하다!
2015년 10월 21일 난징남역에서 버스를 타고 5시간 반 만에 황산풍경구 탕커우(黄山风景区
汤口) 에 내려서... 다시 운곡사행 씬꿔센 버스를 타고 구절양장 산을 올라 1시간 만에
운곡사에 도착해서는 케이블카를 타고 산을 올라 험한 산길을 한시간 가량
걸어서 시신봉을 지나 북해에서 몽필생화를 본후 고개를 넘어서 거대한 낙락장송에 이릅니다.
1. 시선(詩仙) 이태백(李太白)
본명은 이백(李白). 태백(太白)은 그의 자를 가리키는데.... 李白斗酒詩百篇,長安市上酒家眠。天子
呼来不上船,自稱臣是酒中仙。“이백은 술 한 말을 마시고 시 100편을 짓고, 장안성 저자의 술집
에서 잤다. 천자가 오라하여도 배에 오르지 않 채, 스스로 칭하기를 '신은 술의 신선입니다' 하였다.”
두보(杜甫)와 함께 한시(漢詩) 문학의 양대 거성으로 꼽히는데 두보가 몇 번의 퇴고를 거쳐서
완성된 시를 내놓는 반면에... 그는 천재적인 재능으로 마음 내킬 때 몇 줄 내려쓰면
그게 두보에 필적하는 명시였으니, 별명은 두보의 시성(詩聖)과 대비되는 시선(詩仙)
으로 둘을 묶어 보통 '이두(李杜)' 라고 부르며 둘 사이의 우열을 가리는 건 어렵다고 합니다.
이백의 출생은 간쑤성 칭양시이며 3살이 되기 전에 사천(쓰촨) 으로 이주했다는데.....
었을 때는 검술을 배워 혈기를 주체하지 못해 사람을 여럿 살해하고 다녔다가
20살에 개과천선했다고 하며..... 그의 시가 신선(神仙)과 밀접한 관련을 맺은
것도 이때부터 인데 25살 때는 강남 일대를 유람하면서 여기저기를 떠돌았다고 합니다.
또한 도술도 배우고 다녔다고 하는데 37살 때는 5명의 시인(공소보(孔巢父), 배정(裵政),
한준(韓準), 장숙명(張叔明), 도면(陶沔)) 과 함께 죽림에 은거하여 조용히 살려고
했으나... 시가 너무 유명해져서 도피 겸, 여행을 다니다가 장안까지 입성하게 되었는데
시험도 쳤으나 당시 시험관이었던 양국충과 고력사의 의견이 충돌하는 바람에 낙방합니다.
유교적 도덕을 바탕으로 시를 쓴 두보와 달리, 그야말로 풍류를 벗하고 풍류를 노래한 인물로
그런 삶을 살았기에 역대 중국 왕조를 보면 국가적 차원에서 이백 보다는 두보를 더 높이
쳐주었고, 반대로 생각해 보면 중국 왕조에서 대대로 밀어주었던 두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백의 시가 그와 대등하게 평가받고 있으니 그만큼 시의 천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술마시고 노래하는 풍류인(風流人) 이백 쪽이 인기가 더 높은데 유교 문화권에 속하기는 해도 풍류를
노래하는 정취가 수많은 선비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으로... 달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반드시 이백을
이야기하곤 하지만, 두보에게는 천재적인 시인이라는 것 외에 이렇다 할 컨셉이나 이미지가 없습니다.
이백의 시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강산의 정취를 노래하기 때문에 놀고 즐길 때는 좋으나....
두보의 시는 시사(詩史)라고 불릴 정도로 당대 사회에 대한 현실적인 비판과 풍자를
담고 중국의 고사 비유가 많기 때문에 학구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때에 알맞기 때문
인데, 두보는 중국사회의 여러 면면을 살피고 민초들의 생활고에 슬퍼하고 고뇌했습니다.
두보의 시는 완성도가 훌륭했으니 조선에서도 훈민정음으로 발간된 대표적 책 중의 하나가
두시언해였 듯 교훈적인 이유로 두보의 시가 장려되었으며.... 두보의 이미지는 아주
꼿꼿한 기상을 지닌 선비로 곧잘 표현되곤 하지만, 두보 본인도 이백에 지지 않을 정도
로 술과 풍류를 좋아하였다고 하며 애당초 둘이 여행도 같이 다닐 정도로 친한 사이였습니다.
