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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능(英陵) ..조선 가장 위대한 왕.. 세종대왕의 묘역이다.
세종대왕의 치적을 새삼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간단히 정리하면 1).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통하여 유교정치의 기틀을 마련하면서, 인재 등요 시스템 그리고 국정 운영시스템을 확립하엿다. 2). 국방의 정비...일본의 대마도를 정벌하였고, 여진족을 토벌하여 통일신라 이후 급격히 축소되었던 우리의 영토를 지금의 압록강, 두만강 유역까지 확장하였다.
3). 훈민정음의 창제. 4).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 백성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과학 기구를 발명하면서 과학의 발전을 도모하였고... 5). 종래 사용하던 중궁의 아악을 정리하여 우리의 고유 음악을 만들고, 악기를 만드는 등 예술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한글의 비밀........ 한글은 세종대왕이 만들지 않았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다. 옳을 수도, 틀릴 수도 있는 얘기이다. 그 사연인즉.....한글은 세종보다 훨씬 이전인 단군시대에 만들어진 유서깊은 글이다. 단군3세 가륵임금 때인 BC2181년에 정음 38자를 만들어 "가림토(加臨土)"문자라고 명명하여 발표한 것이 그 시초이고,과거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이었던 만주지역에는 가림토 문자 비석이 발견되었다.
세종대왕은 성삼문,신숙주 등을 만주지역으로 13번이나 보내어 가림토문자를 기본으로 하는 우리 글을 연구케 하였다. 그리하여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가림토문자를 실제 쓰기에 편리하도록 다듬어서 1446년 10월9일 훈민정음 28자를 반포하였다. 그리고 일제시대에 주시경선생이 다듬어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면서 지금의 우리 말이 되었다.
한글은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로 만들어졌다.
우리 민족문화의 뿌리는 음양오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과 글뿐만 아니라 음식, 주거, 의복,의학, 음악 등 어느 하나 음양오행과 관련되지 않은 분야가 없다. 한글도 천지인(천지인)원리와 음양오행원리를 바탕으로 창제되었다. 한글은 천(天), 지(地), 인(人), 원(圓), 방(方), 각(角)의 형태로 나누어 지는데.... 天은 ( . ) , 地는 ( ㅡ ) , 人은 ( ㅣ )로 표시하여 母音을 만드는데 활용한다.
하늘은 둥글어서 둥근 점이요, 땅은 평평하여 ㅡ 자이고, 천지간에 서 있는 것이 사람이라 ㅣ 자로 표시하는 것이다. 원(圓. ㅇ ), 방(方. ㅁ), 각 (角. △)은 子音을 만드는데 이용한다. 원방각(圓方角)의 구조는 인간을 말한다. 원은 사람의 머리이고, 방은 사람의 몸통이다. 각은 손발의 움직임을 상징한다. 우주만물은 五行의 원리에 따라 존재하는데, 우리 말의 소리법칙도 이 원리에 맞추어 창제되었다. 따라서 한글은 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그대로 표현할 수 잇는 유일한 언어이다. 한글의 소리법칙에서..오행의 원리의 다섯가지는 목구멍, 어금니,혀, 이, 입술 등 다섯 가지의 조화인 것이다.
한글의 자음은오행의 다섯가지로 구분되어 구분된다. 그리고 기본음이 있고, 각 기본음에서 파생하여 계열음이 생김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기본음 ㄷ에서 ㅡ 를 빼면 ㄴ이 된다. 또한 ㄷ에서 ㅡ를 보태면 ㅌ이 되고, ㄷ에서 ㄱ을 보태면 ㄹ이된다. 또 ㄷ에 ㄷ을 합하면 ㄸ이 된다.
충녕대군이 세종이 되어가는 과정
1. " 경은 타고난 천성이 부지런하고 민첩하여 행실은 공정하고 청렴하였도다. 일찍이 사신이 될만한 재주를 가졌으며, 어려서부터 중국말의 음훈을 잘 알아 소고(昭考..태종)의 인정을 받았고 거듭 칭찬을 받았도다. 나를 보좌하게 됨에 더욱 은총을 입었고, 험난한 만리길을 직접 오가며 상세히 황제의 궁궐에다 우리의 바람을 아뢰었다. "세종 17년 당대 최고의 통역관 원민생(元閔生)이 죽었을 때, 세종이 직접 써서 내린 제문(祭文)의 일부이다. 조선시대 국왕의 제문은 적어도 판서 이상은 되어야 내리는 것이었다.
원민생(元閔生)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가?