이백은 발해 사신의 문서를 해독한 걸로 유명하니 당나라 현종때 발해의 선전포고 서신을 받았는데,
조정의 대신들 중에서 그것을 해석할 줄 아는 사람이 없는지라 대신 하지장(賀知章)이 과거
시험에서 낙방한 이백을 입궁하게 했는데... 황제는 그에게 한림학사의 직함과 관직을
주었고, 이백은 자신의 시험관을 찾아 그들에게 자신의 신발을 벗기게 하고는 그 문서를 번역합니다.
이백은 시를 잘 지어 당현종과 양귀비의 총애를 받았으나 술김에 현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환관 고력사에게 "내 신발 좀 벗겨봐라. 이 고자놈아!" 라며 술주정을 부릴 정도로
호방하게 굴었고.... 훗날 이 일을 잊지 않은 누구라도 못 잊을 듯 고력사의 미움을 사서
파면당했고, 그해 여름 낙양에서 두보를 만나 1년 동안 같이 지내면서 여행도 다녔습니다.
두보가 한 말에 의하면 둘은 밤에는 같은 이불에서 잤고, 날이 새자마자 손 잡고 떠났다
고 하는데.... 이백이 두보 보다 12살 연상이었지만 두보가 이백의 재능에 크게
탄복하면서 그와 더불어 하남, 산동 일대를 유람하면서 친구 사이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고구려에 관련한 시가 존재하니 이백이 과거시험에 합격해 한림학사가 된 42살(742년)
에 지은 시로, 무용수의 고구려 춤을 보고 지은 것 같은데.... 고구려가 멸망한
것이 668년임을 감안하면, 그 후에도 고구려 문화가 당나라에서도 유행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하니 여기서 절풍모는 고구려인들이 자주 썼던 조우관을 말합니다.
金花折風帽[금화절풍모] 노란 꽃 절풍모를 쓰고
白馬小遲回[백마소지회] 백마를 탄채 잠시 멈추었다 돌며,
翩翩舞廣袖[편편무광수] 펄럭펄럭 넓은 소매로 춤을 추니
似鳥海東來[사조해동래] 바다 동쪽에서 새가 날아온 듯 하구나.
애주가들의 표본 같은 인물이기도 하니 술을 뜻하는 한자인 酒(주)자를 앞에 넣어 '주태백' 이라고
하면 술꾼인 사람들, 특히 자주 고주망태가 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시는 술고래들을 일컫는 말로
많이 쓰이고.... '주태배기' 라고도 하며 "이백은 달하고 서로 술을 주고 받았다" 는 전설도 있습니다.
56세에 영왕의 군대에 참여하나 반란군으로 지목되어 영왕이 처형된뒤 귀양을 가다가 삼협도에서 사면
받고 다시 방랑길에 오르고 62세가 되던 해, 종숙이던 이양빙의 집에서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는
데 2남 1녀를 두었으나 집안을 돌보지 않고 떠돌기만 한 인생이라, 이백이 죽은지 60년쯤 지난후 어느
관리가 이백의 무덤을 찾은 후 자손을 알아보았는데 농민에게 시집간 손녀 2명만 파악되었다고 합니다.
2. 이백의 시에서 이름을 딴 일본 하쿠테이조 (白帝城 백제성)
일본 나고야 북쪽에 이누야마성은 하쿠테이조 (白帝城 백제성) 라고도 부르는데 유비가
제갈공명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죽었다는 백제성(白帝城) 이니 유래를 살펴보면...
일본 도쿠가와 에도 막부 시대의 유학자(성리학자)인 오규 소라이는 당나라 시인 이백이
양쯔강 연안에 위치한 白帝城(백제성)에 관해 남긴 "시" 에서 영감을 받아
기소강 연안에 위치한 이누야마성을 하쿠테이성(白帝城) 이라고 명명했다고 전해집니다.
朝辭白帝彩雲間(조사백제채운간) 이른 아침 백제성의 채색구름 뚫고 떠나
千里江陵一日還(천리강릉일일환) 천 리라 강릉길을 하루 만에 돌아왔네
兩岸猿聲啼不盡(양안원성제부진) 양쪽 벼랑 파노라마 된 원숭이 울음 뚫고
輕舟已過萬重山(경주이과만중산) 경쾌한 배는 이미 만겹 산을 다 지났네
이백(李白) 의 나이 57세때 줄을 잘못 선 때문에 역적이라는 죄를 뒤집어 쓰고 감옥에 투옥
되었다가..... 머나먼 장강(長江 양자강)의 상류 야랑(夜郞)으로 유배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는 수만리 길을 걸어서 장강 중류의 빼어난 절경인 백제성(白帝城) 에 도착하였습니다.
아직 유배지 야랑 까지는 갈 길이 까마득하게 남아 있었으니 가 봐야 환영해줄 사람도
없는지라 앞앞이 한숨이고 구석구석이 눈물이었으니.... 이백은 흰 머리카락을
바람에 나부끼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저무는 장강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조정에서 보낸 사자가 속달 편지 한통을 들고 이백에게 달려들었으니, 편지를
뜯는 이백의 손이 공포와 불안(사약?)으로 부들부들 떨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그의 입이 크고도 환하게 벌어졌으니 뜻밖의 사면령 (赦免令) 이었습니다.
그는 한꺼번에 열일곱번(?) 이나 환호작약(歡呼雀躍) 의 뜀박질을 하였다는
데.... 해방이 된 이백은 다음 날 새벽 동이 트자마자 돌아가는 배에다
몸을 실었으니, 배 위에서 멀어지는 "백제성을 보며 읊은 시" 라고 합니다.
시인이 탄 일엽편주는 백제성을 박차고 튀어 나가는데 배는 갑작스런 병목 현상에 따라
험준하게 치솟은 벼랑 사이로 물결이 미친 듯이 휘돌아 흐르는..... 천하의 절경
삼협(三峽) 을 뚫고 쏜살같이 내달리니, 강릉 까지는 천리나 되는데도 걸린
시간이 단 하루 에 불과하니 일사천리 (一瀉千里) 에다 일필휘지 (一筆揮之) 이네요?
3구와 4구는 배의 속도를 좀 더 실감 나게 보여주는 대목이니 삼협에는 예로 부터
애달프게 울어대는 원숭이 가 많았다지만..... 엄청난 속도로 들입다 내달리는
뱃전에서 들어보면 울음과 울음이 쭉 이어지면서 울음의 파노라마 현상 이 생깁니다.
매미가 죽자살자 울어댈 때 가로수 샛길을 달리다 보면 매미 울음소리도 파노라마
가 되는 것과도 같은 현상이니 원숭이들의 애달픈 울음의 파노라마는....
아직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시인이 탄 배는 이미 만겹첩첩산 울음의
터널을 통과했다는 것이니.... 한마디로 말해 “슬픔 끝, 기쁨 시작” 인가 합니다?
3. 검술의 달인 이백
이백은 유배길에서 이제 죽는구나 싶어 절망했지만.... 옛날에 도와준 바 있는 곽자의가 조정에
구명한 덕분에 유배에서 해제된 이후에도 방랑을 계속하다가 62세에 죽는데.... 민간 전승
에서는 이때 강에 뛰어든 이백이 고래를 타고 하늘을 날아 고향인 선계로 돌아갔다고도 합니다.
이백은 젊어서 부터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여러 사람(부랑배?) 을 칼로 베어 죽였을
만큼 유협 생활을 했던 인물로 무예가 뛰어났으니.... 특히 검술에 능하여 시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검술은 일류 고수에 부끄럽지 않은 수준 이었다고 합니다?
이백은 보검 제작으로 유명한 용천 지방을 지날 때에는 차고 있던 용천검을 뽑아 검무를
추고 싶다는 싯구를 썼을 정도로.... 검에 대한 애착이 누구보다도 깊었다고 합니다.