통역관으로서 원민생이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태종 2년(1402)이다. 전국적으로 가뭄이 심하게 들어 백성의 고통을걱정하던 태종이 원민생을 불러 명나라로부터 돌아오던 길에 보았던 평안도와 황해도의 가뭄현황을 상세하게 묻고 있는 대목에서다. 이후 매년 譯官으로 명나라에 다녀 오던 원민생은 태종17년 4월 극비 보고를 올린다. 명나라 황제가 美女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 일이 원민생의 인생을 바꿔놓게 된다. 그동안 명나라를 14차례 다녀왔지만, 신분은 늘 역관이었다. 그런데 원민생은 드디어 그 해 5월 황제에게 헌납할 처녀들의 신상명세를 들고 명나라에 들어가는 "처녀 주문사(處女 奏聞使)'가 되어 처음으로 정식 사신(使臣)이 되었다. 당시 使臣은 2품 이상의 고위직이 아니면 불가능하였다.그래서 국내 직위도 좌군 첨총제라는 무관 고위직을 받았다. 아마도 원민생이 헌납한 처녀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듬해 더욱 고위직으로 승진한다.
2. 3개월 후인 6월3일 태종은 양녕대군을 廢世子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문제는 명나라의 승인을 받는 일이었다. 長子가 아니어서 명나라 입장에서는 부정적이었다. 이렇게 되면 양녕대군의 세력들이 역모를 꾸밀 수도 있었고, 정국의 불안이 예상되었던 태종의 조치이었다. 태종의 고민은 시작된다. 6월9일 테종은 원민생을 충녕대군의 세자 책봉에 대하여 명의 승인을 받아오라는 지시와 함께 사신으로 보낸다. 이 때 태종은 반드시 8월까지는 돌아와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마음이 바쁜 太宗은 원민생이 돌아 오지도 않은 8월8일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중국의 승인 여부와 관계없이 王位를 물려 준 것이다. 다행히 8월22일 한양으로 돌아 온 원민생은 명나라 황제가 7월 27일자로 충녕의 세자 책봉을 승인했다고 보고한다. 자칫 중대한 외교문제가 될 뻔하였으나 아무 탈없이 넘어간 것이다. 이 때 당시 조선을 자주 찾았던 환관 출신의 명나라 사신 황엄의 도움이 컸다. 황엄은 성질이 고약하고, 횡포를 일삼았으나 조선의 기생외교에 빠져 협조적이었었다.
이후 원민생의 인생은 탄탄대로..世宗 6년 4월1일 사신으로 중국에 들어가는 원민생을 불러 세종은新武器를 구해 올 것을 당부한다. 북경에 들어 간 원민생은 명나라 황제 영락제로 부터 큰 곤욕을 치룬다.
영락제는 원민생을 불러 " 태종은 지성으로 나를 섬기어 건어(乾魚)에 이르기까지 진헌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세종은 그러지 못하다. 짐은 늙었다. 입맛이 없으니 조선의 새우젓과 문어 등을 올리게 하라. 현인비( 조선에서 헌납한 황제의 비...2년만에 독살되었다)가 살아 있을 적에는 진상하는 식품이 모두 마음에 들더니, 죽은 뒤에는 음식이나 술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명나라의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고려인이라는 說이 유력...고로 영락제도 조선인이었다. ???
상황이 어색해지자 명나라 내시 해수가 원민생에게 " 좋은 처녀 2명을 진헌하라"며 중재에 나섰다.실은 음식보다 여자를 원했던 것이다. 영락제는 크게 웃으면서 20세 이상 30세 이하의 음식만들고, 술 빗는데 능한 여인 5명도 함께 뽑아 오라고 말한다.
3. 우여곡절 끝에 2명의 처녀가 永樂帝에게 바쳐지기 위하여 10월17일 길을 떠난다. 이때 원민생과 황엄이 동행한다. 조선에서의 처녀 선발과정에서 황엄이 간섭하고 횡포를 부리는 사실이 실록에 기록되었있다. 北京으로 가는 도중 처녀 한명이 배가 아프다면서 김칫국을 마시고 싶다고 한다. 황엄은 김치국이 무엇이냐며 원민생에게 묻고, 원민생은 자세히 대답한다. 실록의 기록이 재미있다. " 사실그 처녀는 이미 이웃사람과 관계를 하여 임신한 상태이었기 때문에 김치국이 먹고 싶었던 것이다. "라고 적혀 있다.
당시 對明外交에서 가장 절실한 과제는 명나라에 보내는 공물(貢物) 중에서 금(金)과 은(銀)을 면제 받는 것이었다. 원민생은 이를 해결하고, 세종은 경회루에서 큰 잔치를 벌려 그의 공을 치하한다.