서양에도 그의 시가 전해졌으니 빈 궁정 오페라극장이며 뉴욕 필하모닉 지휘자로 관혁악
의 대가인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도 그의 시에 반한 듯 한데.... 중국의 시들을 바탕
으로 작곡된 대지의 노래에서 이백의 시가 절반 넘게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볼 때
그렇게 생각되는데....... 물론 원문과 대지의 노래의 가사 사이에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이백은 외국어에도 능통했는지 발해인의 말을 알아서 발해에서 온 외교문서를 처리하는 업무를 담당
하기도 했으며 또한 두보와 관계가 깊었는데, 두보가 그에게 많은 시를 선물했지만 그는 감사히
받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 편의 시만을 써준 일화를 두고 중국인들이 비난하기도 하는데....
2017년 중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일본 NTT 도코모의 앵무새 형제 캐릭터 포인코(poinko)에 나옵니다.
4. 마부작침(磨斧作針)
이태백은 스승에게 글을 배우다가 공부가 싫어져서 25살 때부터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녔는데
35살 때는 낙양을 거쳐 태원까지 유람했고, 이때 우연히 명장 곽자의와 안면을 텄다고도
하며 야사에서는 곽자의가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쓰자 이백이 구명활동을 벌이고 무죄를
호소하여 풀려났다고 하는데.... 훗날 곽자의가 이백을 살려주려고 한 것은 은혜를 갚은 게 됩니다.
이백은 이런 방랑길 유람 중에 상의산(象宜山) 기슭에서 한 노파를 만났는데, 노파는
부러진 도끼를 열심히 갈아 바늘을 만들고 있었으니 그 노파의 모습에서 이백은
포기하지 않으면 마침내 뜻을 이룰 수 있음을 깨우쳤고... 다시 마음을 돌이켜
공부했다는 일화가 있으니 여기서 마부작침(磨斧作針)이라는 사자성어가 유래합니다.
5. 몽필생화(夢筆生花)
황산에는 이백의 전설이 얽힌 몽필생화(夢筆生花) 가 있으니 그가 꿈에서 보았다는 거대한 붓을
세운 듯한 바로 그 몽필생화(夢筆生花) 바위인데.... 당나라 시인 이백 (701-762) 은 1,300
여년 전에 황산에 올라.... 기이한 봉우리들을 바라 보다가 그만 시흥이 일어 시 한수를 읊습니다.
“황산 사천길 높이에 서른 두 개의 꽃봉우리여!
빨간 벼랑들 기둥 틈에 금빛 연꽃들아.....“
그러자 이 외침을 들은 황산의 사자림 사찰의 늙은 주지 스님이 문을 열고 나와 보니
흰 옷을 입은 범상치 않아 보이는 선비가 서 있는지라 안으로 청해 들입니다.
동자승에게 오래된 곡주를 가져오게 하니 애주가 이백이 마다할리 없으니 마십니다.
그러고는 흥에 겨워 다시 시 한수를 짓고는 붓을 허공에 휙 던져버리고
하산해 버립니다. 스님이 손을 배웅하고 돌아와 보니.... 그새 붓은
바위 봉우리 가 되고 그 붓 끝에서 한송이 소나무가 자라는 것이라???
이백 은 자가 태백 (太白) 으로 두보 (杜甫) 와 함께 중국 최대의 시인이자 시선
(詩仙) 이라고 까지 불리는데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하는데 쓰촨성 四川省
촉(蜀) 나라의 장밍현 彰明縣 출신으로 25세 때 양쯔강을 따라서 강남,
산동, 산시성을 편력했는데 도교(道敎) 에 심취해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습니다.
그의 시는 도교적 발상 에 의한 것으로 맹호연 (孟浩然) 과 두보 등 많은 시인들과 교류
했는데... 부패한 당나라 정치에 불만이 많았고 자신의 정치적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바랐으니, 그가 43세 되던해인 724년 현종의 부름을 받아 장안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는 한림공봉 이라는 관직을 하사 받았지만 한낱 궁정 시인에 머물러야만 했습니다.
정치적 야망과 성격은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으니 이백은 “술 속의 팔선(八仙) ”
으로 불렸고 결국 궁정을 쫓겨나 낙양에서 두보 와 지기지교를 맺는데... 이후
두보와 헤어진후 하북성을 방랑하고는 다시 남하해 양주(揚州) 와 금릉(金陵: 南京)
에서 노닐다가 55세 때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안휘 선성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황자 영왕이 거병하자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패하였으므로 그는 구강현의 옥중에 갇히었다가... 그후 곽자의
(郭子義)에 의하여 구명되었으며 이후 난징과 안휘성 선성을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병사하였으니 그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 으로 끝났습니다.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하였는데 그의 방랑은 “대붕(大鵬)의 비상
(飛翔)”이었으니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는데 두보는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한데 비해 이백은 인간을 초월해 "인간의 자유를 비상" 하는 방법을 취하였습니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 까지도 안으로 받아들여 그곳으로 부터 비상
하려고 하였으니 그의 시를 지탱하는 것은 "협기(俠氣) 와 신선(神仙) 과 술"
이라! 성실한 인간 "두보의 시가 퇴고" 를 거듭하여 닦아지는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 가 되는 바람 같은 시풍(詩風) 입니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이백은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
로 하니 인간과 시대에 대해 큰 뜻을 품었으나 제대로 펼쳐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미산 월가 - 이백의 칠언절구(七言絶句) 시
峨眉山月半輪秋 (아미산월반륜추) 아미산에 걸린 반달
影入平羌江水流 (영입평강강수류) 그 그림자가 평강강에 비쳐 흐르고 있다
夜發三溪向三峽 (야발삼계향삼협) 밤에 삼계를 떠나 삼협으로 행하는데
思君不見下渝州 (사군불견하유주) 그대 달을 보려고 해도 달은 산 뒤에 숨어 안보이고
배는 그냥 유주로 내려가 버리는 구나.
6. 황산 시신봉(始信峰)의 황산송(黃山松)
不到始信峰 不見黃山松 (부도시신봉 불견황산송) 을 해석하면“시신봉 을 보지 못했다면
황산의 소나무를 보지 못한 것과 같다” 니 황산의 최고 볼거리 입니다!
五嶽歸萊不看山 (오악귀래부간산) 오악 에 오르고 나면 다른 산이 보이지 않고
黃山歸萊不看岳 (황산귀래부간악) 황산 에 오르고 나면 오악이 보이지 않는다!
명대(明代) 의 탐험가이자 지리학자 서하객(徐霞客) 이 황산에 올라 했다는 말인데, 그는
“명산대천(名山大川) 은 생전에 한번쯤 가 보아야 한다.” 는 일념으로.... 33년 동안
타이후(太湖)를 시작으로 하여 저장(浙江), 장시(江西), 구이저우(貴州) 등을 거쳐
윈난(雲南)에서 마무리 된 여정을 일기로 남겼으니 “서하객유기 (徐霞客遊記)” 입니다.
시신봉(始信峰) 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서는
대산맥과 황산송이 보이는데 운해가 생기면 멋진 풍경을 이룬다고 합니다.
7. 낙락장송(落落長松)인 단결송(團結松)
황산 탕커우에서 버스를 타고 구절양장 산을 올라 1시간 만에 운곡사에 도착해서는 다시 케이
블카를 타고 산을 오른후... 험한 산길을 한시간 가량 걸으면 시신봉을 지나 북해에서
몽필생화를 본후 서해대협곡 방향으로 고개를 넘으면 거대한 낙락장송(落落長松)에 이릅니다.
낙락장송(落落長松)이란 가지가 길게 늘어진 키가 큰 소나무로 지조와 절개가 굳은
사람의 표상으로 쓰이는 말인데.... 낙락(落落) 이란 '길고 얇은 것이 끊이지
않고 많은 모양' 이라는 뜻과 '고고하고 고상한, 또한 출중하고 뛰어나다'
는 의미가 있으니........ 고상하고 원대하여 자잘한 일에 구애받지 않음을 뜻합니다.
장송(長松), 즉 소나무는 우뚝 높이 솟아 한겨울에도 늘 푸른 모습을 띠는
것에서 동양문화에서 예부터 굳은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고..... 군자
(君子)나 지사(志士)의 뜻이나 됨됨이를 표현하는 식물로 여겨져 왔습니다.