제사용품을 보관하거나 능을 관리,청소하는 관리들의 거처...
세종대왕은 1418년에 왕위에 올라 재위 32년만인 1450년 54세를 일기로 승하한다. 그이 왕비인 소헌왕후는 4년전인 1446년 먼저 죽은 후 경기도 광주에 묻히며, 그 곁에 따로 우실(右室)을 만들어 놓아 세종의 사후(死後)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세종이 죽은 후 미리 준비한 이 우실(右室)에 묻히게 된다.
세종이 죽은 후 조선에는 좋지 않은 일이 계속되었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은 즉위 2년만에 죽고, 그 아들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 쫒겨나 결국 죽음을 당하는등.. 크고 작은 사건이 많아, 세조는 세종의 영릉이 길지(吉地)가 아니라며, 천장(遷葬..왕릉의 이장(移葬)을 천장이라함)을 검토하지만, 서거정 등 신하들의 반대로 좌절된다.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천장이 거론된다. 1468년 예종은 노사신,서거정 등 신하를 여러 곳에 보내어 천장할 곳을 물색토록 하였다. 광주, 이천 그리고 여주의 땅을 보고 돌아 온 신하들은 보고한다. ' "이계전의 무덤이 있는 곳이 자손이 번창하고, 만세에 업적을 계승할 땅이라며 세종을 모실 장소는 이 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라고... 예종은결심하고 이계전의 후손에게 양해를 구하고, 지금의 이 곳으로 천장을 추진하였다. 후손들은 벼슬을 높여 주었다.
이계전의 후손들이 이장을 하려고 산소를 파서 유해를 들어내니, 그 밑에서 글을 새겨넣은 작은 비석이 나온다. 그 글에는 " 여기서 연을 날리어 하늘 높이 떠올르거든 연줄을 끊어라. 그리고 그 연이 떨어지는 곳에 이 묘를 옮기어라" 여러 후손들이 신기하게 여기어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연은 바람에 날리어 약 10리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그 곳으로 이장하였고, 자손이 번창하였다 한다.
그리고 연이 떨어진 마을이라 하여 마을 이름이 연주리가 되었다. 영릉가백년(寧陵可百年)이란 말이 있다. 세종이 이 곳에 묻힘으로서 조선의 역사가 100년이 더 연장되었다는 얘기이다.
다음 사진은 이장된 이계전의 묘이다. 가끔 가던 골프장 곁, 식사하던 음식점 바로 옆에 있어
우연히 가 보았었다. 다음은 이장된 이계전의 묘이다. 살아서도,죽어서도 세종의 그늘이다.
다시 세종대왕릉이다.
세종의 兄弟들....양녕대군 : 평생 속 썩인 심술
세종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양령,효령 등 세 형제간의 우애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 온다. 처음에 양녕은 자신의 능력이 동생인 세종(충녕)에 미치지 못함을 알고 일부러 미친척 방황을 하였다거나, 동생인 효령대군은 世子인 충녕이 폐위되면 다음 차례로 자신이 세자가 될 것이라고 짐작하고 열심히 글을 읽으며 왕(태종)의 눈치를 살폈다.
양녕대군의 친필 글씨
양녕이 이를 짐작하고는 효령에게 "어리석다. 아버지의 의중이 충녕에게 있음을 너는 모르느냐?"하였다. 이에 효녕은 크게 깨달아 불교에만 전념하였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소설같은 이야기이며, 양녕은 끝까지 왕위를 탐하였고 세종의 즉위 32년 동안 양령대군의 시기,질투는 계속되었다. 양녕은 세종 즉위 1년부터 그의 처소에 몰래 기생을 들여 뭇사람을 놀라게 하더니 아버지가 지정해 준 집에서 월담하여 도주한 일로 애첩 어리가 자살하는 사건이 터졌다. 담을 넘어 광주목사의 애첩을 빼았으려다 실패하는 망신을 당하고, 그후에도 토지,재물,노비,여종 등을 수없이 탐하여 그때마다 조정에서 돈을 주고 무마하여야 했다.