중국 “세설신어(世說新語)” 에는 죽림칠현(竹林七賢) 의 한 사람인 혜강(嵇康)에
대해 "혜강의 사람됨은 마치 우뚝하게 빼어난 외로운 소나무가
홀로 서 있는 것처럼 우뚝하다[嵇叔夜之爲人也, 巖巖孤松之獨立]." 라고 말합니다.
황산의 북해에서 산을 넘어 西海宾馆 (서해빈관)과 서해대협곡으로 가는 길에 유난히도
가지가 많은 나무가 보이는데 낙락장송(落落長松)인 단결송(團結松)이니... 뿌리
하나에 두 개의 줄기가 위로 뻗으니 연리송의 일종인데, 가지가 50~ 60개쯤 되는
나무인지라 주민들은 많은 자식을 바라는 의미에서 多子松(다자송) 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2001년에 중국의 국가주석 장쩌민(강택민) 이 黃山(황산) 을 찾아 산행을
하면서 이 나무를 유심히 보고는 가지가 몇이냐고 물으니.... 누구 머리 회전이
빠른 아부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56개” 라고 마치 직접 세어본 듯이 말했다나요?
그럼 중국 56개 민족을 상징하는 단결송(團結松) 이라 부르라고 지시했다고 하는데....
우린 중국이 동북아공정으로 발해에 이어 고구려도 자기나라 역사라고
우긴다고 화를 내는데, 물론 중국의 이러한 "역사왜곡" 시도는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하지만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라고 저들이 왜 저러는지 이유 정도는 알아두어야
할 터.... 중국에서는 지금도 신장 위구르족과 티베트 인들은 중국으로 부터 분리
독립을 외치며 테러(독립 운동?) 를 자행해 불특정 민간인들을 살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중국에서 최고로 중요한 것은 56개 민족이 단합하여 "하나의 중국"
을 지향하는 것이니 그런 점에서 여기 "단결송 같은 상징" 이 필요한 것인데...
우리 한국인들은 우리가“단일민족”이다 보니 중국도“漢族(한족)” 한개 민족의
나라라고 생각하며 영토도 한나라나 송나라 혹은 명나라의 국경선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중국은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이니 漢族(한족)
외에 만주족, 몽고족, 회족, 장족, 티베트족과 조선족도 자기나라 국민으로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니.... 국경선도 만주, 내몽고, 신장과 티베트에 걸치며,
漢族(한족) 외에...... "55개 민족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럼 조선족은 국제법상.... 중국인인가? 아님 한국인인가? 우린 발해를 소수의 고구려인 지배층
과 다수의 말갈인 피지배층으로 구성된 우리나라라고 생각하지만, 중국은 대조영을 말갈인
걸걸중상의 아들이라고 여기는데다가.... 주민 대부분이 말갈인이니 발해를 말갈인의 나라
라고 생각하는데..... 소수의 지배층 보다 다수의 백성들이 말갈인이라는게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고구려는 우리 한민족의 나라가 100% 분명하지만 중국의 생각은 다른 것이, 신라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당태종이 협약을 맺기를 백제는 신라가 차지하고 고구려는 당나라가
차지하기로 했으니, 그럼 신라는 고구려 영토와 백성에 대한 권리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네요?
그후 668년 막리지 남생을 비롯 수많은 지배층이 당나라에 항복한후 당군의 앞잡이 향도가 되어
쳐들어오니 고구려 멸망후에 황해도 지방 사람들만 신라에 넘어왔고.... 나머지 평안도와
함경도 그리고 만주 지방에 살던 고구려인은 "씨를 말린다" 는 의미에서 중국으로 잡아가서
장안에서 조리돌림을 한 후에는 노비로 주거나 또는 양자강 이남에 가두어 농노로 만들었습니다.
당태종이 안시성을 칠 무렵 요동성과 백암성등 4개성을 함락했으니 요동성에서만 1만 4천명
을 유주로 보내 노비로 만들었고 나머지 요동성 주민들도 장병들에게게 나누어 주었으며,
구당서 고종본기에는 고구려인 28,200호와 수레 1,080승, 소 3,300두, 말 2,900필을
내주와 기주로 옮겼고, 신당서에는 3만호를 강회(江淮)로 옮겼으며 당회요에는
요주와 개주등 7만명을 내지로 옮겼고 구당서 방현령조에는 포로가 수십만이라고 했습니다.
훗날 이들중 일부가 남쪽으로 달아나서 지금 태국 북부 접경 지대인 치앙라이 등지에 라후족과 아카족
및 리수족 등 3부족으로 남았다고 보는데.... 그 중에도 40만 "라후족" 은 색동옷을 입고 씨름을 하며
호랑이를 숭배하고 결혼후 처가살이, 소도와 제천의식에 언어가 북한 사투리와 매우 유사하다고 합니다.
안시성 전투에서 당태종의 30만 대군을 물리친 성주 양만춘은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인데 이름이
梁萬春 인지 아니면 楊萬春 인지 불분명합니다. 1145년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지으면서 안시성주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걸 애석해 했는데... 임진왜란 무렵 사신과 명나라 병사들의 얘기를 통해 16세기
중국 소설책 “당서지전통속연의 (唐書志傳通俗演義) 에 나오는 이름이라 중국 소설가의 창작으로 봅니다.
안시성 성주의 진짜 이름은 알길이 없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지만 고구려 영토는 10분지
1에 불과한 황해도를 얻었을 뿐이고 고구려 주민도 황해도 지방민등 15% 정도를 거두었는데....
훗날 발해 멸망후 피난민을 받아들인걸 치더래도 20% 에 못미치니 그게 참으로 아쉬운 것이지요?
그러니까 중국인들은 꺼우리(고구려인) 라면 "공포심" 으로 진절머리를 쳤는데 고구려
는 연나라와 한나라 그리고 위나라등 예전에도 중국과 전쟁을 벌인 나라지만....
수나라 시절 문제와 양제에 걸쳐 수차례 수백만의 중국인이 고구려 침략에 나서
대부분이 죽거나 병신이 되었으니 강대국 고구려 에 대한 "두려움과 원한" 이 깊었습니다.
중국인들은 군인으로 징집을 피했다 쳐도 함선이며 투석기등 각종 무기 제작과 식량 공출이이며
만주 벌판으로 운반에 백성들은 초죽음 이 되었던 것이고... 수나라가 무느진후 내란을 거쳐
당나라가 들어서고도 사정은 바뀌지 않아 당태종때 그 전란의 고통이란 필설로 표현할수 없습니다.
수나라와 당나라 2대에 걸쳐 수십년간 수없이 고구려를 공격하느라 중국 백성들은 초죽음
상태로 몰렸고 원한이 하늘을 찔렀는데.... 드디어 하늘의 도우심(?)으로 막리지
남생등 고구려인 배신자들과 신라의 도움을 받아 천신만고 끝에 고구려를 정복했으니
이제 저 치가 떨리는 지긋지긋한 종자들인...... "고구려족을 멸종" 시켜야 했던 것이지요?
지금 고구려인들의 땅에 통치기관을 세우고 다스리면 당분간은 순종하겠지만... 세월이 흐르고
당나라가 안녹산의 난 같은 내란으로 혼란에 빠지면 고구려의 후손들은 반란을 일으켜 독립
을 꾀할 것이니 아예 모두 잡아가서 씨를 말리는 것이 후환을 없앨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로마가 3차례 백여년간에 걸친 포에니전쟁에서 고전하다가 마침내 3차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점령한
후, 2차 전쟁때 이탈리아를 석권하며 로마 귀족 청년 70% 를 죽게한 한니발에 대한 극심한 공포
와 원한으로 "카르타고인을 전원 노예" 로 만들어 외국에 팔아버리고, 성벽과 시가지를 무느뜨린후
바닷물을 끌어들여 소금을 뿌려 도시를 없애버린 일에 비유되니 이런게 “씨를 말린다” 는 것입니다?
하지만 30년 후인 698년에 거란족의 반란으로 영주에 잡혀있던 고구려와 말갈인 일부가 탈출해
발해를 세우고 228년 후에 발해가 거란에 망한후에 일부 유민이 신라로 투항했는데.....