금지된 장소에서 활쏘기와 고기잡기 등 유희를 즐기는가 하면, 비밀리에 무뢰배와 함께 사냥을 나가거나 인사청탁을 받고 향응을 요구하기 다반사이었다. 아버지 태종의 상중(喪中)에도 기생을 끼고 유희를 즐기며, 노비와 간통하고도 부끄러움을 몰랐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양녕의 아들도 하는 짓이 비숫하여 여인이 홀로 사는 집에 침입하거나, 술주정으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다. 또한 그 딸도 품행이 바르지 못하여 왕실의 망신은 양녕대군 가족이 도맡아 하였다. 하인들 또한 주인의 힘을 믿고 함부로 남의 재산을 빼앗고, 재미로 남의 집 개를 쏘아 죽이기도 하였으니, 그 원망은 고스란히 세종의 몫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세종은 형에 대한 우애가 각별하였다. 세종은 어느날 유희를 좋아하는 형을 위하여 스스로 탈을 쓰고 탈춤꾼 속에 들어가 함께 춤도 추었다. 물론 탈을 벗으니 양녕이하 모두 놀라고 황송해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양녕의 기이한 행동도 이해는 된다. 원래 세자인 자신과 동생을 수시로 비교하고, 결국 세자에서 밀려날 때 그 원망과 서운함을 이해할 만하다. 세자나 왕은 그 자리에서 쫒겨날 때 바로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그 측근들은 다음 王에게 커다란 위협이기 때문이다.
세종이 죽은 후 양녕이 69세에 죽을 때까지, 그는 단종의 폐위와 죽음 그리고 세조의 등극을 적극 부추기는 등 세종의 집안이 망가지도록 만들며 그를 즐기는 일 뿐이었다. 실록에서는 양녕을 심술의 化神으로 묘사하였고, 품성이 어리석고 어리석어...라고 적고 있는 것이다.
세종의 형제들...효령대군 : 깊이를 알 수 없는 침묵의 제왕
세종의 작은 형인 효령대군은 평생 자신의 의중을 드러내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세자의 자리가 형에게서 바로 동생에게 넘어가는 이 상황에 그가 느낀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바로 그것이었다. 아버지인 태종이 누구인가? 왕권을 위하여는 할아버지인 태조와 칼부림을 마다하지 않았던..그리고 큰아버지,작은아버지 그리고 외삼촌인 민무구 등을 몰살시킨 냉혈한..불평 한마디면 그대로 죽음을 당할 것을 잘 알았다.
관악산 연주암에 걸려있는 효령대군
효령은 불경을 공부한다며 사찰에 틀어 박혀있었다. 이는 동생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이었던 것이다. 세종도 이러한 작은형의 마음을 짐작하고 고마워했고,어려워 하였다.
하루는 세종이 기우제를 지내고 돌아오는 행렬이 효령의 집 근처에 으르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효령의 집에 들려 잠시 쉬고 나오며 글을 남긴다. " 오늘 이 비는 나의 정성이 아니라 ,우리 형님의 은덕이로다.".....
실록에 효령에 대하여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에 밝으며 형제와 우애 있고 나라에 충성하였으며 무예에도 능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그의 학문은 매우 심오하고 생각 또한 깊어 아버지 태종도 그의 뜻을 도저히 헤아리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큰 도량을 가졌다. 그는백성들의 자치규범으로 "향헌56조"를 제정, 백성들의 윤리도덕과 의식 교화에도 헌신하였고,효에 대한이론을정립하였다고 한다.
불교에 해박하여 연화경,금강경,원각경 등을 번역하여 많은 백성들이 쉽게 보게 하였으며, 탑골공원 10층 석탑(국보 2호)의 건립과 보신각종의 주조를 직접 감독하였다. 조카인 세조가 원각사를 지을 때 그를 주관하였으며, 관악산의 연주암..월출산의 무위사, 만덕산의 백련사, 양주의 회암사 등 많은 사찰을 중건,중수하였다.
왕의 형님으로, 나라의 어른으로 큰 일을 소리없이 추진해 온 그가 원망을 받는 것은 세조가 조카인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는 것에도 침묵을 지킨 일이다. 그는 말년인 성종시절..어른으로서 나라 정사에 쓴소리를 많이 한다. 아마 그때는 할 말을 해도 괜찮은 시기라고 판단하였을까?
그는 불가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잘못 알려졌으나,자식 복을 타고 났는지 엄청 많은자손을 낳아, 왕실 종친중 가장 많은 후손을 남겼고, 재물 또한 엄청 많았다. 현재까지 종친회 소유토지가 무척 많이 남아 있어 당시 권력형 부정축재가 의심되기도 한다.수명도 매우 길어 아우 세종이 죽은 후에도 무려 36년을 더 살아 1486년 91세를 일기로 죽었다.