중국은 다수의 고구려인은 중국에 잡혀갔으니 중국인의 피에 섞였다는 것이고 우린 숫자가
중요한게 아니라 “고구려인의 혼과 얼이며 정신” 을 한국이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성씨는 2000년 통계청 자료에는 286개로 본관으로 세분하면 4,180개인데 인구 25만이 넘는
성씨 본관은 32개이니, 그중 가야계는 1위 김해 김씨 412만이며, 신라계 는 2위 밀양박씨 303만
, 4위 경주김씨 173만, 5위 경주이씨 142만, 6위 경주최씨 98만, 8위 광산김씨 84만, 9위 파평윤씨
71만, 10위 청주한씨 64만에 11위 안동권씨 58만을 비롯해서 12개성씨 473만등 1,408만에 달합니다.
반면에 고구려계는 7위 진주강씨 97만에 횡성 고씨 1만이고, 백제계 라기 보다는 신라계라 여겨
지는 통일신라시대인은 이한을 시조로 하는 3위 전주이씨 261만 외에 평산신씨등 2개 82만
이며 제주는 23위 제주고씨 32만이고 고려시대가 시조는 20위 해주오씨 38만등 3개 94만입니다.
귀화한 중국인은 19위 남양홍씨 39만등 2개 성씨 69만이며..... 이상 32개 성씨 본관을
합치면 2,550만으로 우리나라 인구의 거진 50% 에 달하고 나머지 4,150개 성씨
본관이 2,500만남짓 인데, 보다시피 고구려인을 시조로 하는 성씨는 진주
강씨 2% 에 횡성 고씨 1만등 다른 소수 성씨들을 다 합쳐도 한국인의 3% 미만 입니다?
진주 강씨(晉州姜氏) 는 강진이 진양후에 봉해져 관향을 진주로 삼은 데에서 기인하며 영양왕때 병마
도원수 강이식(姜以式) 장군의 후손이라는데... 정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조선상고사에서만 언급
되는 인물로 실존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강이식의 선조는 중국 주나라 강태공의 자손 천수
강씨(天水姜氏)의 지파 광동강씨(廣東姜氏)의 일족으로 중국 광동강씨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국에는 조선족이 200만으로 56개 민족 중에 14번째인데 이들의 국적은 중국인
이니 조선족의 역사 다시말해 조선족의 조상인 고구려의 일부는 중국의 역사라는게
저들의 인식이며, 또 하나 우리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고 왕으로 책봉을 받았다는 이유로 지방정권 운운하는 것입니다.
고구려 수도 환도성(국내성)이 246년 위나라 관구검에 이어 342년 전연의 모용황
에 의해 두번째로 점령된후 선왕의 시신과 왕모 및 왕비에 수도 주민의
대부분인 5만명이 생포되어 갔는지라..... 고국원왕은 전연에 저항하지
못하고 왕자를 보내 조공하며 굴복하니 정동대장군 영주자사 낙랑공에 책봉됩니다.
광개토대왕은 396년 후연의 모용보로 부터 평주목 요동대방이군왕에 책봉되었으며,
장수왕은 북위에서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중랑장 고구려왕에 책봉되고,
남조인 동진에서 사지절 도독 정동장군 낙랑왕에 책봉된후 다음 왕조인 송나라
에서 정동대장군으로 승급되었으며 이후 영류왕 까지 모두 중국의 책봉을 받습니다.
하지만 590년 영양왕은 수나라에서 상개부의동삼사 요동군공, 다음해 고구려왕에 책봉
되고는 조공을 바쳐서 시간을 번 다음에 598년 말갈 기병 1만기를 인솔해서 요하를
습격하자 문제가 30만 대군을 보내니 다시 "미천한..." 운운 사죄사를 보내 납작
업드려서 용서를 받는 등 책봉은 단지외교에 불과한데 결론은 하나니.... 중국은 “漢族
(한족)” 한개 민족의 나라인가? 아니면 56개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인가?
첫댓글 황산 너무 좋더군요.저도 한번 가보앗습니다.
정말 좋은 산입니다.
일생의 버킷 리스트에 올려도 좋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