조선은 농업이 필수적인 농경국가이었다. 따라서 농시(農時), 즉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때를 안다는 것은 농사에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보이다. 하지만 세종 전까지는 우리나라는 자체적인 달력이 없어 중국의 달력에 맞추어 농사를 지어야 했다. 불편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인식하에 세종은 "칠정산 내,외편"을 발표하여 우리의 달력을 만들었다.
칠정산 내편은 중국 달력의 장점을 응용하면서 10년에 걸쳐 완성이 되었고, 외편은 이슬람달력까지 참고하여 완벽한 우리의 달력을 만든 것이다. 이 완성 당시 전 세계에서 자기나라를 기분으로 천문 계산을 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이슬람 정도이었다. 칠정산은 1년의 길이를 365.2425일로 정확히 계산하였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매일경제신문에서 주관하는 " 장영실상"이 있다. 세종대왕과 함께 여러 과학,기계,건축분야에서 쌓은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수여하는 상이다.
위정재인(爲政在人)...중용에 나오는 말로 일대의 정치가 흥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일대의 영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세종은 여기에 철저하게 충실하였다. 인재를 발굴하고, 그들의 능력을 계발하는 데 이바지한 역사삭 가장 탁월한 인재관리 전문가이었다. 세종은...
장영실은 능력주의에 근거한 발탁 인사의 대표적인 사례이었다. 그는 원래 부산 동래의 관노(官奴)이었다. 아버지는 중국에서 귀화한 원나라(몽고)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기녀(技女)이었다. 그런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장영실을 특채하였다. 그이 실력을 소문 듣고 세종은 그를 불러 오려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와 토론시킨다. 세종은 매우 만족하여...세종실록에 의하면 " 그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가 있을 뿐 아니라, 성품이 특별히 영특하고 매사에 열심히 노력하여 뽑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인사 조치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아무리 그 능력이 출중하다 할지라도, 일개 관노9관노)에 불과한 천한 인물을 발탁한 예는 없었다. 당연히 신하들은 이러한 조치가 신분제도에 미칠 혼란을 우려하여 크게 반대한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그들의 기득권에 틈이 벌어지는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종6품으로 벼슬을 주면서 중국에 유학시킨다. 세종의 전폭적인 관심과 지원을 등에 업은 장영실은 15세기 당시로선 상상할 수도 없었던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초정밀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를 발명하고, 측우기, 해시계 등 눈부신 성과를 만들어 낸다.
집현전(集賢殿) 유학자들에 대한 세종의 인재관리 또한 특별하였다. 조선초기의 국가 운영시스템을확립하기 위하여 세종은 집현전을 만들고, 그 소속 유학자들의 전직(轉職)이나 이직(移職)을 금지한다. 일관성과 연속성을 위하여...
그러나 집현전 학자들은 세종의 특별한 관심과지원을 받지만, 직책의 성격상 "권력"과는 거리가 있어 전직이나 이직을 원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모든 점을 고려,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은 종신(終身)토록 다른 벼슬을 못 하도록 하되, 사가독서(賜暇讀書)라는 극히 예외적인 특별휴가를 주어 별도로 공부에 전념케 하는 동시에 사헌부의 감찰도 받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궁중 안에서 근무토록하여 모든 식사를 특별히 제공하였다.
세종이 이렇게 특별 관리한 이유는? 어렵게 학문의 깊이를 더한 인재들이 출세가 보장되고, 보수가 좋은 다른 곳으로 간다면, 더욱 큰 국가의 손실이며, 전문 지식과 경험을 포기하고 일반 행정업무에 종사케 한다면 집현전을 만들어 그렇게 육성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순지일 것이다. 이순지는 문과에 급제한 양반의 자손으로 앞길이 보장된 인재이었다. 그런 그에게 세종은 중인(中人)계급에서나 하는 학문인 산학(算學..고급수학 또는 통계학)을 연구하라는 특명을 내린다. 그의 수학적 재능을 파악한 세종의 조치이었다. 이순지로서는 자신의 신분보다 낮은 일을 맡으라는 세종의 분부에 선뜻 따른다. 15세기 최고의 천문학자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어느 시대나 人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재는 땅 속으로 스며드는 물과 같아, 자칫 바다를 이루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냇물을 이루거나, 갇혀버린 호수의 물이 되기 쉽다. 그러나 샘이 깊은 물은 결코 마르는 법이 없다. 이 말은 인재를 얻기 위해서는 인재들이 고일 수 있는
"우물"을 제대로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종은 그런 차원에서 집현전을 만들어 운영하였고, 임용시험을 다양화하였고, 특별 발탁을 위한 지방 관리의 수시 면접을 일상적으로 수행하였다. 인물 만들기에 게으르지 않은 것이다.